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올림픽에서 10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순위권을 자랑하는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실상 생존 레이스 위에서 착취당하는 열악한 비인기종목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킹콩을 들다>는 대한민국이라는 좀스러운 현실을 담보로 둔 신파 기획물이다. 주연은 스포츠, 조연은 대한민국. 소박한 시골 소녀들의 표정을 통해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로서의 구색이 명확하기도 하지만 촌스러운 한국적 배경을 활용하는 능력이 그만큼 효과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사냥에 실패한 역도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에게 동메달은 애증에 가깝다. 결과가 과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이지봉은 역기를 잡을 수 없는 몸으로 방황하다 보성의 역도부 선생으로 정착하곤 영자(조안)를 비롯한 소녀들을 만나 역도를 가르친다. 타인에게 멸시당하거나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존재들이 만나 이루는 신파의 앙상블은 그것이 지독하게 닳고 닳은 스토리건 플롯이건 따져 묻는 입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효율적인 웃음과 눈물의 재료가 된다. <킹콩을 들다>는 눈물과 웃음을 다져 넣고 팔팔 끓인 뒤 비극을 첨가하고 희망이란 그릇에 담아 관객 앞에 내놓는, 먹히는 신파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신파를 불순하게 만드는 환경이 나쁘다. 시대착오적인 건 영화가 아니라 여전한 세상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열악한 환경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현실을 담보로 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팔리고 또 팔릴 만한 신파의 재료로서 유효할 따름이다.
제목의 뉘앙스가 오묘하다. ‘나의 친구’는 온당하지만 ‘그의 아내’는 불온하다. 시선이 느껴진다. 나의 친구를 넘어 그의 아내를 바라보고자 하는 어떤 욕망이 감지된다. 제목이 지정하는 ‘나’, 예준(장현성)은 ‘친구’이자 ‘그’인 재문(박희순)을 거쳐 ‘그의 아내’ 지숙(홍소희)을 바라본다. 제목만으로도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묘한 삼각관계가 구상된다.
예준은 재문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다. 유능한 외환딜러인 예준은 미국 이민 생활을 꿈꾸는 재문과 지숙 부부를 위해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 뒤로 찾아온 불미스런 위기에서 재량을 발휘해 친구와 가족을 구원한다. 재문은 예준의 우의에 고마워하는 동시에 경제적인 지원을 피할 수 없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종의 열등감을 품는다. 모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기저에 놓인 우정은 진심이다. 하지만 수면 위의 상황이 수면 아래 진심을 은밀하게 억압한다. 견고한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남자의 우정은 실상 빈부의 자장 안에서 발생하는 우열의 기울기로 변질되어 서로를 바라본다.
불미스러운 결정적 사건이 관계구도를 전복위기로 몰아넣는다. 우연이 겹쳐 거대한 비극적 필연을 완성하고 친구의 오랜 우정은 진동한다. 관계의 파국을 막아서는 건 재문의 희생이다. 재문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을 와해시킨다. 결국 구도적 안정이 깨지면서 잠재된 기저의 욕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잠재된 우열이 권력화된다. 예준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각오하는 재문의 심리를 순수한 우정의 발로라고 이해하기엔 석연찮다. 부채의식 이상의 어떤 위기감이 엄습한다. 예준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된 재문에게 있어서 예준은 자신과 지숙을 구원해줄 수 있는 동아줄과 같은 존재다. 재문의 희생은 친구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자괴적 수긍과도 같다. 이는 단순히 극영화로서의 전개 속성에 따른 사건의 발단에 불과하다 여겨도 상관없겠지만 이 영화의 태도가 정치적 해석의 의도를 부추긴다.
아내 지숙(홍소희)의 뱃속에 있는 아들 이름에 대해 고민하는 재문에게 예준은 말한다. 남자면 민혁, 여자면 예니. 예준은 민혁은 민중혁명의 약자이며 예니는 칼 마르크스의 아내를 의미한다고 첨언한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위트는 정확히 이 정도다. 정치적인 조롱에 가깝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핵심은 아니다. 강변이라기 보단 유희에 가깝다. 어떤 의지를 표하기 위한 웅변이라기 보단 허구적 기호 속에서 드러나는 현실적 상황을 관찰하며 아이러니한 태도로 현실을 유희로 전락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때때로 파격적인 설정이 발견되지만 전반적으로 리듬감 있는 스토리텔링이 큰 무리없게 이어진다. 극영화로서의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 유희적 태도 안에 잠재된 본연의 목소리가 심상찮다. '나의 친구' 재문과 '그의 아내' 지숙을 경제적으로 원조하던 예준은 자신이 잉태한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재문의 대리적 희생을 등에 업고 속죄의 기회를 놓친다. 결국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 쓴 재문은 지숙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도리를 다하고 이를 지켜보는 예준은 도리어 본인의 잠재적 욕망의 상속 기회를 펼쳐나간다.
궁극적으로 파국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마다 발견되는 다양한 기호들이 해석의 여지를 발생시킨다. 영어에 무지한 소시민은 미국을 동경하고, 비좁은 골목마다 가득한 차는 자가주택이 없는 소시민이 이웃의 비하를 얻게 되는 계기로 발전한다. 궁극적으로 영화의 양상을 전복시키는 비극도 그 상황과 연동된다. 한국적이라 할만한 환경적 요소들이 비극을 잉태하는 점층적 수단으로 활용되고 생생히 묘사된다. 자본에 강력하게 종속된 사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착취하는가라는 날 선 주제를 기발한 관점으로 리드미컬하게 풀어낸다. 이는 죄의식과 속죄양이라는 종교적 고찰과도 맞닿는다. 자신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놓친 자의 뒤늦은 파국은 양심을 향한 숭고한 의지를 변호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에 가깝다. 하지만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순수한 극영화적인 내러티브에 집중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 전개 자체가 흥미롭다. 문학적 비유를 동원한 문장처럼 장면과 상황은 유희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실을 조명하는 식견이 탁월하다.
돋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도 공헌도가 높다. 특히 예준을 연기하는 장현성은 악의와 호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망설이는 예준의 이중적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2년 전 완성해 이제야 빛을 보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환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서민들의 삶이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기이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2년 전보다도 더 구려진 요즘 현실이 이 영화의 시사성을 더 부채질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 기이한 삼각 구도는 수많은 오류를 품고 멀쩡하게 유지되는 현실의 축약판이나 다름없다.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행복합니다>가 9일 오후 2시,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소름><청연>을 연출한 윤종찬 감독의 세 번째 작품 <나는 행복합니다>는 올해 타계한 이청준 작가의 단편 소설 ‘조만득 씨’를 각색한 작품으로 현빈과 이보영이 주연을 맡았다.
<나는 행복합니다>는 지리멸렬한 삶을 다루고 있다.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하는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나는 행복합니다>는 환자로 입원한 만수(현빈)와 정신병동의 간호사로 재직 중인 수간호사 수경(이보영)의 사연을 평행처럼 진행시키는데 두 인물은 각자 미쳤거나 미쳐가기 직전의 상태에 몰려있다. 두 인물의 삶은 대칭을 이루듯 펼쳐지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모를 모시는 만수와 암투병중인 노부를 모시는 수경의 삶은 경제적 난국과 그로 인한 연애의 파국을 경험한다는 측면까지 비슷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지난한 삶을 거쳐 과대망상증이란 정신질환자로 규정된 수만과 달리 미쳐버리기 직전에 몰렸을 뿐, 아직 질환자로 판명되지 않은 수경은 정상인이다. 결국 상황 이후의 수만을 상황 이전의 수경이 목격하고 관찰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동병상련은 서로를 보좌한다. 각자가 상대의 처지를 바라보는 관점은 정상과 비정상의 차별된 의식 세계로 구별되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통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영화는 고단한 수경의 현실을 그만큼이나 고단했던 수만의 과거와 종종 대칭 시키는 동시에 수만의 현실과 대비시키는데 그것은 수경의 비극적 현실의 무게감을 측정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수경으로 하여금 어떤 예정될 것만 같은 미래를 경계하게 만든다. 수만의 현실과 과거를 순차적으로 진전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경의 현실이 미묘하게 맞물려 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어떤 연대를 모색하거나 노골적인 교감을 묘사하지 않는다. 단지 두 사람은 적절히 동떨어진 위치에서 상대를 관찰하거나 적절한 거리감만큼 서로를 탐색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낙관을 배제한 이 영화의 엔딩은 지속될 비극의 굴레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희망을 자아낸다. 이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떤 희망을 모색할 수 있다’는 윤종찬 감독의 주관이 개입한 측면이기도 하거니와 그 결과물의 주제 양식이 그것을 적절하게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떤 이들의 비극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허구지만 그것이 바탕으로 두른 세계관은 결코 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큰 비극을 예감하게 한다. 종이에 써 갈긴 만수의 수표는 형태적으로 우리가 탐닉하는 지폐와 별다를 바 없다. 비정상인에게 수표로 통용되는 것이 정상인의 눈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통용되는 돈의 가치, 더 나아가서는 재화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역설과도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행복합니다>는 어쩌면 현실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가치를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역설적 리얼리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처럼 생존 그 자체를 희망이라 붙드는 영화는 역설적인 제목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론 잴 수 없는 인간적 의지의 표상 같아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축제의 마지막 날, 그 지리멸렬한 비극을 대면해야 하는 어떤 관객들의 상황도 역설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것이 이 시대에서 점차 간과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는 희망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축제를 위한 특별한 마침표가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