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를 보면서 <미쓰 홍당무>가 생각나기도 했다. 혹시 <미쓰 홍당무>를 봤나?
<미쓰 홍당무>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약간 비슷한 데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아직 <미쓰 홍당무>를 못 봤다. 시나리오도, 영화도 아직 못 봤다. 사실 의도적으로 안본 측면도 있다.
영향력을 받을까 두려웠던 건가.
맞다. 영화를 위해서 해야 되는 부분이 있는데 <미쓰 홍당무>에서 의식할만한 지점이 발견되면 원치 않게 피해가야 할 부분이 생기거나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까 봐. 하지만 이제 봐야지. (웃음)
<우리집에 왜왔니>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예전에 준비했던 <세탁소>라는 작품이 정황상 지연됐다. 강혜정 씨는 그때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다. 그 사이에 시나리오를 좀 수정하게 됐는데 시나리오를 쓴 김지혜 작가님이 이 기회에 구조를 완전히 틀어보자고 하더라. 그 무렵에 어떤 소녀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집에서도 그 친구가 나가서 노숙을 하는지 몰랐다. 발견되고 나서야 알았던 거지. 우리에게 있어서 그건 처절한 일이잖아. 그런데 이 친구는 과연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었을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처럼 처절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굉장히 행복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고.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잖아. 이 친구처럼 우리 캐릭터도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꺼내보면 어떨까 싶었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남자 캐릭터는 우편물이라는 단서를 통해 끌어내 보자고 김작가님과 이야기했고 그렇게 시작됐다.
방금 말했던 <세탁소>는 필모그래피로 검색되더라.
시나리오만 있지.
간단한 시놉시스와 아까 말했듯이 주연 배우로 강혜정 씨가 등록돼있더라. <세탁소>와 <우리집에 왜왔니> 사이에 얼마나 연관관계가 있나?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세탁소>를 놓고서 변주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자체에 혼선이 생긴 거 같다. 자살기도에 관한 부분이나 캐릭터들에게 뭔가 결핍돼있다는 부분이 새롭게 가미됐다. 하지만 아마 보면 알겠지만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영화다. 그리고 강혜정 씨는 <세탁소>에서 <우리집에 왜왔니>로 시나리오가 바뀌고 나서도 같이 작업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계속 가기로 했었다. 사실 <세탁소>와 전혀 다른 얘기가 됐는데도 그냥 가줬다. 특별히 시나리오를 보고 이런 것도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를 흥미롭게 봤다. 상처 입고 때묻은 피부와 옷감을 부분적으로 접사앵글을 통해 비추면서 호기심을 키우다가 결국 한 여성의 시체를 등장시킨다. 그 자체로 비극을 연출하기 좋은 죽음을 등장시키지만 비극적인 인상은 없었다. 결국 그 시퀀스 자체가 마치 이 영화의 전체를 대변하는 느낌이었다. 판단하기 좋은 어떤 일부의 이미지기 전체로 확장되지만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사실 프롤로그에서 계속 보여주고자 했던 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일부들이 전체를 대변하는 이미지처럼 보인다는 말은 맞다. 상처를 비롯한 신체의 일부가 비춰지다가 점점 샷이 뒤로 빠져나오면서 전체가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큰 그림을 먼저 보여주면서 전체적으로 열어주고 파고들어가는 게 아니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빠져나가면서 열리는 방식이랄까. 그런 접근방식으로부터 전체적인 양상으로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물로부터 최대한 동떨어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최대한 인물의 감정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로서 거리감을 두는 느낌이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까지 상경하는 과정 자체가 관객 입장에서는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수강이가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상투성은 항상 현실에 존재한다. 유행의 문제가 아닌 거지. 하지만 민감한 부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가능하면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수강이는 굉장히 담담하고 태평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게 그런 식으로 보여지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길들여진 이야기의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왜곡시켜서 보여주되 뒤로 갈수록 점점 진정성에 가까워지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심문 받는 장면에서 형사와 병희의 관점에 따라 앵글의 선명도에 차이를 둔 것도 고의적이다. 형사의 시점에서 병희를 바라볼 땐 선명하지만 병희의 시선에 놓일 땐 흐릿해진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 <우리집에 왜왔니>는 관점의 차이를 통해 사건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심각한 범죄적 행위들이 민감한 감상을 부르지 않는 것도 영화가 그런 태도의 관점을 이미 선점했기 때문이다. (웃음)
민감한 부분들이 정말 많지. 폭행, 아동 성추행, 치정, 많다. (웃음) 그런데 다들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내 감정에 충실해서 외부적인 시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가 있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외부적인 해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쇼크를 받게 될 때가 있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다. 병희는 아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아내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어떤 가정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조금씩 어긋나거나 균열이 생길 때부터 문제는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냥 단순하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수강이 지민에게 어느 순간 반했을 뿐이니까 거기까지 해석될 여지는 없지 않나. 그냥 좋았고, 그에 따른 감정에서 비롯된 시간들을 갖게 될 뿐이지만 외부적인 시선에 따라 죄명이 따라붙을 수 있는 것뿐이다.
수강이란 캐릭터 자체도 특이하지만 캐릭터가 두르고 있는 환경 자체도 평범하지 않다. 일단 스무 살인데도 고등학교를 다니고, 산에서 혼자 살고 있다.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만드느냐라는 지점이 중요했다. 사실 너무 현실적이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현실적이어도 안되니까. 일단 이 친구에게도 분명한 현실적 히스토리가 있다. 어려서 가족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된 후로 원래 가족들이 살던 곳으로 보내졌고, 그런 까닭에 고등학교도 늦게까지 다니게 됐으며 생활보호 대상자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들을 적절히 가리거나 노출시키는 밸런스가 중요했다. 캐릭터 자체가 사회성이 없는 감정적인 인물이다 보니까 너무 띄워놓을 수도 없고, 땅에 발붙일 수도 없었다. 마치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지 모를 거 같은 캐릭터를 그려보고자 했다. 그렇게 보여져야 이 친구가 지닌 감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 감정이 영화 전체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캐릭터의 행위에 대해서 완전히 납득하지 못할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캐릭터가 이래야 되지 않냐고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에 로직(logic)으로 설명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 전에 시나리오를 쓴 김작가님이나 내가 항상 했던 이야기가 얘는 원래 이런 애라는 거다. 난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라는 모든 질문에 항상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사람은 그렇다고 받아져야 하는 부분들인 셈이다.
김병희의 집 벽지가 인상적이더라. 외부에서 보는 집의 외관은 낡은 느낌인데 집 안의 인테리어는 모던한 느낌이다. 의도적인 건가. 혹시 단순히 취향 때문은 아니겠지. (웃음)
100% 내 취향인 건 아니고. (웃음) 사실 외관과 내부가 다르다는 건 병희에게도 집이라는 것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병희에게 있어서 집은 지켜내야 될 공간이다. 외형과 상관없이 내부 자체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대로 꾸며놓고 싶은 거다. 사실 병희와 함께 죽은 병희 와이프의 캐릭터를 대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공간 자체에 대한 심심함을 덜어내는 느낌도 있다.
우리 집이라는 공간이 너무 한정돼 있고 그 공간 안에서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되기 때문에 미술적인 깊이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엌이 보인다거나, 계단이 보인다거나, 굉장히 한정된 사이즈의 앵글 밖에 보여줄 수 없어서 그 안에서 어떤 환기가 이뤄져야 된다는 생각에 그런 패턴을 가져간 것도 있다.
겉과 안의 풍경이 다르다는 것도 이 영화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인물의 겉모습을 통해 타인에게 감지되는 삶의 형태가 자신 스스로 감내하는 것과 다른 양상이 될 수 있다고 할까.
내부와 외부의 이질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영화 전체에 크리스마스적인 정서가 흐르는데 크리스마스라 하면 따뜻한 쓸쓸함이 떠오른다.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집 안엔 따뜻한 불이 밝혀져 있지만 밖의 공기는 차갑다.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미지랄까. 그런 느낌이 병희 집에 묻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봤을 땐 차가운 느낌이지만 내부로 들어갔을 땐 다른 톤이 발견될만한.
방금 말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은 사실 부조리다.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따뜻한 날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더없이 추운 날이 되니까. 결국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병희와 수강의 관계 자체도 상당한 부조리다.
모두가 수강을 미친 년이라고 불렀지만 병희 시점을 통해서 수강에 대한 다른 해석이 발생한다. 죽음 자체만해도 그렇고. 수강의 죽음을 형사가 보는 톤과 마지막에 병희가 보는 톤은 다르다. 형사가 본 수강의 죽음이 바로 단순한 외부적 시선이지만 병희의 시선을 통해 들어가면 수강의 사연을 알게 된다. 전혀 다른 해석이 되는 거지.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부딪히게 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측면에서 부조리적인 코드들이 보인다.
병희의 독백을 통한 물음과 함께 엔딩을 맞이한다. ‘우리 집에 왜왔니?’라는 질문은 사실 정답이 있는 것 같지만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말 그대로 어떤 이유가 있다 해도 결과적으론 우연이 아닌가. 하지만 그 우연에도 어떤 의미는 생기기 마련이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떤 희망과 공간이 일치될 때, 우린 그걸 집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놓여있는 공간에서 누군가 함께 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게 될 때 집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생겨난다. 우연의 일치와 같다. 사실 수강한텐 한 평짜리 작은 노숙자 박스조차도 내 집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이 한편으론 관의 이미지도 갖게 되고. 예를 들어서 몽타주 씬에서 수강이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레퀴엠 같은 음악도 들린다. 주변이 빛 바래지면서 모든 게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내 집인 그 박스만은 빛을 잃지 않는 상황이다. 단순히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심볼이랄까.
그냥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라는 단어와 ‘집’이라는 단어 자체가 서브 플롯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져가긴 한다. 수강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마치 회귀본능과 같다. 내가 살았던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행위로 인해서 사실 되돌아보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 자체가 어떤 속죄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지민이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속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행 같은 과정이지 않나. 크리스마스라고 카트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설레기도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그렇게 걸어가는 거 자체가 수강에겐 고행의 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집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지만 사실 병희라는 인물과 함께 지내던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귀결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박희순 씨의 내레이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내레이션은 상당히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방식인데 박희순 씨가 잘 소화해낸 거 같다. 때때로 위트를 발생시키는 기능적 효과까지 거둔다.
그렇다. 내레이션 영화지. (웃음) 사실 나는 영화에 있어서 굉장히 ‘안티(anti) 내레이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으로 교감하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다. 단순히 설명해주는 부분들도 있지만 사실 인물간에도 내레이션을 통해서 교감하거나 소통하기도 한다. 병희가 수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수강에게 읽히기도 하고. 그런 재미들도 발생하는 만큼 단순히 설명의 수단이라 말할 순 없다. 어떤 순간에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레이션을 삽입한다는 게 단순히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작업이기도 하고.
내레이션이 있다는 게 상당히 부담이었다. 영화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굉장히 힘든 부분이었다. 내레이션 자체가 서술적으로 가다가 어느 순간 독백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실 박희순 씨가 문어체를 힘들어 하시는 부분이 있었다. 사실 대사에도 문어체가 많았는데 나름대로 어떤 부분들에선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꿔가기도 하더라. 그리고 처음에는 플랫(flat)하게 가다가 그게 점점 독백이 될 땐 선 자체가 감정적으로 바뀔 거다. 그런 순간엔 그림 자체도 덤덤하게 가줬다. 그런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무덤덤함 자체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태도처럼 보인다. 영화가 어떤 감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영화 자체가 그 감정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느낌이다. 다양한 환경적 요인들을 묘사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게 가져가려 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들이 여기저기 너무 많이 산재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건 그저 이 인물이 겪었던 일일 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토론해보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지점에 대해서는 조금 힘을 놓고 가야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수강이 과거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생활을 하고, 서울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건, 노숙자 생활을 했건, 중요한 건 외부의 환경이 아닌 수강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병희도 마찬가지다. 병희는 조금 다른 케이스지만 병희가 겪어가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굉장히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로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외부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요인들도 중요하겠지만 이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겪어가는 과정에 초점이 가야 된다. 외부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설명이 많이 가해지다 보면 인물 자체가 그걸 스쳐 보내고 있는데 오히려 바라보는 사람이 인물을 멈춰 세우는 꼴이 된다. 그럼 결국 감정 자체도 훼손되고 인물이 자꾸 덜미를 잡히게 되는 꼴이 되니까 그런 부분들은 오히려 좀 툭툭 스쳐 지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야기를 위한 소재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강변되기 위한 본질은 아니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인물이 그런 환경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자체가 보여지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자체를 부여한다는 건 오히려 불필요한 행위 같다.
예산상의 부족으로 포기해야 했던 물리적인 분량이 있었나?
그런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게 큰 부분들은 아닌 거 같다. 본질에 가까운 것들은 챙길 수 있었던 거 같다. 덜 화려하거나 덜 매끄럽거나 그런 부분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해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유연하지 못하거나 좀 더 매끄럽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들은 있지만 중요한 부분들은 해치지 않았으니까.
최근에 박희순 씨를 만났었는데 당시 <우리집에 왜왔니>에 대한 이야길 잠깐 했다. 자신이 찍은 영화 중에 가장 힘들게 찍었던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박희순 씨 같은 경우는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거다. 감량도 있었고. 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는데 예산이나 일정과 같은 물리적 한계가 많다 보니까 체력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거다. 그리고 한번 결박을 묶으면 촬영하는 동안 계속 그걸 풀지 않는다. 묶었다, 풀었다 하는 게 더 힘드니까. 거의 하루 종일 묶인 상태로 계시기도 했다. 그리고 병희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의심의 과정부터, 심리적 장애로 인한 증상까지 겪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연기로서 넘나드는 것 자체도 힘드셨을 거다.
영화를 보고 나니까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다. 사람의 감정이 북받칠 때는 그걸 쏟아내야 편해지는데 이 영화에서 박희순 씨는 자꾸 그걸 안으로 삼켜야 한다. 충만해지는 감정을 쏟아낼 수 없는 배우 입장에선 분명 힘든 작업이었을 거 같더라. 배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축적되는 감정에 시달렸을 거 같다.
말한 것처럼 병희를 절제시킨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아내의 죽음 같은 경우, 그 상황은 예고되지 않은 당혹스러운 순간인 만큼 충격이 워낙 큰 일이다. 하지만 앞에서 아내가 죽고 나도 총알을 맞고 저 앞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도 실제로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고 아무 일도 없듯이 당장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부분들이 사실 당사자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히려 희순 씨에게 그런 부분들이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드렸고 그래서 나온 게 딸꾹질이었다. 눈물이 나기보단 너무 놀라서 그 순간 의외의 것들이 뛰쳐나온다고 할까. 딸꾹질처럼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것들이랄까.
슬픔보다는 그 상황 자체의 통증이 자각되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인물이 스스로 그 슬픔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건 위험한 발상일지도 모르는데, 난 말미에서 배우가 울고 싶어한다 해도 그 후에 울어야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순간 모든 것을 터트려 버리면 그 감정들이 다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미에 두 사람이 만날 때, 분명히 뭔가 내면에 꽉 차있다는 게 보이고, 마음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게 보여지는데 그걸 물리적으로 함께 터뜨려버리면 이 영화 안에서 감당이 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 터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당사자에겐 절제하기가 힘든 일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병희가 다시 살게 됐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그것도 가혹한 일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꿈꾸던 사람에게 있어서 희망은 죽음이다. 삶을 꿈꾼다는 건 삶이 새로운 희망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선 조금 의미가 다른 거 같다.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기 보단 기존의 희망이라 믿었던 죽음이 희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서 살아가야 된다는 걸 직감하는 느낌이다.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사실 <우리집에 왜왔니>라는 영화가 완벽한 치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결국 이제 ‘세상은 아름다워’라는 걸 깨닫는 영화가 아니란 말이다. 이제 앞으로 잘살 수 있을 것 같다기 보단 이젠 밖에 나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정도랄까. 그러니까 반 걸음 정도를 떼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장 두려운 삶이란 그 이후의 삶이라는 게 어떤 걸 보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끝내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어딘가 멈춰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서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다면 최소한 거기서부터 열려있을 수 있다. 그게 이 영화의 희망이다. 엔딩 직전에 병희가 수강이 찾아오는 꿈을 꾸는 것도 사실 병희에게 조금 더 힘을 내게 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수강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면서 병희를 깨우고 움직일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대신 병희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배려를 남긴 셈이다. 그런 부분들이 쓸쓸한 동시에 따뜻하다. 결국 작게나마 희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쉽게 말하자면 <우리집에 왜왔니>는 평범하지 않은 사건을 담은 영화다. 혹시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거부감은 없지만 경계하는 부분은 있다. 세상엔 모두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것들을 패턴화시키거나 정립시키려고 한다. 그런 걸 가장 무서워하기도 하고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일상도 들여다보면 매일이 사고고, 드라마다. 단지 그런 극적인 상황들이 현실에서 일어날 확률이 적을 뿐이지. <우리집에 왜왔니>와 같은 상황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렇게 밖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느낌이랄까. 나는 매일매일 매 순간이 다 부조리인 거 같다. 그냥 그게 당연한 거 같다.
일상적으로 그런 부조리한 풍경이 많이 인지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진짜가 뭔지 잘 보려고 할 때가 많다. 그건 머리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거 같거든. 진짜를 본다는 건 머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강은 자신의 사랑을 관철시키려 하고, 지민은 수강을 떼내려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선언을 통해 파국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이미지와 흡사하다. 단지 영화는 좀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갔을 뿐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일단 깊은 감정에 빠지게 되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잡고서 그 감정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강하고 지민이가 책 읽는 장면이 수강을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진실의 한 부분이 된다. 다만 그게 덧날 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이 친구가 그걸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진짜 감정이 거기 있는데 그 진짜 감정이 어떻게 바뀔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두려움의 본심을 이 친구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는 버거워서 마음이 떠난 거지. 견딜 수 없이 지치다 보니까 너무 싫어졌고,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관계가 돼버린 거다. 단지 수강한테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는 거지. 항상 어떤 관계라는 게 엇갈릴 땐 그렇지 않나. 마음이 같은 속도로 가지 못하다 보니까 헤어지는 거지. 그리고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 명은 그 변화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한 명은 변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벌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지민이와 수강이는 과거에 어떤 연인이었다는 느낌보다는 가족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가 너무 좋지 않은 남동생과 누나처럼 정말 지긋지긋해서 가족이라고도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관계처럼 읽힌다면 좋겠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캐릭터들을 연출하는 사람이라면 그 심정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당사자 입장이 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을 것 같고.
내가 수강처럼 살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수강처럼 행동에 옮기거나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충분히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을 거다. 병희와 비슷하게 가까운 사람의 사고를 겪어보진 못했지만 어떤 의심의 단계라던가, 그 의심이 상상으로 변질되면서 어떤 덫에 스스로 빠지게 되는 듯한 경험은 있는 거 같다.
혹시 연애에 대한 큰 상처를 받아봤나? (웃음)
모든 연애는 항상 같은 양상으로 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연애라는 게 좀 비정상적인 거 같다. 외형적으론 너무나 흔한 스토리 중에 하나지만 감정이 개입되면서 되게 비정상적이고 파국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디가 결핍돼있는지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땐 민감해지거나 가장 여린 부분들이 외부로 노출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까 되게 작은 일도 큰 파국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경우까진 몰라도 적어도 한번씩은 느낄 거다.
병희는 폐쇄적인 남자다. 수강은 그 폐쇄성에 침입하는 여자다. 결국 병희는 침입을 당한 셈인데 결국 이를 통해 삶의 변화를 얻게 된다. 때때로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다가오는 우연적인 일들이 자신의 일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줄 때가 있다. 당신에게 있어서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가져다 준 부분은 없을까?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놓기만 하는 작업이라면 영화 자체도 흥미롭지 않을 거 같다. 이 영화를 찍기 이전에는 이해를 한다는 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머리로 이해를 하던, 가슴으로 이해를 하던, 이해를 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하고 나서 느껴지는 내 개인적인 변화는 이해한다기 보다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한 일이구나, 라는 변화를 겪게 됐다는 거다. 그리고 수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배운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마지막 꿈 장면을 찍기 위해 세트에 있다가 잠깐 촬영이 중단된 상태에서 혜정 씨와 그 장면에 대해서 이런저런 뜬금없는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수강은 사실 욕망을 가지고 가다가 어느 순간에 모든 욕심을 버려버리는 부분들이 있다. 수강을 통해서 오히려 그런 걸 배웠다. 욕망이 없어지는 거, 그러니까 욕심을 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약간은 배운 듯한 느낌은 들었다. 물론 또 다시 욕심부리게 되겠지만 욕심 없이 뭔가에 다가가는 것, 정말 원하는 게 있을 때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을까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됐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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