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감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하지만 대단히 좋아서 죽을 거 같다거나, 그렇진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는 지금이 4월 17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이 맘 때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어졌고, 오늘 같은 날엔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 나는 건 같은데 조금 다른 건 울적하다는 느낌 같다. 흐느낌 같은 것이 하루 종일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 생각해 보니 어제, 비도 왔다. 눈물 같은 하루였다.
2. 집으로 오는 길에 필연적으로 광화문을 지난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방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경찰 차벽으로 인해 완벽하게 봉쇄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 4시가 넘어서인지 통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이 농성 중이라는 광화문 앞과 헌화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 주변엔 경찰차들이 촘촘하게 서있었다. 택시가 마치 섬 사이를 지나가는 배와 같았다. 저 너머에 사람이 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오늘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대비했음을 보여주듯 놀랍도록 철저하게 봉쇄된 광장 주변의 풍경이 암담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구상한 게 저것이란 말인가.
3. 광화문 인근에 사는 탓에 세월호 유가족이 머무르는 텐트를 필연적으로 자주 봤다. 봄이 끝나갈 무렵에 세워진 텐트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까지 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텐트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텐트도 정확히 지구와 함께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 몇 걸음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청와대 앞으로 유가족은 갈 수 없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건. 내년에도 태양을 한 바퀴 돈 세월호 유가족의 텐트를 보게 될까. 어쩌면. 아니, 혹시라도. 혹은 제발.
4. 지난 1년 동안 세월호는 끊임 없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끝끝내 떠오르는 단어였다. 서울에 있다가도, 부산에 있다가도 진도 앞바다를 생각했다. 나는 잊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내가 잊지 않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잊을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을 통해 그 날을 끊임 없이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추모의 의미로 달았던 노란 리본은 강력한 상징이 돼서 떼낼 수 없는 것이 됐다. 평생을 바쳐 추모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내가 어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점점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 물려줄 죄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우울하다.
5. 세월호 유가족이 한 말이 각인된다. “박근혜는 죽으면 자식이 없겠지만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지만 나나 부인은 거둬줄 사람이 없다. 내가 박근혜보다 나이가 적다. 죽을 때까지 두고 볼 것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광장에 서서, 광장이 돼서.
지난 16일, 언론에선 하루 종일 진도의 여객선 침몰 상황에 대한 소식을 알려왔다. 참담했다. 그리고 그 소식만큼이나 참담했던 건 한국 언론의 현주소였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 HBO의 미니시리즈 <뉴스룸>은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 앵커인 윌 맥어보이(제프 다니엘스)를 주축으로 구성된 방송 보도국의 분위기를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이 미드는 동시대의 뉴스를 소재로 삼아 에피소드를 전개함으로써 동시대와 호흡하는 진짜 뉴스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공정성에 중점을 둔 뉴스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해나간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시즌 1 에피소드 4회의 말미인데 주말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애리조나의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한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긴급히 정보를 수집하고 보도 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속보의 핵심은 하원의원인 가브리엘 기포즈가 행사 참석 도중에 총에 맞았다는 사실인데 라디오에서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일체의 케이블 채널 뉴스들도 역시 그녀의 죽음을 속보로 전하기 시작하고 윌의 뉴스룸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뉴스룸 안의 스태프들은 공식적인 확인을 얻게 될 상황에 대비할 뿐 부정확한 타매체의 속보전에 동참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한다. 그러나 방송국 대표의 젊은 아들은 죽음에 대한 공식 발표를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추궁하기 시작하고 뉴스 진행이 한창인 뉴스룸으로 박차고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때 한 스태프가 말한다. “사람 목숨이잖아요. 뉴스가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거죠.” 그리고 결국 타방송사들의 속보가 오보였음이 밝혀진다. 기포즈가 살아있으며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병원의 정보를 전한 것. 공식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인내심을 통해서 유일하게 진실을 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힘든 하루였고, 다시 한번 힘든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아침부터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속보가 보도됐다. 오전 10시경에 이뤄진 정부의 브리핑에선 제주도로 향하는 이 여객선엔 총 477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그중 수학여행을 떠난 325명의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언어만으로도 마음이 쪼그라드는 속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학생들이 전원 구조될 것이란 보도가 이어졌고, 오전 11시경엔 학생들이 모두 구출됐다는 문자가 학생들의 부모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실종자의 숫자는 매번 달라졌고, 전체 승객의 숫자마저도 불명확해졌다. 실종자의 수에 관한 정부의 발표는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 그에 따라 언론의 정정보도가 이어졌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4시 30분경에 벌어졌다. 구조자수가 368명이라고 했던 언론들은 곧 집계상의 오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음을 전했고, 실제 구조자수가 절반으로 떨어진 164명이란 보도가 이어졌다. 집계상의 오류라는 이유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구조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쓰나미 같은 절망으로 덮어버린 이 소식 이후로 구조자수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두운 예감을 부추기듯 해가 저물고 하늘보다도 마음이 먼저 암담해졌다.
일선의 한 기자는 이처럼 무분별한 정부의 통계는 처음이라며 볼멘소리를 토로했다. 하지만 과연 정부의 통계만이 문제였을까. 오전 10시경을 전후로 시작된 갖은 언론 매체들의 속보 경쟁 또한 무분별한 레이싱 같았다. 온라인과 방송, 공영방송과 케이블 채널을 가리지 않고 진도에서 벌어진 참극에서 얻어낸 모든 정보들을 누구보다 먼저 ‘속보’란 이름으로 내걸었다. 정부가 발표하면 받아 적고 게재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정확한 정보보단 신속한 소식이 중요했다. 기자가 아니라 속기사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언론의 현주소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진도는 포털사이트를 바탕으로 가속화된 갖은 언론 매체들이 벌이는 속보의 전장이 됐다. 그 와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촌극이 언론 기사라는 미명하에서 게재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 포세이돈 등 선박사고 다룬 영화는?’이라는 믿을 수 없는 헤드라인을 내건 <이투데이>의 기사는 오후 2시 40분경에 게재됐다. 질타를 받았다. 상관없었다.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를수록 트래픽을 챙기고자 하는 속셈이 다분한, ‘어뷰징’ 기사였다. 그리고 15분 뒤 이 매체는 ‘SKT, 긴급 구호품 제공, 임시 기지국 증설 “잘 생겼다~ 잘 생겼다”’라는 추악한 헤드라인까지 선보이며 매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과시했다. 현재 기사는 삭제된 상태다.
한편 몇몇 인터넷 언론 매체는 여객선의 보험 가입 현황에 주목하는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조선닷컴에선 ‘세월호 보험, 학생들은 동부화재 보험, 여객선은 메리츠 선박보험 가입’이란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를 송고했고, 이런 온라인 기사에 자극을 받았는지 공영방송 MBC는 보험 조건에 따라서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보도를 전했다. 보험사 PPL 음모론을 제기해도 될만한 촌극이었다. 한편 같은 날 JTBC의 <뉴스 9>은 손석희 앵커의 긴 사과로서 뉴스진행을 시작했다. “오늘(16일) 낮에 여객선 침몰 사고 속보를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저희 앵커가 구조된 여학생에게 건넨 질문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여워하셨습니다.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나마 배운 것을 선임자이자 책임자로서 후배 앵커에게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저의 탓이 가장 큽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손석희의 사과는 16일을 암담하게 뒤덮었던 언론들의 막장 배틀에 내린 한 줄기의 빛처럼 느껴졌다.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도 언론의 몫이다. <뉴스 9>은, 손석희는 최소한 그 자리를 지켰다. 다행이다.
“언론의 자리를 되찾는 거지. 언론을 다시금 명예로운 직업으로 만드는 거야. 위대한 나라에 걸맞은 토론의 장을 탄생시킬 정보를 제공하는 저녁 뉴스를 만들고, 예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진정으로 중요한 본질로 돌아가는 거. 천박함은 벗어 던지고, 가십과 관음증도 끝내고, 어리석은 대중일지언정 진실을 전달하는 거.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얘기 말고, 그래서 언론이, 우리 모두가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거야.” <뉴스룸>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 대한민국 언론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보도한다. 그런데 진실을 전하려는 의지보다도 추악한 의도가 먼저 눈에 띈다. 무분별한 언어를 통해서 상처 입은 이들을 되레 유린한다.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소식은 기약이 없는데 알 필요가 없는, 어쩌면 알아선 안될 소식들이 귓전으로 내던져진다. 누군가의 비극이 하나의 쇼가 돼서 초단위로 판매되고 폐기된다. 마치 모든 언론이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16일 하루 동안 대부분의 언론이 보여준 작태는 온라인 쇼핑몰과 홈쇼핑에 매대를 세우고 정보를 팔아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취재원에 대한, 독자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그저 무엇이든 팔아 치우겠다는 장사치의 욕망만이 파도처럼 진도를 덮쳤다. SNS상에선 기자라는 이름 대신 ‘기레기’라는 조롱이 난무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말이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를 압축하는 조롱이다. 마치 온라인 쇼핑, 홈쇼핑이 돼버린 듯한 글과 말의 추락에 대한 씁쓸한 비유다.
조지 클루니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미국의 CBS방송에서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를 진행했던 에드워드 머로우에 대한 영화다. 그는 194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앞에서 끝까지 진실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고, 되레 끈기 있게 조셉 매카시의 실정을 주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머로우는 말했다. "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자명하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한다는 건 그만한 각오와 실력이 필요한 일이다. 치밀한 기획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은 단순한 정의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사람들은 수많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스마트폰으로 숱한 정보를 공유하고 세상의 곳곳을 본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보에 대한 변별력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알 수 있다. 혹은 알아야 한다. 가십을 생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 흔히 우리가 ‘알 권리’라고 말하는,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공적인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고 언론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과연 우리에게 그런 정보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있는가라는 문제다. 신념 있는 언론의 등장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신념을 지켜줄 수 있는 대중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머로우는 말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 또한 남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 언론과 대중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이상적이다. 믿을 수 있는 언론과 이를 지지하는 대중이 함께 하는 사회는 보다 나은 가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린 보다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찾아야 한다. 지금도 진도에선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방금 막 두 번째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봤다. 우린 희망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언론은 그 희망을 팔아먹는 매대로 전락해선 안 된다. 그러니 부디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해’ 주길 바란다. 팔기 쉬운 가십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진실을 위해서. 부디 껍데기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