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now?)”단순하듯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자막으로부터 미끄러져나가듯 이어지는 낮은 음성의 내레이션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에 시달리던 인류가 달의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원료 ‘헬륨3(HE3)’를 대체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이뤘다고 전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모든 성과가 전세계 자원소비량 7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루나 산업(Lunar Industries LTD)’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기업광고에 가까운 그 도입부 영상이 묘사하는 거대한 변화는 인류의 머리맡에 놓인 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치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놓인 달 기지에서 홀로 헬륨3를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은 샘 벨은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가족을 만나는 날만 손에 꼽은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유일한 동료라 할만한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가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컴퓨터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도 어느덧 계약 만료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2주가 지나면 자신을 태우고 지구로 갈 수송선이 도착할 것이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딸도 안아줄 수 있다. 그런 어느 날, 월면 작업차를 타고 자원채취 현장에 순찰을 나간 샘 벨은 충돌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선다.
<더 문>은 범인류적 진전을 피력한 그 동영상의 실체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던 한 남자에 대한 사연을 그리는 SF영화다. 달에서 채취한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달 기지 ‘사랑(Sarang)’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그 모든 작업을 도맡는 샘 벨(샘 록웰)에 관한 드라마다. 지구의 중력에 속박된 이상 결코 볼 수 없다는 달의 뒤편에 대한 비밀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전인류의 편의를 위해 홀로 달에서 외로운 작업을 펼쳐가는 샘 벨의 삶 또한 고립된 비밀처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한 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달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현대문명의 이기를 착륙시켜 완성한 SF영화 <더 문>은 광활한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 표면을 독점하기엔 너무도 작은 존재인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회상이나 영상의 동원과 같은 간접적 방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배제한다면 직접적으로 스크린에 노출된 시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한 <더 문>은 그만큼 정적이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 기지에 홀로 남아 전인류를 위한 에너지 공급에 중책을 맡고 있다는 샘 벨의 상황은 언뜻 봐도 비상식적이다. <더 문>의 우주는 샘 벨의 정서적 고립을 묘사하기 위해 장치된 광활한 감옥이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더 문>에서 달은, 더 넓게 우주는, 궁극적으로 휴머니즘과 멜로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광활한 모노드라마의 무대다.
일차적으로 묵묵히 일상을 견뎌나가는 인물의 고독을 담담하게 응시하던 영화는, 이차적으로 그 인물을 둘러싼 삶의 실체를 가볍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이밀며 본질적 물음에 접근해나간다. 광활한 우주의 깊은 어둠처럼 평온한 고독을 유영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개하며 이를 대면한 인물의 심리적 공황을 긴장으로 달궈나간다. 마치 대기권에 돌입하며 대기와 마찰하는 우주선의 표면과 내부의 온도가 다른 것처럼 인물의 공황적 심리 밖에 흐르는 차분한 공기를 평등하게 포착함으로써 감정적 역설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더 문>에서 그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고독의 만료를 기다리던 남자의 운명이 행성의 소멸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며 그 고독이 끝없이 팽창되는 우주적 너비의 운명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가스와 먼지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연민을 자아내던 샘 벨의 고독은 창작자가 연출한 충돌적 상황을 빌미로 이야기적 자전력과 공전력을 얻어 단단한 감정적 형태를 완성하고 전달해낸다.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의 연기는 <더 문>의 자전력의 기반이 되어 관객의 몰입을 당기는 인력이 되고 창의적인 발상과 전개는 공전력의 기반이 되어 거대한 감정적 은하계를 이룬다. 공기가 없어 소리가 발생할 수 없는 우주의 적막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전 궤도와 공전 궤도를 지닌 행성들의 화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이 황홀한 경험적 진경을 전달한다.
결국 도입부의 물음은 여운적 답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대의적 진리를 떠올리기 위한 발사대나 다름없다. 심오한 질문과 달리 답변은 명확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 결국 무음의 우주에서 살아남아 유음의 지구로 돌아간 샘 벨은 비로소 삶에 대한 선택권을 얻고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적막한 무음의 대지에서 번잡한 소음의 대륙에 내린 샘 벨은 그렇게 긴 시간의 고독 끝에 제 삶을 찾아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문>은 최근 개봉된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응용력과 이야기에 대한 창작력의 자산적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지난 SF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더 문>은 창조보다도 발굴의 가치를 설득하는 참신한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한글로 표기된 달 기지의 이름이나 성조기와 나란히 놓인 태극기가 발견되는 우주복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단순히 얄팍한 생색내기에서 비롯된 이벤트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관심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선물이라 이해될 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애정을 표현한 던칸 존스는 무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다. 어쩌면 그는 <더 문>에 진심을 담아 국내 관객들과 조우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관객이 그 진심에 답할 의무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문>을 완성한 던칸 존스의 재능이 그 진심을 빛낸다는 점에서 <더 문>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돼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