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다가도 몰아치게, 고요하면서도 가열차게, 조 라이트는 특유의 감각적 재능으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초월한다. 사운드와 비주얼의 공감각적인 여정, 조 라이트의 길을 돌아본다.
1972년 런던에서 조 라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5세였다. 그는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은 라이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꼭두각시 인형극 극단을 설립하고 극장을 운영했다. 그 극장에서 본 인형들의 연기는 살아있는 라이트의 삶을 흔들었다. 사실 소년 라이트는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난독증이 있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슈퍼 8미리 카메라로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국 예술학교에 진학한 라이트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한 예술대학에서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크로코다일 스냅>(1997)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주목을 얻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맨이나 디자이너, 혹은 배우가 될 수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들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평범한 삶에 어울리는 법을 잘 알 수 없었던 대신 촬영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행운을 얻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행운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됐다. TV미니시리즈로 연출 경력을 쌓으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2003년 BBC에서 방영된 4부작 시대극 <찰스 2세>로 영국 아카데미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오만과 편견>(2005)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려한 문체로 시대를 풍자한 당대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떤 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게 각본이 보내지기까지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다.”놀랍게도 그는 잘 모르는 제인 오스틴을 필사하는 대신 각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라이트는 대학시절의 수업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매우 이론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를 만들길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론 수업에 의지하기 보다 방과후와 주말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현역 배우들의 강습에 참여하며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는 법을 깨우쳐 왔다. 원작에 비해서 자립적인 현대의 여성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보다 로맨틱한 감수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런 자질 덕분이다. 특히 서정적인 음악과 고풍스러운 영상의 결합은 로맨틱한 기운을 한껏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원작의 유명세보다도 라이트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필름 데뷔 이후, 그의 두 번째 행보는 다시 한번 유명 원작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영화화 작업은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할만한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과 달리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나는 내 심리의 등에서 뛰어다니는 피해망상을 얻었다”고 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리를 압박하듯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타자기 소리, 발자국처럼 찍히는 활자의 행렬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해낸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감에서 출발하는 <어톤먼트>(2007)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융화시키는 라이트만의 공감각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의 공은 일차적으로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돌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악과 영상을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킨 라이트의 재능도 간과할 수 없다. 서정적인 운율의 클래식한 넘버 위가 흐르는 가운데 투명하게 떨어져 분산되는 자연광은 파국적인 로맨스에 깃든 처연함을 더욱 애잔한 여운으로 밀어 보낸다.
과거 시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라이트는 <솔로이스트>(2009)를 통해서 현대극에 도전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정신적 질환으로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을 발견한 <LA타임즈>의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관찰자로서 그를 찾아가다가 끝내 그와 교감을 이루고 서로의 치유를 돕는 과정을 기술한 칼럼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단조처럼 우울한 삶 속에서 무기력과 피로감을 느끼는 탓에 쉼표 같은 삶을 찾던 스티브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착란에서 헤어나올 마침표가 필요한 나다니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솔로이스트>는 영화와 실화의 협연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사실 라이트의 비범한 전작에 비해서 <솔로이스트>는 상대적으로 범작에 가깝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현 위에 떨어진 몇 줄기의 빛을 포착해낸 감각적인 클로즈업 샷과 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현악기의 유리 같은 선율, 베토벤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표현해낸 환상적인 컬러는 라이트만의 진수를 드러낸다.
마치 경력의 전후를 가르듯 라이트는 연이어 현대적인 작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톤먼트>로 데뷔한 시얼샤 로넌을 타이틀 롤로 앞세운 <한나>(2011)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나>는 그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다른 문법을 지닌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공간의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극을 전개하고 진전시키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원작 소설도, 실화적 모티프도 없는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라이트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선택한 건 라이트가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이 확정된 로넌의 추천을 통해서 라이트가 보다 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지닌 공감각을 폭발시키듯 분출해낸다. 특히 노이즈와 전자음에 어울리는 만화경 비주얼은 사이키델릭 그 자체다.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는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이는 가능성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시대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그리고 라이트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그것이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운명과도 같았던 영화는 여전히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다. 그의 공감각적 여정은 그렇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해 혜성처럼 등장한 캐리 멀리건은 일찍부터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한때 조바심을 냈던 것도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던 탓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꽃이 피어 오르듯, 재능이 만개한다.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두는 2009년 작인 <아바타>와 <허트 로커>가 벌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배우 관련 부문만큼은 두 영화의 세력 다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특히 만년 여우주연상 수상 후보인 메릴 스트립과 헬렌 미렌을 제치고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한 산드라 블록은 수많은 말을 몰고 다녔다. 그리고 시상식 이전부터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던 배우가 있었다. “캐리 멀리건, 스타가 탄생했다.” 첫 주연작 <언 애듀케이션>(2009)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얻어낸 캐리 멀리건은 <타임>매거진의 헤드라인처럼 놀라운 발견이었다.
1985년생, 그러니까 이제 20대 중반을 통과한 멀리건의 이력이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만과 편견>(2005)에서 키티 베넷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할 당시만 해도 멀리건은 딱히 대중의 눈길을 끄는 존재는 아니었다. <언 애듀케이션>을 연출한 론 쉐르픽의 말처럼, “그와 같은 속도로 대단히 유명해질 수 있다는 건 특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쉐르픽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난 멀리건은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매니저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세 살의 멀리건은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도버해협을 건넌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뒤셀도르프는 전세계의 사람이 모여 드는 국제적인 공업도시였다. 그녀가 네 살에 입학한 뒤셀도르프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Dusseldorf E.V.)는 서로 다른 50개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곳은 그녀가 배우로서의 오늘에 다다르는 시작점이었다. 2년 뒤, 멀리건은 교내 연극무대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그녀의 오빠 오웬이 출연한 <왕과 나>에 참여하길 원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어렸던 그녀에게 허락된 건 코러스 석뿐이었고 어린 그녀는 화를 삼킨 채 그 자리에서 무대를 지켜봤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그게 내가 연기를 원하게 된 전부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의 다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필요했다. 후에 다시 가족과 함께 런던의 하이드 파크로 돌아온 멀리건은 자녀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길 원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영국의 명문 가톨릭 여자사립학교인 올딩엄 스쿨(Woldingham School)에 입학한다. 호텔 매니저로서, 대학 강사로서, 바쁜 일상을 보낸 탓에 멀리건의 일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부모에게 기숙사 제도를 지닌 이 학교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비비안 리나 모린 오하라와 같은 여배우를 배출하기도 한 이 학교에는 훌륭한 드라마 부서가 있었고 멀리건은 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자양분을 마음껏 쌓아나갔다. 다른 수업을 무시하듯 오로지 연기에 몰두해 나간 그녀는 <크루서블>이나 <스위트 채러티> 등과 같은 고전 연극 무대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멀리건을 지도한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그녀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옳은 기질과 성공을 향한 투지도 지니고 있었다.”
멀리건의 부모는 그녀가 명문대에 진학해서 학구적인 직업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연기자로서의 미래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성공이 멀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기 전공을 꿈꾸던 그녀는 부모 몰래 선술집에서 돈을 벌며 연기 전공이 가능한 대학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세 번의 불합격 통보였다. 그리고 더욱 암담한 것은 그런 그녀의 비밀을 어머니가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간절한 희망이 묘비에 새겨진 유언처럼 허망해지듯 그녀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올딩햄 재학시절, 멀리건은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각본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줄리안 펠로위스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여교장이었던 다이애나 버논의 친구였던 그는 멀리건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가 쏟아내는 대단한 연기적 열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 후, 버논을 통해 냉담한 충고를 전했다. 내용인즉, 은행원과 결혼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멀리건과 펠로위즈와의 만남은 악연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멀리건은 버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버논은 다시 한번 펠로위즈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달했다. 결국 펠로위즈의 가족식사에 초대받은 멀리건은 자신의 열정을 다시 한번 토로했다. 이는 헛되지 않았다. 펠로위즈의 부인인 레이디 엠마는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오만과 편견>의 제작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제작진에게 멀리건을 소개했다. 조 라이트는 멀리건에 대한 첫인상을 이처럼 말한다. “그녀가 왔고, 훌륭한 캐스팅 멤버였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줬다.” 멀리건의 오랜 집념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출연을 확정 지은 멀리건은 로얄 코트 극단에 입단하며 무대 데뷔를 이루고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며 연기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마련해 나갔다. 같은 해, BBC에서 TV시리즈로 제작한 찰스 디킨스 원작의 <황폐한 집>에 캐스팅될 때까지도 무대에서 거듭 연기를 이어나갔다.
“19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진짜 적절한 관계를 얻지 못했다. 루저 중의 하나였다고 할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는 그녀가 이 캐스팅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이해해줄 ‘관계’의 성립에 고무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재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작은 역할을 거듭하던 그녀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더 그레이티스트>(2009)의 출연을 통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기억될만한 기회를 얻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의 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제작자와 세 번에 걸친 만남의 시작이 바로 그 선댄스영화제였던 것이다.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대로 성공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에 비유된 그녀의 주가는 올라갈 차례만 남겨두고 있었다. 같은 해 제작됐던 <브라더스>와 <퍼블릭 에너미>에서 작은 역할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브리티쉬 인베이전’이라 불릴만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거치며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 올리버 스톤의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와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는 멀리건의 새로운 입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특히 데뷔작 <오만과 편견>에서 주연을 맡았던 키이라 나이틀리와 또 한번 함께 출연한 <네버 렛 미 고>는 불과 5년 사이, 멀리건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증명하는 대조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그녀가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놀라운 직업을 얻었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이는 매우 멋진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즉시 그 느낌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에게 연기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재능이 만개할 그 순간을 인내했다. 바로 지금, 그녀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재능이 여전히 만개하는 중이다.
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2005년 4월 17일, LA타임즈엔 ‘2현으로 세상을 소유한 바이올린 주자(Violinist Has the World on 2 Strings)’라는 헤드라인의 칼럼이 실렸다. ‘포인트 웨스트(POINTS WEST)’를 연재하는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이었다. LA의 ‘펄싱 스퀘어(Pershing Square)’공원에 있는 베토벤 동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베토벤 소나타’를 쫓아간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2현밖에 남지 않은 고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Nathaniel Anthony Ayers)’를 만났다. 그 뒤로 스티브는 나다니엘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거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결국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LA타임즈 기자이자 인기칼럼니스트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하게 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제이미 폭스). 스티브 로페즈가 나다니엘에 관해 연재한 칼럼을 엮어 전기적 소설로 각색한 동명원작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솔로이스트>는 실화와 영화의 협연이다. 단조와 같은 삶 속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스티브는 전환을 위한 쉼표를 갈망한다. 도돌이표와 같은 착란에 갇힌 나다니엘에겐 새로운 삶을 위한 마침표가 필요하다. 나다니엘을 위해 헌신적인 원조를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통해 드라마틱한 기사 소재가 아닌 진짜 삶을 정화시키는 감동을 얻는다. 나다니엘은 스티브의 진심을 통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나간다.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관계에 망원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그들의 개별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솔로이스트>는 현실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관계적 묘사방식에서 현실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넣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어내기 어렵다. 형태적으로 관계를 묘사해나가지만 재현적 이미지 이상의 정서적 감흥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과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와 같이 영국작가들의 텍스트를 풍요롭고 섬세한 이미지로 전환해낸 조 라이트의 감수성 어린 재능도 <솔로이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를 예민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풍요로운 문장을 풍부한 색채에 반영하며 조 라이트의 감각을 비범하게 드러내던 전작들과 달리 <솔로이스트>는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콘트라베이스 현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광각 샷과 함께 베토벤의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치환한 환상적인 장면과 같이 예민한 시선과 풍요로운 감각을 드러내 보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솔로이스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미지는 그 드라마만큼이나 평이한 결과물에 가깝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건 <솔로이스트>가 재현해낸 실화 역시 마찬가지다. 스크린은 단지 현실의 감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뤄낸 감동의 본위가 스크린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스크린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췌해내고 있는지가 주요한 관점으로서 감상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 사연의 실체가 된 현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실화라는 정보를 미리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솔로이스트>는 허구적 사연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관객의 착시를 보다 강렬한 감상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에 걸린 현실성의 환기가 <솔로이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대목이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현실을 통해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 <솔로이스트>에 강한 방점을 남긴다. 이는 결론적으로 <솔로이스트>가 부여하는 영화적 감동이 뒤늦게 체감하는 현실에 대한 환기보다 놀라운 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두 인물의 관계와 함께 개별적 인물의 고독과 혼란을 묘사하는 영화는 두 영역에 놓인 정서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저마다 방치하듯 선을 벌려나가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내러티브의 집중력이 응집되지 못해 감상을 흩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는 호연을 펼친다. 하지만 순차적인 수순을 따르듯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서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평범함을 더하는 요소처럼 나열되는 것만 같다. <솔로이스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의 가치를 방증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딱히 부족한 인상을 남기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스티브 로페즈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의 근황을 전하는 자막이 영화적 재현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실화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재현적 한계의 사례로서 유용해 보인다. 마치 원곡의 울림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력을 선보이는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 아래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하는 LA 필하모닉의 공연은 어떤 영화적 얼개와 별개로 좋은 부록의 역할을 한다. 만약 현재에도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인물의 실제적 모습을 보고 싶다면 LA타임즈 홈페이지에 있는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검색해볼 것. 칼럼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 너머의 실제적 삶은 재현이 넘볼 수 없는 감동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