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두 타고, 굿판을 벌이며 온몸으로 귀기를 발산하던 전통무속과 달리 요즘 점집은 캐주얼하고 멀티플렉스적이다. 무당과 타로 마스터가 한 건물에 입주해서 팀웍을 이룬다. <청담보살>은 그런 트렌드를 소재적으로 반영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운명적 배필을 만나야만 삶이 풀린다고 믿는 미녀보살 태랑(박예진)은 비전이 전무해 보이는 백수 승원(임창정)이 자신의 운명적 상대임을 알게 되고 작업(?)에 착수한다. 사실상 과장된 상황극이 주를 이루는 <청담보살>은 연출력이나 개연성보다도 순발력에 의존하는 코미디다. 덕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멜로적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감정은 좀처럼 와 닿지 않으며 전반적인 사연 역시 유치하게 건들거리는 탓에 로맨스 자체가 사족같다. 재치를 발휘하는 배우들의 애드립에 의해 유머가 작동하지만 그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운명적인 상대에 천착하던 보살이 결국 그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게 된다는 외피적 설정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후반부는 온전히 넌센스다. 단지 몇몇 배우들의 애드립에 만족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관객에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은 좀 길어 보인다.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한 채 감춰진 과거를 찾아 서울공항에 내려선 메이(성유리)는 길가에서 차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은 택시기사 은설(장혁)에게 손을 붙잡힌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은설의 손을 뿌리치려던 메이는 은설이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누군지 알 길이 없는 택시기사 은설은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를 ‘민히제스틴 증후군’이란 보기 드문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죽음과 직면하듯 살아가는 남자와 본의 아니게 상실한 과거를 되찾고픈 여자, 기구한 현실에 놓인 남녀는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핸들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의 간절한 표정이 의문을 자아낸다. <토끼와 리저드>는 결말부의 한 조각을 떼어내 전진배치하고 이를 통해 유효해진 물음표의 정답을 찾아가는 멜로적 여정이다. 형태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토끼와 리저드>란 제목은 두 남녀의 트라우마와 연관된 두 마리의 동물을 나열한 것이다. 유년시절 기억에 남겨진 ‘빨간 토끼’를 찾아달라는 은설이나 어깨 뒤에 ‘도마뱀(lizard)’모양의 긴 흉터를 지닌 메이에겐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두 남녀의 트라우마에 얽힌 운명론적 인연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그 상처마저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숨겨놓은 서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지속적인 극적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 뒤 필연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남녀의 인연은 결국 운명적 관계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정체된 듯 미약하게 진전되는 남녀의 관계가 망각된 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는 <토끼와 리저드>가 다다르고자 하는 성취적 결과나 다름없다. <토끼와 리저드>의 관건은 사연의 핵심이 드러날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암시적 상황을 제시하며 극적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끼와 리저드>는 답보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설득시키는데 미숙한 멜로다. 영화는 온전히 캐릭터의 행위나 태도만으로 그 순간의 감정을 곧잘 묘사할 뿐, 캐릭터의 감정에 조언적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제시하거나 연출적 뒷받침을 가미하지 못한 채 온전히 캐릭터가 자아내는 순간의 감정들을 방치하고 휘발시켜버린다. 사실 <토끼와 리저드>는 극적 의문을 해결할만한 결정적 서사를 감춰두고 서사적 진전과 함께 공개되는 기억의 너비를 늘려나가고 이를 통해 결말부에 등장할 결정적 순간의 목도까지 기다릴 관객의 인내심을 확보해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대단한 감흥을 부를 만큼 인상적인 사건을 전개하지 못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단순히 두 인물간의 감정적 마찰만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나가려는 듯 단조롭고 심심한 영화다.
자연광을 적극 활용한 투명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화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종종 희미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이란 수사는 무색하고 사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며 감정은 얕아서 마음을 담기 어렵다. 제목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영화에서 두 남녀 배우는 적절히 제 몫을 다 한다. 다만 두 배우의 기능적인 연기를 좀처럼 감정적으로 보좌해주지 못하는 영화 덕분에 캐릭터마저 겉도는 인상을 준다. <토끼와 리저드>는 서사적 배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확장하지 못한 채 그 단편적 찰나에 기댄 채 사연만 늘려나간 형태로서 감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그 지난한 운명적 예감을 실체로서 공개하는 결말부도 딱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좀처럼 설득력 없는 감정들이 느슨하게 전시되다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실체가 별다른 파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명백히 실패한 멜로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