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