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쉘 공드리와 팀 버튼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비현실을 꿈꾸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몽상의 이미지를 채색하는 공드리나 자아의 내면에 깊게 잠재된 트라우마를 악몽처럼 소환하는 버튼과 달리 놀란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주력해왔다. 놀란에게 잠재된 꿈의 영역은 환상적인 비주얼에 함몰되거나 몽상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꿈에 매혹당할 뿐, 그 꿈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정의를 명확하게 짚고 체계화시킨다. 자신의 꿈을 꾸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꿈을 주시하고 목격해나가며 잠재된 세계관의 설계도를 작성한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이 집약된 총아나 다름없다. 자신들이 설계한 꿈으로 표적을 유인한 뒤, 표적의 꿈에 침투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생각을 추출하는 자들. <인셉션>은 마치 의식 속에 잠재된 거대한 무의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험적 영상처럼 보인다. 타인의 꿈-비록 그것이 자신들이 설계한 도면을 통해 완성된 꿈이라 할지라도-에 잠입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침투한 타인의 꿈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상대의 무의식을 경계하고 자신들이 훔쳐내고자 하는 표적의 생각에 접근해낼 수 있는 최단의 루트를 궁리해 나간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머리 속에 응축된 상상력을 펼쳐놓은 창작적 도면과도 같다. <메멘토>, <인썸니아> 그리고 <프레스티지>는 인간의 의식 속에 웅크린 잠재태의 비사실적인 형상을 사실적인 현실태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구체화시킨다. 놀란은 언제나 시공간의 명확한 경계를 자신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장치적 요소로서 활용한다. 망각과 기억, 수면과 각성, 환상과 트릭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등을 맞댄 분리면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뒤, 두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정의함으로써 상반되는 대립적 관념의 공존이 가능한 비선형의 질서를 명료하게 설득시킨다. 비현실적인 관념들을 현실적인 상 위에 올려놓을 뿐, 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구조적 감상을 유도해낸다.
<인셉션>은 이 모든 자질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인셉션> 자체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펼쳐 보인 도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세계관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서처럼 시작되던 영화는 점차 내밀한 설계도의 거대한 단면들을 펼쳐 보이듯 스케일을 키우지만 서사적 속도감은 유지한 채 정보의 밀도를 팽창시키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 겹겹이 쌓일 뿐 결코 뒤엉키지 않는 입체적 구조 안에서 경제적인 동선을 미리 확보해둔 것처럼 내러티브는 매끈하게 진행되고 경이적인 인테리어와 같이 발견적인 영상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인셉션>에서 묘사되는 꿈과 현실은 영화와 현실이며 동시에 허구와 현실이다. 놀란은 <인셉션>을 통해 영화를 통해 가능한 꿈의 영역을 끊임없이 파고 드는 동시에 그 거대한 허구의 연속에 짓눌리지 않도록, 즉 ‘림보’에 빠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맹점을 경계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좀처럼 ‘죽이기 힘든’ ‘생각’들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이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재생되는 생각의 진전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출구를 확보해낸다. 입체적인 액자 구조 형태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체험처럼 펼쳐질 때,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얻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적 욕망을 입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무대를 얻게 된다. 비선형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축되는 명확한 논리 속에서도 깊게 응축되어 발현되고 마는 페이소스는 <인셉션>의 스토리텔링에서 가히 비기에 가깝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싸워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관과 같다. 현실을 인지하는 의식이 끊임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부수는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낸 듯한 세계관이 스크린 위에 구현된다. <인셉션>은 분명 하나의 전형으로 남을 만한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그 세계관의 외형이나 구조 혹은 비범한 이미지의 출현과 같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결과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 작가적 세계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겹겹이 싸인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분투를 벌이는 구성원들의 활약에 매혹 당하고 헤어날 수 없게 몰입하다 끝내 의미심장한 탄식을 내뱉고야 말 당신들의 감상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뉴욕의 한 지하철, 졸고 있던 승객 하나가 눈을 뜬다. 늦은 새벽의 지하철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가 문득 옆 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서서히 옆 칸으로 통하는 문을 향하던 그의 발이 무언가를 밟고 세차게 미끄러진다. 그가 밟은 것은 바닥에 흥건한 붉은 피, 당황하는 남자는 지하철 기둥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난다. 심히 경악할만한 광경을 앞에 둔 남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 옆 칸으로 통한 문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 쪽으로 서서히 다가선다. 그 창 너머를 바라보는 남자의 경직된 동공이 향한 곳에 놓인 건 누군가의 뼈와 살을 가르는 어느 살인마의 뒷모습이다.
클라이브 바커는 <헬라이저>(1987)나 <캔디맨>(1992)과 같은 작품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잔혹성을 과감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전시하는 감독이나 기획자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단 그 작품들의 원작자로서 더욱 확고한 유명세를 자랑한다. 공포소설의 대가 클라이브 바커의 유명한 공포단편집 '피의 책'에 수록된 동명원작단편을 영화화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Midnight Meat Train>(이하, <트레인>)이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이것과 무관할 리 없다. 도시의 기원에 얽힌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실로 순수한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도시의 참혹한 내면을 고찰하고자 하는 정치적 혐의와 맞닿아있다. 도시의 기원이었던 오래된 존재들에게 인육을 바치기 위한 제단으로써 운행되는 새벽의 지하철은 가히 그 공간 자체만으로도 괴기한 초현실의 공포를 소환하는 자질이 된다. 또한 그 비밀스런 제례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희생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도시의 이면에 놓인 계층적 갈등과 착취적 질서를 살피는 계기로 해석될만하다.
97분 러닝타임의 기원이 된 40페이지 분량의 단편원작은 모티브의 출발점이라기 보단 구심점으로서 명확하게 영화 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트레인>은 원작의 질감을 보존하면서도 형태적인 변주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재생산한다. 두 인물의 대칭적 구도를 한 점으로 맞닿는 방식으로 전진시켜나가던 원작의 평행적인 캐릭터 배열방식과 달리 <트레인>은 레온(브래들리 쿠퍼)과 마호가니(비니 존스)의 접근성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이는 방식으로 긴장감의 수축과 이완을 거듭한다. 또한 짧은 단편 분량 속에서 미니멀하게 소개되던 인물의 성향은 약간의 변화를 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영화에서 최대한 변주된 건 마호가니인데 그는 원작에서 보이던 최소한의 인간미마저 벗겨진 무신경한 광신적 살인마로서 재창조됐고, 결국 그는 영화상에서 절대적인 공포를 발산하는 주체로서 군림한다.
인물의 심리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던지던 원작에 비해 진원과 진앙 사이가 멀어진 영화는 그 거리감을 통해 긴장감을 조율한다. 특히 변주된 캐릭터와 함께 뼈대에 살을 붙이듯 서사적 너비를 넓힌 영화는 인물간의 동선에 따라 긴장감도 함께 넓혀나간다. 사진작가로서 도시의 진짜 풍경을 담고자 하는 레온이 우연히 지하철 실종사건의 단서를 얻은 뒤,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마호가니에게 접근할 때마다 마호가니의 굳은 얼굴만큼이나 지배적인 공포가 두려움이 역력한 레오의 표정을 통해 감지된다. 특히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의 추격씬은 가려진 시야를 헤매는 레온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그 긴장감의 포석은 거대한 망치로 무자비하게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마호가니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목격에서 비롯된다. 등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마호가니가 목표로 삼은 대상의 등뒤에서 당사자도 모르게 망치를 들고 뚜벅뚜벅 다가서는 광경을 지켜보는 심정은 심장을 움츠리게 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 연출력의 탁월함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시야적인 맹점을 확보함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순발력이 아니라 차근차근 대상에 접근하는 살인마의 전진을 바라보는 앵글의 무기력한 목격행위는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예견된 공포를 지배적으로 진전시킨다. 물론 그 살인 이후로 벌어지는 마호가니의 인간도축행위와 고기처럼 매달린 인간의 초라한 육신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에 도전하듯 적나라하여 되려 먹먹할 지경이다. 영화는 심리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진원지가 다른 공포의 발전적 양상을 성공적으로 조합해나간다.
영화는 도시의 이중적 내면을 고찰하던 원작의 함의적 공포와 다르게 선을 넘어서버린 어느 인간의 욕망을 그에 결부시키며 파괴적으로 변질된 인간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살인마 마호가니를 추적하던 레온이 그의 무시무시한 인간도살행위를 카메라로 담은 뒤 점차 변해가는 모습은 도시의 풍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직감하게 한다. 결국 사진작가의 순수한 열망은 도시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와중에 예기치 않게 거대한 변질을 맞닥뜨리게 되고 이는 결국 그 남자의 삶을 거대한 파국으로 몰고 간다. <트레인>은 원작만큼이나 과감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미묘한 변화를 감당하게 만들고, 그와 무관한 이들에겐 이질적인 백색공포를 강권하지만 세계관이 머금은 기운 자체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공포를 선사한다. 결국 파멸적이면서도 묵묵한 엔딩은 원작의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을 보존하면서도 영화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