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때도 사람들은 모여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눈물 흘리거나 한숨을 내쉬고 추모의 발길이 모이는 광경에서 그때와 비슷한 기시감을 얻는다. 정적과 광풍처럼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을 관통한 두 사람의 엔딩 앞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형태가 전혀 다른 두 서사의 동일한 지점은 감정을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놈현 탓이다, 라고 비아냥거렸던 이들도 그 죽음 앞에서 엄숙함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노무현에 대한 비아냥이 지금 MB에게 보내는 욕지거리와 차원이 달랐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마음 놓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그만큼 관점의 여유가 생겼다. 애초에 인간적 그릇의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누구처럼 고개 돌리고 상종하기 싫은 위인은 아니었던 셈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당시 사람들은 어른의 죽음을 슬퍼했다. 점차 어른이 사라지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운 주검 앞에 몰려들어 눈물을 훔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자리는 무엇을 전하고 있나. 이 거대한 비통함의 행렬 속에서 기이한 기분을 느낀다. 현재 이 죽음으로부터 느껴지는 깊은 상실감은 그 죽음과 깊게 연관돼있다. 그 죽음 이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이란 인물에 대해 이토록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치부됐고, 힘없고 나약하게 조롱당하곤 했다. 하지만 죽음의 형태가 보여준 진심이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만약 이 죽음이 양심적 자살이 아닌 돌발적 사고, 혹은 자연적 사망이었다면 적절한 애도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어느 한 인간의 마지막 서사에 대중들의 마음이 동하고 있다. 극단적이지만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예술적 감동이 발생한다.
자신의 생을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이의 마음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그 마지막 진심을 추모하고 또 그리워한다. 그 마음이 만들어낸 빈자리를 보며 채워 넣을 수 없는 절망을 느낀다. 양심을 느끼는 인간이란 낯설다. 인간적으로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양심 따위가 중하다는 말이 낯설다. 노무현의 죽음은 마치 죽음으로서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양심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마냥 비참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비통함 역시 이런 감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죽음이 휘저어 놓은 자신의 마음에서 떠오르는 부조리를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게 만든다. 명예라는 언어의 숭고함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명확하게 부활한다.
스펙이 인간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준이 되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갈증을 느낀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갈된 인정을 감지한다. 인간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성공과 성취가 소유욕을 대변하는 시대에서 사람의 마음이란 갈 곳이 없다. 그런 시대에서 감수성에 예민한 사람이란 아슬아슬하다. 전직 대통령 시절부터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고 했지만 실상 그 품위 없음이 권위적 길들임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있다는 것에 통쾌를 느끼지 않았을까. 놈현스럽다, 라는 막말에 담긴 비아냥은 애증과 같았다. 쥐새끼라고 멸시당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놀림이다. 물론 이 죽음을 통해 분노를 확보하진 말자. 지금은 위로를 전할 때다. 너와 나의 마음 사이의 허물어진 간격을 살피고,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볼 때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다만 사람답게 사는 방식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서로를 안고 쓸어 내려야 한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담기 전에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시간을 품자.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으로 기억되거나. 죽은 영웅을 추모하는 우리는 결국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니 악당은 되지 말자. 사람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애도하라. 그게 사람이 사는 방식으므로. 산 사람은 살아서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