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는 평범하듯 비범한 뮤지컬이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유머와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인 뮤지컬이지만 궁극적으론 가난한 사랑노래라 마음 한 부분이 애잔해진다.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빈민층들은 저마다의 꿈을 접고 접어 달동네 한 켠 작은 방에서 또아리를 틀 듯 비좁게 살아간다. <빨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하듯 진솔하게 묘사하며 유쾌하듯 구슬픈 멜로디로 노래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강릉에서 상경했던 나영과 돈을 벌기 위해 몽골에서 입국해 불법체류 중인 솔롱고는 서울 생활 5년 차 만에 기어들어간 달동네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 마주친다. 강릉에서 올라온 나영에게도, 몽골에서 들어온 솔롱고에게도, 서울은 그저 이방인의 땅처럼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다. <빨래>는 그들이 만나 사랑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한 뮤지컬이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한 낭만에 기대어 설명하지 않으며 그 결심을 단순히 젊은 날의 치기처럼 가볍게 묘사하지 않는다. <빨래>는 대사를 통해 곧잘 ‘힘내라’는 격려를 던지곤 하는데 이로부터 이 뮤지컬의 힘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지극히 상투적인 인사처럼 느껴질 만한 이 세 음절의 언어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지탱하는 이들간의 격려로서 당위를 얻고, 결국 객석의 관객에게마저도 힘을 보탠다.
두 주인공인 나영과 솔롱고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욕쟁이 주인할매. 이 뮤지컬에서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정적인 너비를 보장하는 캐릭터이자 결정적인 추임새로서 박혀있는 그녀는 두 주인공보다도 <빨래>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헌도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특히 <빨래>는 주인공보다도 조연들의 연기가 더욱 두드러지는 뮤지컬이기도 한데 욕쟁이 주인할매를 연기하는 이정은과 함께 구씨를 비롯해 남자 조연 캐릭터 대부분을 소화하는 정문성, 이영기 두 배우의 연기 또한 꽤나 반갑고 정겹다. 특히 이 세 배우는 대학로 원더스페이스에서 공연하던 원년 멤버로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는 점을 눈 여겨 볼만하다.
원년 라인업 당시에도 나영 역을 맡았던 주연 여배우의 성량이 약간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던 것처럼 새로운 캐스팅에서도 마찬가지의 결핍을 느끼게 된다. 기본적인 음색은 곱지만 고음 처리가 종종 불안하다. 무엇보다 이번 라인업의 변화는 임창정이라는 스타급 배우와 홍광호라는 뮤지컬 스타의 가세인데 전자의 공연을 봤으므로 후자 쪽의 평은 어렵겠다. 다만 가수 출신이며 연기자인 임창정은 나름 나쁘지 않다. 특히 도올을 패러디한 서점 싸인 씬의 재치와 팬서비스 차원의 실제 관객동원 싸인은 아이디어가 괜찮다. 스타 마케팅을 잘 활용한 결과물이다. 다만 배우의 연기와 무관하게 이처럼 군무적인 형태의 연출이 행해질 때 시선이 어느 개인에게 집중된다는 건 심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대부분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무대 배우 가운데 독보적인 네임밸류를 지닌 배우가 존재한다는 건 묘하게 전체적인 호흡을 망각하게 만드는 자질이 된다. 좋은 작품의 이름값을 더욱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타의 기용은 효과적이나 관객의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은 한편으로 고민할만한 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빨래>는 원더스페이스 공연 당시 좁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세트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좀 더 무대가 넓어져 그런 묘미를 관찰할만한 구석이 경감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기능성을 계승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노래가 꽤나 괜찮다. 뮤지컬이 귀에 감기는 넘버를 만든다는 건 분명 성공적인 일이며 <빨래>는 그 방면에서 괜찮은 성과를 거둔다.
<빨래>는 분명 좋은 뮤지컬이다. 적절한 너비와 깊이를 갖추고 있다. 엄청난 미사여구를 동원할만한 업적의 반열까진 아니라도 대중적 공감대를 아우르는 주제의식과 소재를 착취하지 않고 진심이 담긴 배려가 인상적인, 누군가에게 권할 만큼 좋은 작품으로 손색없다. 기능적으로 탁월하며 정서적으로 원숙하다. 단지 구색을 맞춘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갈구하는 이들의 꿈이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 가난한 사랑노래를 응원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그 사랑엔 낙관보다도 비관이 어울리지만 응원하고 싶은 진심을 부른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재물이 행복을 대변하는,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서 낭만을 꿈꾸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막막한 도시에서 살붙이고 살 수 있는 사람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 모두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힘내자. 근심 걱정일랑 매일같이 빨고 새롭게 살아가자. 자기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자. 사람답게 사랑하자.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상훈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유일하게 삶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목을 조르고 손목을 긋고 싶은 혈연의 증거다. 손목의 핏줄을 잘라서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혈연이라는 원한이 그의 몸 속을 돌고 돈다. <똥파리>는 모든 이의 혐오를 살만한 존재의 외피를 넘어 내면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영화다. 그 안엔 어떠한 위로나 염원이 없다. 그저 최대한 진심에 접근해갈 뿐이다. 상훈의 진심을 추적하는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것과 같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컷들은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배출한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굴며 주변에 자리한 구성원의 모든 것을 흔들고 부순다. 그 폭력의 중심에서 자라난 또 다른 수컷들은 그 삶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폭력을 재생산하고 잠재적인 잉태를 부른다. 결국 맞는 자도, 때린 자도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삶이 걸쳐있는 영역 전체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삶은 지속된다. 연희(김꽃비)는 유일하게 상훈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전히 체감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다. 상훈이 연희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연희와 상훈은 서로에게 있어서 출구와 같다. 아버지와 남동생 영재(이환)와 함께 살아가는 연희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고립된 신세다. 상훈은 해소되지 못하는 폭력의 징후에 감금되어 지독한 증오를 통해 삶을 지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빈정거리는 욕설로 이뤄지는 대사는 때때로 농담과 같은 언어적 유희가 되어 관객의 웃음을 야기시키지만 이를 담보로 거리감을 좁힌 관객을 곧바로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 방치해버린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끼고 뺨을 얻어맞은 채 눈을 부릅뜰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뺨을 얻어맞은 쪽도 하나같이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 폭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공유해야 한다. 그 과정은 실로 절망적이다. 때때로 어떤 가능성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가장 지독한 폭력을 구사하던 대상이 몰락하는 방식이 발견될 뿐이다. 폭력을 구사하던 육신의 주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질 뿐, 폭력은 계승되고 유지된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영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똥파리>는 희망적인 영화다. 절망을 관통하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이 가능할 때 <똥파리>는 완전한 100%의 절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단지 전세대의 폭력을 증오하는 것으로, 혹은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단절하는 것으로선 그 부조리를 끊을 수 없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 폭력의 기저를 살피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신이 부정하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켜선 안 된다. <똥파리>를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둔갑시키는 이 세태를 고민해야 한다. 가난을 비극으로 치환하고 가정을 폭력의 도가니로 변질시키는 건 그저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증오를 통해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증오를 배출하는 혐오의 덩어리로 몰락할 뿐이다. 실상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영화 밖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 속에서 가족은 살아간다. 그 안에 ‘똥파리’들이 자라나자신만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실상 자신이 폭력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았을 때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