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일단 액션 걸로 시작했지만 점차 로맨틱 코미디 걸이 됐다”는 산드라 블록의 말은 그녀의 변화를 온전히 대변한다. <스피드>(1994)의 터프한 액션 헤로인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어낸 산드라 블록은 이듬해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로 로맨스의 중심에 섰다. 연이은 성공으로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성공적인 두 편 이후로 그녀는 평범한 멜로나 스릴러에 갇혀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를 구한 건 슬랩스틱이었다. 제작자로서도 이름을 올린 <미스 에이전트>(2001)에서 철저히 망가진 그녀의 결심은 결국 보상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를 구한 건 코미디였다. 오래된 유행가사처럼 잊혀져가던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2009)로 다시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올 어바웃 스티브>(2009)는 “나는 항상 대담했다”라는 산드라 블록의 자신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최근 <블라인드 사이드>(2009)로 인상적이란 평가를 얻고 있는 산드라 블록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이 아닐까. 언니가 돌아왔다.
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