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맞고'와 '틀리다'보단 '지금'과 '그때'가 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지금 혹은 두 개의 그때. 결국 지금이라서 맞고,
그때라서 틀린 것. 이것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명해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맞지만 언젠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이라는 마술적 흐름에 관한, 굉장히 사소한
발견의 깊이.
완전히 분절된 데칼코마니 형태의 출발점에서 제각각 시작되는 두 개의 이야기.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구 구조를 개별화시킨 두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품었으나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 아마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구별될만한 작품일지도. 개인적으론 <옥희의 영화> 이후로 또 한번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시점으로 분리시킨 두 가지 삶의 체험. 정말 놀라운 영화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톤으로 길어 올린 마술적 리얼리즘. 나는
이 영화에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다.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정재영은 두 사람 몫을 하며 영화의 너비를 확장하고, 김민희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경계를 만든다. 두 개의 정재영과 하나의 김민희가 이 영화의 대구를 완성한다. 두 방향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영화.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영화라는
체험이 삶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질문에 합당한 답을 모두 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는 언제나 옳게 합리화되고, 과거는 언젠가 틀려서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간이다. 부끄럽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게 당연하다.
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과하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간지러운 표정 연기도 숱하게 나온다. <글러브>는 꽤나 올드한 영화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눈길을 끈다. 장애를 극복하는 스포츠영화라는, 이미 닳고 닳은 영화적 양상을 직구로 관통한다. 정재영은 때때로 과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이 영화의 감정에 진심의 무게를 얹어 내며 구원투수 노릇을 한다.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맥 빠진 중심타선을 보는 느낌이지만 홈런은 아니더라도 진루타는 쳐내는 드라마가 대타 노릇을 해낸다.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끼> 캐스팅은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특히 이장. (웃음) 정재영 씨가 머리를 삭발했던데. 하지만 감독님이 믿음이 강하더라. 워낙 신뢰할만한 배우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믿어야지.
만화가 아닌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변주한 타인의 창작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 있을 거 같다.
처음 영화를 계약했을 땐 어떤 분이 연출할지도 몰랐고 내 나름대로 상상만 해봤다. 배우는 누구, 감독님은 누구, 이렇게. 어쨌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를 벗어난 그 이상의 조합이 나왔다. 그래서 너무 기대가 커졌다. 일단 제일 기분 좋은 건 박해일 씨의 캐스팅이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박해일 씨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님께 내가 박해일 씨 팬이고, 류해국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소개시켜주더라. 그때는 그냥 조심스럽게 만났는데 나중에 캐스팅이 확정됐다고 하니까 속으로 ‘아싸!’했지. (웃음)
류해국이 박해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박해일 씨를 모델로 류해국을 만들었다는 게 재미있다.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더라. 왜냐면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사람은 와이셔츠나 벨트, 바지, 이 이음새가 맞지 않아도 막 입고 다니잖아. 양복 뒷주머니도 일간지가 아닌 벼룩시장 같은 거나 넣고 다니고. (웃음)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박해일 씨를 많이 응용했다. 항상 뭔가에 찌들어있고,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애매모호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도 탐나더라. 계속 그 모습을 머리에 넣고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관여하는 건 없나?
전혀. 어쨌거나 연재가 완료되기 전에 계약이 된 상황이라 계속 회의는 해나가야 했다. 정지우 감독님도 계속 물어보시고. “그러니까 이영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웃음)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해온 사람이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또 그게 말로서 내 입으로 나오면 내가 그 말을 들어도 재미없다. 어떻게 이 분을 감동시킬까 고민이 되니까 설명도 잘 안되고. 완결되고 난 지금은 여러 문제로부터 후련해졌다. 만화로서는 일단 여기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고 시나리오도 변형을 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폼이 생긴 거니까 그 분들도 편해졌고. 사실 5월 말에 연재를 끝내려고 했는데 8회 분량이 연장돼서 그 분들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걸.
8회는 왜 연장됐나?
원래 기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거기서 재미를 느꼈고 분량이 늘어난 거지. 뒤에 수습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몇 회를 더 해버리니까 결말부까지 길어져 버렸다. 아직도 내 생각엔 3회 정도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미디어 다음(Daum)’측 사정도 있고 해서 거기서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결말부도 불충분했다고 느끼나?
조금은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예정된 템포대로 진행했다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그걸 한 회에 몰아가다 보니까 급해진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이끼>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읽어내고 그런 해석을 반영한 댓글이 많더라. 실상 그렇게 읽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처음 잡았던 기본적 설정과 무관하게 연재 과정에서 관찰하거나 목격한 외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극적으로 수정이 가미된 요소는 없었나?
애초에 <이끼>는 노무현 정권 때 기획됐다. 애초에 현정치상황이 <이끼>에 반영된 건 없었던 거다. 작은 권력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작은 권력에 빈정 상한 사람의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인공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돼버렸다. 창작물은 사실 생물과 같다.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이야기가 확장되니까. 결국 애초에 내 머리 속에 구성돼 있던 것들이 너무 시시해져 버린 거다. 덕분에 뉘앙스가 수정된 부분이 있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내 예정대로 갔다고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라난 분량도 생겼으니 그 이후로의 진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계획했던 결말의 형태가 변하진 않던가.
원래 결말까지 이야기를 다 짜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방금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자라나버린다. 그게 내가 간과한 문제였건, 단순한 실수였건, 독자들은 그걸 믿고 간다. 그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나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라 해도 독자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은 정당한 거니까 그것들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줘야 한다. 그런데 내용상 이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애초에 내가 잡았던 것만큼 갈 수 없게 됐다. 크게 봐서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가 잡았던 대로 가야 했던 거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류해국 아버지가 갑자기 도인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관념 자체가 확 팽창돼버렸다. 결국 내가 애초에 잡았던 설정들이 시시해져 버린 상황이 된 거다.
애초에 잡았던 결말과 지금의 결말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말부분은 사실 비극적으로 끝내려고 했다. 류해국 같은 주인공이 자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초에 자기 생각과 습관을 다시 끌어와서 이 사건을 만든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네가 네 스스로 싫다고 느껴서 버리려던 성격이라면 네 성장을 위해서 완전히 버렸어야 했는데 왜 다시 그걸 또 쥐어 잡았냐고, 그런 생각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그에 대해서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거 아니냐고. 사소한 정의라도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는 사회보단 개인 우선으로 관점을 두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품 밑에 달리는 댓글 같은 걸로 인해서 어떤 사회성을 발견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류해국이 이기는 쪽으로 색채가 달라져 버렸다. 대신 류해국의 방법으로 이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검사한테 손을 뻗고, 검사도 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런 식으로 류해국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융화형 인간으로 그리게 됐다. 검사도 유들유들한 타협적인 인간에서 주인공처럼 선이 분명해진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주인공의 파멸이야기였다가 한 40화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게 된 거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이끈 주변 사람이 궁금하다.
<이끼> 40회 즈음에 영화판권 계약을 했고 그 후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한) 정지우 감독님을 만났다. 정 감독님이 내 원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정도 들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솔직히 윤 작가 생각에 동의가 안 돼요. 나는 내가 바로 류해국 같은 사람이라 믿는데 내가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그렇게 죽일 놈인지, 고민에 빠지네요.” (웃음) 계속 “류해국이 뭘 잘못했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검사한테 조금 더 점수를 준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박검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거나 말거나 어차피 사회의 주류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더라. 결국 왜 박검사가 승자가 되고 류해국이 패자가 되냐는 물음이었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파멸로 가는 건 아니란 생각이 굳어지더라. 검사한테 갈 역할이 류해국한테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끝이라고 도장 찍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인 류해국에게 맡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말씀하시길, “류해국 같은 사람의 가치관은 지금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가치관인데 이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스토리 안에서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거였나?
류해국을 포함해서 다 죽고 이영지만 살아남는 거였다. 사실 직접 그리기 시작하면서 콘티를 짜기 전까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버전도 한 스무 개 정도 나왔었다. 영화사마다 아직 연재 중인 만화니까 계약하기 전에 결말을 알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사에 한번 써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또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영화사엔 또 다른 버전을 써주고, 이러니까 영화사마다 각자 본 버전이 다 다른 거다. 정 감독님한테 얘기할 때도 이건 확정적인 건 아니고 나도 솔직히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듀나(DJUNA)’라고 하나?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번 “작가도 <이끼> 결말을 모른답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글이 있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항상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시작점과 끝점은 있는데 인물 위주로 가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설계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지. 사건 위주로도 정해놓고 프리(프로덕션)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야후>와 함께 <이끼>를 비롯해서 최근 연재했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건의 뇌관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자관계가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념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건달 생활 비슷한 걸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야반도주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자꾸 신변이 위험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싫어졌는데 점차 이 사회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거 같더라. 처음엔 단지 내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서 ‘아버지 일기’라는 것도 써보고 그랬는데 인식이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지다 보니까 그냥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다고 느껴지더라. 정치인들은 여성들도 굉장한 마초 근성을 갖고 남성화돼서 움직이잖아. 이런 게 진짜 혐오스럽더라. 난 아직도 아내를 부를 때 ‘누구 씨’라고 부른다. ‘누구 엄마’ 이러는 것도 싫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나 남자야’라고 뻐기는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야후>를 봐도 남자라고 폼 잡고 나오는 애들은 진짜 남자같이 나온다. 아주 권위적으로 여자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의식이나 분노가 굉장히 많은 거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랄까.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경제적 문제로서 크게 두드러지는 시대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결국 세대간의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류해국은 기성 세대와 대립하는 젊은 세대로 치환해도 좋은 인물이다. 결국 그 적의를 사회적 행위로서 내보이고 이를 통해 자기 부정적 파멸마저 도모한다. <야후>도 사실 그런 세대적 적의에서 비롯된 자기 파멸적 이야기다. 원래 계획했던 <이끼>의 결말을 듣고 보니 <이끼>도 <야후>와 비슷한 비극적 파국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 볼 수 있었겠다. 다만 두 작품이 결말에서 극명한 차이를 두게 된 건 외부에서 얻은 영향력이 그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작품의 변화가 스스로의 생각 자체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이제 지는 걸 이야기하긴 싫어졌다. 어떻게 보면 파멸을 그리고 싶다는 건 사소한 동기일 뿐이다. 내겐 엇나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굉장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네 만화 정말 재미있어.” 그럴 수록 막 엇나가고 싶어진다. (웃음) 정말 마이너한 정서지. 액면으로 느껴질 만한 선의의 칭찬이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자랐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찰흙으로 잘 빚어놓고서 ‘에이, 이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란 식으로 막 뭉개버리는 애들 같은 마음이랄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정지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게 너무 사소한 태도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줄 때 욕심을 내서 더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촛불집회만 봐도 과거와 (시위가) 형태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386세대들이 변절해가는 과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과거를 또 비난하고, 적의를 갖고, 그런 건 너무 비참한 삶이 아닌가. 그래서 한번이라도 그 안에서 승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싶더라. 비록 그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 스스로도 분명한 선을 갖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도 둘이나 낳았고. 이제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더라. 내가 포기하는 싸움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멈추지 않은 이상 지는 싸움이란 건 없는 거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만화에 <불의>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는데 이게 그냥 추모만화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했다. 불은 저절로 또 생겨나겠지만 불 끄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런 열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개입됐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야후>는 여전히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야후>는 <이끼>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두르고 메타포적 이미지를 적시한 작품이다.
<야후>에 나왔던 사건사고들은 지방에 살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진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TV를 보니까 마치 컴퓨터그래픽처럼 다리 중간이 내려앉아 있고,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마치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토픽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할까.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엔 며칠 만에 사람들이 구조됐네, 이런 뉴스를 보고 세상이 정말 원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관심사를 만화로 그렸던 거다. 사실 난 사회발언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별자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 한 명에게도 구조라는 게 있지 않나. 사회와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있고. 결국 드라마라는 게 사람 이야기고,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나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종교도 들어가고, 모든 게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졌다. 꼭 기독교나 천주교 같은 특정종교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영역에 마음을 담아두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종교적 의도가 되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부분이다.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도 다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별자리 배우면서 성경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자연스럽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겹쳐졌다. 인물을 우물처럼 깊게 보는 관점도 생겼다. 결국 <이끼>할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이끼>가 <야후>보단 관념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잘 잡아서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야후>보단 <이끼>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큰 건가?
원래 <야후>에서 주인공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첫 아이가 생기면서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뒤로 가면서 해프닝 위주의 사건들이 채워졌고, 결국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절반밖에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끼>에서는 뭐건 간에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밀도까진 들어가봤다는 느낌이 남더라.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다.
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류해국이 이장 집에 찾아가기 전에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밀도로 채워져 있다.” <이끼>는 대사량이 적은 만화가 아니다. 동원되는 대사의 표현방식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덕분에 해석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고. 그림만큼이나 언어를 동원하는 방식에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스토리를 쓸 때 종이를 한 장 옆에 두고 대사를 반복해서 써봤다. 일단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았지. 그 다음에 표현이 많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문장이면서도 읽어봤을 때 적재적소에 쓰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괜찮다는 느낌이 좋더라. 평이하지만 날 선 느낌? 그래서 대사는 반복해서 써보고 판단했다. 가장 훌륭한 대사는 폼 잡거나 많이 부풀려진 대사가 아니라 그 상황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대사니까. 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그런 대사가 있지.
대사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사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함축적이라 이해되는 대사도 많고.
<야후>마지막 권에서 주인공과 신무학이 죽기 직전 “잘 가라.” 할 때, ‘아, 이런 맛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송지나 작가가 <모래시계>에서 “나 떨고 있니?” 이 대사를 쓰기 위해 7일 간 고민했다는 것처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가장 쉽게 의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얘네 나이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죽기도 바쁜 애들이 무슨 대사를 질질 끌면서 하겠냐 싶더라. 그래서 결국 “잘 가라.” 한마디로 가게 됐는데 그때 내 스스로 느낀 거지. 대사는 각 잡을수록 후지게 나오는 구나. 대사의 선이 분명해버리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져줘야 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 여러 해석이 나올만한 대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사회 비판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어려운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마치 식자층 같은 대사를 쳐대거나 사회적 발언을 해버리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대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옆집 사는 아저씨가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 정도 수준의 대사가 필요했다.
캐릭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만한 대사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건가?
맞다. 무엇보다도 <이끼>는 분명히 그림은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관념적 만화라서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끼>를 하면서 어떤 분명한 걸 지적하듯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만큼 불분명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선이 뚜렷한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진 못하겠더라. 각자 처지에 맞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싶었다.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보고 <살인의 추억>이 연상됐다. 인간적이라 이해되는 지방성의 이면에 감춰진 잠재적 폭력성이라던가, 소박한 환경 내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한 심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압축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더라. 무엇보다도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그 자체로 작품에서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런 마을을 상상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차량의 주행속도를 10km/h정도 높이기 위해 곡선을 최대로 줄이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만큼 굉장히 폭력적으로 건설됐지. 한번 그 도로를 타고 고향집을 갔다가 올라오는데 어떤 터널에서 나오니까 소음 방지벽 너머에 가둬진 작은 마을이 보이더라. 돈을 몇 푼이나 받았을지 몰라도 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었겠지. 도로 아래 교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낯선 사람은 저 마을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조차도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갈 마음도 들지 않는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저런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들도 인상 자체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의 모티브는 어디서 시작됐나?
그 공간에 대한 호기심 이후로 사연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전제가 뒤따랐다. 종종 시골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서울에 계속 살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무서웠거든. 시골에 살면서 보면 가끔 시골에서 막걸리 같은 거 마시고 그러다가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다. 낫도 흉기가 되는 물건인데 눈 한번 돌아버린 사람 주변에 그런 게 놓여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농사를 짓고 힘을 쓰다 보니까 체격도 좋은데 저 사람이 순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지. 그래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순박해 보이지만 눈 한번 핑 나가면 살벌해 보일 수 있는 느낌의 캐릭터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장 같은 경우, 딱 봤을 때부터 재수없어 보일 만큼 혐오스런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를 모아 놓은 거다. 대머리에, 광대뼈에, 음흉한 큰 눈까지. 주인공인 류해국은 척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게끔 훌쭉한 느낌을 줬고.
한 마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그런 관계에 잠재된 은밀한 사연과 그 사연의 발굴을 통한 갈등과 충돌이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만큼 캐릭터의 내외를 디자인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거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도 존재하겠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진 않았을까.
사실 모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인물마다 하나씩 죄를 집어넣었던 거다.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얘는 무슨 죄, 얘는 무슨 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이입했다. 이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원죄, 그리고 전석만은 어린 아이를 죽이고 할머니도 죽게끔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인간의 몸뚱이로 장사하며 이를 통해 그 누군가를 죽인 죄, 간접 살인을 한 죄, 이런 식으로 죄를 부여해놓고 그 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성격들을 접목시킨 거다. 살다 보니 죄를 짓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격을 만든 다음에 죄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이해하는 힌트로 적용시킨 거다. 인물 파일을 만들 때 본래 타고난 이 사람의 성격을 먼저 설정한 뒤, 그 사람의 서사를 만들게 된 거다.
마을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라면 이장은 뿌리와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이장은 다른 캐릭터보다도 극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존재를 구상하는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사람 많지 않나? 특히 사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점유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화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수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몰리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더라. 만약 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틀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순간, 이제 이장 같은 사람이 되겠지. 그런 흔한 성격을 극대화시킨 거다. 사실 류해국 아버지 같은 사람도 흔하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봐왔는데, 작은 교회에 가보면 마치 절대자인 양 행사하는 목사가 많다. 목사가 없으면 전도사가 그 역할을 하고 앉았다. 권사만 해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똑같은 시골 촌부인데 권사네, 장로네, 이런 이유만으로 어른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 정식으로 교단에서 인증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고 그로부터 추출해온 성격을 약간만 세게 변형시켜버리면 <이끼>같은 집합이 생긴다.
마을은 죄의식의 연대로서 은둔하는 장소다. 그 공간의 성격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사람이 독립적인 거 같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의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춰야 될 것이 많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부분이나마 노골적으로 감싸주는 방어막이나 울타리 같은 존재를 항상 염원한다. 예를 들어 집단 섹스를 해도 서로 용인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죄의식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운 거지. 그래서 결국 그 마을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거고. 예를 들어서 기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인데 왜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주고 그랬을까. 그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대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위로를 얻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악마를 키우는 거다.
<이끼>에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 많다. 특히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호감을 끌어내기 보단 지나친 자기 아집과 오기로 뭉친 인간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증발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반에 보면 류해국 보고 ‘얘 뭐냐, 진상이냐, 이 새끼 뭐냐. 진상이다. 짜증난다’ 이렇게 욕하는 댓글도 많다. (웃음) 나도 공감한다. <야후>할 때도 선배들이 그랬다. “야, 걔가 주인공 맞아? 걔 너무 찌질해!” (웃음) 내가 그런 모호한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인물의 정서에 동의를 해주고 싶다가도 그런 인물이 막 싫어지기도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에 옮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끼>의 이장은 단순히 악인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실적인 윤리 안에서 분명 악으로 규정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물만의 명확한 합리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부조리 자체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내가 작은 세계에서도 상처받고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보니까 자신을 합리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 방어기제가 잘 발달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류해국 아버지를 보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고, 이장은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 둘의 충돌을 그리고 싶어졌다. 자살에 있어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스스로 숨을 멎게 해서 죽지 않나. 인간으로서 정말 할 수 없는, 자율신경까지 점해버린 사람이다. 결국 그 극단적인 죽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박탈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장이 그 마을의 절대적 메시아라면 마을 사람은 그에게 고해를 받고 구원을 얻은 존재다.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쫓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마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하는 침입자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순환하던 마을의 생리를 훼손하는 바이러스이거나 박테리아 같은 존재로 마을사람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믿음 자체를 통해 평온한 연대적 삶을 이루던 집단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한편으로 <이끼>가 종교적 믿음의 형태에 대한 도발을 던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아, 정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사실 내가 어릴 때 나름대로 교회를 진지하게 다녔다. 그래서 <이끼>의 기도원 신을 그리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렸던 거 같다. 특히 맨 마지막 회 작업할 때, 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예전에 같이 교회 다녔던 선배 형이 군화에 교련복 상의, 군복바지를 입고 기도원 샤워실로 나를 끌고 가더니 나를 두들겨 패더라. 그래서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잠을 확 깨버린 거죠. 덕분에 안 그래도 <이끼>마지막화 분량이 많았는데 잠까지 설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도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교적인 죄의식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그게 도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하나님, 예수님, 이런 용어는 절대 쓰지 않고 절대자, 신, 이런 단어만 썼던 것도 다 그걸 피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어떤 특정종교에 국한돼서 해석되는 건 위험했을 거다.
그런 식으로 한정되게 이해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절대자에 대해 탐닉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던 거지.
믿음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숭고하지만 그 행위적 목적은 때로 불순하고 도피적이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살인범을 면회 갔을 때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도연 씨가 대사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널 용서하냐.” 개인적인 신앙은 때때로 공공적인 윤리를 무력화시킨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한다. 결국 이장에 대한 신앙적 믿음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은 현실적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마을이라는 도피처에서 살아간다. 결국 류해국은 그런 도피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다시 출렁이게 만드는 존재다.
헤집어버린 거지. 다시 원래대로 세팅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곤란해지고.
어떻게 보면 류해국은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인간들의 나약한 양심을 뒤집어 끌어냄으로써 그 실체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되레 자신의 부조리한 정서마저 극복하게 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각각 5년 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 정권을 빼앗긴 세력들이 항시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사람들은 지금 야당인데 전혀 야당같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오히려 정권을 잡은 쪽이 계속 힘들어하고, 이제 다시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언제 우리가 뺏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잡아왔던 사람들처럼 쉽게 안착하고. 이 사람들은 어쩌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와서 자기네 룰을 헤집어 놓는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처가 쪽 집안이 좀 잘 산다. 그런데 처가 쪽 친척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촛불집회하고 그럴 시기였다. 처가 쪽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작은 아버님 한 분께서 그때 노무현 전대통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새끼가 어디 대통령이나 했다고 저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숙모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왜들 저래. 지금 대통령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응원은 못할망정 촛불집회나 하고 있어.” 그 양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 당선됐을 때부터 욕을 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응원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나에게 한나라당 입당 원서까지 주셨던 분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은 병균 보듯이 하고, 마치 급이 다른 녀석이 어디 와서 까불고 있냐는 식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던지고. 그 때가 <이끼>를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쓸 때, 조직과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 깊게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힘으로 구축한 정의라고 할까.
정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들끼리의 룰이지. 그곳에 류해국이 들어가서 하나씩 툭툭 건들기 시작하니까 얘네들은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쁘고, 점차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와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에 걸친 많은 해석들이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그런 건 그 분들 마음이지.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런 외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나는 무아의 경지에서 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담고자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나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은 내 작품이 보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정치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댓글을 다는 건 그 사람들 마음이고 자유로운 권리다. 내 만화에서 그런 코드를 읽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걸 내 만화를 통해서 본 것뿐이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대단하다 싶은 해석들이 댓글로 달리는 건 어쩌면 내 작품에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겠지. 나는 <이끼>나 <야후>가 우화 같은 풍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내러티브보단 인물에 관심이 많다. 어떤 반전을 넣어서 깜짝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기승전결의 감동보다는 이 인물을 따라가다가 혹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사건을 배치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야심 차게 머리를 돌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류해국이 부정하려 하는 맞은 편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류해국의 아버지나 이장이나,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메시아적 능력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류해국의 아버지는 이장에게 눌리고 이장은 류해국의 손에 처단된다. 권력적 관계가 결과적으론 인간에게 얼마나 허망한 게임인지를 인식시키려는 대목아닌가. 권능에 가까운 위력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던 인간일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게 힘을 발휘해왔는지를 드러낼 때 그 내면에 놓인 인간의 존재 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별자리 배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나에겐 훌륭한 변명거리지. 나는 박탈감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의미부여하지 말라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죽을 사람들이고.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이 있고, 기왕에 사는 거라면 삶의 색채를 더 밝게 가져가는 게 맞겠지. 자기가 자기를 긁어가면서 사는 거보단 조금 무책임해 보일 정도로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겠더라. 처음에 류해국을 처단시키자고 결정했지만 나중에 류해국을 처단하지 않고 포지티브한 영역으로 끌어올리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발전적 고민의 결과였던 거다.
그런데 그 별자리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순정만화가 이황주 씨와 친했는데 그 분이 우연찮게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래서 김준범 씨와 같이 공부했지.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
별자리를 공부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점지하는 것을 배우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진 않았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시작한 거라서 남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많더라.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한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생일이 언제냐고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 쉽게 단정하려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실례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고 제 머릿속으로만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은 잘 모르잖아. 정보가 부딪히는 거지. 어떤 면에서 이건 폭력이다. 그래서 난 그런 게 싫다. 그 사람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그런 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됐나?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명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렇구나,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많고, 탐욕스런 과거가 떠오르거나 낭비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들과 오해를 일으키고 그런 오해를 쌓아둔 부분들에 대해서도 왜 그런 문제에 좀 더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쉽게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스스로 대인 관계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얼마나 닫힌 성격이었냐 하면,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긴 다음에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도 그만 두고 나왔는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화실에서 선생님들이 화투를 치면서 새벽마다 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한번 화투판을 엎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조운학 선생님한테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집단으로 난리가 났지.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거다. 난 왜 그럴 때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이끼>의 류해국이나 <야후>의 김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캐릭터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 반영된 측면이라 봐도 될 거 같다.
그럴 거다. 자기 반성적인 면은 그래서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죽였거나 죽이려 했던 셈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캐릭터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음, 그렇다기 보단 나를 캐릭터에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나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반영된 이 캐릭터들도 이 사회에선 안 되겠구나, 라는 식으로 접근된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구나 싶었던 거지. 그러니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소멸이 돼야 맞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한쪽으로 굉장히 오만한 구석이 있다. 내 속에 오만한 탑이 하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는 폐허 같은 정서가 채워진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나에게 남을 굉장히 잘 깔보는 태도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되다 보니까 어차피 얘네들도 이 사회에 적응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회와 융화할 수 있는 타협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끼>는 결과적으로 <야후>에 비해 그런 정서를 덜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만큼 스스로도 변한 게 아닐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사소하게 차끼리 시비가 붙었던 걸 보게 됐다. 서로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싸우면서 “야, 쳐봐, 쳐봐!” 이러면서 길 한가운데서 뒤엉키더라. 그 길 옆에 많은 차가 있는데도. 나는 남의 눈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하거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공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사는 구나 싶었다. 그게 내 눈엔 천박해 보이지 않는 거다. 나는 쪽팔려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 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깡이 놀랍더라. 아이 낳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소한 거라도 싸워서 쟁취하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나는 결코 그렇게 안 되더라.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종의 박탈감을 느낀다. 형태를 떠나 그 너비나 크기로서 중요한 존재감을 행사하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 인물들은 결핍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세상에 대한 분노나 다른 세계에 대한 공격성으로서 충만하려는 것만 같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만약 내가 박탈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만큼의 실패나 상실을 맛보게 되면 그 반대영역에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생길 거다. 특히 내가 그런 게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런 게 강하게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이끼>의 류해국도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설정하려 했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바꾸게 된 거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변해간다. 엄한 데서 보상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안에서 싸워야 한다. 상실감이 있으면 싸워서 얻어내든가,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든가. 지금 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지녔다 해도 다음 투표 때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다면 이건 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상실감을 엄한 데서 채우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거지. ‘세상 이렇게 됐으니 나도 모르겠다. 투표고 뭐고 그냥 여행이나 다니자.’ 이러지 말자는 거다. 자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석에서 그걸 다시 챙기고 뚜렷하게 싸워야 한다.
류해국을 죽일까 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결국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주변의 요구가 어쩌면 시대적 요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류해국은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덕분에 박 검사도 힘들어졌고. (웃음)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모른 체할수록 자신의 안위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들춰보고 캐내고 찌르다 보니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어려운 건 그런 피곤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불편한 정의보다도 편한 불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그런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뤄진 게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런 가치에 대한 보상심리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만화에서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위로 받아야 할 곳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 국가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니 각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만화가로서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 ‘아고라’를 보면 종종 ‘벌써 죽었냐? 촛불집회 그거 그냥 유행이었냐?’ 이러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원하는 정권으로 교체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다 대변해주는 건 아닐 거다. 그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궁극적으로 현 정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항시 환기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서로 위로해줘야 한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해서 대기업의 비리가 정의롭게 파헤쳐진 적 있었나? 결국은 그 너머에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단지 이명박 대통령 욕하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닌 거다. 단지 표면적으로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노골적인 문제가 발견되니까 그렇게 거대한 시위적 형태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거대 기업, 자본, 흔히 말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과의 싸움은 대를 이어서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구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게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줬다 믿으니까.
<이끼>는 제도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고,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합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후>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다. 어쨌든 <야후>나 <이끼>처럼 정치적 해석이 동원될만한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작품으로 인지도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나?
그런 부담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론 창작자지, 사회 운동가는 아니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안에는 사회관찰자 입장으로서의 피가 많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이 나를 점유해버릴 수는 없지. 그걸 경계하기도 하고. <이끼>도 특별히 정치적으로 풀어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마 그런 목적을 노리고 시작한 작품은 <야후>가 유일했다. 다만 우연찮게 <이끼>를 독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엮다 보니까 나도 문득 ‘이렇게도 풀이가 가능하구나’라는 지점이 생겼다. 나는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야후>에서 나오는 수경대의 비행용 바이크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특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명백히 허구지만 막강한 공권력의 도구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구가한다. 요즘 세태에 너무 잘 어울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의 세태에 대한 기시감을 뒤늦게 느낀다. 비행용 바이크라는 날아다니는 기체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애초에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오토바이 기동대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지엽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날아다니는 걸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워의 특성이 강한 서울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지상은 어렵겠다 싶더라. 어쨌거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고, 그만큼 기동력을 확보할만한 수단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헬기도 생각했는데 사실 헬기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비행체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던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쯤 있으면 어때?’란 생각도 하게 됐지.
사실 <야후>에서 수경대만 빼면 리얼한 시대극 만화가 된다. 그리고 그 수경대의 비행기체는 <야후>에서 만화적 상상력으로서 발휘된 가장 특별한 이미지다.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한번은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 교수를 하는 선배가 너무 안타까워하는 거다. 선배가 수업 중에 계속 이야기했단다. “너희 <야후>라는 만화 꼭 봐라. 우리 시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마 <야후> 6~7권 즈음에서 수경대 비행바이크가 나오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야, 이거 뭐니? 정말!’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는 거야. 오토바이로 해도 됐잖아. 왜 이걸 넣는 거니?” 이렇게 너무 안타까워하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그걸 진짜 넣고 싶었거든. 그때만 해도 주인공이 서울 시내를 날아다니면서 벌이는 총격전을 보여주는 내용을 생각했으니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와서 ‘아싸!’싶었던 게 있다. <야후>최종 권에서 50미터 탄이라고 50미터 넘으면 뻥하고 터지는 총알이 나오는데 그 총알이 최근에 개발됐다 하더라. (웃음) 거리를 정해서 쏘면 엄폐물 너머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서 화약이 터져서 사상을 입히는 거다. 그 뉴스를 보면서 ‘아, 내 머리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어.’ 싶었지. (웃음)
<야후>도 그렇지만 <이끼>에서도 분량이 늘어날수록 그림체의 변화가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하는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슬램덩크>조차도 첫 단행본과 마지막 단행본의 그림체가 판이했으니까. (웃음) 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어쨌든 작가로서는 뒤늦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일 거다. 사실 <이끼>의 댓글에서 종종 ‘작화붕괴’라는 말이 보이더라. 심지어 후기에 직접 그걸 거론하기도 했고. (웃음)
거기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한다. (웃음) 사실 80회씩이나 되는 장편을 하다 보니 사람이 그 정도 그리다 보면 뭐가 늘어도 늘거든. 보다 능수능란해지면서 더 잘 그리게 되는 거지. 특히 나는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잘 그리지 못한다. 학창시절에 보면 만화를 잘 베껴서 그리는 애들 있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걸 잘 못해서 남의 그림을 베껴본 적은 별로 없다. 거의 내가 만들어서 그림을 그려봤지.
모사가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 애들은 로보트 태권V, 마징가도 잘 그리는데 내가 그리면 뭔가 비율도 맞지 않아 보인다. 태권V라고 할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결과는 태권V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렇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다 보니까 류해국 같은 주인공은 제발 같은 그림으로 나오기 쉽게 개성을 분명히 담아보려 했다. 그 삐쭉하게 만든 코 같은 거. (웃음) 그런데 박 검사는 개성이 모호하다 보니까 매회마다 자꾸 얼굴이 바뀐다. 사실 이현세 선생님처럼 개성을 강하게 주면 작화붕괴가 일어날 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쓰는 그림체가 그런 경향을 더 심하게 가중시키는 탓도 있다.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모니터 하나에 실제 그림 사이즈보다 200%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얼굴을 그릴 때도 눈썹 하나만 모니터에 꽉 채우고 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를 그리고 있는 건지 모니터만 봐서 잘 모를 때가 생긴다. 선 하나 그리고, 축소해서 다시 보고, 다시 키워서 또 그리고. 물론 이게 변명은 안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니까. (웃음)
인물들의 신체비율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웃음) 그런데 그런 불균형한 느낌이 후에 오묘한 특징으로 인식된다는 기분도 들더라. 뭔가 상당히 기괴하다고 할까.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런 어설픈 방식도 몇 회를 가면서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이 맞춰주더라. (웃음)
<이끼>엔 스크린적인 이미지가 많이 동원된다. 롱테이크가 연상되는 컷도 이어지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핸드헬드적인 이미지가 연출되는 느낌도 들더라. 컷 자체에 기능적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하지만 특별한 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일반적인 출판 만화는 정보가 양 페이지로 한꺼번에 확 들어온다. 예측이 가능하지. 그런데 웹툰은 작가가 하기에 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한 장면만 눈에 띌 수 있게 구성이 가능하고 계속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봐야 하니까 잔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잔상을 이용하기 위해 반복컷도 많이 쓴다. 매번 다른 컷들로 이어지면 잔상이 남을 여지가 없어지니까 비슷한 표정의 컷이 반복돼야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예상치 못한 컷이 떡 하고 올라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크롤 만화의 장점이 그런 거다. 독자들의 점유력이 세진다고 해야 하나. 말한 대로 한 컷 한 컷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출판 만화엔 배경이 없는 컷도 무지하게 많으니까 주인공 얼굴로만 때워도 되는 컷도 있지만 웹툰에선 매 컷마다 컷 자체의 밀도를 유지시켜줘야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배경도 계속 깔아줘야만 된다. 그런 전제로 가다 보니까 작업 자체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리듬이다. 재미도 리듬에서 생기니까. 처음엔 그 스크롤만의 리듬을 못 잡아서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게 정말 재미있나?’ (웃음) 의심도 들었다. 반복해서 볼수록 나는 익숙해져 버리니까 제3자들의 반응을 모르겠더라. 다행히 10회 정도 지나고 보니까 어느 정도 조절이 됐다.
방금 했던 말처럼 강도하 작가와 같은 기존의 만화가들은 테두리의 구획에 정확히 색의 경계가 나눠진다는 느낌인 반면 <이끼>의 색감은 회화처럼 번지는 느낌을 준다.
포토샵 툴 중에 직선을 그리는 툴이 있다. 사실 이걸로 대부분 라인을 따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문하생들한테 작업을 시킬 때도 그걸 못 쓰게 한다. 다 손으로 따서 그리게 만든다. 비뚤어져도 상관없다고, 흔들려도 상관없으니까 손으로 그리라고 한다. 유리라면 모를까, 실제 건물벽을 흙으로 미장센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직선은 아니거든.
매체의 변화에 따라 그림체에서도 변화가 생기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엔 인물을 그리는데 그 툴의 사이즈를 너무 두껍게 했다가 가늘게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작화붕괴니, 그림체가 다르니,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게 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던 거지. 후반부로 갈수록 체계가 잡히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도 사라졌다. 사실 스크롤 만화가 영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매 컷마다 그림 사이즈를 다르게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최대한 컷은 유지한다. 그렇게 와이드 컷을 유지하다 특정장면에서만 변형을 시켜줘도 그게 별로 충격을 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덕천이가 할머니 귀신을 보는 신에서도 비슷한 사이즈가 유지되다가 마지막 컷이 길어지니까 독자가 봤을 때 공간감이 확 넓어진다고 느껴져서 순간 놀랐을 거다. 갑자기 정보량이 많아진 거니까. 이장이 주인공 아버지 목을 잡고 훈계하는 신에서는 거의 이장 얼굴만 쭉 나온다. 독자가 마치 이장에게 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장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독자한테 이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에서 “이번엔 날로 먹었네?”하기도 하고. (웃음) 이현세 선생님이 그리는 까치는 어떻게 그려도 까치다.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 쪽 작가들은 그림이 조금만 변형돼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나도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린다는 게 부담이 크다. 특히 나같이 동일한 얼굴을 잘 못 그리는 작가는 카메라 각도만 바뀌어도 새로운 얼굴형이 막 나오거든. 그니까 그 클로즈업을 하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부담인데 그걸 날로 먹었다고 하니까 황당하긴 했다. (웃음) 하여튼 스크롤 만화는 그런 장점이 있다. 두 페이지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절대 못 가거든. 갈 수가 없다. 왜냐면 많은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와버리니까.
웹툰을 하면서 그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방식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결말부로 갈수록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다 보면 속도감이 부여되는 신이 있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아웃 포커싱되는 느낌의 컷이 많았다. 동시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릴수록 프레임의 속도감이 연출되는 기분이 들더라. 기존의 웹툰과도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웹툰 작가들이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토샵 툴을 쓴다. 솔직히 내가 그런 기능을 전에는 몰랐던 거지. (웃음) 하다 보니까 포토샵 기술이 늘어서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해서 알게 된 것들을 쓴 거였다. 아마 초반부부터 그 기능을 알았다면 초반부부터 적극적으로 썼을 거다. 다만 초반부는 좀 정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었으니까. 물론 후반부도 정적이지만 영화로 치자면 풍경 자체는 정적인데 왠지 드럼 소리가 사운드로 깔리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리고 만화에는 사운드가 없으니까 이미지로 그런 느낌을 좀 주려고 했던 건 있었다. 굳이 내가 실험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끼> 단행본도 발간되고 있는데 애초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의 <이끼>와 같은 형태는 불가능했을 거다.
머릿속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서 책으로 나올 거니까 책도 고려해야 돼. 이렇게 작업은 못 하겠더라. 왜냐면 웹툰에 적응하고 웹툰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버겁고 힘드니까 출판까지 고려해서 작업한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이렇게 보여줘야지, 이런 건 전혀 없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하다 보면 문하생 때 배워왔던 관성대로 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법도 쉽게 가고. 그러니까 만약 웹툰에서 실험적이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점점 늘어간다는 거?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발견을 느끼면서 ‘이런 것도 넣어봐야지. 이것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컬러링 작업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작업도 천차만별일 텐데 웹툰에 컬러가 들어간다는 것도 과거와 작업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발생한 시도적 차이도 있었을 테고.
진짜 힘들지. 출판 만화할 때는 먹만 필요했다. 흑백만화다 보니까 제일 센 표현이라면 먹칠이었다. 그런데 컬러 만화이다 보니까 어디에 포인트를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 자기 색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색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까 작정한 게 차라리 전체적으로 톤을 다운시켜버리자는 거였다. 아예 무채색 계열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리고 대신 빛으로 음영을 묘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통일감도 주고, 음영이 생기면 좀 더 인상이 강렬해지는 게 있잖아. 색을 쓴다는 기분 말고 빛을 묘사한다는 기분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색을 쓰는 건 기본적으로 작업시간도 더 걸릴뿐더러 색에 대한 계획도 갖고 가야 하니까 힘들거든.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신이 생각나는데 류해국 아버지가 기도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는 복도 신에서 시체들을 음영으로 표현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차라리 구체적인 실물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어서 실루엣만 감지시켰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 자체가 보다 증폭되는 것 같더라.
아무리 어둡게 해도 노트북 모니터로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 그래서 최대한 노트북에서조차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게끔 하려고 그렇게 어둡게 해놨는데 누가 그 조잡하게 펜터치 돼있는 걸 포토샵으로 완전 밝게 만들어서 댓글에 올려놨더라. (웃음) 그때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미안한 게 또 그 밑에 사람들이 댓글로 욕을 써놨더라. 알아는 볼 수 있게 해놔야 될 거 아냐, 하면서 욕을 써놓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여튼 그렇게 어둡게 된 장면도 웹툰에선 적극적으로 쓸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해놓으면 인쇄가 떡이 져버린다. 스크릴 톤을 여러 번 붙여놓게 되면 미세한 알갱이들이 인쇄하면서 다 뭉개져 버려서 효과가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컬러만화라서 채도 만으로도 색을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이끼>는 항상 도입부에 어떤 중요한 풍경을 프롤로그처럼 전시한 뒤, 타이틀 컷을 배치하고 본격적인 작품을 밀고 나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키를 쥐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먼저 전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적인 컷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경묘사에 공을 들이고 빛과 음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혹시 만화보단 회화적인 부분에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는지 궁금하더라.
컬러만화를 하게 되니까 회화를 많이 보게 됐다. 최근의 모던회화 말고 클래식한 거 있지 않나. 네덜란드 풍경화 같은 걸 많이 봤지.
사실주의적인 고전회화 말인가?
그렇다. 풍경을 많이 담았던 고전주의 회화 같은 거. 특히 <이끼>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 묘사되는 장면 같은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참고한 거다. 회화만 쫙 올려놓는 블로거들 있잖아. 달빛이 정말 대낮처럼 환한 밤을 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계속 살펴보게 됐다. 그러면 구름은 이렇게 묘사하고, 이건 이렇게 묘사하고, 이런 걸 계속 분석해보고 내 작품에 적용해보기도 하는 거지. 강도하 같은 경우, 나무 숲을 그릴 때 윤곽을 잡아서 색을 넣지만 나는 나뭇잎을 다 그린다. 터치가 많이 들어간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사실 강도하처럼 그리는 게 애니메이션적인 기법인데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를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수채화 전공의 입시미술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색에 대한 직관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경험적 기반이 있어서인지 회화작품들을 참고한 게 도움이 됐다.
원래 미대를 진학하려고 했다던데.
실패했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웃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품은 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이미 만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만화 전공 대학이 없으니까 당연히 미대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자기가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설정은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미술을 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만화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대를 선택했던 건가?
비슷하다. 만화는 너무 좋았지만 만화가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고, 만약 직업이라도 하나 갖는다면 화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했던 거지. (웃음) 그렇게 ‘미대 갈까?’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졌고, 우리 집 경제상황이 나를 재수시켜서 대학에 보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가 돼야겠다’가 된 거지. 학교 다닐 때도 진로 상담을 받지 않나. 난 항상 ‘그걸 왜 하지?’라고 생각했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진로가 없나?’ 생각했지. (웃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왜 고민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몰라도 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화학을 좋아한다는 애가 경영학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웃음)
결국 미대 진학이 좌초되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고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항시 어려웠지. (웃음)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명확한 진로가 잡힌 게 아니었을까.
만화 그리러 서울로 올라온 것부터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루트를 모르니까 만화학원을 가게 된 거지. 그런데 그 만화학원 원장님이 만화가 협회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싸운 적이 있어서 전화번호조차 가르쳐주지 않더라. (웃음) 결국 나 혼자 앞길을 찾아야 했던 거지. (웃음) 한때 아파트 벤치에서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벤치 생활하던 멤버 형이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들을 만나게 돼서 연락처를 받아와서 나한테 가르쳐주더라. 결국 허영만 선생님이 계시는 은마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알게 됐고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노숙도 했던 경험이 <야후>에서 김현에게 반영됐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상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아까 말한 아버지에 관한 심상도 그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목하는 부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 특별한 감상을 얻는 게 아닐까 싶더라. <야후>의 단행본 표지에 그려진 건 항상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이끼>의 단행본 표지 역시 얼굴이더라.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면적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사람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모티브나 소스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찰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에겐 상실이나 결핍의 정서가 굉장히 많다. 어릴 때 미술대회에서 받아온 상장을 벽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놨었다. 그런데 남의 집에 가보고 나서 상장은 액자에다 걸어놓는구나, 처음 알았지. (웃음) 어쨌든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는데 우리 집을 사러 온 사람이 벽 안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본다면서 그 벽지를 다 찢더라. 그래서 상장이 남아있는 게 한 장도 없다. 내 상장이 찢어지는 걸 내 눈을 목격하기도 했고.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데, 상도 많이 받는데, 왜 내겐 항상 그 다음이 없지?’ 싶더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그 다음이 없는 거다. 상실감 같은 거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 칠판의 절반을 내주셔서 분필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숙제 검사조차도 그림 연습으로 대체해줄 정도로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집에서는 왜 인정을 못 받을까, 이런 생각들.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도 아버지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 그 까짓 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놓고 본인이 다 망한 뒤에 자신 없을 땐 “너 대회 나가서 상 받았냐?”고 얄밉게 물어보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이 안타까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짠하고,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란 생각을 자주 품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보니까 별자리 공부도 하게 된 거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
그래서 결국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나?
그냥 난 또 다른 걸 무언가를 위해서 결핍이 돼있구나, 라는 거. 다른 뭔가를 강화시키려다 보니까 이런 결핍이 된 거구나, 라고 인정하게 됐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각자 다른 미션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까. 그 미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옵션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강화된 옵션이 있는 반면, 결핍된 옵션이 있는 셈이지. 마치 야구팀 운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구단주 게임을 예로 들면, 자금이 한정돼 있지 않나. 선동렬 한 명 산다면 나머지 선수는 리틀 야구단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 퀄리티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주력 선수 몇 명을 올리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누구나 똑같이 100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90이 한 면에 몰려있는 거다. 어떤 회장이라는 사람은 전생에 조상이 나라를 구해서 그게 돈 버는 쪽으로 갔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그게 아닌 거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많이 강화된 사람이더라. 그런데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런 결핍에 대한 포지티브(positive)한 보상이 항상 있다는 거다. 물론 네거티브(negative)한 보상도 있고. 네거티브는 사람을 파멸로 몰 수도 있지만 포지티브는 그 결핍으로 되레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고 할까. 8년간 별자리 공부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도 넓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는 선이 뚜렷해졌지. 얼토당토않은 걸 탐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잃거나 기회를 빼앗기지 말고 확실히 하자. 사실 이 회사에도 그런 각성이 없었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나니까 내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뿐이지, 남이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자화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혹시 요즘 주시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있나?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빤하게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에 ‘수유 너머’라는 곳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면 8년 동안 배운 별자리를 다 소진한 상태라 이걸 다시 끌어와서 국물을 우려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스로 처참해질 때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생활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러나와야 진짜 좋은 내용이 나오는 건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남의 책을 뒤적이고 남의 영화를 살펴보고, 그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수면 위로 뭔가 떠올리기 전에 그 수면 아래에서의 활동이 좀 바쁘게 필요하겠더라.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강의도 많더라. 문화강의도 많고. 그렇게 뭔가 배워보려 한다.
강단에도 서고 있다고도 들었는데.
세종대학교에서 하고 있다.
강단에 서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전한다는 건 어떤가?
강단에 서는 친구들은 막상 자기가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얻어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학비가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그 학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수업 준비를 해보니까 6~7시간 걸리는데 마감해가면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얻어오긴 뭘 얻어와. (웃음) 그 애들이 수업 끝났을 때 ‘아, 오늘 뭐 좀 들었네.’ 이런 느낌이 들 정도가 돼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진중권 씨가 쓴 ‘미디어 아트’란 책을 읽으면서 ‘아트 앤 스터디’라는 문화교양 웹사이트에 매달 돈 십만 원씩 내고 유료강의도 들었다. 내가 애들한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웹툰을 고민하지 말고 디지털 만화를 고민해라.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창작자라고 생각해라. 만화도 창작의 한 범위니까. 우리 시대에 너무 흔해져서 가치 없는 말이 많다. 정의, 도덕, 교양. 특히 교양이란 말은 원래 의미에 비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쓰이지.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교양이다. 창작자는 교양인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계속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발표하게 만들어서 그 애들을 발가벗기려 한다.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단편만화를 가르치는데 단편 만화 기획서를 써오라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한 명씩 발표시킨다. 이걸 왜 기획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설득해보라 한다. 핵심적인 건 이거다. 말로 하지 못한 관념은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글로 써보고 말로 표현해놔야 된다. 그리고 말 못하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 없다. 글을 잘 쓰려면 말도 잘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앞뒤 분명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말은 어눌해도 상관없다. 대신 앞뒤를 맞춰라. 그래서 여기 앉아있는 네 동료들이 네 작품을 사가야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입장에서 네 생각을 최대한 매력 있게 설명해라. 그렇게 먼저 기획서로 전부 다 심사한다. 그 다음에 콘티를 짜오게 한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가 콘티에서 어떤 리듬으로 표현됐는지 프로젝션으로 쏴서 이 장면은 어떻게 그릴 거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했다는 걸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걸 그리기 위해 어떤 사진자료를 취재했는지 그 과정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그 과정에 걸맞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점수를 주는 거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배운 성취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만화가로서의 기능력보다 생활력을 학습하는 교육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 출판사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연재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면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인의 어떤 능력을 알고 같이 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할까라는 거다. 최소한 자신의 매력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한 분야를 이끄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던지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지. 뽑아낸 작품도 별로 없는데 중견이 돼버렸으니까. (웃음)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갔을 때 허영만 선생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허영만 선생님은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이미 한 100타이틀 가까이 그린 작가였으니까. 나는 아직 20타이틀도 꼽지 못한다. 만화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모를까.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책임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에피소드 형태의 단막극으로 진행되는 웹툰이 서사적 호흡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사적 연재로 이뤄진 웹툰을 주목 받게 만든 시초는 강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서사적 형태의 웹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독자의 주목을 얻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끼>도 그런 흐름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면 출판 작가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서사가 없는 작품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서사적 형태가 작품의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개그물을 한다 해도 서사가 있는 개그물을 하고 싶지. <아색기가>같은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 있질 않다. 사실 흥미도 별로 없고. 물론 (양)영순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내가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사실 웹툰으로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은 했다. 원래 웹툰은 유머 사이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만화적인 패러디물을 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그런데 기성작가로서 그런 후배들이 만들어놓은 웹툰이란 판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들어온다는 게 실제로 굉장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도 됐고.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나도 후배들이 했던 것처럼 간결하게 치고 나가는 형식을 따라 한다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강풀이나 강도하가 몇 년에 걸쳐서 서사적 만화 폼을 웹툰에 안착시켰고 나는 다행히 서사라는 게 웹툰에서 인정받는 시기에 여기 들어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서사적 폼으로 웹툰에 들어오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그 역할을 똑바로 맡고 싶었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 작가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 대표적인 웹툰 작가다. 반대로 당신은 기성 매체 작가로서 매체의 변화에 편입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매체에서 적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굉장히 부끄러웠지. 그리고 못하면 어쩌나 싶었고. 예를 들어서 가령 댓글 개수조차도 액면으로 쫙 나오지 않나. 이게 개그작가보다 못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웃음) 물론 작품의 경종을 극화냐, 개그냐, 로 나눌 수 없지만 좀 더 둔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함의도 못 잡아내면 처참할 것 같았다. 특히 경력이 20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기존의 웹툰 작가들만큼의 흥미도 못 끌어내고, 싸구려처럼 말하자면 낚시 정도도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닌가 싶더라.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웹툰에서 작업하던 후배들보단 많은 돈을 받으니까 그만큼 돈 값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서 연재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이끼>를 끝내고 나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갔지. 이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강풀 보면 신기해죽겠다. 어떻게 연달아서 저렇게 뻥뻥 터뜨릴까. (웃음) 나는 한 3년 헤매다가 이제 이야기 하나 나왔는데, 신기하지.
결과적으로 <이끼>는 웹툰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도 사실 거의 안 만난다. 강도하, 이충호 씨, 아니면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 이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에는 댓글만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댓글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가 생기더라. 누가 댓글로 이슈 하나 던져놓으면 그 의견에 시비 걸기 위해서 내 만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 거다. 그럼 결국 만화하곤 정말 상관없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 판단이 드니까 댓글이 수백 개, 천 개 달려도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다는 건가 싶어지는 거다. (웃음) 그리고 조회수로 고료를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다음은 네이버에 비해 조회수가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냥 ‘난 아직 멀었네?’라는 생각만 들고. (웃음) 그래서 또렷하게 내가 뭘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사실 웹툰하면서 영화 계약한 후배들이 많다. 다만 강풀 말고는 이슈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나는 이슈 메이커라고 할만한 강우석 감독님이 연출을 맡으면서 그 덕을 꽤 본거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과연 <이끼>가 반응이 있나 싶더라. 길 다니면서 누구한테 사인을 해줄 일도 없었고, 동네 아파트에서 동대표 나와라, 이러면 나가고. (웃음) 네이버 ‘한국인’에 실리고 이랬을 때 요즘 내가 조금 이슈가 되나 보다, 이 정도지.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런데 (강)풀이는 만나보면 확실히 그런 태도가 있다. 지금 웹툰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그만큼 자기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기준점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그걸 각성하고 산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 그냥 풀이가 “형, 이렇게 해보죠.” 그러면 “그래.”하고, 내가 풀이 등을 타고 간다는 생각이지. 아직은 내 위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어차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지우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님께서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 말고 의미부여를 해주시니까 너무 송구스럽고 감사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아서 허투루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영만 작가님도 다음에서 <꼴>을 연재했다. 현재 출판만화의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그 대안으로 웹툰이 부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존 출판만화에서 중시했던 만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밟히기도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기본적인 기능적 자질이 부족한 작품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런 과정에서 종종 기성 작가들과 웹툰 작가들 사이의 신경전도 없지 않은 거 같다. 매체의 변화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분명 고민이 있지. 나는 만화가들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출판만화의 어법을 왜 고정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든다. 나도 거기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만화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웹툰이 가진 좋은 장점이 많다. 출판만화가 포기했던 장르의 다양성이라던가, 그 동안 출판만화가 도외시했던 독자층의 흡수, 이런 것들은 웹툰이 가진 큰 장점이라고 본다. 대신 출판만화는 신인작가가 등용해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그 신인작가도 출판만화의 관습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자기의 개성을 보이기 보단 편집장 한 사람의 안목을 통과해야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출판만화니까. 그런 점에 비해서 웹툰은 순기능이 많다. 기본적으로 웹툰이 아닌 디지털 만화를 염두에 둔다면 모바일이나 이북(e-book)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시 어마어마한 환경변화가 이뤄질 거다. 이랬을 때 언제까지 출판만화의 폼에 대해 고정적 확신을 주장해야 하겠나. 물론 그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그쪽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웹툰이 출판만화에 대한 관심도를 흡수해버린다는 이유로 공격 아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저하시켜버렸다나. 그런데 본격적으로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들이 먹고 살만큼의 고료를 받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안팎이다. 그런데 출판만화는 3~40년이나 된 분야다. 자기들이 자신들의 어법을 고민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밀리게 됐는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파이가 좀 넓어진 상황에서 그 넓어진 파이에 대해 돌 던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자멸하자는 뜻이지. 스스로 내적인 고민을 하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변해야 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출판만화를 책으로만 파는 게 한계가 있다면 이게 디지털 컨텐츠로 전환됐을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으면서 여전히 일본만화만 수입해오고, 그러면서 수입구조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의 마인드에 너무 많은 한계를 지어준다. 출판만화의 형식이 정확한 폼인 것처럼 강요한다던가. 그런 게 나는 못마땅하다.
안에서 느끼는 갈등이 생각보다 깊나 보다.
기성매체가 웹툰을 공격하는 논리는 딱 그거다. 결국 웹툰은 수입구조가 없으니까 허상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 인터넷 IT 비즈니스라는 게 끊임없이 개발되는 중이고 계속적으로 도구가 개발되고 모델이 나오면서 또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웹툰 시장만 보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정작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포털의 웹 구조만 보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IT환경에서 많은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하는데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허수네, 뭐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굉장히 비겁한 행위일뿐더러 나라 전체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도 그건 아닌 거다. 성공을 기원해줘야지. 그렇게 힘을 합쳐서 자기네 컨텐츠도 잘 되게끔 가야지. 웹툰이 망한다고 자기들이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으면서 왜 거기에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앉아있는 사람끼리 뛰어가는 사람 다리 걸지 말고, 같이 뛰든가, 손을 내밀든가 하자는 거다.
류해국처럼 뛰어들어서 뭔가를 헤집어 놓을만한 발언이다. (웃음) 만화가로서의 기능적 창작력을 넘어 산업적인 생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만화 그리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말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야 한다. 자기의 시효가 끝났을 때는 독자 앞에서 사라져도 되지만 나를 대체하는 누구 때문에 내가 밀려나는 상황은 없어야지. 적어도 몰개성적인 작가는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만의 작가적 역량을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자라는 분명한 자기 태도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말한다. “나는 극화 만화가가 꿈이야, 이렇게 단정하지 마라. 말이 다 빚이 된다. 너희가 경험할 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예전에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에 같은 화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화잡지를 보면서 “이건 너무 일본풍이야. 이건 너무 상업적이야.” 그랬는데 그 말들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다 빚이 돼서 돌아온다. 괜히 자기가 말한 상업적인 만화 그려놓고서 우리끼리 만나면 불필요한 죄책감에 빠져있지. “사실 나 요번에 상업적인 거 좀 했어.” 이러면서. 그게 뭔 상관이냐. 우리가 배운 게 상업만화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웃음)
어쨌든 <이끼>의 연재를 끝내고 나서 남는 단상도 많았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나 속이 팽창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사로운 동기나 아이템을 캐치해서 작품을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부풀려진 상태다. 왠지 대부분의 생각이 딱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부담감이라면 부담감이랄 수 있고. 설경구 씨도 <역도산>으로 살 찌운 상태에서 바로 뭘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빨리 본래 상태로 축소시켜서 옛날의 예민했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반짝반짝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 물론 <이끼>는 내게 너무 고마운 작품이다. 다만 빨리 이 사이즈를 줄이는데 집중하려 하고 있다. 호흡조절을 해줘야지.
이제 댓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후련하겠지. (웃음)
댓글에 괜히 욕 써놨다가 다른 팬들에게 융단폭격 맞을까 봐 그런지 메일로도 욕을 하더라. (웃음) 댓글로 하면 몇 줄로 끝날 수 있는 말이 메일로 오니까 더 강렬하게 오는 거지. 그냥 멋도 모르고 클릭해서 열어봤다가, 어이구. (웃음)
지면 연재를 병행했는데 앞으로 또 웹툰에서 연재를 계획하는 바가 있나?
원래는 있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이끼>때문에 그것들이 지금은 시시해져 버렸지. (웃음)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 아이템들에 대해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 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상황이지.
스스로에게도 <이끼>가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나?
포지티브의 확신, 긍정의 힘을 느꼈다. 연재가 끝나고 댓글을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긍정으로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로를 받았다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게 가장 큰 성과였나 보다. 나에게는 그 동안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서울시로부터 밤섬에서 8회 차 촬영만 허가받았다고 들었다.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아낸다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다. 연출부와 제작부에서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강이란 강은 모두 다 뒤졌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중요했다. 모래사장과 모래사장 뒤로 울창한 숲이 있어야 되며 촬영여건을 따지자면 섬보단 차 진입이 가능한 강변이어야 됐다. 그리고 여자의 시점샷을 고려하자면 어느 정도 망원렌즈를 붙여서 찍을 수 있는 거리감이 확보되는 조건도 중요했고 해변이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안됐다. 그런 조건들을 찾기 위해서 정말 강이란 강은 다 뒤져서 충주의 주 촬영지를 찾아냈다.
사실 어떤 장면은 밤섬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밤섬 자체의 생태를 설명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람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는 밤섬의 모습들이 더 중요했다. 김씨는 밤섬에 처음으로 떨어진 경계의 대상이므로 처음엔 낯선 이방인을 거부하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의 숲처럼 보이다가 김씨가 점차 밤섬을 자기 공간으로 인식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이루고 보금자리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숲의 이미지가 연출돼야 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숲의 이미지에 따라서 각자 다른 숲으로 돌아가면서 촬영을 했다. 밤섬 자체를 모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이 남자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공간의 필요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천만 인구의 대도시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표류를 한다. 이 독특한 소재의 시작이 밤섬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미지였을지도 모를 밤섬에 대한 목격을 관찰로 진전시키고 허구의 살을 붙여 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보는 순간, ‘아, 저기 섬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그 어둑한 섬이 딱 보아하니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무인도 같아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곳이 있다라는 건 얼핏 알았지만 그게 여기라는 건 그때 보고 알았지. 공간 자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밤섬 주변에 서강대교에 허락된 가로등을 제외하곤 일체 조명을 못하거든. 그래서 그 주변이 굉장히 어둡다. 그런데 그 백(back)엔 화려한 시티라이트가 있고, 그 가운데 어둡게 자리잡은 섬이라니 공간의 재미가 오더라. 지금 저기에 한 남자가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들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가 그 남자를 발견했을까, 혹은 발견했더라도 그 남자의 구조신호를 인지했을까, 아니면 그냥 사람이 있네 이러다 말고 지나갔을까. 이런 무심한 속도감 속에서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감, 그 관계성, 그런 생각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남아있더라.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결국 밤섬을 이야기의 척추로 삼아 캐릭터의 뼈대를 잇고 다양한 설정의 살을 붙여나간 셈이다. 그리고 남자 김씨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몰락한 루저가 밤섬이란 모티브와 연결되는 첫 번째 지점이었나.
글쎄, 분석적이고 전략적으로 ‘루저를 등장시켜야지’ 이렇게 접근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인 거 같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가 루저라면 루저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으니까 내가 잘 아는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항변하고 싶어지는 거고. 내가 우울하거나 그렇게 이해될 존재는 아니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일 뿐이지만 다른 친구들이 보기엔 번듯한 직장도 없고, 돈도 있다가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뭐 저렇게 무책임하게 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볼 거란 말이지. 그렇게 내 스스로를 항변하고자 하는 이해심을 조금 더 발휘하면 이해되지 않을 존재가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 아님에도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자살을 실제로 해보지 않았음에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이 사람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존재라고.
현실적인 세태를 대변할만한 설정이 등장한다. 특히 친절하게 채무액을 알려주는 대출업체의 코멘트, 서비스 가입을 권하는 끈질긴 이동통신사 상담원 안내와 같이 겉보기에 친절하지만 진심이 인색한 세태에 대한 은유가 노골적이다.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조난 문자를 관심 있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징표처럼 떠오른 이미지다. 그게 그런 전화통화나 유람선에서 손 흔드는 장면과 같은 에피소드로 이어진 거다. 표류라고 하지만 표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말하자면 먹고 살고 생존하는 이야기 후에 찾아오는 어떤 욕망으로부터의 고립감. 그런데 그런 얘기는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같은 훌륭한 작품들 속에서 이미 했고, 내가 그걸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그런 마당이니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 안에서 써야 하니까 일단 내 자신이나 가족들, 친구들과 같이 내 주변 사람들이 안고 가는 고민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되더라. 빚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도 많고, 내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너무 낯설다 생각했던 경험도 있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확장된 셈이다.
처음 남자 김씨가 섬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섬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에 안착하려면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과정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사실 남자가 섬을 못 나오는 상황보단 그 섬에 남는 게 중요하다. 이 남자가 그 섬을 못 나오는 게 아니라고 관객들도 이해할 거라고 믿었고. 이 섬에서 남고자 하는 욕망이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에 맞닿을 수도 있는 지점이 있겠다고 봤으니까. 만약 수영을 잘해서 이 섬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섬에 남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시작된 계기는 거기서부터라고 봤고. 다만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20여분의 상황을 코미디로 끌고 갈 수 있겠다고 봤다. “정말 저게 말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서 부담없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섬에 남아야지, 하는 순간부터 저 사람의 입장과 욕망에 대해 관객들도 동의해주고 출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밤섬이 모티브고 시작점이라면 여자 김씨와 그녀의 방은 추가적으로 나열된 캐릭터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두 가지 정도의 전제를 갖고 시작했다. 이게 단순한 표류 영화가 아니라 요즘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과 이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일단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등장한 다음엔 표류의 고립감을 어느 순간 희석시키기 보단 그 고립감을 안으로 더 파고 들 수 있는 상황의 존재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히끼꼬모리를 떠올리게 됐다. 다만 그게 표류기라는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전제가 된 건 아니다. 일단 이야기 목표가 표류가 아닌 관계성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캐릭터였던 거다.
모티브가 밤섬이고 그 밤섬에서 살아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니 결과적으로 여자 김씨는 이야기의 입체감을 배려하기 위해 후발적으로 창작된 캐릭터와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처음부터 관계성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봤으니까 두 인물로 시작했다. 표류하게 된 남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아이템들을 떠올렸지만 태생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해서 출발했기 때문에 후생적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장편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으로서 얼마만큼 표현하고 얼마만큼 포기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늘 있었다. 연출가로서 보는 즐거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협소한 상황을 이래저래 돌파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이 생기더라. 단지 내가 생각하는 사실감을 통해 나의 만족을 얻고자 하면 그게 보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연이 보존된 밤섬의 원시적 풍경과 달리 여자 김씨의 방은 인공적이고 현대적이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공간이 대비적으로 설계됐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석적으로 뭔가를 계획할 인간은 못 된다. 물론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지만 보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서 대차점이나 대비를 이루는 상황의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목표해서 반대개념이나 대비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던 건 아니다. 그보단 기본 목표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요소가 떠올랐고, 그런 만큼 이런 대차점에 주목해서 포장이 가능했던 거지. 다만 그 공간이 서로에게 의미를 준다는 지점이 중요했다. 특히 여자는 이 남자를 발견하면서 컴퓨터의 윈도우가 아니라 진짜 윈도우를 보고 이를 통해서 가상의 친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대를 보게 된다는 기본 개념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블루로 가득했던 방이 창이 열려서 옐로우로, 따뜻한 빛의 공간으로 변하고 이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색도 살아나고 공간이 생기를 얻는 과정으로 변하는 게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소품들이 저마다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야기에 입체감을 이룬다. 다양한 소품들이 영화를 패셔너블하게 꾸미는 것만 같다. 마치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품을 수집한 것 같다. (웃음)
일단 패셔너블하다라는 것에 동의할 순 없다. (웃음) 어쨌든 나는 소품 하나하나가 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놓칠 수 없는 것들이라 봤다. 궁극적으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 사소해서 별로 눈 여겨 보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본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말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오히려 그런 게 부족한 사람들이 그 안의 어떤 의미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태프들에게도 소품 하나하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세심하게 놓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당부했고, 그렇게 코미디를 위한 배치나 활용도에서 신경 써나간 측면이 있다.
사소한 소품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디테일한 느낌이었다.
표류 얘기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핵심은 이 사람이 뭘 이용해서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더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공간감을 유지하면서도 소품의 본래 활용 방식을 뒤집는 전복의 방식을 활용하면 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커피잔을 가리키며) 사실 이 커피잔은 우리에게 커피를 담는 용도로서 규정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단정을 물려받지만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이걸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규정된 물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쓰레기를 갖고 처음부터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소품적으로 작용했으면 했다. 버려진 오리배를 갖고 집으로 활용한다거나 뚜껑을 갖고 선글라스를 만들어 쓴다던가, 자신만의 생활방식으로 모든 걸 다 재조립하는 진화의 단계랄까.
관객 입장에서 의미를 수집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소품을 마련하는 입방에서도 그런 수집의 단계가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직업시나리오 작가로서 어떤 정확한 이야기 설계가 되지 않고선 작업을 하지 않았었다. 포스트잇을 쫙 붙이고 모든 과정을 나열하는 방식이었지.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지난 작품을 보면서 조금 반성한 결과랄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훨씬 더 생기와 생동감이 넘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갑갑하게 찍었구나 느꼈거든. 그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그런 방식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싶더라. 그래서 이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단초들만 갖고 무작정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인물이 가는 대로 받아 적어야 되겠다, 그런 결심으로 시작했고 그냥 남자 김씨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었다. 캐릭터와 일치된 상태에서 썼다고 할까. 그러니까 김씨의 절실함이 나의 절실함이었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니 물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어떻게 잡아야 할까, 그러면 포대기에 나무를 연결해서 해야지, 이런 김씨의 방법이 동시에 나의 방법이었으니까. 고기를 다 잡고 나면 또 무엇이 먹고 싶어지고 욕망하는 게 뭘까, 이런 욕망도 내 욕망이었다.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것도 순전히 이야기적 구성요소로 궁리한 게 아니라 내 욕망을 끌어온 거다. 그렇게 나와 일치된 김씨의 욕망을 그때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표류하듯이 따라간 결과인 셈이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야기를 똑똑하게 만든 셈일까. (웃음)
욕망이 사람을 똑똑히 만든다. (웃음) 어쨌든 이야기를 전진시키고 싶은 내 욕망이 수를 써내게 하더라.
그런데 여러 가지 음식이 정말 많은데 왜 자장면이었을까. 자장면이 어디든 배달되는 음식이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자장면을 원하니까, 내 욕망이 진짜 자장면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다 보니까 배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고. 그냥 정말 발상의 진전대로 이야기를 쓴 거다. 이야기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예를 들면 김씨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서 면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김씨가 한동안 방법을 못 찾을 땐 나도 방법을 못 찾았다. 이야기를 한달 동안 쓰지 못했다.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면을 어떻게 만드나, 미치겠네. 이런 김씨의 고민이 곧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김씨가 우연히 새똥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어느 순간 ‘똥이다!’라고 외치듯이 방법을 떠올렸고,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켜서 써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계획적인 방식으로 써나간 건 아니었다.
‘농심’에서 협찬 받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웃음) 사실 그런 상표명을 가릴 때 뭔가 실제적인 상표명이나 상호가 주는 리얼리티가 훼손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게 참 억울한 측면인데 PPL은 고사하고 허가를 받아야 되는 입장이었거든.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는 영화에 자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와 상표를 허가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더라. PPL얘기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 허가까지 받아가면서 써야 했던 건 다들 그 짜파게티의 맛을 아니까, 그 즉물감을 무시하거나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SK텔레콤’이라던지, ‘오뚜기’ 얼굴이라던지, ‘짜파게티’, 우리가 사는 공기 중의 일부분이라 말할 수 있는 그 물리감이 이야기를 받쳐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지.
밤섬에서 김씨가 살아가는 모습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렵과 채취에서 사냥으로 이어지고, 결국 농경사회로 진입한다. 이런 과정의 설계도 역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방식 안에서 단계적으로 착안된 건가?
그건 약간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코미디를 빌려 쓴 인류학 보고서의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왜냐면 김씨는 사회성을 다 내던지고 다시 밤섬에서 새롭게 사는 거니까 그러려면 자신만의 방식에서 비롯된 삶이 진화적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랬다. 작지만 다른 의미의 진화랄까. 먹을 것을 구하고, 욕망을 성취하고, 어떤 일에 보람을 느낀 다음의 욕망은 뭘까. 그 다음의 욕망은 결국 사람을 원하지 않을까. 이런 과정들이 일종의 진화에 가까운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도 예측은 있었다.
남자 김씨가 섬에 표류했을 때, 119에 신고하고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조를 요청한다. 부모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래서 그럴까. 그것도 내 욕망인데, (웃음) 내가 만약 자살했다가 실패해서 밤섬에 떨어졌다면 가족한테 전화할 거 같진 않거든. 걱정도 되실 테고, 내가 자살을 포기한 상태도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가족을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상태로 거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가족이 편한 상대가 아닐 수 있지 않나. 혹은 자신의 그런 상황을 알리고 싶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타인인 119를 통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본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119의 도움을 받고 밤섬에서 나가서 다시 자살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운 친구나 친척, 가족에게 자기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건 불편하지 않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동구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마지막 허들은 아버지다. <김씨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의 유년시절이 잠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여자 김씨는 온전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같은 집에 사는 부모와 완전히 단절돼서 살아간다. 폐쇄적인 가족 구조가 <김씨표류기>에서도 은연중에 감지된다.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그런 문제처럼 이해돼서 그런가 보다. 가깝지만 가깝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지긋지긋하게 계속 화해해야 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내가 조금 비뚤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고.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나 <김씨표류기>의 남자 김씨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이라 할만한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사회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라던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사회적 자살을 선택하는 남자니까. 하지만 정작 그 삶을 드러내는 방식은 비관과 거리가 멀다. 상황의 비극을 유희로 역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면 자살하려는 상황에서 변의를 느낀다거나. (웃음)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취향상 뭔가 하나의 감정을 100%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감정이란 복잡한 문제를 싹 여과해서 어떤 감정에 100% 집중해서 이것만 보라고 하는 게 진심을 다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슬프게 오열하는 가운데서도 똥이 마려울 수 있는 거 아닐까. 거부할 수 없는 똥. (웃음) 그 감정이 놓인 공간 안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셈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 같은 설사라고 설명을 해서 배우가 기겁을 하긴 했는데, (웃음) 눈물보다 설사가 중요했고, 눈물보단 침이 더 중요했다. 며칠간 물을 못 먹다가 달콤한 액체를 삼키면서 입안에 도는 침이 그를 다시 살게 하는 거니까. 실제로 측면의 클로즈업으로 봐도 눈물은 없다. 콧물과 침, 설사, 이렇게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다시 산다는 것에 주목한 장면이라서 눈물만 흐르는 장면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
남자 김씨의 위생상태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불결함이지만 여자 김씨의 불결함은 선택에 가깝다. 결벽적인 인간으로 그려볼 생각은 없었을까.
여자가 무엇을 방치하고 무엇을 지키느냐라는 게 공간에서 확실히 대비되길 바랬다. 이 여자는 결벽증이 있다. 그런데 모든 사안에 관한 결벽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에만 결벽이 있는 거다. 나에게도 그런 시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자기에게 관심 없는 건 완전히 방치하고 자기가 매달리는 것들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습성을 보이는 여자의 절실한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방은 그렇게 어지럽지만 자판은 매일 청소하고, 쓰레기는 널브러져 있지만 그 가운데 가지런히 정리된 것들이 있고, 그런 풍경 속에서 본인의 입장과 태도, 감정을 설명해보려 했다. 계획적으로 삶을 방치하는 여자다. 삶을 방치하는 인간이지, 방치된 인간은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주도 면밀하고 계획적이기까지 하다. 기본 생활을 방치할 뿐이지, 자신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한다.
여자 김씨가 너무 예쁜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
어느 선에 맞춰서 표현해야 할지, 예를 들면 상처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와 같이 관객과 내 입장 사이를 염두에 두는 모양새의 고민이 있었다. 히끼꼬모리가 왜 저렇게 예쁘냐, (웃음)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다는 걸 예측했지만 그 상황에서 적절한 예쁨이란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든 예쁘지 않게 보일 방법을 못 찾을 정도로 뭘 해놔도 여배우가 예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웃음)
사루비아라던가, 민방위 훈련 같은 과거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반대로 로그인이라던가, 젊은 세대와 소통이 용이한 용어들도 함께 등장하고. 시대적 정서가 먼 용어들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현대적인 스타일을 두르고 있음에도 과거지향적인 감성을 지녔다고 할까.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가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고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적 욕망이 있었다.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그런 단순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다층적이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섬이 황폐화되는 장면은 <김씨표류기>에서 유일하게 영화의 비극적 감정이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부분이다. 캐릭터에겐 가장 가혹한 순간이기도 하고.
태풍은 한국에 살면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사전조사를 해보니까 밤섬에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에 보통 공익근무요원과 해병전우회 분들이 정화작업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사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지금까지 끌고 온 이야기와 충돌되는 요소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까 맞닿은 지점이 있었던 데다가 일종의 이격화 같은 게 필요했다. 밤섬은 김씨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싸늘한 시선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김씨의 왕국과 성취감에 감동하고, 김씨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현실이 휙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냉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좀 보여주고 싶었다.
고립을 선택한 인물의 삶을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결과적으론 그 고립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고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고립에서 인물이 벗어나는 장면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남자는 자장면이 희망이라고 얘기했지만 자장면을 다 먹은 다음엔 어떡하나. 결국 희망은 자장면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닌가. 결국 지치고 힘들게 볶는 관계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간의 관계에서 풀고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한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걸 김씨가 알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그렇고 <김씨표류기> 역시 주인공의 미래가 드러나지 않는 영화다. 사실 두 김씨 남녀의 만남이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삶이 더 비참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지운 감독님이 영화 보시고 나서 말씀하시더라. “너무 멋 부린 결말 아니야?” (웃음) 자기는 좋지만 관객들은 뭔가 후일담을 더 원할 거 같고, 그에 대해서 더 친절한 결말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도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냐 마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다음을 보여줄 엄두가 안 났다. 둘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만 앞으로 닥쳐질 삶이 마냥 행복할지, 아니면 어려울지 모른다. 아니면 마냥 행복하다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려나. 쉽지도 만만치도 않은 앞길을 남겨두고 끝내는 게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책임이었다. 내 마음에서 보자면 그 이후에 둘이 버스에서 내려서 손을 잡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건데 뭔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규정 같아서 꼭 그렇게까지 한쪽으로만 볼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지는 걸로 그냥 남겨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마치 캐릭터의 조물주나 다름없는 창작자가 그 삶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창작자라고 해서 내가 한 사람을 단정하고 규정하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봤다. 비단 결말 이후의 얘기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도 그렇다. 남자는 최소한 빚이 있어서 자살하려는 건지 알지만 저 여자는 왜 벽장에 틀어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물의 전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히끼꼬모리가 됐고, 자살을 선택했다는 단정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야기가 그런 방식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두 사람의 현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현실의 공기를 충실하게 다룸으로서 각자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내가 짊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경우는 에필로그라도 있어서 최소한 그 인물에 대한 희망이 감지되는 지점이 있지만 <김씨표류기>는 그냥 두 사람의 만남과 동시에 이야기가 끝난다. 어떻게 보자면 동구에 비해 남녀 김씨의 미래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건 아닐까. 동구는 어리기도 하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니까. 일단 두 사람의 맞잡은 손만한 게 없겠다는 생각도 했고. 앞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사실 그 인서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처음 계획은 남자 김씨의 얼굴로 시작해서 다시 남자 김씨의 얼굴로 끝내는 거였다. ‘클로즈업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가 점점 퍼지기 시작하고 그 미소가 더 퍼지다가 가차없이 암전되면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게 원래 시나리오 문구였는데 영화를 찍는 순간 그렇게 끝내선 안되겠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투샷에서 끝내야겠더라. 두 사람이 쏟은 애정을 생각하면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지도 못하고, 손 한번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내는 건 할 수 없겠더라고. 찍는 도중에 거기서 조금 더 가는 결말로 약간 수정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바라보는 투샷이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말이란 걸 느꼈지.
<김씨표류기>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가는 두 인물의 연대를 통해서 관객에게도 모종의 희망을 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이라 할 수 있나?
내가 사실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인 인물은 못 된다. 그래서 희망을 더 갈구하고 얘기하는 것일 수 있겠다. 사실 나나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어려운 소리만 하고, 희망이 희망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이니까 나와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희망 얘기하니까 갑자기 내 자신이 턱 막히는데. (웃음)
결국 영화가 자신의 갈증을 해갈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시나리오가 유머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지만 내 자신은 그렇게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갈증과 욕구들을 작품을 통해서 찾으려 하는 거 같다.
자신이 생각했던 3~4개의 구상 가운데 <김씨표류기>가 가장 비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파울로 코엘류의 ‘오, 자히르’라는 소설 덕분이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의 선로를 보면서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과연 몇 미터일지 갑자기 궁금해하다가 역무원에게 물어본다.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얼마나 되죠?” 역무원이 자신있게 143.5cm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왜 열차 선로가 143.5cm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니까 그건 기차 폭에 맞춘 거라고 답한다. 그럼 왜 기차 폭이 그렇게 된 거냐고 묻자 역무원이 드디어 짜증을 낸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데 그 궁금증이 계속 되니까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된 거다. 찾아보니까 그게 중세 마차의 바퀴 폭이란 걸 알게 된다. 중세 마차와 이 열차의 메카니즘엔 하등의 관계가 없는데 불구하고 마차의 폭이 143.5cm라서 기차의 폭이 143.5cm인 거다. 그럼 왜 마차 폭이 그런 걸까 찾아보니 그건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시대까지 닿는다. 로마시대에 말 세필이 끄는 마차가 있는데 말 세필을 일렬로 세우면 폭이 그 정도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로마시대 말 세필로부터 만들어진 메카니즘이 열차를, 선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지금 로켓의 연료통 모양과 설계도 거기서 출발한다. 로켓의 연료통을 나사에서 출발대까지 기차로 옮겨야 되니까 그걸 기차 폭에 맞게끔 길게 제작된 거다. 로마시대의 메카니즘이 로켓으로 이어진 거다. 뭔가 대단한 메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수 있는 일이지. 결국 그게 그냥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로켓까지 규정해버리는 우스꽝스런 내용을 전하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 무슨 용기를 얻었다는 건가?
상업적이다, 비상업적이다, 라는 구분이 나에게 143.5cm의 허울처럼 보였다. 상업영화라는 메커니즘은 사실 할리우드가 백여 년 만에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이걸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이걸 근거로 삼을만한 것인지 헷갈리더라. 맹신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요즘 시스템이 우울한 건 창작자로서도 스스로 과연 이게 상업적으로 될까라는 생각에 얽매여야 한다는 거다. 지금 시스템은 영화 한편 찍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장될 수 있는 각박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러 모양의 영화를 여러 루트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된 게 아니라 지금처럼 몇 개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산업적으로 차지하는 파이가 큰 상황에서 거기서 143.5cm같은 허울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대로 찍어야 관객이 좋아하는 거라고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의 고민을 포기한 채 수용해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걸 온전히 지키고 표현하는 감독들은 이런 상황에서 몇이나 될까. 물론 관객이 즐겁게 보길 바라지만 관객이 즐겁게 보는 영화의 공식은 누가 무슨 근거로 쥐고 있는 건지, 우린 왜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공동작업이었던 전작과 달리 개인으로서 이름을 올린 첫 작품인 만큼 의미가 남았을 텐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이런 거 하나는 있는 거 같다. 언젠가 해영이도 똑같이 느낄 건데 사실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득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난해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래서 그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둘이서 작업할 때는 그 과정을 우리끼리만 한 거 같다. 그게 한편으로 좋고,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대부분을 우리 안에서 만족하고 끝내버리면 다른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소홀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그 대상들과 다 함께 소통해야 되는데 두 사람의 소통이 너무 강력하니까 이미 설득의 과정을 둘에서만 해소하게 된다. 이번 영화는 어쨌거나 편한 설득의 대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노력을 배우와 스태프들과 나누게 됐다. 덕분에 영화를 찍는 과정이 이래야 되는 거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둘이나 하나나 외롭긴 매한가지더라.
아무래도 혼자가 됐다는 게 오히려 더 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나 보다.
그전엔 감독의 고민은 감독들끼리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지금은 감독의 고민과 방향에 대해 스태프들이나 배우들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가고 있는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어느 지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런 걸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거지.
강우석 감독이 제작에 관여했다. 사실 강우석 감독은 상업적인 마인드가 강한 감독이다. 반면 <김씨표류기>는 실험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강우석 감독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그 143.5cm의 허울을 근거라고 계속 제시하는 제작사 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님은 투자자이기 전에 선배감독님이기 때문에 이야기나 영화 본연의 재미를 봐주셔서 투자가 이뤄지고 제작이 가능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믹싱 때 즈음 내가 오히려 배우와 흥행의 압박을 느끼고 원래 계획되지 않았던 것 가운데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음향적인 뭔가를 더 추가했었다. 그런데 그걸 딱 보시더니 영화 잘 만들어놓고 너무 쓸데없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고, 왜 코미디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냐고 하시더라. 개봉 직전에 코미디의 품위를 말할 수 있는 한국의 유일한 투자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투자자와 과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정말 많은 용기가 됐다.
<김씨표류기>외에 영화화를 생각하는 다른 이야기가 3개 정도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야기였을까.
시나리오도 아니고, 시놉시스가 있었던 것도 아닌 구상 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좀 다양하고 많은 걸 해보고 싶다. 지금 슬슬 너무 아기자기하고 영화의 묵직한 힘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는데 덕분에 콤플렉스 같은 것도 쌓이기 시작했다. 직업감독으로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의 요구를 받게 될 때가 온 거 같다.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감독으로 정형이 되야 할 시점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나 <김씨표류기>와 전혀 다른 영화에 도전해야겠다는 건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직업감독으로서 ‘이런 건 못하잖아’, 아니면 ‘계속 또 그것만 해’, 그런 시점들이 생길 거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직업감독으로서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어떤 프로젝트든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시킬 수 있는 직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금 다른 방식의 경험도 해봐야 될 거다. 나도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소재의 제한이 있었다면 <김씨표류기>는 형식의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왜 이렇게 제한을 두고 할까, 이런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이 애초에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요소를 갖고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즐거움이 담겨있는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망도 한편에 있다. 내가 아까 말하지 못했던 구상 가운데 몇 가지는 더 말도 안 되는 제한 속에 놓여있거나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전에 재영 선배와 우리 김정수 촬영감독과 술 마시면서 그런 아이템을 잠깐 얘기했더니 쌍수를 들고 반대하더라. (웃음) 물론 일종의 오기도 있다. 앞으로 점차 넓혀지겠지, 라고 남들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나는 조금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갈만한 무지막지한 아이템들을 꺼낼 수도 있거든. 일단 두고 보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인간인지 더 살펴봐야겠다.
최근 몇 년 사이 신예 감독과 중견 감독의 작품에 고루 출연하고 있다.
사실 자신의 나이를 기준으로 배우를 선택하는 감독은 없을 거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니면 젊기 때문에 선택의 취향이 나뉘는 건 아닌 거 같고, 순전히 작품에 맞을 거 같은 배우를 선택하겠지. 어쨌든 내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경험이 된다. 베테랑 감독님들과 작업해보고, 떠오르는 신인 감독님들과도 함께 해보면 배우로서 스스로 그에 맞게끔 처신하는 법을 알게 된다. 김유진 감독님은 배우로서 편한 분이다. 일단 아버지 같은 믿음을 줘서 안정적인 느낌이지. 반대로 신인 감독들은 일단 시나리오 단계부터 아이디어나 감성적인 부분이 톡톡 튄다. 아무래도 나보다 경험이 적은 만큼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양쪽에서 그런 면을 다 배울 수 있다는 게 내겐 플러스가 된다. 어느 한군데 치중하지 않고 폭넓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 나도 아직까진 배우는 단계인 만큼 그런 부분들을 다 흡수할 수 있다면 앞으로도 무형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씨표류기>는 기발하고 실험적인 스타일의 젊은 영화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였나?
독특하고 디테일하고 세심했다.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감독의 철학도 담겨있더라. 다만 그걸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지 않게 다룬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거운 걸 무겁게 얘기하지 않고, 힘든 걸 힘들게 얘기하지 않고, 유머와 위트로 풀어나간다. 하지만 그냥 웃기려고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만화 삼국지’나 ‘만화 천자문’ 같은 느낌? 나이 있는 분들이 어린 애들에게 ‘삼국지’ 읽었냐고 물어보시잖아. 꼭 읽어야 된다 하고. 그렇지만 어린 애들한테 ‘삼국지’가 너무 길고 어렵다. 그런데 그걸 만화로 풀면 그림이 곁들여지니까 이해가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지. 물론 글로 읽는 것보다 깊이는 얕아질 수 있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 접해보기라도 해야 그걸 생각해볼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잖아. 두 번 보면 전보다 재미는 떨어지겠지만 오히려 작가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조금 더 분석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의도를 표현하는 방식이 좋았다.
시나리오만으로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건가?
물론 감독님은 만나보고 결정해야지. 한번도 못 봤으니까. 다만 이럴 땐 감독님이 양아치만 아니면 된다. (웃음) 그런 사람 있잖아. 글만 잘 쓰는 사람. 그럼 또 난감하거든. 어쨌든 감독님을 만나니 생각이 너무 괜찮더라. 이러면 좋지.
<천하장사 마돈나>는 보고 <김씨표류기>를 결정했겠지.
원래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을 만나보기 전에 미리 봤어야 되는데 그 때 아마 <강철중>촬영이 끝날 즈음이라 영화는 못보고 감독님부터 만났다. 그리고 출연결정을 내린 다음에 영화를 봤는데 역시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 작품이 어떻고, 상도 많이 받았고, 그렇게 일단 들은 얘기가 있기도 했지만 일단 보내준 시나리오 자체만 봐도 그냥 영화를 안 보고 감독님을 만나도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지. 그런데 <마돈나>는 어차피 두 감독이 만들었으니까 사실 누가 만든 건지 잘 모르잖아. 이해영 감독이 만든 건지, 이해준 감독이 만든 건지. (웃음) 사실 난 두 분이 형제인 줄 알았어. 대부분 소문이 형제라고 하기도 하고, <마돈나>자체가 그런 영화니까 둘이 사귀는 거 아닌가라는 소문까지 돌던데. (웃음) 물론 만나기 전엔 진위를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만나보니 형제도 아니었고 애인도 아니고, 과 동기더라. (웃음) 여하튼 직접 만난 뒤에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나서 더 확신이 생기더라.
밤섬을 무대로 찍었는데 사실 모든 장면이 밤섬 같진 않더라. 사실은 되게 적은 분량만 밤섬에서 찍었다. 서울시에서 딱 8회 차만 허락해줬다. 우리나라 영화 중 처음이라고 하던데 <괴물>도 협조를 요청했지만 법 때문에 불가했더라. 이번에는 주로 밤섬에 대한 이야기니까 시나리오도 전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8회 차 이상은 허락이 안됐고 나이트 신조차 허락이 안됐다. 그리고 그 8회 차도 막판에 간신히 허락된 거다. 처음에는 허락이 안 됐거든. 8회 차 빼고 나머지는 충청도 쪽에서 밤섬과 비슷한 곳을 찾아서 부분부분 찍은 뒤에 나머지는 다 CG로 처리했다. 내 분량의 70% 정도에 CG가 들어간다더라.
밤섬이라는 공간의 특이성이 영화의 독특한 양식을 이룬다. 사람이 많은 도심 한 복판에 그런 무인도가 있고 그 안에서 홀로 표류하는 남자라는 설정이 독특하지만 대도시 소시민의 비애가 투영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정서적 동의가 이뤄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 분석이나 사전준비가 필요 없었다. 내가 김씨가 될 수 있고, 길거리를 다니는 누군가가 김씨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나 한번쯤 그냥 힘들어서 못 살겠다, 짜증나서 못 살겠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잖아. 어쩌면 그런 심정에서 김씨도 죽으려고 했겠지. 그런데 사실 미끄러져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차가 확 지나가는 바람에 놀라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웃음) 사실 떨어지려는 데까지만 보여줬지, 떨어지는 건 안 보여주잖아. 어쨌든 우연히 살아난 김씨가 걸치고 있던 양복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그 섬에 적응하는 과정은 어쩌면 정재영이 스태프들 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고 그 상황에 적응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스태프들 앞에서 혼자 벗고 있는 게 어색했을 거 같다.
<실미도>를 빼면 이렇게 빤스만 입고 카메라 앞에 서본 적도 없으니까. 그나마 <실미도>는 남자끼리 다같이 잠깐 벗고 항상 러닝셔츠라도 입고 있잖아. 그리고 <김씨표류기>에서 배우는 유일하게 나 혼자였다. 느낌이 달라. 처음에는 딱 찍을 때만 벗고 있었다. 웃통 까는 거 자체가 창피하더라고. 하루 이틀 그렇게 했는데 점점 김씨처럼 익숙해지니까 그냥 분장차에서 벗고 나와서 혼자 빤스만 입고 돌아다녔다. (웃음) 정재영도 완전히 김씨가 됐던 거지. 또 그래야 될 거 같았고. 그러니까 감독님도 좋아하더라. 속으로 ‘김씨가 됐구나.’ 그랬을 걸.
무인도에 표류하는 인물이다 보니 독백에 가까운 대사가 많고, 내레이션 분량도 상당하다. 사실 내레이션이라는 게 간단하게 읽어 내려가면 끝나는 작업 같지만 배우에겐 상당히 고민스러운 부분이 된다.
대본 상에서 읽을 땐 재미있고 와 닿는 감정이 좋았는데 막상 ADR(Automatic Dialog Replacement, 후시녹음)을 할 때 내레이션을 하니까 뭔가 자꾸 잘 맞지 않고 어색하더라. 이게 지금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제3자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니면 관객들이 나한테 하는 말인지, 말 그대로 그냥 내레이션인지, 그 톤을 잡기가 되게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이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저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너무 무겁고,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다.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듯 말듯 하다가도 다 붙여놓고 보면 때론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된 거 같고, 어떨 때는 너무 많이 개입되지 않은 거 같고. 결국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최종적으로 이렇게 됐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는데 촬영할 때보다 더 까다로웠다.
김씨가 밤섬에 갇힌다는 설정은 나름 기발하다지만 반대로 비상식적인 상황이라 납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그 섬에서 빠져 나오지 않겠다는 김씨의 결심이지만 그 결심 이전에 섬에서 고립되는 상황을 설득시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서 물에 막 들어가면서 ‘할 수 있다’고 혼자 중얼거리거나 얕은 데서 막 뛰어들고, 그런 모습이 사실 조금 과잉된 감정이거든. 무슨 죠스라도 나올 것처럼 공포감을 갖는다는 게 어쩌면 일반적인 감정이 아닐 수 있지만 그렇게 조금 과잉으로 해야 될 것 같았다. 김씨가 물에 대한 큰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그 다음부터 물에 얼씬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테니까. 사실 뗏목을 만들어서 나간다거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고 느끼기 전에 일단 캐릭터가 물을 통해 원천 봉쇄되는 느낌을 줘야 했다. 그러려면 조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김씨가 물에 경기를 일으킨다고 느낄 정도의 한방으로 조율해줘야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어진다. 초반에 그 부분을 넘고 나면 이제 김씨가 자연스럽게 이 섬에 있게 되는 거니까, 그 다음부턴 자기가 스스로 나가지 않으려 하니까 문제가 안 되잖아. 그래서 초반이 사실 문제였다. 비현실적인 느낌을 벗어나면서도 어떻게 확실히 설득시킬 수 있을까.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몰입을 못할지도 모르는 문제고.
현실적인 리얼리티보단 상황을 납득시킨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잘못 하면 관객들도 계속 의문에 쌓일 수 밖에 없으니까. ‘왜 안 나가? 나갈 수 있는데.’ 이래 버리면 틀린 거다. 그래서 그 부분을 신경 많이 썼다.
이해준 감독이 무대인사에서 <김씨표류기>를 보고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던 만큼 이 영화에서 ‘자장면’은 의미심장한 소품이다. 물론 여기서 ‘자장면’을 먹는다는 건 단순한 식욕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준 감독이 단순하게 얘기했지만 영화가 자장면을 너무 맛있게 보여줘서 자장면이 먹고 싶어지는 건 아닐 거다. 자장면 광고를 보고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문제지. 결국 자장면을 왜 먹고 싶은가라는 거다. 자장면을 먹고 싶게 만들려고 ‘농심’에서 몇 십억 수표 받고 협약 맺어서 두 시간짜리 광고를 찍은 것도 아니잖아. (웃음) 옛날에는 자장면을 귀해서 못 먹었다. 그러니 무조건 자장면을 먹어야지. 졸업식 때나 무슨 특별한 날이면 무조건 자장면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에게 자장면은 아무데서나 먹을 수 있는 흔해빠진 음식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장면이나 먹어볼까, 라고 하는 시대가 됐잖아. 그렇게 자장면의 위치가 변하는 동안 우리가 뭔가를 잊고 살지 않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코믹한 상황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게 단순히 기능적인 코미디가 아니더라.
사실 표류 아닌 표류를 하는 김씨의 설정이 황당해서 웃기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걸 보면 그냥 웃자고 만든 거라 느끼진 않겠지. 초심이라던가, 잊고 살았던 작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볼 계기도 될 수 있고. 지금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자장면을 먹어볼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단순히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결과만 생각하다 보면 사실 본질이 없어지지. 김씨가 자장면 먹는 걸 보고, “‘농심’하고 뭔가 커넥션이 있구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이제 약간 본질을 흐린 거지. (웃음)
사실 상대의 연기에 능청스럽게 반응하는 리액션이 당신의 장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김씨표류기>는 리액션을 받아줄 상대가 없는 영화다. 마치 일인극의 모노드라마 같은 느낌일 수도 있는데 그 가운데 코믹한 감정을 이끌어내야 하니 다른 방향의 리액션을 모색했을 것 같다. <김씨표류기>는 기존의 <아는 여자>나 <바르게 살자>처럼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를 해서는 안 됐다. 그냥 캐릭터 자체가 쌓여서 나오는 코미디, 캐릭터 자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져서 보이는 코미디가 되니까 그냥 코미디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냥 최대한 절실하게 보이는 상황과 내가 주고 받는 액션과 리액션을 통한 코미디였다. 그러니까 적절한 상황과 맞물린 절실함에 공감하면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것이고, 절실함이 아니라 과잉이라고 생각하면 처음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재미있을 수 있지만 결국 계속 보다 보면 지루해지지. 그래서 김씨의 코미디는 처음엔 덜 웃겨도 그 상황을 지속적으로 밀고 갔을 때 캐릭터의 감정이 쌓이면서 점점 재미있어지는 코미디랄까? 어쩌면 코미디라기 보단 그냥 그 상황에서 해야 될 의무였던 거 같다.
‘자장면이 희망이다’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여자 김씨가 배달시켜 준 자장면을 남자 김씨가 돌려보내는 건 결국 자장면을 먹는 것보다도 자장면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떤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인간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이 감동을 부르는 측면이 있다. 종종 배우라면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지 않을까 싶다. 연기적 성취의 의미가 발견될만한 실험적 작품과 소모적인 연기를 요구하지만 결과적인 흥행성이 보장되는 작품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우는 없었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항상 선택의 기로에 있는 거 같다. 사실 지금 세상이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한다. ‘어떻게 만드느냐’보단 ‘뭘 만드느냐’가 중시되는 세상이다. 내 입장에서는 7:3정도. 작품이 먼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완전한 10은 아니다. 흥행적인 부담이 전혀 없다면 그것도 완전히 무책임한 거지. 일단 좋은 과정이 있으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어야 인지상정인데, 그렇지 못하면 사실 속상하잖아. 하지만 과정이 후지고 목적도 후진데 결과만 좋으면 그게 더 실망스럽다. 그럼 앞으로는 저렇게 만들어야 되나.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냥 흥행만 바라보고 해야 될까. 이렇게 막 해도 되는구나, 싶어지니까.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면 결과가 좋지 않아도 최선을 다했다는 위안이 생긴다.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수한 열정이 남는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잔머리 대충 굴려서 영화 하나 뚝딱뚝딱 만들어놓고 이렇게 하면 영화가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충 얼마 정도 들여서 어떻게 기획하면 된다고. 요즘 세상에선 그게 더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상하고 안타깝지. 흥행배우라는 말도 좋지만 그보단 연기를 잘하는 배우, 진심이 있는 배우, 이런 칭찬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김씨표류기>를 선택해서 일단 내 한은 다 풀었다. 과정이 너무 좋았으니까.
편수가 늘어가고 입지가 구축될수록 작품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런 갈등이 치열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개인의 욕심만을 생각할 입장도 아니고,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것도 고민의 한 축이 되는 게 아닐까 싶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가 연기를 왜 시작했는지, 왜 연극을 좋아하게 됐는지, 이런 생각을 통해 조금씩 해결해보려 한다. 내가 돈 때문에 연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돈 못 버는 거 뻔히 알고 시작했으니까. 일단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또 좋은 작품을 하기 위해서 시작했으니까, 대단한 건 못해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자장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는. (웃음) 그런 마음을 매 작품 매 순간마다 다시 되새김질하려고 한다. 망각의 동물이라서 자꾸 까먹거든. 어느 순간부터 옛날의 소박한 욕심은 어디 가고, 점점 더 큰 욕심들이 자리잡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잔머리 굴리는 것보다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배우로서 훨씬 더 오래갈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분명히 그게 정답이다.
‘욕망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든다’라는 대사처럼 어쩌면 욕망이 배우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배우로서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다스려야 할 욕망이 커지는 만큼 그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역량도 함께 생길 수 있는 게 아닐까.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돈 한푼 없는 입장이 되면 작품이고 나발이고, 연기고 나발이고 어디 있어. 그때는 또 생활로 가는 거다. (웃음) 단지 그렇게 타협했다고 해서 이렇게 막 쭉쭉 가보자, 이런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최소한의 방편이 되면 그 다음에 또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거지. 다만 일단 살아야 뭘 하지. 살지도 못하면서 무슨 작품이 어떻고, 좋은 배우고, 그런 건 없다. 일단 김씨처럼 사는 게 제일 중요해. 산 다음에 자장면이지. 지금 죽을 거 같은데 무슨 자장면이야. 처음에 버섯만 먹다가 그 다음에 생선을 먹게 되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어느 새 새도 먹게 되고, 그러다 보면 물고기 먹을 때를 잊어버린다. 어류보다 조류가 맛있으니까 점점 까먹게 된다. (웃음) 그리고 자장면을 발견한 뒤로 옆에 새가 있어도 자장면에 꽂혀있는 거지. 그리고 (여자 김씨가) 여자라는 걸 알았잖아. 자장면을 먹고 나니까 이젠 여자가 보고 싶은 거지. 남자라면 ‘Who are you?’같은 거 했을까? (웃음) 뭘 보고 싶겠어. 그런데 여자라니까 갑자기 너무 보고 싶은 거다. 이게 인간의 욕망이 진화하는 과정 아닐까. 뭔가 하나가 실현돼야 그 다음에 또 얻고 싶은 게 생기고. 그러다가 그런 욕망들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지니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래대로 한강에서 뛰어내리려 했을 때가 생각나지. 그런데 여자 김씨가 뛰어와서 손 한번 잡으니까 희망이 생기고. 어떤 위기가 닥치거나 고민이 생기면 속상하고 그렇지만 결국 이 삶이 반복되는 거 같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너무 속상해할 필요도 없을 거 같고. 그런 교훈은 선배들의 행보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후배들에게 배울 때도 있고. 책에서 읽기도 하고, 나름대로 혼자 생각도 해보고, 여러 방면에서 종합적으로 한해 한해 계속 축적되는 거지.
남자 김씨의 이름은 초반에 단 한번 민증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영화 내내 이름 없는 사람처럼 불리지 않는 존재로서 나타난다. 한때 당신에게도 지독한 무명배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누구나 아는 주연급 배우로 이름이 불리고 있다.
사실 지금도 영화를 관심 있게 보는 몇몇 젊은 관객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나를 그냥 배역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을 거다. 물론 관계자 분들은 알겠지. 이름이라는 건 항상 표면으로 드러나거나 불려져야 알게 되는데 내 이름은 크레딧에서나 보이고 홍보할 때나 잠깐씩 집중적으로 보일 뿐인데 일반 대중들이 그런 걸 눈 여겨 보진 않거든. 노출이 별로 안되니까 배역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다. 어디 나왔던 누구, 뭐 이런 식? 그게 속상하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이름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지 않는다. 그냥 저절로 작품이 쌓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알아가게 될 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진 내가 신선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혹시 스스로 배우는 이래야 한다라는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 건 아닌가?
이게 옳은 길이다, 이게 배우의 길이다, 이런 건 절대 아니다. 모로 가도 다 서울만 가면 돼. 일단 이름을 알리고 배역으로 가도 되고, 그냥 나처럼 소극적인 사람은 이렇게 쭉 가는 거고, 심지어 스포츠 스타가 배우가 될 수도 있는 거다. 단지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이 나를 보면서 저렇게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면 정말 끝까지 해먹을 수 있겠구나, 그럴 수 있잖아. (웃음) 무슨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옷을 입는 취향이나, 차를 타는 취향 같은 거다. 그만큼 다 장단점이 있겠지. 이런 내 모습을 특별한 매력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배우로서 겉멋이 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단지 나는 그냥 이런 게 편할 뿐이다.
하지만 이젠 적어도 정재영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이제 한 해마다 한 편 이상씩 영화에 출연해오고 있는 만큼 날 몰랐던 분들도 익숙해지는 거겠지. <실미도>때 날 봤던 분이 만약 <김씨표류기>를 보면, “저 사람 <실미도>에 나왔던 사람 아니야?” 이럴 수도 있고. 다만 내가 나온 작품을 다 볼 순 없잖아. 그건 진짜 영화광이고. (웃음) 앞으로도 계속 영화에 불러줘서 연기할 수 있다면 언젠가 ‘저 사람 진짜 오래하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도 생길 거고. 심지어 ‘이젠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하면서 질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겠지.
배우 이름보다 캐릭터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익숙한 것 같다.
사실 그게 배우에겐 제일 행복한 거지.
<아는 여자>나 <거룩한 계보>의 ‘동치성’이란 캐릭터처럼 정재영을 통해서만 떠오르는 캐릭터도 있다.
그것도 이제 몇 번 했으니까. 그 영화를 다 보신 분들은 그게 특이해서 기억하겠지만 그 중에서 한 편만 본 사람들은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일종의 매니아를 위한 이름 짓기랄까.
현재 영화배우들 가운데 무대 출신 배우도 많고 그들 대부분이 중심 배우군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 류승룡 씨를 만났을 때 정재영, 황정민과 같이 친한 동기들이 연기자로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하더라. 아무래도 함께 무대에서 활동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전우애가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무대를 자신의 연기적 뿌리로 두고 있다는 것이 연기자로서 어떤 자산을 남겼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이제 연기적 영역에 있어서 연극과 영화, 방송 사이에 경계가 없어진 것 같다. 80년대처럼 연극연기, 영화연기, 방송연기가 다르지 않고, 이젠 일단 리얼리티가 관건이기 때문에 연극으로 활동했던 배우들의 가능성이 커진 거 같다. 연극에서 잘했던 배우라면 방송이나 영화에 와서 하루 이틀 정도나 헤맬 수 있겠지만 대부분 잘한다. 옛날엔 메커니즘이 많이 달랐는데 이젠 거의 다 똑같아서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없고. 단순하게 연극에서 출발한 배우가 많을수록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배우층이 두꺼워진다는 건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래야 고생하는 후배들도 나 같은 얼굴로도 해나가는 사람을 보고 희망을 갖지. (웃음) 어떻게 보면 시대가 변한 덕이다. 옛날에는 잘 생기면 방송으로 가고 못 생기면 연극으로 갔다. 사실 그런 거야. (웃음) 일단 연기력을 떠나서 얼굴로 밀어붙일 수 있어야 탤런트 시험이라도 보고, 그게 안 되는데 연기를 하고 싶다면 연극으로 가야지.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잘 생겨도 연극을 하고 못 생겨도 방송을 하고, 얼굴에 대한 경계가 점점 더 없어졌잖아. 옛날엔 정말 잘 생겨야 했지만 이젠 리얼리티가 중요한 시대라서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을 해도 되니까 나 같은 배우는 편해졌지.
김씨가 자살을 결심해 한강에 뛰어드는 것이 육체적 자살이라면 밤섬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건 사회적 자살에 가깝다. 결국 후자 역시 삶에 대한 포기지만 결국 그게 희망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배우로서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듯 자포자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그걸 희망으로 역전시킨 계기도 있었을 것 같고. 20대 초중반 시절엔 그냥 내가 이렇게 무조건 열심히 하면 잘 되겠지, 무조건 잘만 하면 잘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후반쯤 되니까 조급증이 오더라. 계속 상황에 발전이 없으니까 불안이 생기는데 그걸 나 혼자 계속 짊어지긴 싫잖아. 그러니까 남 탓을 하는 거야. 야, 이거 이러다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거 아냐? 난 정말 가망이 없나?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세상 사람들이 왜 날 알아주지 않는지, 내가 왜 누구보다 떨어지는 건지, 나는 괜찮은데 왜 그러는 건지, 결국 다 운이 없다는 탓으로 돌리게 되는 거야.
그 때가 일종의 고비였을 것 같다. 어떤 극복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운이라는 건 네가 잡으려고 하는 게 절대 아니다. 네가 모르고 지나갔다가 돌이켜봤을 때 알고 보니 그게 운이었던 거지.” 그 순간에는 운인지,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생각해보니까 역시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까지 내 실력이 모자랐던 거다. 내 탓인가 보다, 이렇게 마음을 싹 바꿔버리니까 고민이 덜어지더라. 그렇다고 다시 자신만만하게 그냥 열심히 하고 잘 하면 되겠지, 이런 건 아니었다. 원초적으로 돌아갔지. 내 실력을 더 키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이렇게 방향을 잡으니까 극복이 되더라. 돌이켜보면 운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한두 신 자리 촬영하던, 힘들게 연극했던, 아무것도 모르고 까불었던 그 시절들이 쌓여서 지금 영화를 하는 정재영이 된 거지. 어느 한 순간 때문에, 어느 한 방을 통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다. 그런 과정이 쌓여왔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는 거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런 것들이 다 운이었다. 거기에 운이 있었더라.
하지만 종종 진짜 한방으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젊은 배우 가운데 단 몇 편으로 스타덤에 오르는 친구들도 있다.
어느 한 작품 때문에 대박이 났다고 말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말하자면 이준기 씨 같은 경우, <왕의 남자>한편으로 대박이 났으니까 사람들은 그게 운이라고 생각하지. 그런데 거기서 만약 못했다고 생각해 봐. 사실 <왕의 남자>를 찍을 땐 몰랐을 거야. 얘기 들어보니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고 뭔가 절실했던 만큼 최선을 다해서 촬영했고 결국 작품이 잘 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과정이 운이 된 거지. 길거리 가다 캐스팅 됐다고 다 배우 되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보면 잘됐다는 거 하나는 운일지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다 실력인 거지.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무대에 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연극열전2’같은 경우도 그래서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고.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영화나 방송을 통해 인지도가 늘어난 만큼 그 인지도가 연극의 인지도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 정확한 계획은 없다. 연극과 영화, 방송에 활동의 구분을 두진 않는다. 다만 연극이나 방송 섭외는 영화보단 훨씬 적고, 들어온 작품이 괜찮아도 스케줄이나 시기가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의도적으로 연극을 무조건 한 편 해야지, 이런 생각은 안 한다. 예를 들어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던가, 아니면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의도적인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동정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할 수 있거든. 연극은 그런 게 아니고 똑같다고 생각하니까.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는 곳이 아니고 영화와 나란히 공존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할 기회가 되면 하는 거지, 일부로 의도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어서 되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작품이, ‘연극열전’ 첫 번째 당시 공연했던 <택시 드리벌>이었다. 그게 마지막이니까 무대에 선지도 벌써 5년 가까이 됐다. 그런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연극판을 특별히 도와주겠다는 의도로 무슨 선물을 준다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내가 연극할 때도 그랬지만 연극을 계속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누군가 잘됐으니까 돌아와서 도와준다는 느낌을 주면 개인적으론 차라리 오지 말라고 하고 싶어진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지금 영화 하는 것처럼 연극을 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매년마다 출연작이 한 편 이상은 된다. 그런데 작품마다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연기적인 비난을 얻었던 적도 없었고, 출연작마다 어느 정도 이상의 흥행성적도 거뒀다고 할만하다. 사실 낙관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결과들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좀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 같다. 그게 꾸준한 활동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내가 영화 아니면 할 것도 없고, 써주는 데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가족을 제외한 내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 수 있는 건 영화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단 뭔가 해야 되는 입장이란 말이지. 예를 들어서 몇 년 사이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 적어도 일년에 한 작품은 꼭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나한테 들어오는 시나리오 가운데서 일단 선택해야 된다. <김씨표류기>처럼 보자마자 ‘아, 이건 꼭 해야겠다’싶은 작품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필연적인 선택을 해야 되는 순간도 생긴다. 그럴 땐 최소한 내가 이 작품을 했을 때, 전작 가운데 제일 잘했다는 평가를 듣진 못해도 제일 못했다는 평가는 받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배우가 매번 최고의 작품을 할 순 없다. 그런 작품이 맨날 나한테만 들어오나. 절대 아니지. 내가 그럴 만큼 최고의 배우도 아니고. 내가 처한 위치에서 나한테 들어온 작품 가운데 나름대로 최대한 욕먹지 않을만한 작품을 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 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다. 운도 따라줘야 되고, 여건도 맞아야지. 그럼에도 난 해야 되는 거고.
‘진화는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배우에게 있어서 진화는 현명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고 성취적 욕망이 깊어질수록 현명해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일단 나도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고 싶다. 매 순간마다 너무 궁금하지. 친한 강호 형은 물어봐도 자기만 오래 하려고 안 알려줘. (웃음) 사실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된다는 방법은 없거든. 그런데 나도 궁금한 거야. 좀 쉽게 잡고 싶으니까. 배우로서 어떻게 작품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기를 하고, 연기 외적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되고, 인터뷰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느 정도까지 솔직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잖아. 과연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하지. 연예오락프로 같은 데는 원체 나가질 않으니까 주변에서 요즘은 나가야 된다고, 그게 대세라고 하는데 이럴 땐 나가야 되는지, 안 나가야 되는지 모르겠다.
최소한의 자기 기준이 중요할 거 같다. 배우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소신 정도는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외적인 게 본질을 해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외적인 게 본질을 해치는 순간 그땐 잘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본질을 갉아먹게 된다. 흥행이 잘되건, 연기를 잘하건, 일단 어딜 나가건, 안 나가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연기자의 본질을 얼마만큼 끝까지 지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기가 생각하는 본질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니면 연기를 그만 둘 때까지, 그렇게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가장 현명한 배우가 아닐까. 물론 정답은 없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본인이 각자 선택하는 거다. 단지 자기가 선택한 그 길에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지키고 가느냐가 문제겠지. 그 안에서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수준에서 조금씩 타협해가기도 하면서 죽을 때까지 연기에 대해서, 작품에 대해서 고민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건 이제 쉬워, 내지는 이렇게 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는 순간에 본질은 흐려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가는 거지.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
사실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은 <공공의 적 2>라고 명명됐어야 하는 작품 같다. <공공의 적2>?
사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강력반 형사 강철중이 다시 복귀한 거니까. 그렇지. 1편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1이 됐고.
솔직히 본인도 <공공의 적 2>보단 <강철중>에 애정이 남을 것 같은데. 백배나 당연하다. 솔직히 <공공의 적>이 너무 강렬해서, 바로 이어서 못하겠더라. 게다가 강력반 형사가 만날 적이 있고, 검사가 만날 적이 다르지 않나. 강력반 형사로서 적을 찾기가 힘들어서 직업을 바꿔봤지. 하지만 머릿속에 계속 저 강력반 캐릭터를 살려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강철중>을 잡으면서 오케이, 이거다, 밀어붙인 거지.
사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오랜만에 본인을 감독으로서 현장에 복귀시킨 캐릭터이기도 했다. 맞다.
그만큼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캐릭터였을 텐데 다시 한번 그 캐릭터를 꺼내 들었다는 건 제대로 진검승부를 해보겠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감 플러스, 내가 제일 잘하는 장르를 다시 한번 해보자는 거였지.
동시에 한국영화 위기가 공공연해진 상황에서 강우석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감이 <강철중>에 대한 비장감을 덧씌우는 것 같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이 영화 판에서 나까지 작품을 꺼냈는데 이게 안되면 나는 문 닫겠다, 난 이제 물러난다. 그렇게까지 절박하게 느껴졌다.
<강철중>에서 이원술이란 캐릭터는 전작의 ‘공공의 적’들과는 다르다. 완전히 다르지.
이전까지의 ‘공공의 적’들은 단선적인 악인이었다. 그냥 나쁜 놈. 머리 안 쓰고 그냥 나쁜 놈.
그에 반해 이원술은 다양한 감상을 부르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아무래도 그건 장진 감독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이원술은 분명히 영향이 있다. 다만 (장)진이가 만든 캐릭터를 강우석화(化) 시켜버린 거지. <공공의 적>시리즈의 승부처는 적이다, 적. 강철중이 아니다. 강철중이 만난 새로운 적이 어떻게 하느냐가 이 영화의 흥행결과로 나타나겠지. 그래서 난 정말 웃음을 주고 싶었어. 물론 사람들이 보기엔 참 나쁜 인간인데 영화가 경쾌하니까 덜 나빠 보일 수도 있단 말이야. 애정이 가기 시작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그 웃음 때문에 혹시 덜 미워 보이더라도 그런 걸 시도해보고 싶었어. 이렇게 악당도 웃길 수 있구나. 영화적으로 큰 웃음을 줄 수 있구나. 마지막에 처단할 때 덜 통쾌할 수 있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 재미를 주면 된다고 생각했지. 또 전편의 공공의 적들처럼 재영이가 직접 칼 쑤시고 다니는 것만 하면 사람 지친다. 내용만 바꿨지만 전편 또 보고 있다고 그러면 안되잖아. 본 영화 또 보는 거 같으면. 그래서 정말 새로운 영화하자, 고삐리 양아치도 나오고, 칼잡이도 나오고. 대신 1편의 향수가 있으니까, 이문식, 유해진이 나와야 된다, 그건 분명히 1편을 복기하면서 한번 즐겨라, 하는 부분이지. 그리고 이외의 나머지는 새롭게 한번 즐겨라, 는 것이고. 고삐리와 강철중의 대결도 있고, 이원술과의 대결도 있으니까, 분명 새롭지만 1편과 무관한 영화 같지 않다는 말이지. 그래서 1-1이 딱 맞는 거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공공의 적’과 달리 이원술은 관객의 호감을 얻는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당연하지. 그래야 다음 편이 나온다.(웃음) 이번엔 저게 누구야, 이렇게 되야 한다고. 워낙 연기력이 탄탄한 설경구는 이제 그대로 두고, 이번에는 어떤 적인지, 그 놈을 어떻게 잡을지, 그런 기대치가 있는 거지. 적이 살아줘야 시리즈가 간다니까.
어쨌든 <강철중>은 여러모로 장진의 흔적이 배어있다. (장진 감독이) 설계를 했으니까. 물론 구성은 내가 올렸지만. 설계자의 설계가 나쁜 것이 아니면 구성에 받아줘야 해. 그렇잖아. 현무암 쓸 걸 대리석으로 쓰겠다, 이렇게 재질은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지만, 그것도 쓸 때부터 나랑 말을 많이 맞췄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시나리오 작업에도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말인가? 관여 안 할 수가 없지. 아이디어는 내 아이디어인데.
그래도 장진 감독의 시나리오인 만큼 특색이 상당히 두드러졌을 텐데. 그런 걸 다 걷어내 버렸지.
본인의 연출적 취향에 걸맞게 변형되거나 제거된 게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름대로 반영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존재했을까? 당연하지. 예를 들면, ‘진아, 이 씬은 내가 못 쓴다. 내가 알아서 바꾸마.’ 그렇게 바꿨지. 그 대신에 전체 틀거리가 좋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수정을 하더라도 작가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 않겠지. 오히려 자기 코미디에 내 코미디를 더 얹어줬으니까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러는 거지.
고등학생들이 조직에 연루된다는 설정은 누구로부터 착안된 아이디어인지. 어느 분 아이디어가 아니라, 영화 크랭크인한 뒤 한달 만에 이 사건이 실제로 터졌었어. 임성훈의 ‘세븐데이즈’에서 이게 나오는 거야. 조폭이 직업화되고 있다, 이 코너였어. 거기서 조폭들을 인터뷰하는데 조폭들이 어이없는 말들을 하더구먼. 나 이 생활에 만족한다, 나 연봉 얼마 받는데 대우도 괜찮다, 청소년들한테 이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있어.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가도 돼? 이게 다 영화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이런 생각도 들고. 영화 속에서 조폭들이 너무 멋있잖아.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이거 한번쯤 말할 필요가 있겠구나 싶었지. 그 대신에 조폭을 너무 극악하게 그리면 영화가 너무 지저분해져 버린다고.
폭력의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건 경계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폭력성이 가미되면 청소년들 보여주고 싶은데 이 영화는 못 보여줄 것이고, 대신 적을 좀 재미있게 가보자. 그래서 웃고, 즐기고 나오다가도 우리 사회가 이런 면이 있구나, 이 정도만 생각하게 해주면 상업 영화로서 할 도리를 다한 거 아닌가, 그런 판단을 했다.
이전 시리즈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굵어졌다. 웃기면서 메시지를 밑에 깔았으니까. 소리 지르지 않고.
장진 감독과 함께 K&J를 설립한 이후, <강철중>은 가장 본격적인 공동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이 전에 <아들>이나 <한반도>로 따로 놀긴 했지만 <강철중>이 우리가 영화사 세워놓고 함께 한 첫 게임이지. 처음 링에 오른 거야.
사실 본인이 오랫동안 장진 감독의 배후세력이기도 했다.(웃음) 난 진이가 한다면 뭐든지 밀었으니까. 심지어 시나리오가 안 좋아도 찍으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장진 감독의 이야기가 본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건 아니었을 텐데. 아니지. 하지만 생각은 비슷해. 다만 표현의 차이가 있지. 예를 들면 <거룩한 계보>도 잘 가다가 갑자기 판타지로 가버리잖아. 그래서 ‘진아, 이거 하지 마라. 위험하다.’ 그러면 절대 아니래. 그래서 ‘야, 총 맞고 비행기 떨어지고, 그게 (말이) 되니? 그게?’ 그 전까지는 꼭 <대부>처럼 멋있게 가잖아. 그러다 어느 순간에 벽 무너뜨린다고 벽에 달려가 박고 있고.(웃음) 그런 거야.
혹시 이 부분만큼은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장진 감독이 애착을 보인 부분은 없나? 이것만 살려달라고 할만한 건 내가 아니까 알아서 살려놓지. 애초에 내가 진이 보고, ‘네 맘대로 써라. 내가 못 찍는 건 알아서 걷어내마.’ 그랬더니 ‘감독님 알아서 하십쇼. 전 그냥 분량만 전적으로 채웁니다.’ 그래서 OK 한 거니까.
<강철중>을 <공공의 적>시리즈의 가능성을 책정하는 기준으로 생각하진 않나? 계속 가고 싶다는 뜻이지.
예전에 <투캅스3>같은 경우는 김상진 감독에게 맡기기도 했었다. <투캅스>와 <투캅스2>찍을 때, 너무 고생해서 내가 억만금을 벌어도 다신 이거 못한다 그랬지. 그런데 (김)상진이가 ‘그럼 감독님 이거 저 주세요.’ 그러는 거야. ‘자신 있어? 너?’ 그러니까 ‘네. 제가 청출어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랬다가 제대로 망해서 시리즈가 문 닫았잖아.(웃음) 지금도 혹시 (누군가가) ‘<투캅스>감독이세요?’ 그러면 ‘아, 아닙니다.’ 이래.(웃음) 어쨌든 그땐 그랬고, 강철중은 3편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거야. 왜? 적이 바뀐다 이거지. <투캅스>는 적을 쫓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뭔가 만들어가야 되는 거고, 이게 시트콤이나 다름이 없단 말야, 시츄에이션 코미디. 근데 <공공의 적>은 우리 시대에 또 다른 천인공노할 나쁜 놈, 퍼블릭 에네미(public enemy)가 나타나면 되잖아. 그렇기 때문에 3편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거야.
혹시 <투캅스3>처럼 이 시리즈도 언젠가 다른 감독한테, 에이, 노! 네버! 노! 안 하면 안 했지. 못 줘, 이제.(웃음) 진짜 못 줘. 그리고 내가 안 하면 설경구가 안 해.
조연들의 매력을 살리는 것도 염두에 뒀을 텐데. 아마 배우들 연기가 나쁘지 않았을 거야. 이번에 조연들을 하나씩 다 살려보려고 주변 배우들까지 내가 하나씩 일일이 다 컨트롤했다고.
사실 <공공의 적>이 인기를 얻은 배경으로 조연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공공의 적>에 나왔던 유해진, 이문식이 드라마 운반하는 브리지(bridge)로 잠깐 나오고, 고삐리 태진이, 칼잡이 문수, 그 다음에 이원술 따라다니는 변호사까지 다 자기 노릇을 하잖아. 영화가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려면 조연의 등장과 퇴장을 명확하게 잡아줘야 돼. 등장하면 왜 등장하는지, 무슨 롤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주고, 엔딩 아웃 시켜라 이거지. 내가 이번에 주인공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조연들까지 일일이 다 손봤던 건 입체적인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였으니까.
사실 이문식이나 유해진 같은 경우는 <공공의 적> 개봉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였지.
하지만 지금은 종종 주연까지 맡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너무 작은 역할을 맡기는 게 아닌가 불안함은 없었나? 아니야. 그들이 그 영화로 컸기 때문에 너무나 흔쾌하게 하겠다고 하더라고. 심지어 돈도 안받았잖아. 마치 아버지한테 아들이 뛰어오는 것처럼. 그래서 ‘너희 여기 출연한 거 후회하게 하진 않을게.’ 그랬더니 ‘아, 저희 믿습니다.’ 그러더라. 첫날 크랭크인을 이문식하고 갔고, 다음 날은 해진이하고 갔어. 아주 기분 좋게 찍었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당신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대감일 거다. 영화 잘 되면 또 찍고, (다른 감독에게도) 이 영화 찍게 하고, 저 영화도 찍게 하고, 그렇게 영화판을 몰고 가는 느낌에 대한 기대감. 이번에 <강철중>이 잘되면 한국영화가 어려운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 그런 기대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그런 면에 대해서, 엄청 부담스럽지. 그런데 거기서 만약 진짜 개떡 같은 영화가 나왔다면 그 배신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거야. 기자들조차도, 쟤는 끝장났다, 이런 식으로 글들 엄청 써 보냈을 거야, 아마. 어이없는 영화 찍었다면, 너마저 이러냐, 너마저, 이런 마음에서 얼마나 많은 분노의 글이 나오겠어. 고등학생들조차 ‘이명박 OUT’ 피켓 들고 다니는데, 언론에서 일개 감독하나 못 죽이겠냐고. 거기에 대해서 난 각오한다니까. 이번에 만약 당신들이 봤을 때, 내가 유머 다 잃어버리고, 드라마도 모르는 놈같이 보이면 날 개같이 밟아도 좋다. 대신 좋으면 칭찬해줘라.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이잖아.
사실 예전에 <한반도>당시에 스스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영화 찍고 나니까 한국 해경과 일본 해경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강철중>에서도 비슷한 시의성이 발생한 것 같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광우병’이란 단어 딱 한번 나오는데도 민감하게 들린다. 사실 그 전에 소 얘기 많이 나오잖아. 처음부터 도축장 씬도 있고. 나중에는 ‘수입산인데 속여 팔면 안되지.’ 이런 대사도 나오고. 후반부에 가면 ‘고기 맛이 어떻습니까?’ 물으면 강철중이 ‘이 맛이지. 한우가. 반성 많이 했구나.’ 이런데다가 광우병 대사까지 나오니까 사람들이 확 기겁을 하는 거지. 근데 4개월 전에 난 그런 의도로 찍은 게 아니라, 이왕 소고기 먹는 거 한우 먹어주자, 우리 농민들 위해서. 그런 뜻으로 한 건데…..내가 마치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말야.(웃음)
아무래도 시사적인 부분에서 영화적 모티브를 얻다 보니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인 관심이 많아서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
사실 최근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많은데. 근데 그건 걱정이 안 되는 게, <강철중>은 민생사범 쫓는 거야. 지금 경찰의 과잉진압이 문제가 있는 거지, 실제 강력반 형사들이 소매치기도 안 잡고 강도도 안 잡고 그런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잖아. 강철중은 민생사범을 잡는 일개 형사니까 그걸 여기에 비유해서 과잉 진압하는 경찰을 떠올리진 않을 거 같아. 일반시사 해봤잖아. 그럼 거기에 경찰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의견 나와야지. 근데 정말 나쁜 놈 잡는 거니까. 내가 봤을 땐 그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 같다.
사실 강철중은 형사가 아니었다면 깡패가 될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강철중이란 캐릭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활용하는 방향에 대한 답변이라 해도 될 것 같다. 고삐리들한테, 깡패가 그렇게 되고 싶어? 너 깡패가 부럽냐? 이런 대사 하잖아. 그런데 실제로 그런 애들 많거든. 학교가면 일진회 있잖아. 그런 걸 선망한다는 말이지. 영화보고 나면, 이거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한 거 아냐? 한번쯤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강철중은 한국영화의 자본동원력 안에서 묘사가 가능한 안티히어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금으로 할리우드 애들 못 이겨. 우리 정서로 이겨야지. 우리 정서로. 우리 식으로 이겨야 된다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영화도 대작을 제작하는 비율이 늘었다. 시장상황도 그에 기대는 느낌이고. 조금 더 영화인들이 신중해질 필요가 있어. 너무 급하게 찍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하고, 정말 이 시나리오가, 이 내용이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지, 상업영화 찍으면서 최소한의 그런 노력들은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지. 투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편수만 무조건 늘릴 게 아니라 내실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주면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선택한다. <괴물>이 재미있으니까 보러 간 거지, 누가 보라 그래서 봤냐고, 그러잖아. 그런 관점에서 우린 지금 영화 내실에 힘을 쏟아야 돼.
91년에 찍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이후로 각본 작업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참여하던 안 하던 난 이름을 안 올리니까. 다 참여는 하는데 이름은 빼지. 내가 작가란 이름을 가지면 뭐하냐고. 누릴 거 다 누리는 놈이. 자기가 조금 써놓고 왜 이름 넣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공로 인정받으려고? 내가 다 썼으면 내 이름을 넣지.
워낙 할 일이 많다 보니 각본까지 도맡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아니고, 내가 촬영할 때 워낙 시나리오 수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리면 아이디어가 안 나와서 그런 거다. 조금 미흡하더라도 작가에게 쓰게 하는 게 나아. 어차피 내가 고쳐 찍으면 되니까.
글쓰기는 일단 작가에게 맡기고 연출로 승부한다? 물론이지. 만약 내가 고치다가 힘들 때 다시, 이건 네가 고쳐줘야겠다, 그 정도 부탁은 하는 거지.
좀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모티브가 궁금하다. 사실 1편 작가들이 뽑아낸 캐릭터다. 내가 꼴통 형사는 그려본 적이 없잖아. <투캅스>는 재미있는 형사였고. 작가가, ‘감독님, 꼴통 형사 이야기 한번 해보실래요? 진짜 나쁜 놈인데 꼴통 형사 이야기, 나쁜 놈이 더 나쁜 놈 잡는 영화.’ 이러더라. 그 때 감이 왔다. 바로 그거다. 화이트 앤 블랙이 아니고, 회색. 그렇게 오케이 한 거지.
그 당시 <공공의 적>으로 오랜만에 감독직으로 현장에 복귀했는데 만약 강철중을 못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복귀 안 했을걸. 그 정도 되니까 내가 복귀했지. 3년 반 만에 영화 찍는 놈이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으면 바보지, 바보.
<한반도>는 말이 많았었다. 좀 위험했지.
사실 <공공의 적>으로 현장에 복귀한 뒤로 공공의 적 시리즈를 제하면 <실미도>와 <한반도>가 남는다. 두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이란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한반도>가 <실미도>에 비해 민감한 반응을 얻었던 건 직설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반도>의 평에 대해서 내가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라고 말한 것뿐이야. 나는 판타지로 소리를 질렀는데 사람들은 현실정치로 받아들이고 굉장히 오해를 하더라. 지금 이 세계화 시대에 일본에게 국수적으로 이래야 할 이유가 뭐냐, 굉장히 편협한 인종주의다, 막 이러는 거다. 사실 사상이 없는 영화였고 나한테는 판타지였는데 그렇게 들이대니까. 아, 지금 이 사람들이 영화평을 안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너 이런 얘기하면 안돼, 그래서 사실은 되게 당황했어. 억울하기도 하고. 관객한테, 우리 이런 일이 있죠.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죠? 이런 동의를 구하려던 거거든. 그걸 전달하는 수단은 웃음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 보는 동안에 다른 생각 말고 나와 한번 생각을 맞춰보자는 거지. 이런 인물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객하고 이렇게 얘기하고 소통하고 싶은 거였다. 일반 관객들은 받아주는데, 먹물, 화이트 칼라들, 또는 언론들, 평론가 시각에서 안 받아들이는 거야. 이런 영화는 만들면 안 되는 영화다. 그래서 난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시의성도 컸다. 시의성 플러스 노무현 정권. 이거 이 정권 밀라고 찍은 거 아냐? 이런 오해까지 하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보고 차기 국회의원 나가시려고 그러죠? 이러고.(웃음) 내가 어이가 없어서.
어쩌면 그런 과정도 다시 강철중을 빼 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됐을 것 같다. 그것 때문에 내가 다시 재미있는 얘기로 돌아왔을지도 몰라. 내가 바보가 아니거든.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나 국수주의자 개념으로 영화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다시 즐거운 영화 찍어드릴까요? 이런 마음으로 다시 몸풀어본 거라고. 내가 감각이 아직 죽진 않았다고, 연출자로서 비겁하지 않게 연출해보자, 그런 의도도 있고.
사실 처음 강철중이 상대한 공공의 적은 사소한 개인적 범죄자였다. 하지만 속편에서부터 그 범위가 조직적인 형태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강철중>에서는 확실히 기업적인 조직 자체가 공공의 적이 됐고. 1편의 <공공의 적> 타이틀이 붙을만한 것인가, 약간 회의가 있었다. 천하의 몹쓸 놈이지, 그게 공공의 적인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공공의 적 2>에서는 천박한 자본주의자를 하나 건드렸고. 그건 공공의 적이 맞거든. 근데 <강철중>이 사실 공공의 적 중에 가장 사실 공공의 적답지. 그래서 이 영화보시고 어떤 어르신 한 분이 이번엔 정말 공공의 적 같네? 이러더라.
<강철중>에서 등장하는 강철중은 <공공의 적> 당시에 비해 성숙했다는 느낌도 든다. 캐릭터가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당연히 성장해야지. 세월이 흘렀는데. 인간이 변해가야지.
사실 애초부터 강철중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나쁜 놈이지. 정의롭지 않아.
<공공의 적>에서도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상대에 대한 사소한 복수심이 발단이 되기도 했었고. 그렇지. 그런 개인적인 원한도 좀 있고.
하지만 <강철중>에서 그는 과거에 비해 사회적인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의지가 좀 더 보인다. 사람이 연륜이 몸에 배면 사고가 달라진다. 당신도 5년 후에 본인의 글이 달라질 거라고. 지금처럼 많이 안 써도 더 짧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글이 나올 거라고. 그것처럼 세월이 흘러가면 사람도 자연스럽게 변한다. 나쁜 짓 했던 놈이 생활인이 되듯이, 그래야 시리즈 안에서 변해가는 이 사람과 함께 우리가 생활해가는 느낌이 들지. 과거가 좋았다고 해서 그대로 다시 가면 그 영화 무슨 재미로 봐.
딸이 많이 자란 것에 대한 영향도 있지 않나 싶은데. 사실 옛날에 가족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가족도 중요해진 거지. 그래서 일일교사도 가잖아. 1편 같았으면 일일 교사 갔겠냐고, 걔가.
우린 깡패지만 사회에서는 우리를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부른다. 극 중 이원술의 대사에서 나오는 말인데 이는 마치 사회적인 조직체계나 조직문화에 대한 비유처럼 들린다. 실제 건달 아니지만 보면 건달 같은 애들 많잖아. 사회에서도 조직 형태가 그렇고. 일반 회사도 안으로 보면 깡패보다 더한 곳이 많아. 폭력을 안 쓸 뿐이지. 사람 함부로 자르고. 그니까 그 대사를 보면, 건실한 청년으로 불러주니까 깡패 짓 열심히 하다 보면 나처럼 돼, 이런 아주 나쁜 꿈을 던져주잖아. 우리가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강철중은 항상 주먹으로 공공의 적을 처단한다. 그런 응징방식을 묘사하는 건 그 상황에서 발생할만한 쾌감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만든 캐릭터인데 당연히 내 생각이 안 들어갈 수가 없지. 그리고 내 생각도 당연히 있지만 관객들도 대등하게 배려해줘야지. 우리는 깡패 보면 무서워서 피한다. 근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피하면 안돼. 아무리 무서워도 들러붙어야 한다고. 그래야 사고가 맑아지고 투명해지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우리는 길거리 지나가다가 진짜 깡패들끼리 싸우면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 도망가야지, 어떡해. 무슨 칼 맞을 일 있어? 그런데 강철중은 그러면 안되지. 거기서 시비를 가려주던지, 다 때려서 무릎을 꿇게 만들던지. 그건 영화적 통쾌함 때문에 해야 하는 거야.
동시에 그것이 어쩌면 본인이 현실에서 지닌 공권력에 대한 불만을 영화적으로 해소하는 측면이 아닌가 싶다. 바람일 수도 있고. 맞다. 나는 강철중 같은 형사가 분명 있다고 본다.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오케이 하거나, 또 그렇게 못한 사람들이 보고, 나도 앞으로 이렇게 한다, 그럴 수 있잖아. 내가 형사는 안 해봤지만 실제로 <공공의 적 2>보고 검사들이, 맞아, 검사는 저렇게 해야 돼, 자기들끼리 그랬다는 거 아니야. 강철중 같이 검사라면 저렇게 해야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악을 잡아야지. 안되면 총을 들이대는 한이 있더라도.
요즘 안 그래도 시국이 어지럽다. 나는 촛불시위를 보면서 되게 슬펐다. 내가 작업 중이라 참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이젠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이 진짜로 높아졌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진국 수준일지 모르나 의식들은 정말 선진국 수준이다. 아줌마들이 유모차에 애태우고 나온 거 보면, 야, 이제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됐다, 싶더라. 난 되게 감동받았어.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영화적 모티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웃음) 난 더 이상 (영화적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아. (웃음)
사실 여성 캐릭터를 못 본지 오래됐다. 한 10년 됐지. 10년. 내가 사실 코미디라면 할 수 있다. 그런데 멜로 드라마 해라, 그런 건 내가 못해. 남녀 사랑이야기 같은 건 못한다고.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건 해보겠다 싶어서 코미디로서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건 앞으로 분명히 나올 거 같은데, 여성스러움을 묘사하는 건 난 못한다.
사실 <마누라 죽이기>나 <미스터 맘마>처럼 여성이 등장했을 때 코미디도 유연해졌던 것 같다. 그건 우리 마누라가 무진장 웃기니까.(웃음) 진짜로. 결혼하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마누라가 결혼하고 나서 지금은 완전 개그우먼됐어. 옛날에 내가 웃기려고 하면 화내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자기가 날 웃기고 그래.
사모님께서 유쾌하신 편인가 보다. 되게 명랑해. 되게 밝고.
다시 한번 여성캐릭터를 앞세운 코미디를 찍어도 될 거 같은데. (웃음) 일단 내가 해보고 싶은 거 한 두 개 먼저 해보고.
사실 최근 시네마서비스 위기설이 심상찮게 돌았었다. 실제 위기다. 실제 지금 심각한 위기라고. 지난 2년 동안 개봉했던 영화들이 다 망했잖아.
시네마서비스의 위기를 한국영화 위기의 실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우리하고 싸이더스 어려워진 거 보면 당연히 한국영화 전체가 어려워진 거지.
본인은 재미있는 영화의 부재가 한국영화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기회라고 본다. 진짜 한국영화가 질 높아질 수 있는 기회다.
부가판권이나 극장과 배급의 수익 배분의 구조적인 개선도 시급하지 않을까. 그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한국영화의 수준문제다. 수준문제. 사실 요 근래 극장에서 내걸기에 민망한 작품들이 많았잖아. 기자시사에서 보고 민망하지 않았어?
…… 기자들도 답답했을 거야. 어떻게 이런 영화에 3~40억씩 돈들이냐, 이런 영화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런 영화들 편수 줄이고, 한국영화 가능성 있구나, 발전하네, 이럴만한 영화들이 드문드문 나와줘야 된다 이거야. 너무 안 나오고 있잖아. 요즘.
그런 실망감이 축적되다 보니 관성적으로 한국영화 자체를 기피하는 관객도 발생하는 것 같다. 그걸 깨주려면 재미있는 영화가 계속해서 나와야 돼.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강철중>에 그런 기대를 하는 거 같아. 어려움도 극복해주고, 관객들도 만족시켜주고.
반면에 그런 관성이 <강철중>에게도 작동할 수 있다. 당연히 지금 관객들이 너무 안 나오니까, 사실 한국영화를 너무 안 보니까 걱정이 된다. 그러니까 좀 오게 해봐!(웃음)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강한섭 교수가 취임했다. 의견이 궁금하다. 나는 잘 할 거 같은데. 워낙 의욕이 넘치고, 본인도 너무 하고 싶어했고. 그리고 사실 지금 강한섭은 안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분명 더 잘할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안티가 많다는 얘기는 감시가 많다는 얘기거든. 그래서 난 오히려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잘할 것이다. 내가 저번에 축하한다고 전화했는데 그 때, 당신 정말 잘해야 된다, 여러 명이 주시하고 언론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니 진흥위원회 똑바로 운영하고 정말 한국영화에 뭐가 도움이 되는지 정말 잘해달라, 그랬다. 그러니까 정말 믿어달라고 하더라. 자기가 3년 동안 한국영화에 큰 도움이 돼보겠다고. 잘할 거다.
지금 사실 제작자나 기획자로서, 한국영화 안에서 산업적으로 많은 짐을 지고 있는데, 종종 감독역할에만 치중하고 싶다는 생각하진 않나. 왜, 정말 하루에 수십 번도 하지. <강철중>기자시사회에서 어떤 기자들이 그러더라. 온갖 이상한 짓 다 하면서도 이 정도는 만드는데, 감독만 하면 정말 어떤 영화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고.
사실 순차적으로 따지자면 <공공의 적 3>에 해당한다. 하지만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본래 타이틀 대신, ‘강철중’이란 캐릭터의 네임밸류를 앞세우고 ‘1-1’이란 번거로운 순번을 꼬리에 붙인 건 다름아닌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구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틀로 전면에 내세운 ‘강철중’은 그 앞에 ‘원조’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1-1’이라는 순번이 붙은 부제는 전작인 <공공의 적 2>를 시리즈로부터 분가시키는 동시에 <공공의 적>으로 돌아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강철중>이 ‘공공의 적 1-1’이 된 사연은 이렇다. 결국 <강철중>은 <공공의 적>이란 브랜드를 재건하는 작업이다. 무리한 확장사업으로 인해 훼손된 캐릭터의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강철중>은 동어반복의 함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가문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개별적인 존재의미를 확보하는 것은 속편이 맞이해야 할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강철중>에 주목할만한 점은 설경구의 출연, 강우석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장진 감독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강철중>에서는 장진 감독 특유의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만큼은 아니지만 드물지 않게 눈에 띤다. 또한 강철중과 상대하는 이원술(정재영) 역시 전작에서 등장한 악인 캐릭터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조규환(이성재)과 한상우(정준호)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절대 악인으로써 강철중과 대척점에 놓였다면 이원술은 전자들에 비해 인간적인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는 고등학생에게 태연하게 칼을 쥐어주는 악인이긴 하지만 조직적 의리를 중시하고, 자가수성적 대범함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적 자상함마저 갖추고 있다. 강철중을 주목하게 만들던 전작의 단선적인 악인들에 비해 이원술은 좀 더 입체적인 선을 지닌 캐릭터로 완성됐다.
동시에 <강철중>의 강철중은 <공공의 적>의 강철중에 비해 성장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양아치만큼 껄렁껄렁하고 애처럼 멋대로이며 손발이 자동 반사되는 폭력적 습관도 여전하다. 그러나 자신의 철없음을 타이를 수 있을 만큼 똑똑하게 성장한 딸이 있고, 15년 차 경찰 공무원 월급으로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는 빈곤한 현실적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세월에 장사 없듯,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강철중>에서 강철중은 철없이 막무가내이던 <공공의 적>시절에 비해 성숙한 인상을 준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위트가 감소한 강철중 앞에 인간적 매력을 갖춘 악인 이원술을 대립시키면서 캐릭터 구도가 종종 역전되는 뉘앙스를 준다는 것. 사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조규환을-<공공의 적 2>는 논외로 치고- 미치도록 잡고 싶어한 건 강철중이 정의에 목숨 거는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규환이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인면수심의 탈을 쓴 악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술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악인이다. 특히 그가 사시미 하나를 쥐고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그 두목(문성근)과 담판을 짓고 나오는 장면은 인상적인 카리스마가 구사되고 인간적인 유머까지 겸비한다.
단선적이던 캐릭터 나열방식에 불분명한 혼선이 발생했다.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의 것이지만 이원술은 분명 장진 감독의 것에 가깝다. 결국 두 감독의 조합은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쉽게 융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위트에 도취되기도 한다. 수위가 넘칠 것 같은 웃음의 타이밍에 좀처럼 쉽게 반응할 수 없는 건 융합될 수 없는 스타일의 간극 때문이다. 선이 굵고 묵직한 강우석 감독의 판을 지탱하기엔 장진 감독의 스타일은 가볍게 들뜬다. 동시에 캐릭터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공공의 적>의 단선적 관계는 공익적인 메시지를 얹으며 다소 번거로워졌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관여하는 조폭들의 실상을 그리는 <강철중>은 누가 봐도 공익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작게는 상도덕의 윤리부터, 크게는 기업의 경영 윤리가, 게다가 대한민국의 조직적 위계질서에 대한 풍자까지, 넓은 현실관념의 메시지가 펼쳐져 있다. 문제는 이런 측면들이 더더욱 <강철중>을 경직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의 유머가 녹아 들지 못하는 것도 이 심각한 사안들이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극적인 유연성을 방해하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강철중>은 ‘<공공의 적> 혹은 강철중 리턴즈’라 명명돼도 상관없는 작품이다. 하는 꼴을 봐서는 깡패인지 형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것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강력계 형사 강철중에게 호감을 보였던 이라면, 게다가 양복 차려 입은 검사 강철중이 정의를 주창하던 경직된 모습에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던 이에겐 더더욱 반가운 사실일 수도 있다 게다가 오리지널 <공공의 적>을 계승하는 만큼 본래 <공공의 적>을 채우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돌아왔다. 삼류양아치였던 산수(이문식)는 강철중 덕분에 학교(!)에 다녀온 뒤, 유흥업으로 성공해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칼잡이 용만(유해진)도 정육점을 운영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다. 또한 강철중과 애증을 나누는 엄 반장(강신일)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공공의 적>의 중요한 관점포인트가 다양한 조연 캐릭터들을 통해 얻어지는 굵직한 재미였음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은 <강철중>의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강철중은 서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한국형 안티히어로에 가깝다. 그가 상대하는 악인은 언제나 부자이며 그들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게다가 강철중은 가난하고, 심하게 강직하지 않다. 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풍자가 막연한 단상처럼 녹아있는 강철중은 분명 대한민국 서민들을 통감시킬 만한 자의식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그의 공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보단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형이 돈이 없다 그래서 패고, 말 안 듣는다 그래서 패고, 어떤 새끼는 얼굴이 기분 나빠, 그래서 패고, 그렇게 형한테 맞은 애들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2바퀴다.’ 다소 길지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뱉는 강철중의 대사는 결코 선한 이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부패시키고, 이를 좀먹고 자라는 무리들을 향해 그는 주먹을 날리고 맞짱을 뜬다. <공공의 적> 그리고 <강철중>에 어떤 쾌감을 느낀다면 분명 이 때문이다. 게다가 권력친화적이고 부에 관대한 대한민국의 알량한 공권력과 달리 강철중은 공권력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허구적이지만 실존적인 심판을 몸소 실천한다. <강철중>에 호감을 부여할만한 요인은 영화 외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는 바도 (분명)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위협에 시달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시의 적절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