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보다도 끊기 힘든 게 ‘미드’ 정주행이다 무심코 누른 플레이 버튼 하나에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다.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솔깃한 떡밥이 던져진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다. 이건 물어야 하는 것이야! 그렇게 날을 샜다는 미드 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 바퀴는 넘을 게다. 사실 <브이> <맥가이버> <전격Z작전> <에어울프> 등과 같은 외화시리즈가 국내 TV시장을 주름잡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미드의 열풍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다만 과거와 달리 케이블 채널의 확대 등으로 리모컨을 쥔 시청자들의 선택권이 넓어졌고, 채널 고정을 보장하는 작품 수급에 심혈을 기울이는 채널 간의 작품 수혈 경쟁이 보다 흥미진진해졌다.
범죄물과 미스터리, 의학드라마 등 각양각색의 소재를 지닌 미드들은 저마다의 소재가 지닌 전형성과 특이성을 기반으로 장르적인 스펙트럼을 확대해낸다. <24>, <로스트>, <섹스 앤 더 시티> <그레이 아나토미>와 같은 작품들은 그 제목만으로 장르를 대변한다. 특히 <CSI 라스베가스>를 필두로 <CSI 마이애미> <CSI 뉴욕>까지, 3대 체인점 런칭에 성공한 <CSI>시리즈는 범죄수사물의 전형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뜀박질과 몸싸움으로 대변되던 블루 칼라 스타일의 역동적인 범죄수사에서 벗어나 과학적 접근과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서 인텔리적인 과학수사의 묘미를 제시하는 화이트 칼라 스타일의 범죄물을 완성했다. 무엇보다도 철저한 현장수사와 프로파일링을 동원해서 사건의 인과를 추적하고, 최첨단의 과학수사를 통해서 단서들이 전해주는 정황을 분석해나가는 과정은 지적인 욕구 충족과 함께 전문장르에 대한 신뢰감을 보장한다.
이런 전문성을 보장하는 임무는 그러한 사건 속을 움직이는 캐릭터에게도 주어진다.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은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코필드나 <하우스>의 하우스 등 미드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장르적인 특성을 대변하는 전시적 캐릭터다. 하지만 사적인 성격이나 취향을 지닌 캐릭터의 개성을 어필하고 이를 통해서 극적인 감정선을 보다 두텁게 이끌어내고 드라마의 변수를 만들어낸다. 성공한 작품에는 저마다 성공적인 캐릭터가 존재한다. <X파일>에 멀더와 스컬리가 있어야 하듯, <CSI>에는 길 그리섬 반장이, <24>에는 잭 바우어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스토리다. 크게 유턴하기 보단 조금씩 차선을 바꾸며 끝내 새로운 경로로 나아가는 차를 지켜보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법이다. 미묘한 흐름의 변화를 예감하게 만들면서도 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게 만들고, 다음 에피소드를 기다리게 만드는 건 미드의 필수적인 전략이다. 시즌제로 운영되는 미드는 1시즌, 심지어 본 작품에 들어가기 앞서서 방영되는 파일럿 시즌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작품의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꼽는 그 미드 작품들은 그런 치열한 검증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다. 10부작으로 계획됐다 해도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단 한 회만으로 사라진다. 장수하느냐, 비명횡사하느냐, 결국 완성도가 문제로다. 지나치게 냉정한 것 아니냐고? 회당 제작비가 백만 달러가 넘어가는 제작 여건을 염두에 둔다면, 낭비적인 작품의 싹을 잘라버리는 건 냉정한 합리에 가깝다. 동시에 이런 낭비를 좋은 작품의 질적 향상을 보장하는 투자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CSI>와 비교된 <싸인>이나 <스파르타쿠스>에 비교된 <추노>와 같이, 미드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아 긍정적인 결실을 이룬 한국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앞의 두 작품이 그 스타일의 장점을 흡수하며 독자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타일은 결국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다. 다양한 소재 발굴과 스토리 개발, 기술적 발전 등 종합적인 제작 여건이 뒷받침돼야 <CSI>도, <스파르타쿠스>도 나오는 법이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건 상상력의 주체들에 대한 생존 문제다. 작가 파업으로 방영이 중단돼도 그 권리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시청자들이 존재하는 사회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골방에서 굶어 죽는 작가가 존재하는 사회의 차이. 미드와 한국드라마의 차이는 어쩌면 바로 이런 근본적인 밑바닥의 생태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싸인>의 결말은 마치 <이끼>의 이장이 던지는 협박 같은 물음에 대한 숭고한 답변과 같다.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오만하지만 실로 살 떨릴 만한 물음 앞에 맞서고자 하는 어느 개인은 그 거대한 장벽 뒤에 가려진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 장벽을 깨부수고자 스스로의 생까지 내던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이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이끌어낼 만한, 숭고한 돌팔매질의 전례가 될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같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층이 얼기설기 얽힌 이 추악한 사태의 진면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대담하고 거대한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거대한 부조리를 조금씩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세상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인>을 남기길 포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