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명예를 축적한 남성의 어긋난 욕망이 하녀의 표독스런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 불길한 전조가 감돈다. 치부처럼 드러난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의 포로가 되어 불순한 관계의 늪을 허우적거린다. 자본주의가 걸음마를 시작할 1960년대 무렵을 배경으로 어느 중산층 가정의 파괴적인 몰락을 그려나가는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는 시대적 리얼리즘을 광기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독보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다. 자본의 유무가 권력의 우열로서 확장되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의 요람적인 징후는 <하녀>를 이루는 무시무시한 광기의 원천이자 소스나 다름없다. 하녀의 얼굴은 곧 시대의 숨은 욕망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육체를 담보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하녀의 욕망은 부유한 중산층의 빈곤한 정서와 밀착하고 질환적인 병폐에 가까운 욕망이 괴물처럼 자라나 삶을 집어삼킨다.
걸작을 리메이크한다는 발상은 사실 위험하다. 원작의 아우라에 눌려 빛을 잃는 경우가 태반이거나 원작의 성과에 매몰되어 제 빛을 내기조차 어렵다. 김기영의 <하녀>를 리메이크한다는 건 히치콕의 그것들을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일찍이 <싸이코>를 숏 바이 숏의 모작으로 재가공한 구스 반 산트의 그것이 증명했던 것처럼 애초에 원작의 형태를 고스란히 따라잡겠다는 야심 자체가 무리수에 가깝다. 새로운 시대의 <하녀>는 과거의 <하녀>와 조금 다른 판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지난 <하녀>에 출연했던 아역배우 안성기를 중년이 넘은 국민배우로 만든 50년의 세월이 두 작품 사이에 필연적인 간격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대적 공기의 변화가 반영될 때, 원작과 리메이크작에서 드러나는 차이가 묘한 이질감을 동반할 것임에도 틀림없다.
스크린의 입자 하나까지 시대적 공기를 채워넣는 임상수가 새로운 <하녀>의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1960년을 대체하는 2010년의 풍경은 새로운 시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위해 마련된 미장센의 의상이다. 주요 배경이 되는 2층 집의 풍경은 보다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로 채워졌고, 보다 젊은 세대로 구성된 인물들의 이름이 변한 것처럼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도 과거와 다른 생활 양식 안에서 인물의 관계 구도도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편된다. 보다 노골적인 물질주의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 세태에서 <하녀>는 보다 농밀하게 시대적 공기를 흡입하는 영화로 거듭날 가능성이 크다.
김기영의 <하녀>가 그러하듯이, 임상수의 <하녀>에서도 배우들의 역량은 절대적인 밑천이자 자질이다. 어쩌면 임상수의 <하녀>보다도 전도연의 <하녀>를 기대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비해 캐릭터의 연령층이 낮아졌다는 점도 관건이다. 최근 <파주>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서우가 아내로 등장하고, 욕망의 근거지이자 주둔지나 다름없는 남편 역의 이정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하는 늙은 하녀 역의 윤여정까지, 혈기와 관록이 뒤엉킨 캐스팅은 새로운 <하녀>에 짙은 의문을 새겨넣는다.
중요한 건 욕망이다. 임상수의 <하녀>와 김기영의 <하녀>가 서로 다른 시대적 텍스트를 품고 있음에도 하나의 본질로서 수렴될 수 있는 건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욕망 덕분일 것이다. 21세기에서도 인간은 욕망한다. 고로 <하녀>는 유효하다.
김수현vs 임상수
당초 <하녀>의 시나리오는 ‘드라마 히트 제조기’라 불리는 김수현 작가가 집필했다. 임상수는 김수현의 추천으로 <하녀>를 연출하게 됐다. 그러나 임상수의 손을 거친 시나리오를 되돌려 받은 김수현은 격분했다. 자신의 흔적이란 “초입의 한 장면 반토막과 나오는 사람들 이름 뿐”이라며 제작자에게 전화로 하차를 통보했다. 임상수의 사과가 담긴 이메일은 “용서할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축됐다. 크랭크인 전부터 두 작가의 대립이 <하녀>를 뜨겁게 달궜다.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
그 사내는 절박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걸어온 뒷길에는 좌절의 발자국들이 길게 늘어섰고, 온 몸은 실패로 얼룩졌으며, 인생은 누더기처럼 해진 지 오래다. 한때 축구선수로서 기대를 얻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실패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인생에 불과하다. 발 딛고 선 땅에서조차 밀려나듯 길을 떠나다 보니 다다른 곳은 끔찍한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가난한 영혼들의 땅, 동티모르. 인저리 타임밖에 남지 않은 듯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절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 복판에서, 회심의 만회골을 노린다.
5년 전, 김태균 감독은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동티모르를 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맨발로 공을 차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는 한국인 김신환 코치를 만났다. “이상했지만 마음이 끌렸다”는 김태균 감독은 주변의 지인을 모아 후원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동티모르 축구소년들의 히로시마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은 “제대로 된 운동장도 없이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울퉁불퉁한 땅에서 공을 차던”아이들이 직접 일군 ‘레알’드라마였다. 결성 1년 만에 6전 전승으로 우승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내막을 아는 김태균 감독은 이를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말한다. <맨발의 꿈>은 그 기적에서 시작됐다.
영화 제작 여건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동티모르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컨테이너 5박스 분량의 장비를 공수했다. 한국과 일본 대사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대사관 주소로 장비들을 실어 날랐다. 대사관에서 무대포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현지 소통도 문제였다. 제대로 된 통역사도 없이, 현지 스태프를 섭외하고, 배우 오디션까지 치러야 했다. 덕분에 김태균 감독은 현지 UN경찰로부터 아동 납치 의심까지 얻으며 조사를 당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열악한 제반 시설 문제도 만만찮았다. 제일 큰 난관은 현지인과의 정서적 괴리였다. “일을 하지 않는”현지인들의 느릿한 행동과 일처리는 급박한 촬영스케줄의 발목을 잡았다. 현지 한국인이나 대사관에서는 하나같이 “스케줄 안에 영화를 찍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을 더 줘서라도 한국식으로 일하게 만든”결과, 현지 스탭들도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한국인”이 다 됐고, 촬영 일정을 예정대로 마칠 수 있었다.
북한의 가학적인 체제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던 부자의 파국적 상봉을 그린 <크로싱>에 이어 또 다시 열악한 동티모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한국인 코치의 꿈을 다룬 <맨발의 꿈>은 실화가 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다만 절망적인 실화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싱>과 달리 <맨발의 꿈>은 희망적인 사연을 품었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돼?”영화 속 대사처럼 가난은 꿈을 움츠리게 만든다. 가난 아래 목 졸린 꿈 옆으로 용기와 믿음, 의지가 밟혀 눌린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룬 이들의 현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맨발의 꿈>은 그 현실을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꿈이 이뤄낸 현실의 드라마, 그리고 꿈은 여전히 희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피와 눈물의 땅, 동티모르
1999년 10월 20일, 동티모르의 독립은 5세기 만에 이뤄졌다. 16세기 포르투갈의 긴 점령과 철수 직후인 1975년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입으로 식민지 지배는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앞세운 끔찍한 학살로서 동티모르에 심각한 민족분열을 야기시켰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권교체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이 결정됐다. 피와 눈물의 땅은 비로소 새 역사를 살고 있다.
김태균 감독 인터뷰
<맨발의 꿈>도 <크로싱>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다.
그 사연들이 내게 감동을 주는 바가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다.
전작과 반대로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로 위안이 되지 않았나?
<크로싱>은 작은 부분이라도 해피엔딩을 해주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그래야 흥행될 것도 같고. (웃음) 하지만 양심상 못하겠더라. 힘들어도 그렇게 가야 했지. 그래서 이번엔 다행이고.
영화는 히로시마 대회에서 끝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그 아이들이 히로시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김신환 감독도 좌절했겠지. 하지만 우승 이후로 그 꿈이 계속 가고 있다. 그때 우승 주역들이 작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아시아 16강에 올랐다. 대단한 성적이지.
<맨발의 꿈>이란 제목은 아이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김신환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꿈꾸지 못했던 아이들과 꿈이 완전히 꺾인 사람이 만나서 같은 꿈을 향해 뛰어가는 이야기다. 꿈이 이뤄졌다기 보단 꿈을 진짜 꿀수 있게 된 거지.
김신환 감독이란 사람이 궁금하다.
언뜻 보면 사기꾼처럼 보인다. 원래 꿈꾸는 사람은 사기꾼이잖아.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워질 거라던 축구학교를 아직도 못 세웠거든.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3만 평의 땅을 받았지만 도내이션을 받지 못했다. 10억이 넘게 필요하다는데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의 좌절을 거듭했지만 이제 남을 일으켜 세워주는데 기쁨을 느낀 거다. 그리고 사실 아이들이 그 사람을 살게 해준 거지.
<맨발의 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진부하고 보편적일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주고 싶다. 이 세상에 꿈꿀 수 있는 게 너무도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 40대 아버지랑 아들이, 가족이 같이 봤으면 좋겠다. 요즘 다들 인생에 지쳐있잖아.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루 종일 노는 애들을 보면 우리 애들이 너무 불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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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복근의 ‘언니’들도, 앙증맞은 ‘쉪~’ 애교도, 심지어 ‘빵꾸똥꾸’의 우격다짐도 끝났다. 마치 TV 안이 텅 빈 것만 같다. 하지만 ‘장준혁’이 죽어도, ‘미실’이 죽어도,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꽃피는 춘삼월에 폭설이 계절을 역주행해도 드라마는 어김 없이 피고 진다.
조선 시대에서도 대세는 식스팩이었던가. 말 달리는 노비 언니들의 헐벗은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추노>, 도망 노비를 쫓는 노비들. 그러니까 노비 풀어서 노비 잡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체제 위에서 쫓기는 자가 아닌 쫓는 자가 된 노비들은 ‘짐승남’이 될지언정 진짜 짐승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화끈하게 부르짖고 한판 뒤엉켜 붙다가도 껄껄거리며 웃고, 엉엉거리며 울었다. <추노>는 <선덕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인 함수를 품었으나 신념과 이상의 고매함보다도, 삶과 밀착한 의리나 우정이라는 관계의 끈을 통해 미련하지만 우직하게 생의 너비를 채운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배신한다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와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려다 눈뜬 채로 죽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이 결연하게 손을 맞잡고 처연하게 현실과 맞설 때, 단단한 육체가 맞부딪혀 내는 땀의 결정이 모여 이루고자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브라운관 밖에서조차 절실히 꿈꾸게 만든다.
고운 소리, 맑은 소리 낸다는 모 피아노 건반이 무색할 정도로 간드러진 비음,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주창하던, 200년 묵은 홍삼보다도 마음이 묵을 만큼 묵어서 풀어지지 않는다는 솔로들의 마음까지 치즈처럼 녹여버린 그 한 마디, “쉪~.” 주방에서 연애질이 한창인 쉐프와 주방보조의 태업이 돋보이는 연애 드라마 <파스타>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한 번 즈음 꿈꿔봤거나, 지나쳤거나, 혹은 자신도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믿거나……(잠시 5분간 묵념), 어쨌건 판타지다. 불굴의 씩씩함과 천부적인 애교 유전자를 타고난 그녀를 통해 차가운 도시 남자가 그래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다는 가설을 온전히 입증해내는 인류적 낭비, 아니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보기 드문 연애질 드라마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후로 단골손님이 뜸했던 트렌디 드라마 매장에서 간만에 단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파스타>는 이승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사연일지라도 분명 신선하고 담백한 낭만이었다. 최소한 강남에서 뺨 맞고 이런 기분 처음 느낀다는 재벌2세의 사디스트적인 취향을 신데렐라 러브스토리로 진단하는 돌팔이 멜로가 판을 치는 드라마 세계에서 탈피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랑이야기였다. <추노>도, <파스타>도, 이제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져 간다. 이야기는 끝났고, 캐릭터의 삶은 가려졌으며, 공유하던 시간은 추억으로 묵어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연들은 그 빈자리의 주인으로서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동이>는 새로운 사극의 본좌 자리를 노린다. <대장금>과 <허준>, <이산>을 연출했던 이병훈 PD의 새로운 작품이기도 한 <동이>는 긴 호흡을 위한 첫 숨을 내쉬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 사극들이 초반 아역들의 열연으로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점만큼은 <동이>도 잘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김유정 양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내세우며 시작된 첫 회부터 곁눈질 학습효과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액션과 몰입을 훼방하듯 느슨한 스토리텔링은 가히 20세기적이다. 이 모든 게 <선덕여왕>과 <추노>때문일까. 시대는 변했고, 사극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트렌디한 창이 됐을 뿐이다. 한효주를 비롯한 주요 성인 배우들의 등장조차 이루지 못한 시점에서 가혹한 일침은 이른 처사다. 남은 앞길이 실크로드가 될지 골고타 언덕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파스타>의 공백에 시청률을 득템한 <부자의 탄생>과 <제중원>과의 본격적인 몸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한편 <추노>의 종방을 기다렸다는 듯 방송3사는 수목드라마를 새단장한다. <신데렐라 언니>는 문근영의 출연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 새로운 ‘국민여동생’들의 범람과 함께 더 이상 국민여동생이 문근영을 위한 절대명사로서 유효하다 말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문근영은 유효하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보다 성숙한 내면을 드러냈던 문근영은 처음으로 표독스러운 악역에 도전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로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선보인 서우가 배수의 진을 친다. 젊은 여배우들의 연기 대결은 관록 있는 대배우들의 그것과 한 차원 다른 경연적 흥미를 돋운다. <꽃보다 남자>로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의 차기작이자 <연애시대>이후 한동안 브라운관에 두문불출했던 손예진의 복귀작 <개인의 취향>이 출사표를 내민다. <아이리스>로 주목을 얻은 김소연이 카리스마를 내던지고 귀여운 여인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검사 프린세스>도 눈길을 끈다. 천하통일이냐, 천하삼분지계냐, 수목드라마 판도는 벌써 뜨겁다.
그녀가 쓰면 일단 본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인생은 아름다워>는 주말드라마에서 태풍의 눈이다. 한국적인 가족의 형태 안에서 시청자들이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도발을 매설하는 김수현의 스토리텔링은 시작부터 유효하다. 거실을 공유하고 제 방을 차지한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인력과 개인이라는 척력의 관계 속을 분주하게 드나들고 부딪히며 말을 걸고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한다. 무엇보다도 드라마 역사상 이처럼 멀쩡하고도 아름다운 ‘게이’ 청년이라니, 이건 배반, 배신, 아니 감동이야, 감동. 어쨌든 이것이 인권윤리위원회나, 열혈 야오이 팬덤을 배려한 팬서비스가 아닌 진짜 정공적인 문제제기란 점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또 한번 빛난다. 이미연의 복귀작 <거상 김만덕>은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고 있으나 그래서 김새는 작품이다. 여성 CEO 김만덕의 생애를 재조명한다느니, 새로운 리더상,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느니, 이런 건 청와대 정신교육용으로 배포될만한 비디오 자료에나 어울릴만한 문구잖아. 각설하고 김만덕이라는 실존인물의 도전적인 삶은 분명 미덕이며 이미연은 인물의 생에 적합한 설득력을 얹는다. 물론 진짜 다크호스는 따로 있다. 문광부에서 자신만만하게 내건 한국CG산업육성계획에 찬물을 끼얹다 못해 북극곰이라도 초빙해서 코카콜라 병뚜껑이라도 따다 줄만큼 무시무시한 CG완성도를 보여주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일명 <신불사>. 그러니까 온라인 상의 짤방 몇 컷만으로도 이미 전설은 아닌 레전드 반열에 오른 <신불사>는 요즘 시대에서 ‘병맛’이 얼마나 악마적인 트렌드인가를 보여주는 새로운 전형이다. 폭탄 터지면 부엽토쯤은 떨어뜨려줘야 하고, 서류뭉치는 가지런하게 떨어져야 레알임……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여하간 <신불사>는 악마의 유혹이다. 시청률 10%는 이미 병맛의 노예 지수를 의미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세경은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간은 멈췄다. 그렇게 <지붕 뚫고 하이킥>은 흑백의 찰나를 여운처럼 남긴 채 끝났다. 그 끝에서 시청자들은 경악했고, 슬퍼했다. 세경이 행복하길 바라던, 해피엔딩을 바라던 이들에게 그 결말은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 불행하기만 한 그 마지막 찰나가 세경에게도 불행이었을까.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순간, 너무 깊게 찔러 넣어 구겨질 것 같았던 한 마디의 진심을 비로소 꺼내 놓을 수 있었던 세경의 시간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대로 멈춰버렸다. 설사 그것이 끝이었다 해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해리는 ‘빵꾸똥꾸’조차 잊게 만드는 이별의 슬픔을 알았고, 준혁 학생은 날카로운 첫사랑과의 키스를 가슴에 묻은 채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드라마는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무덤 속으로 주검처럼 스러져 묻혀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넘을 수 없는, 진짜 삶으로 자라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슬퍼도 안녕. 그리고 다시 한번 반갑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