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위장된 극영화적 오락물. 도입부부터 인터뷰와 취재 영상을 동원하며 사실적으로 위장된 정보를 방대하게 쏟아내는 <디스트릭트9 District9>은 기존의 SF영화들이 제시한 상상력을 고스란히 녹여낸 도가니에서 온전히 판본이 다른 형태로 주조된 독창적 산물이다.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 어떤 성과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실험적 소품이자 기존의 할리우드발 상업영화들의 방법론을 하이브리드(hybrid)하게 응용한 SF변종이다.
거대한 우주선이 출몰한 건 맨하튼도 아니고, 시카고도, 뉴욕도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이다. 이를 대사로서 읊조리기까지 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할리우드 SF영화들의 관성을 배반하는 유희적 조롱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이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을 출몰시키고 외계인 수용소를 설치한 건 단순히 할리우드에 대한 안티테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디스트릭트9>은 요하네스버그를 지배했던 과거의 부조리한 역사적 공기를 환기시킨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 안에서도 ‘디스트릭트6’라는 백인전용 출입공간이 실제로 존재했던 요하네스버그에 28년간 외계인 격리수용소 ‘디스트릭트9’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영화적 진술은 요하네스버그를 점하고 있었던 어떤 과거와 깊게 연동된다. <디스트릭트9>을 연출한 닐 블롬캠프가 남아공 출신이란 점은 이런 추측을 강력하게 보좌하는 사안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외계인 수용소 ‘디스트릭트9’의 안팎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28년간 공존해왔다. 그 28년간 인간과 외계인은 많은 사건과 사고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상대와의 갈등은 불거져왔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객관적 형태의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편집한 영상에 담아 일목요연하게 단시간에 과거사를 정리해 전달한다.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외국도 아닌 외계에서 온’ 이방인을 멸시와 적대로 맞이한다. 지도층을 전염병으로 잃었으며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인간의 질서에 섞이지 못하고 요하네스버그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버리는 외계인은 시민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된다. 결국 외계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까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외계인의 추방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까지 벌이게 된다.
외계인을 적대하고 그들의 수용소 이전을 요구하는 요하네스버그 시민들의 행위는 일종의 ‘님비(NYMBI)’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사태에서 발효되는 핵심적 의문은 좀처럼 공존을 모색하기 어려운 인간과 외계인이 어째서 맞닿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어째서 외계인은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지, 반대로 어째서 인간들은 외계인을 지구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영화는 이에 대해 대사로서 직접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 <디스트릭트9>은 궁극적으로 SF적 상상력으로 디자인된 음모론이다. 영화적 허구로 치장한 현실의 우화다. 외계인과 인간의 우열적 관계와 이를 통해 빚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의 형태는 실상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인종 분쟁의 모습과 가깝게 닮아있다.
닐 블롬캠프가 2005년에 발표된 6분 23초 분량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 Alive in Joburg>는 <디스트릭트9>의 기본적인 자질이 어디서 구축되고 비롯됐는가를 보여주는 기본적인 소스나 다름없다. 이를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와 선명한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닐 블롬캠프는 그만큼 견고해진 정치적 의식을 완강하게 밀어붙인다. 3인칭 시점의 보도적 영상과 인터뷰 컷을 스트레이트하게 이어 붙여 나열하며 객관성과 현장성을 확보하는 <디스트릭트9>은 이를 통해 극영화적 연출력을 선보이는 후반부 이미지를 위한 설득력마저 확보해낸다. 객관적(으로 위장된) 이미지의 나열로서 거침없이 서사적 줄기를 뻗어나간다. 주요한 맥락의 중심에 선 인물 비커스(샬토 코플리)의 주변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비커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도입부는 영화가 도달해야 할 모종의 결과에 대해 예측하게 만듦으로써 극적 호기심을 부풀린다.
제3자들의 진술로서 회자되곤 하던 비커스를 등장시키며 서사를 정상궤도로 진입시키는 영화는 3인칭의 다큐적 시점에서 극중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의 관찰에 치중해나간다. 다국적 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Multi-National United)에 근무하는 비커스는 디스트릭트9에서 요하네스버그로부터 200km떨어진 새로운 수용소로 이전하겠다는 조항에 대한 동의서에 180만 외계인의 싸인을 받아야 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된다. 비커스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그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비커스의 행위를 관찰자 시점에서 따라잡으며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의 객관성과 극영화로서의 연출력을 중첩시킨다. 현장감을 더하는 핸드헬드 영상과 거친 편집을 통해 사실성을 획득한 영화는 이를 통해 허구적 상상을 과감하게 현실세계에 안착시키고 점차 극영화적 진전을 거듭해나간다.
중반부에 다다를 때 즈음 묘사되는 비커스의 신체적 변이는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던 영화는 이를 통해 인물과의 거리감을 해소하고 인물의 심리를 극적 감정으로서 포용해나간다.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는 비커스의 심리적 변화는 점차 객석에 앉은 관객의 감상을 지배할만한 감정적 형태로 번져나간다. 동시에 <디스트릭트9>은 인간보다도 외계인의 입장을 배려한 관점과 감정이입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서 약자의 위치를 점하는 외계인들은 인간이 행사하는 다양한 폭력의 형태에 노출됨으로써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그 형태적 우열관계 속에서 관객의 감정을 점유할만한 동정심을 이끌어낸다. 디스트릭트9에 수용된 외계인들이 인간에 의해 받게 되는 다양한 폭력을 인종차별적 형태에 가깝게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인종적 분쟁과 갈등을 외계인과 인간의 대립으로 치환한 우화나 다름없다.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디스트릭트9>은 사실상 상업영화로서도 손색없는 오락성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현실이란 밑바탕을 훼손하지 않는 수순에서 SF적 상상력을 일부 수용해 넣은 <디스트릭트9>은 역동적인 액션을 연출하고, 캐릭터와 이미지를 활용해 서스펜스와 위트를 유발하기도 하며, 외계인과 인간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동시에, 휴머니즘과 멜로적 감정마저 이입하는, 장르적 도가니나 다름없다.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기 보단 이미 갖춰진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를 조립해나간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화로서의 자의식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극영화적인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종종 껑충거리듯 내러티브를 건너는 플롯은 영화적 단점이라기보단 의도된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디스트릭트9>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적 혁신이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영상의 조악함이 되레 현장성을 극대화시키고 극적 설득력을 더해나가는 수순을 지켜보면 흡사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월등한 의식마저 전복되는 기분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은 고도로 위장된 인종주의적 갈등을 치환한 정치적 우화다. 다국적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가 사실 세계2위의 군수업체이며, 바이오기술을 적용해 외계인DNA에만 반응한다는 외계인의 레이저건을 활용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디스트릭트9에 수용한 외계인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한다. 심지어 인간과 외계인의 중간자로 변이된 비커스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반인류적 이미지로서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창조적인 소재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신선한 화법이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변종적 상상력을 동원한 세계관은 다양한 영화적 환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설계한 하이브리드 이미지로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우화적 주제의식을 품고 재생된다. 정확한 목표의식을 품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영상은 그것이 월등한 오락적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보다 효과적인 주제 전달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안다는 듯 강인하고 묵직하게 전진한다. 그만큼 <디스트릭트9>은 도전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작품으로서 오락성마저 포획한다. 이는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인상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물론 3년 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전제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선혈이 선명한, 상흔이 뚜렷한, 공포에 질린 소녀가 공장지대에서 발견된다. 신체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가득한 소녀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는다. 소녀가 발견된 공장지대 건물 내부엔 가학적 증거들이 즐비하다. 의문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과연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큐적 질감의 영상 너머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연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사연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의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의문을 증폭시키고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물음표의 미로를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에 봉쇄한다.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이미지가 전시되는 스크린을 응시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는 물음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실로 잔혹한 영화이기 전에 강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가학적 사연을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 이후로, 역시나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참한 학살신이 시선을 장악하고 그 지점부터 충격이 고스란히 쌓여나간다. 모든 의문의 주체인 루시(밀레느 잠파노이)가 눈물을 동반한 학살을 자행하고, 정체불명의 괴인으로부터 근본을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고 쫓기게 되는 순간까지, 관객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을 공략하는 서스펜스에 난도질 당해야 한다.
쏘고, 베고, 찌르고, 가르는 고문적 이미지가 생생하게 눈앞을 오가는 광경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한 감상을 부른다. <마터스>가 핸드헬드로 포착한 혼란의 도가니를 통해 캐릭터의 공황적 심리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면 공포에 질린 캐릭터의 얼굴을 관찰하는 외부자의 위치를 문득 깨닫고 캐릭터가 내지른 비명과 함께 저만치 다른 편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말 것이다.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서스펜스의 여정이라 할만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장르적 연출 면에서 가히 탁월하다 칭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일관하는 동시에 극한적인 체험에 가까운 공포를 깊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정체를 드러내는 극악한 세계관은 앞선 시각적 자극을 잊게 만들 정도로 참담한 심경을 안긴다. <마터스>의 본질은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탁월한 장르적 연출과 극한의 가학적 이미지를 동원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사실상 후반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과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편적인 이미지즘의 총합을 통해 전가되는 서스펜스의 즉물적 자극을 넘어서 좀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드는 공황적 충격이 엄습한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에서 시작해 감정을 후벼 파는 서스펜스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나면 후두부를 강타하듯 충격적인 세계관이 머리를 들고, 밑도 끝도 없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마터스>는 불순하게 여겨도 무방할 정도로 극악한 영화다. 의문을 품게 만드는 극단적인 참상이 거칠게 전시되고 나서야 베일을 벗는 끔찍한 세계관의 정체는 결과적으로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적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 제 스스로 물음표를 파기한다. 그것은 선의의 여운이라기 보단 악의적 도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대체 뭘 본거냐. 하지만 끝난 영화는 말이 없다. 참혹한 기분과 어지러운 심정이 모든 감정이 휘발되듯 창백해진 심리 안으로 어지럽게 맴돈다.
끝없는 의문 사이로 감탄과 탄식이 명확히 동반되는 <마터스>는 어떤 의미로든 분명 놀라운 영화다. 장르적인 방식 안에서도 뛰어난 연출적 자질을 선보이고,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서사의 저력이 대단하다. 동시에 그 끔찍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 역시 관습을 잘 따르면서도 창의적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참담함 너머로 내려앉은 의문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공포를 넘어 극한의 불순함을 선사한다. 그 불순함을 좀처럼 잊을 길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끔찍하다.
<블룸형제 사기단>은 범죄물에 순수한 동화적 판타지를 결합한 또 다른 장르적 이종교배다. 백치미스러운 하이틴무비에 느와르적 서스펜스의 양각을 새겨 넣은 <브릭>과 전혀 다른 방식의 장르적 접합을 선보인다. <스팅>에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는 <블룸형제 사기단>은 버디무비 사기범죄물이라는 그릇을 고스란히 차용하되, 우정을 형제애로 변주한다. 스토리텔러와 액터, 마치 허구적 창작자와 유사한 사기꾼 형제의 역할분담을 통해 진전되는 사기행각은 한편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완전하다기보단 엉뚱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은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다채로운 동선을 이어나가며 영화적 매력을 더해나간다. 궁극적으로 <블룸형제 사기단>은 장르적 그릇보다도 그 안에 담긴 로맨스와 형제애라는 정서적 감흥이 중요해지는 영화다. 그만큼 결말에 다다라 이야기로서의 묘미가 손실되는 인상을 부르지만 장르적 쾌감을 대신할만한 감동적 자질은 폄하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블룸형제 사기단>을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유쾌하게 넘겨버린 라이언 존슨의 재능은 분명 현재진행형의 기대감을 얻기에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