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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1 주여, 이것도 당신의 뜻입니까?
  2. 2008.11.27 <바시르와 왈츠를> 단평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살의를 느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기엔 지독하게 끔찍한 현실이다. 비처럼 떨어지는 백린탄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졌나. 참혹하다. 820명과 10. 팔레스타인 사상자 820명을 이루는 건 대부분 민간인이다. 이스라엘 군 10명이 죽었다는데 개중 7명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한 사망이라 한다. 이게 전쟁인가. 이건 학살이다. 홀로코스트다. 유태인 민족을 말살하자 했던 히틀러의 야심이 진정 현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오른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배웠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가 말했다. 그들은 예수의 아들 딸이 아니다. 사탄이다. 악마가 그곳에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행위 속에 악이 있다. 증오와 분노와 살의가 넘친다. 인간을 과녁으로 삼아 유희를 즐기는 이들이 국경지대에 즐비하다. 수용소에 갇혀서 삶을 꿈꾸던 유태인들은 이제 타인을 겨누며 즐기고 있다. 자신들의 비극을 잊고 만행을 전이한다. 언젠가 역사는 반목될 것이다. 공포에 떨고, 분노가 차오른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눈엔 또 한번 돌고 도는 증오의 역사가 서려있다.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도 내주어라. 예수가 말했다. 왼뺨을 때리고 오른뺨마저 때렸다. 예수도 고개를 숙일 판이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엔 악랄한 미소가 번진다. 가자지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즐겁게 한낮의 오락을 즐기고 있다. 폭력을 양성하고 타인의 비극을 즐기는 무리가 저 땅에 있다. 세계의 목소리가 일침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깡패가 따로 없다. 행패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악의 축이 따로 없다. 십자가 못박혀 죽은 예수가 자신을 못박은 로마인에게 저주를 퍼붓더냐. 예수의 사형을 소리치고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하라 악다구니를 쓴 건 유대인이었다.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작당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죽였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서 가장 먼 길로 가고 있다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을 잊은지 오래다.  

 

주여, 이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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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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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마리의 개가 사납게 내달린다. 사나운 개떼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다. 청자는 감독 자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과거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아리 폴만 감독의 자전적 성찰이다. 동시에 그 잔인한 기억에서 상실로 도피한 자의 뒤늦은 참회이자 치유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현재 고백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기억을 복원해나간다.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취하는 건 <바시르와 왈츠를>이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가 어떤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착시와 연동된 까닭이다. 비극을 목도한 이들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적 상흔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과 실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격전이 펼쳐지는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서 스텝을 밟으며 기관총을 사격하는 병사의 모습 위로 왈츠가 흐른다. 우아한 이미지 사이로 비통한 정서가 유유히 새어 나온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결과가 담긴 실제적 풍경이 등장하는 말미에 도달하면 그 모든 이미지의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환기된다. 승자도 패자도 소용없다. 살아남은 자는 지울 수 없는 업보의 여생을 떠안게 될 뿐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거대한 비극에 압사당한 인간 그 자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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