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
좋은 작품은 때로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뮤지컬에서 영화로 변주된 <오페라의 유령>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와 같은 작품은 너무도 유명하고 활자에서 영상으로 치환되는 유명 소설의 예는 방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비틀즈(Beatles)의 음악과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퀸(Queen)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은 뮤지컬 ‘We will rock you’처럼 그 영향력은 형태의 판이함조차 무난하게 극복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무대와 스크린, 음악과 연기,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반 조건은 컨텐츠의 육체를 입고 변형되는 소스의 기본 자질이다. 특히 오늘처럼 하이브리드와 크로스오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대에서 훌륭한 작품은 장르의 형식을 초월해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유명 뮤지컬 ‘맘마미아!’ 역시 훌륭한 컨텐츠의 변형 유통 생산과정을 거친 모범전례라 할만하다.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로 16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가 이제야 비로소 무대 공연이 아닌 스크린 상영의 단계로 옷을 갈아입었다. 게다가 2004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로 7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례가 있는 만큼 <맘마미아!>의 영화화 소식은 결코 국내 관객에게도 무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오래된 호텔을 경영하는 도나(메릴 스트립)의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버지로 추측되는 어머니의 옛 연인 세 명에게 결혼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 그들을 초대한다. 결국 중년의 세 남자가 섬을 방문함으로써 그들과 그녀들 사이에 묘한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맘마미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뮤지컬만큼이나 발랄한 넘버들로 채워진 유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리스 섬을 둘러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만큼이나 싱그러운 뮤지컬 넘버들이 유명세만큼이나 연기되고 노래되는 배우들의 목청으로 재탄생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역시 눈과 귀가 즐거운 호사임에도 틀림없다. 게다가 캐스팅 자체가 이 영화의 야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미 근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비롯한 과거 여러 작품에서 발군의 노래 실력을 뽐낸바 있는 메릴 스트립을 비롯해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줄리 월터스와 같은 배우들이 관록 있는 보컬을 선사하고 소피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이 청량한 화음을 더한다.
연출의 평이함은 이 뮤지컬의 유명세에 따른 기대감을 다소 중화시킨다. 넘치는 야심에 비해 특별함을 과시해야 할 몇몇 장면들이 지극히 안일해 보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현란한 율동을 영화적으로 재연해보고자 한 야심들은 스크린의 평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다소 비약적인 상황만을 제시할 뿐 정리되지 못한 산만함을 드러낸다. 평면적인 스크린에 무대의 입체적 양식을 구사하지 못하고 강요하는 꼴이다. 특히 급작스러운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초반부엔 극중 몰입이 쉽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배우의 개인적 동선이 군무로 확장될 때 종종 세련된 무대 매너가 연출되지 못하고 스크린을 채운 배우들의 수적 우위만이 확인된다.
그 모든 악재를 무시하고 싶은 건 끝내주는 뮤지컬 넘버들 덕분이다. 걸출한 배우들의 목소리로 레코딩된 사운드 트랙은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물건이다. 장면 연출에 대한 아쉬움이 상쇄되는 건 그 음악들이 발군의 엔터테인먼트적 충족감을 주는 덕분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은 가히 독보적이다. 물론 때때로 말괄량이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극히 일부의 상황을 배제한 대부분의 장면들은 장면의 평이함에 깊은 감흥을 불어넣는다. 특히 샘 카마이클(피어스 브로스넌)을 바라보며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는 후반부는 잊을 수 없는 관록의 깊이를 발산한다.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충만하게 뒤엉키던 초반부의 어지러움은 덕분에 후반부로 접어들며 안정을 찾는다.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좋은 노래들 덕분에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해도 사랑스러운 영화로 거듭난다. 특히 결말부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는 특별한(?) 공연은 흥겹다. <맘마미아!>는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처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해맑은 감격을 줄만한 영화다. 그리고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면 충분한 값어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