(어쩌면 마케팅 때문에) 단순히 웃겨주는 섹스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다소 뜨악할 수도 있겠다. 이해영 감독의 <페스티발>은 자신의 전작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와 커다란 접점을 지닌,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연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페스티발>에 등장하는 세 커플과 7인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취향이 다른 성적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계적 소통의 불편을 느낀다. 옴니버스 구조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야릇한 사연들은 영화를 버라이어티하게 확장하며 내러티브의 진전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동시에 대사와 행위를 통한 웃음을 드물지 않게 포진시켜나간다. 하지만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표방될 만한 <페스티발>의 메시지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안에서 포용되지 못하는 느낌인 동시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네 갈래의 사연을 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탁월한 합의점을 발견할 수 없다. 웃겨주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건 맞지만, 웃겨주는 이야기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축제 분위기는 요란한데, 들뜨는 기분이 멈칫거린다고 할까.
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90년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일찍 갔더군요.
제가 빠른 90년생이에요. 원래 지금 2학년이 됐어야 했는데 <반두비>를 찍느라 휴학을 해서 이제 2학기에 복학하려고요.
연극영상학 전공인데.
예. 연출 배우고 있어요.
연기가 아니라 연출 지망생인가요?
원래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요. “연기는 대학가서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시작할 수 있는 길도 있다지만 만약 대학부터 그 길을 선택했다가 나중에 그 길이 너랑 맞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만 두게 됐을 땐 네가 할 게 없지 않냐.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해라.” 하셨죠. 그래도 관심 있는 분야가 이 쪽이다 보니까 연기가 안 된다면 연출 쪽으로라도 가자 싶어서 이렇게 됐어요.
연극영화과에 가는 건 반대하셨지만 연출 공부는 반대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분야에 대한 반대는 아니셨어요. 공부를 하라는 거죠.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데 공부를 벗어나서 다른 걸 하는 건 아니라고, 네가 아직까지 부모 밑에 있으면 부모님 말씀을 따르라고 하셨어요. 연기한답시고 괜히 애가 붕 떠서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만 낭비할까 봐 걱정되신 거 같아요. 그런데 연출과 간다고 하니까, 거긴 시나리오 쓰는 것도 배우고 그렇게 공부하는 바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기본적인 원칙을 중시하시는 편이신가 봅니다.
맞아요. 그런 걸 중요시 하세요. 저는 어릴 때 아빠의 그런 면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청소년 때나 사춘기 때. 이런 말 하면 안될 거 같은데, 아빠가 너무 틀에 박히신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다니다가 연기라는 사회생활을 하는 셈이잖아요. 부모님이 제어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고 제가 스스로 알아서 해야 되는 사회 생활을 하는 건데, 그러다 보니 아빠가 하신 말씀이나 저를 키우신 방식이 옳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거 같아요.
어머니께서도 반대하신 건가요?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다니 아버지 반응은 어땠나요?
엄마는 전적으로 해주시려고 하거든요.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건데 대학교 와서 영화도 찍고, 그렇게 조금씩 하니까 좋아하세요. 그래도 아빠는 이제 학교 돌아가면 학업에 열중하라고 하시죠. 엄마는 그냥 신기해하고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친구분들 만나면 가끔씩 얘기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딸 영화 나오고, CF도 어디어디 나왔다고. (웃음)
부모님께서 혹시 <반두비>를 보셨나요?
부모님은 아직 못 보셨어요. 제가 장난으로 엄마한테, “보고 싶어?” 그랬더니, “아니, 별로.” 그러셔서, “보고 싶으면 돈 주고 사서 봐.” 그러니까 됐다고, 안 보겠다고 그러시는 거에요. 아무래도 표를 드려야 보실 거 같아요. (웃음)
조금이라도 연출 공부를 한 셈인데 그 덕분에 생겼다고 할만한 변화는 없을까요?
연출 쪽을 공부하다 보니까 스태프 분들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알 거 같아요. 제가 1학기 때 조명을 배웠는데 그 무거운 걸 나르고, 수업 다 끝났지만 조명이 다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찍을 때 스태프 분들에게 조금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다만 아직 깊게 배운 게 없어서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시선이 달라졌다거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아닌데 작게나마 스태프 분들의 노력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오디션을 통해서 <반두비>에 출연하셨죠.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제가 맨 처음에 출연한 <사람을 찾습니다>의 이서 감독님이 신동일 감독님과 친하세요. 그래서 이서 감독님이 저를 추천해주셔서 그렇게 처음 뵙고 시나리오를 본 다음에 <반두비> 오디션을 본 거에요.
신동일 감독님은 조금 섬세한 편이시죠.
사람 눈을 안 쳐다보시잖아요. 그죠? (웃음) 감독님과 처음 미팅을 했을 때, 감독님께서 제 눈을 안 쳐다보시는 거에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생각했어요. (웃음) 그렇게 사적으로 만나면 그러시지만 현장에서는 영화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오히려 민서 캐릭터를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죠.
그럼에도 신동일 감독님의 영화는 상당히 놀랍게도 세죠. 꽤나 직설적인 발언들도 등장하고요.
그 직설적이라는 걸 누구는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모든 영화들이 밝은 사회만 그리는 건 사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가상으로나마 영화 속에서 희망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반두비>란 영화는 아닌 거죠. 정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고 행동하잖아요. 그런데 감독님 혼자서 글을 쓰신다거나 저 혼자서 그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면 전혀 힘을 낼 수 없잖아요. 그 말에 담긴 메시지가 전달되기 힘든데 이렇게 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건 효과적이라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가려운 부분도 긁어줄 수 있고, 현실에 없는 희망을 가식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진실된 희망을 주잖아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일단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편차는 있지만 신동일 감독님의 두 전작이 공통적으로 무거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란 점은 명확하죠. 그만큼 <반두비>도 무거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진 않았나요?
<방문자> 상영할 때 감독님께서 시사회 표를 주셔서 보러 갔던 적이 있어요. 생각 없이 가서 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약간 무겁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그래서 <반두비>가 청소년에게 많이 보여지길 원하는 영화이니만큼 <방문자>처럼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찍게 됐죠. 그런데 <반두비>는 아무래도 여고생이 주인공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정말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정말 유쾌하고 밝은 영화잖아요. 그래서 감독님께 두 작품에 못지 않게 좋은 성과를 거두신 거 같다고 축하 드렸어요. (웃음)
올 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반두비>가 2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전주에 못 갔는데 폐막 전날이었나, 검색어에 말 오르는 거에요. 그래서 깜짝 놀랐어요. 신기했죠.
그전에 이미 백진희 씨에겐 <반두비>가 첫 주연작이라는 점에서 이미 의미가 분명한 작품이었겠죠.
아무래도 첫 (개봉)영화에서 첫 주연까지 맡아서 뜻 깊은 작품이죠. 사실 기대하지 않고 오디션을 봤거든요. 그런데 주인공이 되니까 막상 부담감도 밀려오더라고요. 찍는 중간중간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나중에 완성본을 보고 나서 내가 나한테 부끄럽지 않을까 의심을 많이 했죠.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스스로 그런 의심을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네요.
그런 의심이 많이 드니까 집중을 못하겠던데요. 하나를 하더라도 내가 진짜 잘 하는 게 맞나 싶고. ‘진짜 민서라면 이렇게 행동했을까’, 의심이 드니까 정말 작은 문제도 더 크게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감독님께도 많이 여쭤봤죠. “감독님, 민서는 왜 이걸 이렇게 해요? 이렇게 하면 아니지 않아요? 보통 아이들이 이렇게 할까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민서는 특별한 아이니까 이렇게 한다고 하시는 거에요. 초반에 많이 의심했는데 점점 연기를 하면 할수록 민서라는 캐릭터에 제가 동화돼서 그런 의심이 잦아들었어요.
‘동화’됐다는 말이 마치 캐릭터에 빙의됐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군요. 자신도 모르게 때론 민서로서 행동하고 말하게 됐다는 의미겠죠.
그런 게 연기의 매력이고 자꾸 하고 싶게 만드는 거 같아요. 처음 시작했을 땐 의문으로 시작하거든요. ‘민서는 왜 이렇게 행동하지? 왜 얘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밖에 못할까. 나 같은 보통 아이나 아무리 튀는 아이들도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 이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고 촬영이 계속되면서 그냥 제가 민서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이 나오는 거에요. 처음에 돌 던지는 장면도 저는 좀 그랬거든요. 부잣집에 돌 던지고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집안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까 싶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되니까 정말 초인종 벨을 누르고 반대편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정말 욱해서 돌을 던지게 되는 거에요. (웃음)
<반두비>에서 민서란 아이와 백진희 씨의 거리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더군요. 영화만 보고 이야기하자면 마치 민서가 백진희 씨 같더군요. 지금도 조금 걱정됩니다. 화나면 영화처럼 손에 쥐고 있는 거 아무데나 던져버릴까 싶어서. (웃음)
아니에요. 영화만 그럴 뿐이에요. (웃음) 일단 저는 민서처럼 극단적이지 않아요. 학교를 그만둔다던가, 카림같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면을 빼고 보면 성격적으로 약간 비슷한 면이 있을지도 몰라요. 민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고 쉽게 욱하는 다혈질 소녀잖아요. 그런 면이 비슷한 거 같아요. 저도 울분을 못 견디거든요. (웃음) 그런 성격이 비슷해서 연기가 수월했던 거 같아요.
민서가 등장할 때, 촛불소녀 부채를 들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과외비를 이야기하며 민서 주변에 서 있던 소녀들과 명확히 대비를 이루는 이미지입니다. 민서가 또래들과 차별화된 사회적 의식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랄까요.
저도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시사프로를 즐겨봤기 때문에 민서가 낯설진 않았어요. 민서는 세상에 무관심하듯 무대포인 소녀잖아요. 그런데 민서의 무대포식 행동이 결국 올바른 행동이죠. 요즘 너무 사교육 열풍이 심해서 애들 모두 영어학원에 다니는데 민서가 이를 부정하는 건 형편이 안 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에 저항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네들이나 잘해’라는 대사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잖아요. 물론 제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저항할만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관심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엔 집까지 쳐들어갔고요. (웃음) 민서는 상당히 터프한 다혈질 소녀에요. 본인은 화가 나면 어떤 편인 것 같아요?
화가 나면 말을 안 해요. 화가 풀릴 때까지 상대한테도 절대 말하지도 않거든요. 집에 들어와서 부모님이 말 시켜도 말을 안 하죠. 화 푸는 방법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면 울면서 화를 풀 때도 있어요. 막 심하게 분출하는 스타일은 못돼요. 화를 내면 더 커질 걸 알기 때문에. 욱하는 게 심해서 제어가 안될 때가 있거든요. (웃음)
부모님께서도 상대배우를 아실 수 밖에 없었을 텐데 반응이 어떠셨나요?
아셨죠. 막 인터넷도 검색해보시고 그러시는데. (웃음) 처음엔 영화 찍는다고 좋아했는데 상대배우가 하얀 사람도 아니고, 까만 사람이라니 어떻게 연기할 수 있겠냐고, 솔직히 부모님께선 걱정하셨죠. 그렇다고 말씀을 많이 하신 건 아니고 결국 너한테 주어진 거니까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그 분도 자기 역할 주어진 데에서 열심히 할 테니까 너도 그 분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고 네 맡은 바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죠.
<반두비>는 어쩌면 백진희 씨에게 외국인 연기자와 호흡을 맞췄다는 점에서도 두고두고 특별하고 생소한 경험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외국인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일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도 제 자신에 대해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냥 길에서 마주치는 똑 같은 사람이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계속 마주치고 밥도 같이 먹고, 연기도 하고, 그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니까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가 영화 찍기 두 달 전부터 준비를 들어가서 그 동안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마붑 씨가 한국말을 잘해요. 얘기하다 보니까 다를 게 없다는 걸 느꼈죠. 저도 모르게 제 안에 편견이 있었던 거 같아요. 처음엔 좀 멀리하려고 그랬을 거에요. 그런데 같이 지내다 보니까 어느 새 저도 모르게 그냥 가까워져 있고, 그래서 정말 피부색만 다르지 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죠.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사람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죠.
한국말을 너무 잘 해서 신기했어요. 겉보기엔 딱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시니까 점점 익숙해지고, 그냥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 같아요.
서로 다른 생김새를 보고 느끼는 이질감만큼이나 문화적 차이도 개인의 잠재적인 편견을 만들 수 밖에 없겠죠.
그게 어려운 거 같아요. 아무래도 다른 문화권에서 살다 만났기 때문에 생각이나 언어도 같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걸 깨는 게 상당히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시간을 갖고 차츰차츰 시도해야죠.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물 흘러가듯이 계속 얘기하고, 그렇게 1분 볼 거 10분 보고, 10분 볼 거 30분 보게 되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는 거 같아요.
당사자만큼이나 감상자들도 독특하다 느낄만한 캐릭터의 어울림이죠.
어떻게 보면 남들과 다른 시작점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게 이슈가 됐으면 좋겠어요. (웃음) 물론 이슈가 되긴 됐어요. <반두비>에 대한 안 좋은 글들이 벌써부터 너무 많아서요. (마붑 알엄이) 협박 전화도 받으셨다고 인터뷰에 말씀하신 것도 봤는데 그래서 너무 속상해요. 물론 이주노동자 분들 가운데 나쁜 사람도 있겠죠. 한국사람이라고 다 착하고 좋은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일부분만 보고 모든 사람들을 평가한다는 건 아니지 않나요. 영화를 보시고 나서 생각을 해보셔도 늦지 않을 텐데 미리 단정짓고 나쁜 글들만 써버리면 다른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죠. 분명히 내용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러는 거 같아요.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말이 많죠.
보지도 않으시고, 그냥 지레짐작으로 저럴 거다 하시나 봐요.
어쩌면 본인도 <반두비>를 통해 직접적인 경험을 거친 덕분에 얻은 좀 더 명확하게 세상을 보는 관점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제가 <반두비>를 찍지 못했다면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현장을 갈 일도 없었을 거고, 그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냥 듣기만 했다면 지금만큼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거에요. 막상 가서 보니까 정말 작업환경이 열악해서 깜짝 놀랐어요. 일하다가 쉬는 장소가 있는데 거기 벗어놓은 신발에 바퀴벌레가 가득 들어가있는 거에요. 냄새도 심해서 머리가 아플 정도고요. 그 분들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거죠. 저는 그 분들이 그렇게 일해주기 때문에 저희 사회가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 보통 대한민국 청년들은 3D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분들이 와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그 업종에 종사해서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거죠. 물론 그 중에 나쁜 분들도 계시겠죠. 사람이 살면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다 나쁜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두비>가 청소년 불가 판정을 받아서 본인도 속상하겠어요.
사람들이 <반두비> 검색해보고 19세라는 것만 봐서 그런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너무 속상해요. 그런 내용 전혀 아닌데,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정성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19세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을 박아버리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몰랐는데 오늘도 그런 분을 만났어요. 덜컥했죠.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연기를 하지도 않았고 감독님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배우, 혹은 연예인으로 살다 보면 이상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루머에 휩쓸리는 경우도 있고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책을 읽었어요. 제목이 <루머의 루머의 루머>인데 여자주인공이 루머에 휩싸여서 결국 자살을 하거든요. 그런데 자살하기 직전에 테이프를 녹음해요. 자살에 동기부여를 한 사람들한테 다 한마디씩 남겨서 그걸 돌린다는 내용이죠. 그걸 읽고 나니까 무서운 거에요. ‘무슨 이런 걸로 죽을 생각을 해’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유가 모이고 쌓이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정신 똑바로 차려서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제대로 갖고 있으면 덜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만큼 더 강해져야 하는 거 같아요.
아직 사회적 경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여자로서 느끼는 불합리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반두비>에서 민서를 연기하면서 어떤 쾌감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고요.
아무래도 여자는 약자라서 보호받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당하고 무시 받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반두비>에서는 교복 입은 16살짜리 어린 꼬맹이가 세상을 진두 지휘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빠보다도 나이 많으신 분 따귀를 때리고, 그 집에서 행패도 부리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카림이라는 청년을 휘어잡기도 하죠. 항상 여자는 약자고, 뒤에서 보호받아야 되고, 눈치도 많이 보잖아요. 일단 남자가 우선이라는 가부장적인 생각들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희열을 느꼈어요.
<반두비>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영화에 먼저 출연했죠. 그 작품에 출연하게 된 경위도 궁금하군요.
CF를 통해서 얼굴이 조금 알려졌는지 ‘애니콜 시보소녀’를 찾던 매니저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을 만나게 되면서 저도 회사랑 계약을 했죠. 그분이 ‘너 나랑 일해볼까’ 하신 뒤에 그 분과 처음 미팅을 간 자리가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영화 오디션이었는데 딱 된 거에요. 너무 신기하다 싶은 마음으로 촬영을 했죠.
CF를 통해서 카메라를 먼저 접했지만 아무래도 영화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거에요.
전혀 다르죠. CF는 솔직히 대사보단 표정 위주니까요. 그리고 대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동기 부여가 다르잖아요. 얘가 이런 말을 할 땐 이유가 있는 거죠. 그 땐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나 봐요. 지금 보면 되게 웃기거든요. (웃음) 물론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걸 느끼는 거 같아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그 사람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캐릭터와의 거리감을 이해해야 하는 측면의 어려움도 있었겠죠.
민서가 갖고 있는 상처와 외로움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저와 정반대의 성장배경을 갖고 있으니까요. 저는 부모님이 두분 다 계시지만 민서는 어머니 밖에 없고, 민서는 외동딸이지만 저는 여동생이 두 명이나 있는 큰 언니거든요. 그리고 저희 집은 큰소리 한번 난 적 없을 정도로 단란하기 때문에 저에게 민서는 가족의 화목함을 모르고 자란 소녀처럼 불우해 보였어요. 제가 연기하면서 과연 그런 상처를 이해하고 제가 그런 면을 보여줄 수 있을지 불안했어요. 그런 상처 때문에 민서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 건데, 내가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어쨌든 민서란 캐릭터가 저에게 주어진 이상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해야 했어요. 케이크 하나를 먹더라도 정말 민서가 이 케이크를 먹을지, 집에 싸가서 엄마를 줄지, 그 외로움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민서를 100% 이해하진 못했다 해도 반은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CF에 출연한 경위도 궁금합니다.
운 좋게도 길거리 캐스팅이었죠. 그리고 일단 사진심사가 먼저 올라간 다음에 감독님과 미팅을 해요. 카메라를 두고, ‘그 자리에서 해봐라’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촬영한 자료를 감독님과 광고주들이 같이 보시고 회의를 한 뒤에, ‘얘로 가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자료가 남아서 어쩌다 보니까 이를 통해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런 과정이 그 당시 본인에겐 상당히 놀랄만한 변화의 연속이었을 텐데요.
신기했어요. 그냥 맨날 공부만 하다가, ‘미팅 있습니다. 오세요.’ 그래서 갔다 오면 일주일 안에 연락이 와서, ‘촬영합니다.’ 그럼 공부하다가 촬영장 가서 촬영하고 오고. 그 순간엔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죠.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입시 공부하느라 힘들잖아요. 저는 공부를 별로 안 했지만. (웃음) 어쨌든 누구나 힘든데 그렇게 하루 이틀 정도 CF를 찍는 게 저한테 주어진 상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늘에서 주어진 상. 정말 특별한 취미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걸 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카메라 앞에 있으면 행복하고, 그래서 관심이나 호기심이 다 이쪽으로 쏠리게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이전에 꿈은 없었나요?
음, 꿈이 없었어요. 아마 요즘 청소년 대부분이 그럴 거에요. 고등학교에 가서 꿈이 뭐냐 그러면, ‘꿈 없는데요. 그냥 대학교 가서 졸업 잘해서 공무원 시험이나 봐서 공무원이나 돼야죠.’ 대부분 이럴 걸요. 저도 평범한 학생이었고 특별한 꿈은 없었어요. 그냥 공부하라 그래서 공부했고,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놀았고, 맨날 무의미하게 살았던 거 같아요.
하긴 요즘 초등학생에게 꿈을 물어봐도 서울대 진학이라고 답한다 하더군요.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이 꿈꾸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탓이죠.
맞아요. 초등학교 때는 꿈이 많았는데 점점 현실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꿈이 사라지는 거 같아요. 그런데 제 동생이 저와 10살 차이 나는데 또 다르더라고요. 동생한테 꿈이 뭐냐고 했더니 없대요. “네 친구들도 그래?” 그랬더니 대부분 그렇다고. ‘또 다르구나’ 생각했죠.
저 어릴 때만 해도 꿈들이 거창했죠.
대통령? (웃음)
박사, 의사, 이런 것도 많았어요. (웃음) 사실 어릴 때 꿈은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구체적인 꿈을 좇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현실성을 파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금은 세상이 각박하니까 중고등학생조차도 사회에 나가서 먹고 사는 길을 먼저 생각하는 건가 보죠. 그만큼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 환경이 학생들의 꿈을 억압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어요.
학교라는 공간이 그 시기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거 같아요. 공부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강압적으로 해야만 하는 게 돼버렸으니까. 또 우리나라 현실상 공부가 아니라 예체능처럼 다른 분야는 집안이 빵빵하지 않고선 할 수 없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건 대학가서 해라, 이런 식이니까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에 너무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주변에서 이렇게 CF도 찍고, 영화도 찍었다 그러면 부러워하는 친구는 없나요?
아니요. 여자애들이 샘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는데, (웃음) 그런 말은 안 하더라고요.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직설적이에요. “너는 그냥 볼 땐 괜찮은데 TV에서 보면 얼굴이 왜 그렇게 크게 보이냐”고 그런 말이나 하지 부러워하진 않더라고요. (웃음) 각자 자기만의 꿈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열심히 하니까 그럴 지도 모르죠. 겉으로 내색하는 친구는 없어서 속마음까진 모르겠어요.
반대로 시기하는 친구는 없었나요?
있었어요! 제가 예전에 공익광고 찍어서 학교에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거기다 낙서를 엄청 많이 한 거에요. (웃음) 어린 마음에 새벽에 지우러 갈 수도 없고. (웃음)
CF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됐고, 그 다음은 연기에 도전한 셈이죠. 진지하게 연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또 궁금해지는군요.
처음엔 호기심이었죠. CF로 먼저 시작하면서 조금씩 카메라 앞에 서는 시간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얼마나 신기해요. 공부만 하던 학생이 CF찍고, TV에 나오고, 돈도 벌고. (웃음) 그렇게 조금씩 호기심이 커져서 관심이 되고, 점점 연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고2, 고3때부터 강한 계기가 생겼던 거 같아요. 제가 고3때 ‘애니콜 시보소녀’ CF를 하면서 해외촬영을 했는데 연기를 못한다고 감독님한테 혼났거든요. 그게 컸던 거 같아요. ‘내가 연기를 하면 어떨까.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연기가 해보고 싶은 거에요.
주눅이 들어서 일찍 단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 보면 민서만큼이나 오기가 만만찮은 성격인가 보군요.
그런 점이 민서와 비슷한 거 같아요. 욱해서 오기가 발동하니까, ‘나도 잘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포기하면 어떡해요. 아직 어린데. (웃음) 세상에 쉬운 일은 없잖아요. 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걸 겪으면서 견뎌내고,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거니까. 그렇게 결국 잘 되면 얼마나 좋아요.
처음으로 스크린에 뜬 자신의 얼굴을 봤을 텐데 기분이 어땠나요?
실망스럽죠. (웃음) 그냥 <반두비>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어요. 오디션장에 예쁜 친구들도 많이 왔을 텐데 감독님은 왜 나를 썼을까. 전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요. 오디션장 가면 예쁜 친구들 정말 많거든요. 촬영하면서 한동안 잊어버렸는데 큰 스크린으로 제 얼굴을 보니까 다시 한번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고치고 싶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웃음)
아무래도 얼굴 예쁜 사람 순서대로 배우를 시킨다면 지금 현재 훌륭하게 인정받는 배우 가운데서도 그만 두셔야 할 분이 많을 걸요. (웃음) 아무래도 백진희 씨가 신동일 감독님이 찾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겠죠. 전 영화를 보면서 민서의 심드렁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는데 백진희 씨가 아니었다면 그런 얼굴이 아니었겠죠. (웃음) 어쩌면 자신도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 알지 못했던 버릇이라도 찾아내지 않았을까 궁금한데요.
있죠. ‘나한테 저런 얼굴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내가 저렇게 연기했구나’ 깨닫기도 하고.스크린으로 보여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게 많이 느껴져요. 민서가 아니라 백진희가 보였던 장면도 있어요. 노래방에 카림이랑 같이 가서, “엄마, 특실 비었지? 2시간만 넣어줘.” 이 때, (테이블을 두들기면서) 이렇게 딱딱 치고 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그냥 한 거에요.
계산하고 의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행위들이 그냥 감지된다는 거죠.
저도 모르게 나와요. 그 말을 하고 나면 이런 행동이 이어지고, 그게 되게 신기했어요.
아직 경험적으로 백지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경험적인 자극의 강도도 크게 느껴질 수 있겠죠.
그 하나하나를 잘 기억해두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배우가 되려면 모든 반응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반응에 대해서 기억해두면 다음에 이와 비슷한 반응이 왔을 때 그 반응과 비교할 수 있겠죠. 살짝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공통점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 걸 항상 기억하고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본인은 사실 적은 경험이라고 느끼고 있는 반면 주변에 자신의 경력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CF를 찍고,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한 시선을 둘 가능성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그런 시선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대학교 가서 처음 친구들 사귈 때 특히 그랬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게 알려지니까 친구들이 다르게 보는 거에요. 처음에 그걸 견디기 힘들었죠. 왜 그럴까, 나는 아직 이름도 안 알려졌는데, 버스타도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저럴까, 생각했죠. 인터뷰는 제 속에 있는 깊은 생각까지 다 얘기할 수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아무래도 친구들과 얘기할 땐 이런 대화를 할 수 없거든요.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건 좀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일단 시나리오 받고 놀랐어요. 성매매하는 곳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장소가 있는지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이게 뭐에요?” 물어보고 이런 저런 설명을 듣다가 굉장히 놀랐고, 걱정도 많이 됐어요. 그런데 너무 그 부분에 염두를 두다 보니까 영화 전체가 안 보이고 그 장면만 보이게 되더라고요. 감독님께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된다고 말씀드리고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그런데 감독님이나 스태프들이 아무리 신경 써준다 해도 해내는 건 제 몫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힘들었죠. 하고 나서도 좀 그랬고. (웃음)
남자들이 징그럽진 않던가요?
아니요. 다행히 그 정도는. (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나 됐나요?
이제 1년 넘었으니까 2년째죠.
약 1년 만에 다시 교복을 입게 된 셈인데.
저는 고등학교 때 사복을 입어서 교복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아, 그럼 중학교 이후로 교복을 처음 입는 건가요?
4년 만에 입는 거죠. 그래서 교복 입는 거 좋아요.
본인 나이보다 어린 여고생 역할을 연기한다는 건 어떤가요? 아직 그 당시로부터 많이 지난 나이가 아니라서 그리 어색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는 아직까진 교복 입고 학생역할 하는 게 잘 맞는 거 같아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성숙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이 대가 있는 역할을 지금 하기엔 버겁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 학생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20대 여대생 같은 경우도 아직은 무리가 아닐까 싶어요. 솔직히 대학교도 한 학기만 다녀봤기 때문에 여대생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죠. 외적으로도 성숙해져야겠지만 동시에 내적으로도 커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겠죠. 도전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괜히 섣부르게 못하는 걸 할 순 없잖아요. 아직은 자신도 없고, 지금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겠죠.
독서 좋아하세요?
예. 책 읽는 거 좋아해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말을 잘할 가능성이 많더군요.
아, 저 말 잘 못하는데. (웃음)
자기 주장이나 주관이 뚜렷한 거 같아요. 사실 요즘 학생들 여건상 독서가 쉬운 취미는 아닐 텐데요.
요즘 학생들은 책 많이 못 읽을 걸요. 문제집 보는 시간이 많지, 책 읽는 시간은 적을 거에요. 저는 최근에 <반두비>때문에 휴학을 해서 남는 시간도 대부분 책 읽는 시간으로 보냈거든요. 어릴 때와 다르게 느끼는 것도 많아진 거 같아요. 간접적으로 많은 걸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으니까.
배우로서도 간접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는 개인적인 범위 내에서 가능한 취미죠. 그만큼 개인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공간을 중시하는 성격이 아닐까 예상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저는 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적인 사람 같아요. 개인적인 활동을 주로 하거든요. 생각해보면 뭔가 좋아서 환호한 적도 얼마 없거든요. 남들과 소란스럽게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어쩌다 친구를 많이 만나도 4~5명 정도 모여 앉아서 수다나 떨고, 그게 다에요. 책 읽고 혼자 생각할 때가 많아요.
자신의 캐릭터나 작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군요.
작품을 하나 하면 얻는 게 많은 거 같아요. 한 작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거든요. 얘는 이런 가정 환경에서 살았지만 얘는 어땠을까, 이렇게 사람에 대한 분석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아무래도 감독님과 대화하려면 너무 애 같아선 안될 거 같단 생각도 들었어요. 제 자신에 대해서 저도 모르게 점점 생각을 깊게 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까 생긴 것과 달리 속이 깊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웃음)
연기가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고 있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없나요?
사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처음 본 사람하곤 거의 말을 못해요. 대화를 이어가지도 못하고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그런 게 조금 없어진 거 같아요. 물론 아직도 그런 면이 많이 남아있죠. 잘 모르시는 분들은 화났냐고 묻는 분들도 있어요. 뚱한 표정으로 있으니까. (웃음) 사람 대하는 게 어려워요. 게다가 다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니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괜히 낭패 볼 수 있기 때문에 더 조용해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땐 더 정적인 거 같아요. 사람들 대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을 혼자 있는 시간으로 보상받겠다는 생각이랄까?
어쩌면 더 변할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어요. 그냥 책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좋아서 계속 이런 식으로 갈 거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요즘은 사람을 안 만나도 대화할 수 있는 창이 너무 많아요. (웃음)
대화라기 보단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자기가 가진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을 때 말의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이렇게 인터뷰로 만나지 않고 사적으로 만났다면 주제를 갖고 만난 게 아니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인터뷰는 기자님이 물어보시면 저는 답하고, 또 물어보고, 이런 식의 대화가 편하고 좋아요.
<반두비>에서 민서가 주유소 사장님에게 가불을 요청하면서 거짓말로 쌍꺼풀 수술 때문이라고 대답하기도 하죠. 아까 장난처럼 성형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정말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나요?
저도 조금 하고 싶긴 하죠. (웃음) 그런데 눈은 정말 고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요즘 다들 쌍꺼풀 있는 눈들이잖아요. 물론 안 그런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 그래서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런 얼굴이 되기 보단 저만의 개성을 확실한 매력으로 둔 얼굴을 갖고 싶거든요. 그리고 그런 개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눈이 아닐까 싶어요. <마더>에서 김혜자 선생님께서 눈 하나로 살아온 세월이나 지금 하려는 이야기를 다 표현하시잖아요. 정말 그런 눈을 닮고 싶어요. 전 외꺼풀이라 깊은 눈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외꺼풀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저는 눈만은 절대 고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반두비>를 통해 배우로서 시작점을 출발한 셈입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어떤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지점일지도 모르고요.
깊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대사 한마디를 던지더라도, 의미? 깊은 의미를 던질 수 있는 그런 것. 김혜자 선생님의 눈빛 반만 따라가도 성공한 게 아닐까 생각해요.
혹시 롤모델이라고 말할 만한 배우가 있나요? 방금 말한 김혜자 선생님?
롤모델은 김미숙 선생님. 눈빛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지잖아요. 여자로서도 닮고 싶고, 피부도 너무 좋으시고. (웃음)
관록 있는 분들을 동경하시는군요. 만족하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겠어요. (웃음)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워요. 아무래도 연기적인 부분이 많이 보이나 봐요.
직접 연기를 해봤기 때문에 좀 더 실감나는 건지도 모르죠.
사실 예전엔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닫게 된 거죠. 일단 저런 감정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하나씩 깨우쳐 갈 수 있었던 과정인 거 같아요.
민서처럼 고등학생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변했다고 생각하나요?
학교에선 틀에 갇힌 주입식 입시교육 위주로 학생들을 다스리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학생들처럼 주어진 것에만 반응해야 했죠. 1번부터 5번 보기 중에 1번이 답이라면 1번 보기처럼 반응하고 살았는데 이제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면서 약간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보는 시각도, 하는 행동도, 드는 생각도.
그렇다면 <반두비>는 백진희 씨에게 무엇을 남겼다 말할 수 있는 영화일까요?
다른 문화권의 다른 인종, 그것도 한국인이 경멸하는 이주노동자를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영화 내용이 신선하다면 신선하다고 할 순 있겠지만 저한텐 둘이 친구가 된다는 게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친군지 로맨스인지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웃음) 그런 부분을 깊게 생각하다 보니까 이렇게도 친구가 될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생각하는 게 많이 변했어요. 이제 막 싹을 틔운 느낌이랄까. 그전까진 모든 일에 있어서 세상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것도 많이 없어졌고 사람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배려하려고 노력하게 된 거 같아요. <반두비>를 하면서 친분이 쌓인 스태프분들 한 분 한 분이 소중하다는 감정을 느꼈어요. 저한테 주어진 모든 것들, 저한테 주어진 제 주변의 사람들, 저한테 주어졌던 일들, 저한테 주어지는 일들, 그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민서도 카림이라는 진정한 친구, 반두비를 만나면서 느끼는 게 많아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서 숙녀로 성장하잖아요. 나중에 영화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모습이 정말 다르거든요. 인생에 있어서 한번의 전환점이 된 거죠. 민서에게 카림이 그런 존재인 것처럼 어쩌면 <반두비>가 저에게 그런 존재가 된 건지도 모르죠.
화장실에 갇힌 호준(김재록)은 자신이 박대하던 계상(강지환)으로부터 구출된다. 아는 게 많은 호준은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계상을 박대하지만 정작 계상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방문자>는 결코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떤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버디무비이며 코미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 때, 우스꽝스러운 사연이 발생하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한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다.
계상을 멸시하던 호준이 계상에게 마음을 열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카림(마붑 알엄)과 ‘3m’떨어져 걷던 민서(백진희)도 어느 새 카림과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인 <방문자>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다. 카림은 계상을 닮았고, 민서는 호준을 닮았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똑부러지는 민서의 염세적인 표정은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정작 냉소와 비관밖에 거듭하지 못하는 호준의 무력한 표정을 연상시킨다. 그런 민서에게 카림은 ‘방문자’다. 계상과 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민서와 카림도 ‘반두비’가 된다. <반두비>는 별개의 세상에 놓여있던 두 사람이 하나의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방문자>를 연상시킨다.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반두비>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에 나열된 정치적 부조리를 스토리텔링의 근간으로 둔다. 고액의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서의 모습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는 재문(박희순)과 상사로부터 야간 출근을 통고 받은 예준(장현성)이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방조하게 된다는 과정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하기엔 현실적 리얼리즘이 지독하게 녹아 들어간 살풍경을 곧잘 묘사한다. <반두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떼먹고 부도를 낸 사장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영어에 목맨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희롱하는 백인 영어선생님 앞에서 방긋 웃는다. 비상식이 평온히 내려앉은 기이한 부조리는 정치적 메타포를 노골적으로 함유한 영화적 소재에 가깝다.
사실 현정권과 특정인물을 겨냥한 직설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정치적 색채가 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물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의도한 정치적 발언이 스토리텔링에 녹아 든 메타포의 양식으로 밑그림처럼 삽입되던 것과 달리 <반두비>는 좀 더 직설적인 강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정치적 발언을 던진다. 간접적인 매체와 사건을 통한 은유가 직접적인 행위나 대사를 통해 보다 쉽고 강하게 어필된다. 사실 <반두비>는 실상 징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신도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적 강제성에 대한 저항적 신념을 직설적인 이미지에 담아낸 <방문자>와 비슷한 양식의 저항적 변화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자>가 제도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소신을 정당하게 담아내는 것과 달리 <반두비>는 비난과 조롱의 수순에서 멈추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쾌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퇴보적이다. 또한 여고생인 민서와 이주노동자인 카림의 신분은 <방문자>의 두 남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징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반두비>의 정치성이 전작들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시간대의 현실을 인식시킬만한 소품들을 영화적으로 이양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적 리얼리티가 강렬한 탓에 때때로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하는 듯한 감상이 부여된다.
신동일 감독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매력은 정치적 주제가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치 피자빵에 얹혀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정치적 컨텍스트와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서로에게 녹아 내리듯 밀착한 채 함께 진전된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버디무비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상징을 연상시킬 때, 텍스트와 이미지에 입체적 풍요가 부여된다. 버디무비의 구도 안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자질까지 내포하는 <반두비>는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만큼이나 이야기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반두비>의 직설은 현실적 통쾌함이 보장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잠식하고 있는 듯한 비효율적인 불편함이 감지된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창작력을 침해할 만큼 현실의 정치적 공정성이 심각한 부조리의 수순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반두비>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 탓이다. 직설적인 정치적 언어가 강하게 인식되는 탓에 허구적 자질이 때때로 잠식되곤 할 뿐, 스토리텔러로서 신동일 감독의 재능은 <반두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단독 컷처럼 분리된 세계관에서 살아갈만한 두 인물을 투샷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설득력은 <반두비>에서도 탁월하며 이는 신동일 감독의 정치적 뜨거움보다도 대단한 성과다. 하이틴 무비의 경쾌함을 밑천으로 버디무비의 유쾌함과 로맨틱코미디의 순수한 자질을 흡수하고 블랙코미디의 감수성으로 아우르는 <반두비>는 작지만 다부진 민서의 눈빛만큼이나 강단이 뚜렷한 영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만한 백진희와 마붑 알엄의 기묘한 조합 역시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작품을 ‘반두비’라고 쓰고 ‘친구’라고 읽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두비’라고 읽고 ‘친구’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반두비>라는 제목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친구’가 아닌 ‘반두비’인 이유는 ‘반두비’는 ‘반두비’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반두비’는 영원히 ‘친구’로 해석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단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반두비>를 불순하게 인식하는 이라면 자신이 과연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건 세상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런 것만 보니까 그 따위로’사는 거다. 때론 현실의 편견을 부수고 불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밑천이 된다. 그리고 <반두비>는 그 가능한 변화들을 위한, 작지만 당찬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