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동명의 고전 어드벤처 PC게임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이하, <페르시아의 왕자>)는 그것과 시간차를 두고 있는 후속작에 가까운 롤플레잉 콘솔 게임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다. 추억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며 실제로 그 양자에 가까운 후속 모델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실상 그 추억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페르시아의 왕자>는 제목 그대로 <페르시아의 왕자>이되, 그 누군가가 기억하는, 혹은 반가워할 그 게임과는 직결되지 않는 동명의 타이틀을 지닌 영화에 가깝다.
고아였지만 우연히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눈에 띄어 샤랴만 왕의 아들로 입양된 다스탄(제이크 질렌홀)은 왕가의 막내 왕자로서 활발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난다. 그러던 중, 신성한 도시라 불리는 ‘알라무트’가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된 왕자들은 도시를 공격하고 다스탄의 활약으로 도시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공주 타미나(젬마 아터튼)를 만난 다스탄은 곧 함정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로 전락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올드한 고전의 명성처럼 근래 보기 드물게 올드 패션한 영화다. 스턴트와 파쿠르, 야마카시 등으로 채워진 액션 신의 팔 할은 서커스적인 재미를 부여하며 활극적인 기운을 부여한다. 하지만 일관적으로 뛰고, 구르는 액션으로 이뤄진 역동적인 움직임을 응시하다보면 굉장히 활동적인 가운데서도 느슨하게 벌어져 가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것은 그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때때로 실소를 부를 정도로 과장된 액션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액션의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막무가내에 가깝게 흐르는 덕분이기도 하다.
단검에 채워진 모래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고, 이로 인해 운명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영화에 적절한 흥미와 신비를 부여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사의 흐름과 소재의 활용은 과거적이라는, 그러니까 향수를 자극할만한 수단으로서 감상을 부추기기 보단 언어 그대로 오래된, 그러니까 무언가 낡은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을 부풀린다. 마치 오래된 아동용 디즈니 영화가 성인용 오락 블록버스터의 흉내를 내고 있는 형태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할까.
조금 기묘한 감상을 낳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의 정세를 상기시키는 설정의 묘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험한 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신비의 도시를 침공했지만 정작 그 전쟁을 발발시킨 무기는 발견되지 않으며 권력에 눈이 먼 권력자의 야욕에 의해 왕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현실을 겨냥한 교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 철저하게 제리 브룩하이머 식의 엔터테인먼트로 가득 채워진 <페르시아의 왕자>는 스케일을 통해 대단한 오락적 너비를 확보하는 특유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어드벤처 무비로서의 기능성만을 염두에 둔 오락영화라고 말해도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락영화로서의 만족감일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날렵한 것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반복적이고 느슨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추억은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 동명의 원작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는 이름만으로 추억이 되겠지만 그 제목의 형태 이상의 의미는 염두에 두진 말 것. 마치 올드한 아케이드 어드벤처 게임을 상기시키듯 올드 패션한 어드벤처 무비를 완성시킨 것마냥 촌발 날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적당한 합의는 거둔 오락영화랄까. 투박하지만 활극적인 묘기에서 발생하는 서커스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종종 막무가내처럼 흐르는 서사와 액션을 즐길 수 없다면 맙소사.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문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는 매력적인 대학원생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를 통해 늦깎이 사랑에 들어선다. 자신의 감정이 원나잇 스탠드로 해소될만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야기하는 권력의 우열관계에서 아래 놓인 자신을 자각한다. 자신이 홀로 남게 될 때마다 불안과 초조를 느낀다. 소유욕이 강해진다. 그 불안은 결국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 감정을 좌초시키도록 스스로를 유도한다. <엘레지>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기품 있는 영상 속엔 우아한 관능적인 클로즈업은 우아한 곡선 위로 흐르고 그 여백마다 서정적인 격랑이 찬찬히 모이고 흩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야기되는 고독과 슬픔이 고요한 침묵을 통해 드러나고 상실과 죽음의 공포가 차분한 이미지로 다가와 머무른다. 뒤늦게 자신의 마음이 쓸쓸함으로 텅 비었음을 깨닫게 된 남자는 그 공허함을 통해 체감한 진심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일정한 범위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그저 반복적인 만남과 이별 속에서 살아가던 남자는 비로소 사랑을 갈망하고 정착한다. 감각적인 언어, 감미로운 멜로디, 감성적인 이미지, 감정적인 연기, <엘레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슬픔을 통해 허물어질 듯 삶을 이룬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하는 시도, 슬픔을 연주하는 악장도, 그 너머를 갈망할 때 더욱 애잔한 법이라는 걸 잘 아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