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위성사진의 부감이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버지니아 CIA본부의 복도, 그리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엄청난 예감을 일으키는 오프닝이 환기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예감은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 박자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비범한 척하기 좋은 농담과 같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얻을 게 없는’결말로 종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번 애프터 리딩>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CIA분석가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의 해임 장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사건을 부풀려나간다. 오스본과 이혼을 고민하는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국무부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내연의 관계이며 그와 전혀 무관한 스포츠센터엔 전신성형을 꿈꾸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낙천적인 동료 채드(브래드 피트), 인자한 상사 테드(리차드 젠킨스)가 있다. 동떨어진 구석에 자리한 두 맥락의 인물들이 동일한 문단에 포섭되는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스포츠센터에서 발견한 CD한 장이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가며 거창한 음모론이 꿈틀댄다. 작은 오해는 불미스런 갈등으로 발전하고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의 자장 안에 들어선다.
실상 사건의 맥락엔 어떤 본질 자체가 없다. 그저 그 허무맹랑하게 커지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도가 발견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관계도 속에서 맞닥뜨린 개개인들은 불필요한 해석을 덧씌우며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의 수순에 이르고 만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사람도, 사건을 스스로 확대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산출된다. 그러나 그 해프닝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득력을 갖춘다. <번 애프터 리딩>은 구심점이 없는 인과관계만으로 온전한 스토리텔링을 형성한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녹록하다. 허풍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구술엔 어떤 허세가 없다.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다.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란 해프닝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과장된 음모론에 도취된 이들은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거나 그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이라도 결국 본질은 없다. 결국 그 모든 악화일로는 그저 실없는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망상을 통해 음모론을 확장하는 인물들과 그 추이를 관찰하는 건 CIA정보부다. 그들은 린다나 채드의 상상처럼 대단한 음모의 중추가 아니라 그저 퇴임한 정보분석가의 뒤처리나 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결국 그 망상의 음모론은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마치 살상무기 없는 이라크 전처럼, 그건 그저 해프닝이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속이 빈 형태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블랙코미디의 자격을 거머쥔다. 실체가 없어서 완벽한 해프닝을 이루는 <번 애프터 리딩>은 그 자체를 통해 거대한 음모론의 지지자들을 완벽하게 조롱한다.
'모든 것은 사소한 법(It is all small stuff)’이다. 다만 그 사소함이 때론 대단한 해프닝을 낳는다는 것. 물론 심각할 필요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저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를 즐기는 바보들의 향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저 그들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즐기면 된다. 하나같이 이름값이 대단한 배우들의 부조리한 앙상블 역시 또 다른 백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코엔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를 통해 깊이와 너비를 모두 갖춘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재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재능이 스스로의 삶을 위한 유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어머니가 직장에 간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실종신고를 하니 경찰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24시간 이후에 현장 방문이 가능하다. 24시간이 지났다. 5달이 지났다.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집으로부터 먼 외딴 곳에서 발견된 아이가 돌아온다는 기차역으로 발을 구른다. 그리고 모자는 상봉한다.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어머니의 표정이 굳는다. 우리 아이가 아니에요. 이를 지켜본 경찰의 표정이 굳더니 입을 연다. 당신이 잘못 본 거에요. 생전 아이를 본 적도 없는 경찰이 평생 아이를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 됐음을 지적한다.
<체인질링>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이 짧은 문장은 눈물겨운 신파를 예상케 하지만 실상 <체인질링>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드라마다. 단지 아이를 그리워하는 모성이 중심이 아니다. 아이를 찾았다고 자위하는 경찰은 제 아이가 아님을 알아보는 어머니를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어머니는 이에 끝까지 저항한다. 이는 실화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사라진 아들 월터 콜린스(게틀린 그리피스)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에 관한 사연이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호흡을 지닌 <체인질링>은 전형적인 선악 구도와 약자의 승리를 꿈꾸는 전형적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를 기반으로 둔 사연은 허구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엔 강렬한 투쟁의 연대기가 꿈틀거린다. <체인질링>의 모토는 신파가 아니라 저항이다. 모성에서 비롯된 감정적 호소와 함께 권리를 찾기 위한 소시민의 이성적 선언이 내재돼 있다. 물론 기반은 모성이다. 하지만 모성애는 투쟁심으로 나아간다. 부패한 경찰과 착복하는 정치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언질이 한 어머니의 모성애로부터 고발되고 발가벗겨진다.
사연의 형태는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새로운 애완견을 사주듯 실종된 아들 대신 찾아온 다른 아이를 모성애로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경찰의 모습은 권위적인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크리스틴을 되려 몰아세우는 경찰의 만행은 분노를 머금게 한다. 그 종래에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권리를 묵살하고 되려 억압한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어머니의 승리는 감동을 자아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사연은 슬프다. 진실은 조작이 가능하다. 그 조작된 진실엔 진실의 외벽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절한 사연이 짓눌려있다. 단순히 순수한 모성애로부터 발생하는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뛰어넘어 권위적 억압에 저항하는 개인의 순수한 양심을 조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1920년대를 조명하는 <체인질링>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진실을 강요하고, 이에 분노하는 소시민들은 저항을 거듭한다. 정경유착이 맞물려 도시를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고 조작된 평화를 전시하지만 실상 기저의 소시민들은 불안에 방치된 채 살아간다. 희생자가 나타나면 잘못을 덮고 되려 희생자를 협박한다. 권력의 지배자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로 소시민을 지배한다. <체인질링>은 슬픔을 동반한 승리를 꿈꾼다. 그 승리는 아픈 만큼 숭고하다. 조작된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선 결국 어느 개인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른다. 조직적인 체제를 통해 개개인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시민은 말한다. 싸움을 걸지 않되,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지. 체제에 굴복한 개인은 약자가 된다. 반대로 체제에 저항한 개인은 강자로 거듭난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시하는 정의란 이렇다. 대한민국의 가짜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의 진짜 보수주의자는 적어도 정의를 안다.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에 찬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혜안에 깊은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