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도 알고 난 자리도 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없어졌고, 없어야 할 것이 굴러다녔다. ‘내 집’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 결혼 후 ‘우리 집’이 생기면서 벌어졌다.
“사람을 갑자기 바꾸려고 그러면 안돼. 그냥 서로 맞춰서 살아야지.” 장모님께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내는 종종 ‘조커’ 같았다. 집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어지럽혔다. 여기가 신혼집인지 고담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 무찔러야, 아니,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확립해야만 한다. 복면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언어를 던져야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가방은 제발 식탁 의자에 던져두지 말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가방은 주문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식탁 의자에서 발견됐다. 종종 쇼파에서도 목격됐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이라도 읊는 마음으로 그 무질서를 견뎠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내로 업데이트 되기 전, 그러니까 여자친구 버전이었던 당시에 그녀가 혼자 살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 사실 낯익은 그림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라는 단어와 멱살이라도 잡은 양 생활하는 누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여자와 정리라는 단어는 강남구와 캘리포니아주처럼 요원한 관계임을 암기해 왔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한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간혹 청소와 정리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보자.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며 정리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이다. 그러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지갑이나 옷 따위를 치우고 나서 우리가 ‘바닥을 깨끗하게 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간단히 정의해서 날 잡고 하는 게 청소라면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해야 하는 게 정리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밑줄 쫙. 청소를 하겠다고 정리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냥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씀. 청소를 위한 정리란 말 그대로 청소 직전의 일상적인 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어질러진 것을 치운다거나 청소기 헤드에 걸릴만한 것들을 임시적으로 옮기는 하등의 행위일 뿐이지 약속된 위치에 두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온전히 정리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청소는 주기적인 노동일 뿐이지 일상적인 습관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선 청소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깔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좀처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선 청소도 힘드니까, 결국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고.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을 구별하고 위치가 얼마나 자주 바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 뒤 물건의 용도와 어울리는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방에 국자를 두지 않고, 부엌에 옷걸이를 걸지 않는 이치랄까. 물론 이처럼 명확한 경우엔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공간의 특성에 딱 떨어지지 않는 물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집마다의 구조적인 특성에 기반한 노하우도 요구된다.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 그건 어디 있는 거지?’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약속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생기는 혼선에 익숙하다면 정리를 못하는, 어쩌면 안 하는 쪽인 셈이다. 아내를 비롯해서 몇몇 여자들이 가끔 핸드백이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작은 가방에도 작게나마 별도의 주머니가 있는데 굳이 그 핸드백 안의 잡동사니들 속으로 핸드폰을 묻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곤 매번 겨우내 핸드폰을 발굴한다. 그때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긴장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실제로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건지 모르고 뒤늦게 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정리란 물건의 공간을 확정 짓는 동시에 공간의 용도를 명확히 가져가는 일이다. 단지 집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리가 필요한 건 비단 ‘집 구석’만은 아니니까.
원래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방의 면적엔 한계가 있었고 넘치는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만한 공간의 견적을 파악해서 채워 넣는데 이골이 났다. 문제는 그런 덕분인지 빈 공간에서 어떤 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신혼집을 방문한 몇몇 지인은 말했다. “신혼집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정도 살아온 집 같은데?” 그러니까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내보단 내 욕심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집정리의 윤곽이 잡혀가던 3일 간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주도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야 할 가구가 생기면 으레 자리를 지정하는 건 아내보단 나다.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주로 내 몫이 됐다.
아무래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듯이 더 많이 정리하는 쪽도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빨래가 마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쪽이 전전긍긍하다가 빨래를 걷게 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이고, 청소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살짝 억울해지는 순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정리 페티쉬라도 있는 것마냥 정돈된 이미지로부터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피곤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길 설득하며 실태를 확인하는 쪽이 자연스레 더욱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딱히 정리에 신경 쓰지 않는 아내가 편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아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식탁 의자나 쇼파에서 아내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집 안을 떠돌아다니던 물건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물건의 가짓수가 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무장해제되는 순간도 생기는데 ‘포기하면 편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나 할까. 노력하는 속도가 빠를지, 포기하는 속도가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애초에 정리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발만 맞춰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국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머슴처럼 살고 있다는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응?)
그저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5년을 함께 하니 알겠다. 그저 나만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집안의 풍경도, 삶의 태도도, 우리 강아지 하늘이로 인해서.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하는 목소리가.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마치 애한테 말을 걸 듯 오냐, 오냐, 하셨다.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 강아지였으니까. 원래 어머니께선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려동물을 집에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강아지와 어느 순간부터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건 2008년 2월 즈음이었다. 생후 3개월 된 말티스가 집에 온 건 정확히 2월 12일이었고. 누나가 어머니께 잠깐 집에 데려다 놓을 거라 말했던 것도 어느덧 5년을 넘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아지 키워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름은 하늘이다. 뭔가 좀 더 시크하거나 세련된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 불린 이름이 하늘이라 해서 그냥 동일한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요즘 집에서 강아지 키우는 게 한두 집도 아닌데 별일이냐고 묻는다면 나에겐 별일 맞다. 나이 서른에 다다라서야 반려동물을 집안에 들인다는 건 때때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처음엔 대부분 우여곡절이었다. 강아지는 좌변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럴 수가 없지. 그러니 녀석의 뒤처리(?)를 직접 ‘핸드 메이드(?)’로 해줘야 한다는 건 대단한 도전이었다. 길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화장실이 가까운 마루 한 부근을 하늘이의 화장실로 내줬다. 하지만 침대 이불에서 하늘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부아가 치밀어서 도끼눈이 된 내 시선을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표정 덕분에 사리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일단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자면 그 흔적을 치우기 전에 강아지를 그 흔적이 보이는 곳 앞에 데려다 두고 가리키면서 신문지를 말아서 바닥을 치면서 혼내던가, 가끔 코를 때리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상태라면 역효과만 생길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발견하는 것도 관건이라 했다.
차츰차츰 하늘이의 흔적을 치우는 게 익숙해질 즈음, 하늘이도 자신이 가려야 할 자리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알아듣는 말이 늘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께선 갑자기 불러선 ‘이것 좀 보라’고 하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앉아!’ 하니 앉았다. ‘손!’하니 손을 내밀었다. 이 기분은 뭐랄까. 자식을 얻은 친구 중에 어느 날 어린 아기가 갑자기 몸을 발라당 뒤집으니까 기분도 갑자기 발라당 뒤집어지듯 미친 것마냥 좋아졌다는데, 이런 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뒤, 어머니는 하늘이의 새로운 능력을 다시 개발해주셨다. 손가락을 가리키며 ‘빵야!’하는 순간, 등을 대고 발라당 누워서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돌아!’하면 제 자리에서 뱅글 돌고, ‘굴러!’하면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을 보니 잠시 군대에서 유격 훈련 받던 기억이 나서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대단히 기막힌 기분이었다. 비결은 그저 손에 들고 있는 간식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점점 머리를 굴려서 간식을 들고 있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무슨 짓을 해도 딴청을 피웠다. 문득 기억이 났다. 수의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이가 똑똑한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사실 하늘이는 처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컸을 무렵, 심장의 판막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해서 혈액순환에 문제가 있을 거란 진단을 받았고,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견해까지 들었다. 혈액 순환을 방해할 수 있는 육류 음식의 섭취는 제한하고, 최대한 뛰지 못하게 하라는 말도 들었다. 전자는 충실히 지키고 있지만 후자까지 막긴 어렵다. 사실 산책을 주기적으로 자주 시켜주는 형편은 못 되는데 하늘이는 집 안에서 기분만 좋으면 장난을 걸고 털이 휘날리게 뛰어다닌다. 처음엔 뛸 때마다 놀라서 막았지만 이젠 5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가끔씩은 설마 오진은 아니겠지,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다. 한번은 대수술을 감행한 적이 있다. 명절에 이쑤시개에 꽂힌 전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을 하늘이가 보고 대번에 삼켜버린 적이 있었다. 이쑤시개가 가로로 걸려서 위에 천공이 생겼고, 낑낑대는 녀석을 안고 병원에 가서 개복수술을 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하늘이를 보러 위문을 갈 때마다 측은하게 낑낑거리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추후에 '0'이 무려 6개(!)가 붙은 수술비 및 입원비를 결제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보험 적용도 안 되는 반려동물 병원비에 부가세까지 붙이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라니까.
마루 한 구석에 화장실이 생겼다던가, 언젠가 관절염에 걸릴까봐 점프를 하지 않도록 계단 형태의 스텝을 침대 곁에 뒀다던가, 하늘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집안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던가, 방 한 쪽에 있는 하늘이 물통을 수시로 살핀다던가, 화장실 문을 꼭 닫아둔다던가, 눈에 띄는 집안 풍경의 변화란 이처럼 소소하다. 하지만 집에 들어갈 때 나를 맞이하는 이가 없지 않다는 안도감이라던가, 집안에서 말을 걸 상대가 하나 늘었다던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던가, 작은 인형 같은 걸 보면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던가, 말 그대로 일상적인 사고가 변했다. 저 밖의 현관 대문 앞에 서기만 해도 녀석은 놀랍게 알아보고 짖어댄다. 유독 나에게 그렇다. 강아지 좀 키워본 지인은 반갑다는 표시일 거라 했다. 하긴 꼬리를 흔들어대더라니.
하늘이가 집에 오기 전까진 몰랐던 것들이 있었다. 단지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 즉 내가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 단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있어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하늘이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몹쓸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하늘이는 나보다 먼저 늙고, 먼저 눈을 감을 거다.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처음엔 한 손 위에 올려놓아도 됐던 하늘이는 이제 양손으로 들면 제법 무게가 느껴진다. 그 선물 같은 무게를 느끼지 못할 때가 올까봐 조금 두렵다. 그러니까 일찍 가지 말고 오래 살아줘. 지금처럼 동그란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목욕할 때 말 안 들어도 구박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이쑤시개 같은 건 다시 삼키지 않는 걸로. 다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무려 '0'이 6개라서가 아니라니까.
조용하듯 분주하게, 에디터들은 각자의 취향으로 세상을 감별한다. 그렇게 수집된 정보가 모여 매월마다 한 권의 <엘르>로 전파된다.
바야흐로 마감이다. 가을바람이 신선하게 불어오는 이 계절의 주말 한낮에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렷다. 어젯밤 ‘불금’을 보내자고 카톡을 날렸던 친구는 ‘마감’이라고 답하니 ‘달거리 할때구나’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순간 자웅동체라도 되어 에이리언 같은 새끼를 낳아서 놈에게 퀵 배송이라도 보내줘야겠단 상상을 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사무실은 조용하게 분주하다. 컬렉션 기간이 시작되면서 해외 출장을 떠난 몇몇 패션 에디터들의 빈자리가 눈에 띄는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마감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키보드 치는 소리가 거진 들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지금 키보드를 바삐 두들기는 내가 정상적인 마감의 중력에서 이탈하여 비정상적인 궤도 위에서 떠도는 것을 직감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정신차리고, 다시 원고의 경로를 재탐색하자.
여자가 8할인 <엘르> 사무실 책상 하나에 입주한 것도 어느덧 반 년이 지나는 중이다. 제대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축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여하간 벌써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관련 업체 종사자나 이 업계에 어느 정도 이해도를 지닌 이들이 아닌 ‘아주 보통의 사람들’은 내가 <엘르>를 만든다 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응?’ 혹은 ‘와!’ 전자는 수컷이고 후자는 여자다. 내 절친한 친구 놈은 진지한 얼굴로 창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네가 한다는 ‘퓨처’ 에디터가 뭐야?” 잠시 네 놈의 인생을 편집해 주는 직업을 어떨까 생각했다. 한 여성 동지께서 물어보셨다. “<엘르>면 패션지니까, 직원 분들도 다 패셔너블하시겠어요.” “음, 그건요. 일단 제 꼴을 좀 보고 말씀하세요. 하하하.” “호호호.” “…” 그래, 뭐, 나는 퓨처 에디터니까.
며칠 전, 동료 선후배 에디터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서 잠시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다양한 화두 중에 최근 장안의 화제인 <개그콘서트>의 새로운 코너에 등장한다는 ‘꽃거지’로 대화가 흥했다. 한 패션 팀 선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니 후배가 스마트하게 아이폰으로 동영상을 검색했다. 역시, 이런 아이폰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영상을 보던 선배는 웃음을 터트리는 대신 감탄했다. “와, 옷 되게 잘 입혔다. 레이어드 너무 잘했는데.”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저거 에세이 떡밥인데?’ 어쨌든 이건 ‘일상의 재발견’ 아닌가. 꽃거지에게도 룩이 존재함을 재발견하는,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패션 에디터만의 멘트. 관심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도 달라지는 법이라더니, 패션 에디터는 꽃거지에게서도 레이어드 룩을 발췌한다.
물론 앞선 문장의 의미 중 절반은 농담이고, 절반은 진담이다. 패션지의 에디터들, 패션, 피처, 뷰티 에디터들이 먹고 사는 방식이란 그들이 지닌 취향을 밑천으로 삼아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이란 말이다. 고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는 생각 이상으로 즐거울 수도, 고될 수도 있는 일이다. 취미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을 좀 더 명확하게 아는 것도 중요하고, 타인의 취향을 좀 더 폭넓게 수집하고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취향도, 성격도, 일하는 방식도, 심지어 저마다의 책상 풍경도 다르다. 중요한 건 이렇게 서로 다른 개개인이 모여서 한 권의 잡지를 매달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한 권의 잡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부단하고 지난한 노력들을 상세히 읊을 순 없겠지만 그 잡지가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서 에디터들은 결국 저마다 하나의 요소가 되어 한 권의 잡지에 저마다 녹아 들어간다. 마감 사무실의 풍경이란 결국 매달 제작되는 한 권의 책으로 기록되고 보존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 한 권의 <엘르>를 만들고 있는 이 사무실 안의 에디터들이란 저마다 특별한 취향을 섭렵해서 감별하고 전파하는, 아주 보통의 에디터들이란 말이다. 마감은 여전히 끝나가는 중이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퓨처’ 에디터가 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