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건 본능이다. 누구나 미를 탐한다. 그래서 수술한다. 코를 높이고, 턱을 깎고, 눈을 키운다. 설마 그랬다고 고개를 숙이지는 마라. 당신에겐 죄가 없다. 죄인은 따로 있다.
강남의 한 지하철역 출구는 인생 역전했다는 남녀들의 자랑으로 도배돼 있다. 그중 한 여성은 성형수술 후, 결혼했단다. 그 옆에 나열된 남성은 프러포즈를 했단다. 국가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시대에 성형외과가 국익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만한 경사가 또 있을까. 게다가 한 남성은 취업까지 했단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 청년 실업자들을 성형외과가 구한다. 그 놀라운 행적의 주체라며 패기 넘치는 광고를 집행한 건 바로 인근에 16층 빌딩을 독점한 어느 성형외과였다. 얼굴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 할렐루야!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광고의 기본적인 목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성공이다. 그 출구를 오르내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고를 쳐다보고 일행과 수군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손가락질하고 수군대며 깔깔대는 모습이 그리 통쾌하진 않았다. 만약 그 성형 광고 모델이 김태희 같았다면 그녀들은 마냥 그렇게 손가락질할 수 있었을까. 성형이 누군가의 인생을 얼마나 탈바꿈시키는지 몰라도, 이 풍경은 분명 어딘가 놀랍다.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욕망이 지하철역 벽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욕망의 주체들과 마주본다. 외모도 이젠 하나의 스펙이 됐음을 부정하지 않는 패기 넘치는 카피가 되레 신선했다. 문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출구를 통과해 성형외과의 문턱을 넘었을지 출구조사라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강남의 특정 지역을 배회하면 가끔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여성들과 마주치기 십상이다. 마스크로 채 가려지지 못한 얼굴 외곽까지도 시퍼렇게 부어 올라 통증을 상기시킨다. 살이 찢기고 뼈가 깎이는 고통이 전이된다. 무섭다. 그네들의 그런 외형이 무서운 게 아니다. 그만한 통증을 감내하고서라도 사고 싶은 인생이 있다는 건 그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뒤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기회라면 추구해야 마땅한 현실인 거다.
송나라 시대부터 중국에서 미의 기준은 기이하게도 작은 발이었다. 그냥 작은 발이 아니라 작게 만든 발이었다. 당시 중국 여아들은 네다섯 살 무렵이면 네 발가락이 발바닥에 밀착될 정도로 발을 뒤틀어 천으로 동여맸다. 딸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록 어머니는 발을 더욱 세게 조였다, 작은 발을 가지면 시댁의 가문이 달라졌으니까. 가장 이상적인 발의 크기는 9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풍습은 1000년 동안 이어졌다. 이른바 전족이다. 전족을 하면 걷기가 불편했기에 집안일을 하지 않고 부축할 하인이 있는 상류층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지만 서민층도 이를 따라 했다. 두 발로 설 수 없어서 무릎으로 기면서도 아름다운 발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4년 서태후가 전족 금지령을 내린 뒤에도 이런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족을 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선호는 여전했고, 여성들 또한 쉽게 발을 풀어놓지 못했다.
미의 가치나 기준은 시대별로 지역별로 달랐다. 다만 추구하는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중국에서 성행한 전족과 같은 사례는 더러 발견된다. 이디오피아의 수르마족은 여전히 성년이 된 소녀의 입술을 찢어서 쟁반을 끼우는 의식을 치른다. 나이가 들수록 쟁반의 크기는 커진다. 이는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복종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입술에 끼운 쟁반의 크기가 클수록 혼인할 남성이 지불하는 지참금의 액수가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여인들이 코르셋을 입고 허리를 옥죈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적 수준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행해지는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혼인을 앞둔 여성들은 남성적 권위가 강했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통용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하며 더 나은 혼인 조건을 충족하고자 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당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성형은 사회가 가리키는 미적 기준에 충족하고자 신체의 손상을 감수한다는 점에선 중국의 ‘전족’이나 이디오피아의 ‘쟁반 입술’과 유사한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형이 전족이나 쟁반 입술과 구별될 수밖에 없는 건 온전히 당사자가 선택한 결과라는 데 있다. 전족이나 쟁반 입술은 커뮤니티의 강압을 통해서 이뤄지는 완벽한 폭력이다. 그저 감당해 내야만 하는 일종의 재앙이다. 하지만 성형은 선택이다. 부모로부터 발을 동여매어지거나 성년이 돼 입술이 찢긴 채로 쟁반이 끼워지는 것과는 엄격한 격차가 있다. 그만큼 선택에 대한 결과적 책임도 온전히 본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과연 성형이 온전히 개인의 선택을 통한 결과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
여자든, 남자든,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고 동경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꿀벌도 자신의 관점에서 예쁜 꽃의 꿀을 빨아들이는 법이니까. 그런 미적 추구의 방편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타인이 나서서 손가락질할 권리는 없다. 다만 그런 욕망이 마치 누구나 그래야만 할 것처럼 부추기고 전파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몇 케이블 채널에선 시청자에게 성형수술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다. 평소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이들에게 성형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치유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이 방송의 모토다. 확실히 성형수술을 받은 여성은 달라 보였다. 단지 외모가 변해서가 아니다. 표정에서 발산되는 생기가 그랬다. 긍정적인 결과다. 단편적인 결과만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외모 때문에 주눅들어 살던 여성이 성형수술 후 스튜디오 무대로 당당하게 걸어 나와 카메라를 응시하는 광경은 강남의 한 지하철역 출구에서 목격한 광고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형이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할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이 TV를 통해서 전파된다. 당신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을 갖추고 당신의 가치를 높이라고 속삭인다. 엄연히 말해서 이건 조장이다. 어느 개인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던 일들이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고 전시될 때 그 목적은 뚜렷해진다. 개인에겐 자기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대부분의 성형 프로그램들은 그 권리에 기생해서 왜곡된 가치를 송출한다. 규격화된 미의 기준을 전시하고, 그런 삶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할 거라고 무의식을 지배한다.
성형외과(Plastic Surgery)의 영어식 표기는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플라스틱코스(Plastikos)’에서 유래됐다. 본래의 타고난 인상에 ‘형태를 만든다’는 건 결국 가공의 의미에 가깝다. 타고난 신체를 원석 삼아 새로운 외모를 가공해내는 것이다. 성형외과를 찾은 이들은 다이아몬드로 거듭나길 희망한다. 그리고 성형외과는, 그 이전에 이 사회는 대학졸업장과 외국어 실력만큼이나 코의 높이와 턱의 형태가 당신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 부추긴다. ‘단지 예뻐지고 싶어서’라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예뻐져야 한다’는 강박을 일으킨다. 성형수술도, 성형 미인도 죄가 없다. 당신의 삶이 개력될 것처럼 광고하고 방조하는 성형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죄라면 죄일지도 모르겠지만.
폐쇄적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신분을 초월하는 수단이자 때때로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기도 했다.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의 외모는 유효한 재능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성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은 유효한 수단이다. 다만 선천적 한계가 그 가능성을 좌우하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엔 후천적 선택에 따라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많다.
과거의 여성보다 현대의 여성이 보다 큰 미적 욕망을 품을 수 있는 것도 그 가능성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접근 가능성에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외모란 물려받지 못하면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와 성형이 지배하는 현대의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외모란 특수한 재능의 영역에서 점차 필수적 덕목의 수준으로 이해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가학원>은 그런 세태를 반영하는 영화다. 최고의 쇼호스트였던 효정(유진)이 미스코리아 출신의 후배에게 밀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자신의 위치에 위기감을 느끼다 외모적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과정은 특수한 직장의 분위기를 담보로 연출된 보편적 이미지에 가깝다. 동시에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요가학원에 참여하게 되는 효정을 비롯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외모에서 비롯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요가학원>의 설정에 일면 그럴 듯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관계의 설득력에 있다.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여성들의 관계는 권력적 욕망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으며 질환적 수준의 광기를 표출한다는 점에서도 시대적 증후를 표면적으로 노출한다. 요가학원이라는 집단의 형태 자체가 시대적 광기를 표출하는 공포의 근본 지점이나 다름없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그녀들의 선택은 부질 없는 집착을 넘어서 필연적 본능에 가까운 절박에 가까운 요구량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증후를 장르적 공포로 치환한다는 아이디어는 분명 쓸만하다. 하지만 <요가학원>은 명확하게 그 아이디어 이상의 결과물에 도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영화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로 같은 공간과 우아함과 불길함을 동반한 미장센이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본질적 의도는 철저하게 망각된다. 지극히 예상범위를 맴도는 자극적 영상이 권태롭게 전시되고, 평면적인 사연을 담아내기 위한 캐릭터들이 덧없이 나열되다 차례로 퇴장한다. 그 가운데서 무기력하게 낭독되는 일차원적인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지 못한 채 귓가를 맴돈다.
입체적인 이야기 구조로 건축되지 못한 사연들은 손쉽게 와해되며 확실한 방점을 찍지 못하고 뜸만 들이는 장르적 분위기는 결말에 다다라 차갑게 식어버린다. 어느 지점에서도 방점을 찍지 못한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력도, 흥미를 유발할 만한 장르적 성취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보상받을 길이 막막한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만이 안쓰럽게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