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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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소금> 단평

cinemania 2011. 8. 23. 19:21

콘트라스트를 극명하게 높인 뮤비 질감의 영상. <푸른 소금>의 이미지는 모 카메라 광고만큼이나 쨍하다. 그만큼 단편적인 감상이 강렬해지는데 이는 유연하게 이어지기 보단 조각나듯 나열된 시퀀스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하다. 마치 두 편의 다른 영화를 찍고 나서 어영부영 자르고 붙여서 한 편의 영화라고 우기는 것만 같다. 특별하다 말할 수 없으나 중심인물의 관계적 긴장과 이완의 흐름이 흥미를 당기는 측면은 분명 존재한다. 허나 감정의 전환이 성급하다 못해서 따로 노는 것마냥 신과 신 사이의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적절하지 못한 문어체 대사들이 어색함을 남발하는 사이, 배우들도 어찌할 수 없는 캐릭터의 무능력이 영화를 루즈하게 깎아먹는다. 무엇보다도 낭비에 가까운 시퀀스들이 너무 잦게 눈에 띈다. 좀처럼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감정선이 깨알 같은 PPL적 이미지 속을 공허하게 유영하는 것만 같은긴 종합 CF 필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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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발> 단평

cinemania 2010. 11. 9. 19:14

(어쩌면 마케팅 때문에) 단순히 웃겨주는 섹스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다소 뜨악할 수도 있겠다. 이해영 감독의 <페스티발>은 자신의 전작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와 커다란 접점을 지닌,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연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페스티발>에 등장하는 세 커플과 7인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취향이 다른 성적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계적 소통의 불편을 느낀다. 옴니버스 구조의 캐릭터들이 이루는 야릇한 사연들은 영화를 버라이어티하게 확장하며 내러티브의 진전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동시에 대사와 행위를 통한 웃음을 드물지 않게 포진시켜나간다. 하지만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표방될 만한 <페스티발>의 메시지가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안에서 포용되지 못하는 느낌인 동시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네 갈래의 사연을 갈무리하는 방식에서도 탁월한 합의점을 발견할 수 없다. 웃겨주는 캐릭터가 존재하는 건 맞지만, 웃겨주는 이야기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축제 분위기는 요란한데, 들뜨는 기분이 멈칫거린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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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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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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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신문물과 구시대적 풍습이 공존하는 일제 치하의 경성은 분명 흥미를 끌만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시대다. <그림자 살인>은 그 과도기적 시대상을 무국적의 그릇으로 활용한다. 친일 세도가들이 득세하고, 이를 비호하며 밥그릇을 유지하는 관료들이 자리잡은 암울한 시대상 한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민초들의 활력이 거리를 지배한다. 요즘 세상 의리 없이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만시경을 들고 바람난 유부녀의 불륜 현장을 추적해 얻은 사진과 기사를 신문사에 팔아 넘기는 진호(황정민) 역시 앞선 대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과 무관하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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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전례가 있음에도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변화와 정체가 혼재된 과도기의 이미지는 시대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희석시키며 장르적 발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그릇임에 틀림없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을 자신만만하게 내건 <그림자 살인>은 살인의 배후를 쫓는 전형적인 후더닛 구조의 미스터리로 시작된다.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의 구조가 미숙하다.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까지 동원하며 너비를 벌리지만 수집된 양식을 펼쳐 보이기 급급할 뿐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동시에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면 정답을 유출시키는 이야기는 영민한 편이 아니다.

 

이야기보다도 캐릭터가 눈에 띈다. 그러나 캐릭터들도 장르적 매력에 기인하는 건 아니다. 배우들의 표현력은 나쁘지 않다. 캐릭터 설정의 문제다. 애초에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다. 사건에 개입되는 당위부터 확실치 않은 캐릭터들은 역할에 대한 설득력을 명확하게 차려 입지 못한다. 추리물을 표방했지만 야심은 다른 쪽에 걸쳐 있다.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을 마다하지 않으며 직업 윤리와 고위층의 도덕적 해이마저 도발하는 후반부는 전반부와 분위기가 판이하다. 말미에 다다라서 반복되는 클라이맥스는 도돌이표처럼 권태롭기도 하다. 어쩌면 동일한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이미지야말로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이미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르와 역사 의식이라는 이중주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처럼 보인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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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조합된 결과물이 하나같이 과도기적인 형태로 혼재된 채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는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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