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케팅 때문에) 단순히 웃겨주는 섹스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다소 뜨악할 수도 있겠다. 이해영 감독의 <페스티발>은 자신의 전작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와 커다란 접점을 지닌,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연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페스티발>에 등장하는 세 커플과 7인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취향이 다른 성적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계적 소통의 불편을 느낀다. 옴니버스 구조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야릇한 사연들은 영화를 버라이어티하게 확장하며 내러티브의 진전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동시에 대사와 행위를 통한 웃음을 드물지 않게 포진시켜나간다. 하지만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표방될 만한 <페스티발>의 메시지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안에서 포용되지 못하는 느낌인 동시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네 갈래의 사연을 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탁월한 합의점을 발견할 수 없다. 웃겨주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건 맞지만, 웃겨주는 이야기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축제 분위기는 요란한데, 들뜨는 기분이 멈칫거린다고 할까.
여자보다도 예쁜 남자, 이름하여 마성의 게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이하 <앤티크>)엔 게이가 나온다. 남자끼리 손도 잡고, 엉덩이도 만지고, 키스도 한다. 개봉 주 50만 관객을 동원했다. 게이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종로에 있는 한 게이바에 가서 물었다. <앤티크>봤어요? 아니요. 이태원에 있는 게이바에 가서 물었다. <앤티크>봤어요? 아니요. 마성의 게이 체면이 말이 아니시군.
강남의 한 멀티플렉스를 찾았다. <앤티크> 상영관에 삼삼오오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한다. 종종 커플도 보이지만 여성들이 꽤 많다. 남남 커플은 찾아보기 힘들다. 분위기는 뜨거웠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잦았다. 상영관엔 화색이 돌았다. 게이 커플의 키스씬 장면에서 앞줄의 어느 한 젊은 여자 무리가 꺅,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넌? 마성의 게이는 대체 누굴 홀리고 있는 건가.
야오이
게이라고 했을 때 일단 미소년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동인녀, 혹은 그 주변사람일지도 모른다. ‘야오이(やおい)=동성애’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상 야오이는 동성애자들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관계다. 창작자와 독자층 대부분이 일반여성으로 이뤄져 있다. 일반여성들이 즐기는 남성 동성애물이다. 미소년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여성용 동성애 판타지에 가깝다. 사실 야오이는 동성애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문화가 아니다. 반대에 가깝다. 야오이 만화의 대부분은 게이들의 성행위 묘사에 치중한다. 야오이는 ‘야마나시, 오치나시, 이미나시(ヤマなし、オチなし、意味なし)’의 약자로 알려진다. 주제 없음, 소재 없음, 절정 없음. 조롱의 의미가 감지된다. 야오이를 극단적인 동성애 포르노에 불과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게이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맞서 플라토닉한 동성애를 묘사한 ‘BL(Boys Love)’같은 장르도 등장했다.
요즘의 야오이는 수위에 따른 등급차가 있을 뿐, 미소년이 등장하는 게이 로망으로 집약된다. 야오이 창작 집단은 전문작가군부터 아마추어 팬픽 동호회를 망라한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창작과 동시에 소비를 겸한다. 10대 미소년들의 동성애에 대한 환상과 혐오가 고스란히 그들의 동인 활동에 투영돼있다. 동인은 뜻이 같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동인지=야오이’라는 식의 왜곡이 자리잡았다.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들을 동인녀라 지칭하는 것도 그 탓이다. 일반명사가 고유명사 개념으로 와전됐다. 그만큼 그들의 교류가 활발하고 결속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 활발했던 문학동인지가 쇠퇴하고 만화동인지가 꾸준히 맥을 이어온 덕분이다.
스키니진을 입으며 각선미를 뽐내는 요즘 아이들의 패션에서 야오이가 연상된다. 뱅헤어 스타일의 머리에 마스카라까지 칠한다. 여성성이 혼재된 메트로섹슈얼의 이미지다. 최근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이돌 패션은 점점 유니섹스 코드가 강해진다. 더 이상 근육이 남성적 매력을 보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스키니진을 입은 남자들의 다리는 여자들보다도 가늘고 길다. 브이넥은 더욱 깊게 파인다. 샤방샤방한 미소년 전성시대다. 여자보다 예쁜 남자가 각광받는다. 원래 아이돌은 무대에서 대접받는 메인디쉬 중 하나였다. 과거의 아이돌은 반항적인 이미지를 구사하거나 귀엽게 춤추고 노래했다.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 누난 너무 예뻐. 적극적인 섹스 어필이 가미된다. 누나들의 가슴이 뛴다.
예쁜 남자들의 중성적 이미지가 야오이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메트로섹슈얼을 넘어 호모섹슈얼리티의 영역을 침범한다. <앤티크>는 미소년 신드롬과 결합된 야오이 코드다. 진짜 동성애자의 실체와 거리가 있지만 상관없다. 인권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다. 컨텐츠로 이윤을 남기는 게 목적이다. 관객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동성애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관건이다. 소비자가 보고자 하는 욕구에 충실하면 상관없다. 미소년 트렌드에 접목시킨 동성애 코드는 동인녀 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드라마와 영화로 동성애 코드의 유입이 활발해지고 있다. 작년에 방영된 <커피프린스 1호점>은 남장여자 고은찬에게 끌리는 최한결의 심리를 통해 퀴어드라마의 감수성을 교묘하게 노출시켰다. 최근 방영 중인 <바람의 화원>도 비슷한 맥락이다. 극 속의 주인공이 ‘남장여자’라는 정보는 시청자들에게만 열려있다. 극 속 캐릭터들은 알지 못한다. 남자가 감정을 느끼는 건 남장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시청자에게도 남장여자가 아닌 남자에 대한 연모가 느껴진다. 하지만 시청자는 이미 알고 있다. 실질적으로 퀴어는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다. 심리적인 안정이 유지된다. 그러면서도 동성애의 뉘앙스가 발생한다. 시청자들은 적절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동성애를 소비한다.
<바람의 화원> 원작소설은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신윤복이 남장여자임을 밝힌다. 텍스트이기에 가능한 바다. 문근영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드라마에서는 그런 속임수가 불가능하다. 시청자들에게 맥락은 이미지로 개방될 수 밖에 없기에 암묵적 합의가 요청된다. 김홍도와 신윤복 사이에서, 정향과 신윤복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 교류가 흐른다. 이 경우 자극의 크기가 센 건 후자 쪽이다. 외관상 남남 커플의 형태를 이루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미지가 퀴어에 걸맞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여여 커플인 정향과 신윤복이 이루는 자극이 강렬하다. 이미지의 힘이다. 정향과 신윤복의 관계는 야오이의 구도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이역시도 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다. 적당한 안전거리는 유지되고 파격은 더욱 강해진다. 동성애라는 컨텐츠가 서서히 대중의 저항심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호모포비아
국내에서 퀴어(queer) 컨텐츠의 저변은 동인녀들을 중심으로 확대됐다. 그만큼 동성애 문화는 소수 취향의 음지 문화로 인식됐다. 그만큼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로 확산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호모포비아(homophobia)와 같은 동성애 혐오증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2002년 3월 22일 MBC 베스트셀러 ‘연인들의 저녁식사’가 방영된 후 방송사 홈페이지가 뜨거워졌다. 일반적인 가정이 있는 남자가 죽은 옛 동성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장면에 시청자들은 반응을 보였다. 호평도 이어졌지만 극심한 호모포비아가 게시판에 분출됐다.
대중문화는 대중적인 선호도를 고려한다. 그만큼 관객의 반발을 살만한 소재에 망설일 수 밖에 없다. 소비자가 판단하기 이전에 창작자 입장에서 몸을 사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앤티크>의 민규동 감독은 전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중년의 동성애 코드를 극에 삽입했다. 제작사 측에서는 동성애 캐릭터인 천호진과 김태현을 영화포스터 촬영에서 누락시켰다. 특별한 성애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먼저 몸을 움츠렸다. 동성애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에 배우들이 부담을 느껴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는 케이스도 있었다. 이송희일 감독은 <후회하지 않아>의 캐스팅을 위해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시나리오를 건네 받은 배우들은 좀처럼 연락이 없었다. 심지어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답변을 얻기도 했다. 호모포비아와 그에 대한 외부적 경계심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부분의 호모포비아는 동성애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동성애가 변태적이라는 오해에서도 혐오가 발생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정의 내리는 사고방식과 연관된 바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깨닫는 동성애자는 없다. 자연스럽게 이성애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와중에 성 정체성의 혼란을 직감하게 된다. 이태원의 게이바에서 만난 한 게이는 19살에 처음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전까진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이성애자로서 살아간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흔히 말해 일반적이다. 동성애는 반대로 특수한 경우다. 당사자에게도 혼란이 가중된다. 확신하기까지 많은 갈등이 따르기도 한다. 외부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도 발생한다. 커밍아웃(Coming out)은 쉽지 않다.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도 존재한다.
커밍아웃
성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 데엔 유명인의 커밍아웃이 한몫 했다. 트랜스젠더 하리수가 매스컴에 등장했고, 홍석천은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하리수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하리수의 등장으로 트랜스젠더라는 생소한 외래어가 일시에 통용됐다. 대중들은 하리수를 궁금해했다. 혐오스러움을 표하는 이도 분명 있었지만 일단 그 존재 자체가 새로운 자극이었다. 대중의 관심사만큼이나 매스컴에 꾸준히 노출됐다. 음반도 발표했고 연기도 했다. 심지어 해외진출까지 이뤘다. 확실한 상품성이 존재했다.
홍석천은 고전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고백한 이후로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방송 섭외가 단절됐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낙인과도 같았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죄인이 됐다. 자살을 고민하기까지 할 정도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동성애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자립이 필요했다. 대중의 혐오를 사는 상황에서 연예인으로 살아가기란 어렵다. 외식사업을 했고 재기에 성공했다. 현재 홍석천은 케이블 방송에서 ‘홍석천의 커밍아웃’이라는 프로를 진행하고 있다.
최진실의 자살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지난 10월에 두 명의 성소수자가 자살했다. <색즉시공>에 출연해 중성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던 장채원은 트랜스젠더 수술 후 ‘진실게임’에 출연해 자신이 트랜스젠더가 됐음을 알렸다. <색즉시공2>에 출연해 트랜스젠더라는 역할도 맡았다. 모델 겸 연기자로 활동하던 김지후는 촉망받는 신인이었다. 그는 ‘홍석천의 커밍아웃’에 출연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각각 10월 3일과 7일에 차례대로 세상을 등졌다. 혹자는 최진실의 죽음에 따른 베르테르 효과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럴 수도 있다. 허나 자살을 결심한 이에게 사연이 단지 그것뿐일까.
장채원은 공중파 방송에서 직접 자신이 트랜스젠더가 됐음을 고백했고 화제가 됐다. 그뿐이었다. 전작의 인연 덕분에 <색즉시공2>에 출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라는 성소수자 역할로서 희화화되고 말았다. 특별한 지점이 없었다. 하리수는 초유의 모델이었다. 외모도 뛰어났다. 그만큼의 희소성을 누렸다. 하리수를 통해 대중들은 트랜스젠더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소비했다. 더 이상 트랜스젠더라는 상품성만으론 대중에게 어필하기 어려워졌다. 소비적 욕구가 약해졌다. 장채원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이슈가 됐을 뿐 지속적인 관심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김지후는 커밍아웃 이후로 홍석천과 상황이 다를 바가 없었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기 좋은 연예인의 커밍아웃은 일반인의 커밍아웃과 범주가 다르다. 일반인의 커밍아웃은 자신의 주변인에 국한되지만 연예인의 커밍아웃은 사회 전반에 노출된다. 익명의 탐탁지 않은 눈길까지 감당해야 한다. 김지후는 ‘홍석천의 커밍아웃’에 출연한 뒤 지독한 악플에 시달렸다. 여론의 동향에 민감한 방송사들은 김지후의 출연에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연예기획사와의 전속계약이 무산됐다. 성소수자 연예인이 되기란 쉽지 않다. 하리수와 홍석천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닌 특수한 성공담이다. 폐쇄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 성소수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반사회
동성애자들은 스스로를 ‘이반(二般)’이라고 지칭한다. 이반은 이성애자들을 ‘일반(一般)’적이라고 지칭하는 세상을 유희하는 언어다. 최근엔 좀 더 분명한 의미를 두기 위해 ‘이반(異般)’이라 정리되고 있지만 일종의 저항감에서 출발된 선언임에 분명하다. 동성애자들은 스스로를 이반이라 정의함으로써 일반적이라는 이성애자들로부터 구별 지어지기 전에 스스로 이반이라 일반인을 구분한다. 선수를 쳤다. 차이를 감추기보단 자기 정체성을 어필한다. 오히려 이반사회가 일반 이성애자들에게 열려있다. 소수가 다수를 포용한다. 이태원이나 종로에 있는 게이바를 찾는 이성애자들도 적지 않다. 처음엔 호기심에서 찾아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별한 선입견으로 인해 두려움을 짊어지는 이도 있지만 오히려 지극히 평범해서 놀랐다는 이가 대부분이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가능할 때 상대의 영역은 존중된다. 공존은 가능해진다. 하지만 정상과 비정상의 맥락으로 이해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평행우주가 아니라 우열관계로 인식할 때 소통의 가능성은 멀어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보고 있다고 믿는다. 수적 우위의 심리가 발생한다.
과거의 동성애 영화는 무겁고 어두웠다.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 동성애자들의 혼란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반영됐다. 최근 개봉된 <앤티크>나 <소년, 소년을 만나다>는 과거와 다르다. 더 이상 우울함에 기대지 않는다. <커피프린스 1호점>은 퀴어 드라마를 트렌드로 승격시키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동성애 코드에 대한 문화적 포용 빈도가 활발해지는 만큼 컨텐츠의 양식도 변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와 같은 퀴어 멜로도 등장했지만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 코드를 서브 컨텍스트로 차용한 작품도 등장했다. 활용의 폭이 넓어졌다. 작년에 개봉한 <가면>과 <궁녀>는 스릴러 장르의 반전 키워드로 동성애를 삽입했다. 최근 남장여자 신윤복을 소재로 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영화 <미인도>는 간접적으로 퀴어적인 요소가 가미됐다 말할 수 있다. 심지어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동성애를 그린다는 <쌍화점>도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2005년에 개봉한 <후회하지 않아>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은 4만 여명의 관객 중 동성애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주관객층은 동인녀였다. 동인녀들은 <후회하지 않아>에서 동성애 관계를 연기한 이영훈과 김남길(당시 ‘이한’)을 통해 야오이를 소비했다. 이송희일 감독은 동인녀들의 호응이 이렇게 뜨거울지 몰랐다며 인터뷰에서 밝혔다. 동성애자 감독이 만든 동성애 영화를 동성애자들은 당당하게 보기 힘들다. 한 남성 블로거는 <앤티크>를 보고 싶지만 게이로 오해받을까봐 두려워서 볼 수가 없다는 포스팅을 자신의 블로그에 남겼다. 이런 상황에서 게이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게이끼리 상영관을 찾기란 쉽지 않다. 문화적인 포용력은 확대되고 있지만 가치관에 따른 습성은 변화가 더디다. 컨텐츠에 대한 소비는 활발하다. 하지만 컨텐츠의 본질은 주목 받지 못한다. 문화지체현상이 발생한다.
지난 9월 이화여대 레즈비언 인권운동연대가 기획한 문화축제 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 무지개 걸개가 걸렸다. 무지개 걸개는 동성애를 상징한다. 갑자기 몇몇 학생들이 무지개 걸개를 찢고 밟았다.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의 소행이었다. 사회적 편견만큼이나 종교적 근본주의는 거대한 장벽이다. 보수적인 기독교단체인 교회언론회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성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 수상 기준에 해당하는 문장 하나가 문제가 됐다. ‘동성애자·아동·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 보호에 공적이 있는 자 또는 단체’라는 문구 중 ‘동성애자’를 삭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동성애가 치료의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동성애라는 정신병을 낫게 해주소서. 컨텐츠는 유통되고 소비는 확대되지만 여론이나 인식은 답보상태다.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지점이 발견된다.
호모섹슈얼리티
현재 동성애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은 사실상 동성애자들의 취향과 무관하다. <앤티크>에서 등장하는 마성의 게이는 실상 게이들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다. <앤티크>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게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크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니까.”야오이에서 발췌한 환상일 뿐 진짜 게이들의 로망과 무관하다. “차라리 마성의 게이가 장동건이라면 좋았을 텐데.”옆에 있던 다른 게이친구가 말했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영화 속의 마성의 게이는 게이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 아니다. <앤티크> 상영관을 채운 여성들의 열기가 그것을 대변한다. 메트로섹슈얼에 대한 신드롬이 동성애를 맞춤복처럼 골라 입었을 뿐이다. 동성애 문화와 동성애자들의 삶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동성애가 이야기되는 것은 중요하다. 한때 ‘클릭B’는 앰프와 연결되지 않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섰다. 연주 흉내내는 락밴드라는 자질논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신해철이 말했다. “지금 같이 댄스곡 일색의 상황에서는 기타를 들고 밴드 흉내라도 내면서 무대에 서 있다는 게 중요하다. 보여지는 것 자체만으로 그나마 득이 된다.”동성애 문화도 같은 맥락의 마케팅이 필요하다. 동성애를 소비하는 대중이 늘어날수록 호모포비아가 붕괴될 가능성도 늘어난다. 문화적인 주입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훈육이다. 지난 16일 육군 22사단 보통군사법원은 군형법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군대 내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군형법 조항에 관한 것이었다. 재판부는 이를 인정했다. 결정문 내용이 눈길을 끈다. "국제적 흐름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이 사회적 관심을 받고 동성애자의 모임이 늘어남에 따라 국민의 의식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강제에 의하지 않은 동성 간 추행을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건 과도한 규제다.”군대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의 사각지대라 꼽히는 곳이다. 판결문의 내용은 동성애를 품은 대중문화 컨텐츠의 성과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동성애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종로에서 게이바를 운영하는 C사장이
물었다. “동성애와 동성애 문화가 같은 걸까요?”동성애 문화는 동성애가 아니다. 삶과 문화의 영역은 다르다. 동성애 문화는 동성애로 포장된 소비재에 불과하다. 문화를 소비하는 건 불특정다수의 대중이다. 동성애 문화가 동성애자들을 위한 것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동성애자들은 나름대로의 자신들의 세계에서 문화를 꾸려나가고 있다. 게이바 직원이 크루즈 모임을 홍보하는 브로셔를 건넸다. “게이들만 가는 거에요.”그들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에 속한 이가 아니라면 굳이 참견할 필요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종로의 한 점에 게이들이 모이는 바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소비의 양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대중이 소비하는 동성애 문화는 결국 대중이 보고자 하는 또 다른 환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우리가 보는 동성애 로맨스는 진짜 동성애가 아닐지라도 그것을 본다는 건 의미가 있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검증은 필요 없다.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서로 다른 세계의 입장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게이바에 앉아있던 게이 한무리가 ‘도전! 슈퍼모델’에 출연하는 한 모델을 보며 정말 예쁘다고 감탄했다. 그냥 그랬다. 저마다 다른 것을 본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서로가 편해진다. 비로소 함께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