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크루지(짐 캐리)는 마주선 이들을 질색하게 만드는 지독한 수전노다.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놀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혐오적 하루일 뿐이다. 그에겐 크리스마스 파티는 낭비고, 웃음은 사치이며, 길거리의 찬송가마저 소음일 뿐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단한 반전이 찾아온다. 언제나처럼 홀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보내던 스크루지는 7년 전 죽은 동업자 말리의 혼령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3명의 유령이 찾아올 것이란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세 유령과 스크루지의 만남을 다룬 <크리스마스 캐롤>의 플롯은 동화적 교훈극의 온화함이 깃들어 있던 원작과 달리 호러와 판타지가 뒤엉킨 환상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마냥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와 반대로 디지털 캐릭터의 불완전한 형태에 실제적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체계를 응용해 실제적 이미지를 허구의 세계관에 실현시키고자 한 이입적 시도였다면 후자는 실사적 표현력을 허구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리모델링하는 디지털 부호의 변환적 시도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에 함몰된 실제적 배우의 외양은 희미한 형태를 간직하거나 온전히 자취를 감춘 채 영화적 세계관에 철저히 복무한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는 언제나 저메키스의 영화를 혐오하게 만들거나 폄하하게 만드는 한계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언캐니 밸리란 음산한 작품의 톤에 어울리는 적절한 장치적 효과로서 성과를 발휘한다. 시체의 눈이라는 비아냥을 얻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과 얼굴은 역설적인 효과적 표현력을 얻는다.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기본적인 요소로서 삼아 호러적 이미지를 확장하는 한편, 판타지적인 입체감을 덧씌운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기술적 한계마저도 작품을 위한 표현적 질감으로서 설득시키는 적절한 맞춤형 선택처럼 보일 정도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이 종종 과욕적 이미지를 선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입체적 이미지를 감상하기 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적인 쾌감이 이를 적당히 보충하는가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동시에 저메키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위한 맞춤형 효과로서 3D디지털 비주얼을 활용했다기 보단 지난 실험의 연장선상의 연결고리에서 시도를 거듭하는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효과를 후발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적이며 그것이 집착을 넘어선 발전적 지향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불가피하다. 중요한 건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이다. 그 여부에 따라 저메키스가 꾸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 역시 가치적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디지털 캐릭터 아래 놓인 짐 캐리의 흔적이다. 그는 3D디지털 부호의 숲 안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기본기를 설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화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용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그 남자의 사전에 ‘예스(Yes)’란 없다. 오로지 ‘노(No)’만 존재할 뿐. 어떤 제안에도 거절이 뒤따른다. 심지어 물음이 끝나기 전부터 거절을 서두른다.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미덕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예스’의 삶이 찾아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남자는 어떤 일에도 무조건 예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서약한다. 그 뒤로 그 남자는 예스에 귀속된다. '노'밖에 모르던 그가 '예스'만을 말한다. <예스맨>의 삶이 시작된다.
은둔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칼(짐 캐리)의 행동엔 어떤 이유가 명시된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기방어적 성향은 이혼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처의 앞에서 달아나듯 사라지는 칼의 모습에서 모종의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칼은 자신에 대한 모든 관심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한다. 홀로 집구석에 쳐 박혀 매일같이 DVD나 보면서도 친구의 전화엔 항상 바쁜 척이다. 심지어 오랜 친구의 약혼식마저도 귀찮다. 소통에 실패한 지난 경험이 소통을 거부하게 만든다. 타인을 통해 얻은 상처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해졌다. 외로움에 무감각해졌다. 집에서 홀로 DVD를 보다 죽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친구들의 조롱을 악몽처럼 꾸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 처방은 간단하다. 자신의 믿음을 역전시킬만한 계기만 있으면 된다. 다만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노'에 대한 강박처럼 '예스'에 대한 강박도 비슷한 양상이다.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삶에 대한 미숙함이 칼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진짜 성장이 필요한 사람이다. 관심에서 달아나는 법이 아니라 관심을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른이다. 그런 그가 우연처럼 '예스'를 실천하다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난다. 삶이 변한다.
<예스맨>은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스스로 꽉 막힌 채 살아가게 된 한 남자가 어떻게 변했고, 무엇을 알게 됐는지에 관한 가벼운 드라마다.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사연이지만 주제는 흥미롭다. 삶을 부정의 모토로 끌고 가던 한 남자가 타의로 인한 긍정을 통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은 지극히 성찰적이고 시사적이다. 개인주의적인 경계를 중시하는 현대 도시 사회에서 <예스맨>은 정도차가 있을 뿐 보편적인 사연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비약적이지만 <예스맨>은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통해 적절한 타협점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어떤 가능성을 묘사하면서도 그 가능성의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소심한 듯 기괴한 짐 캐리의 연기도 설득력을 지닌다. 코미디의 기능성과 드라마의 진정성을 겸비하는 짐 캐리의 연기는 뻔한 듯 하지만 점점 자신만의 관록을 자랑한다. 종종 넘치려 하는 짐 캐리의 애드립을 적절하게 받아넘기는 주이 드샤넬의 리액션도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짐 캐리의 한국어 연기가 이색적이나 반가운 묘미를 팁처럼 부여한다.
삶은 '예스'와 '노'라는 양면적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선택으로 삶은 가늠할 수 없다. 예스와 노가 혼재된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칼이 예스를 선택하고 곤경에 빠졌다가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처럼 어떤 일방적인 선택이 우연한 행운을 가져다 줄 순 있겠지만 그 효력이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예스맨>은 수동적인 인간이 능동적인 삶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노’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황량하게 방치하거나, ‘예스’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전시하던 철없던 어른이 뒤늦게 자신의 삶을 어른답게 선택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이들도 성장하지만 어른들도 성장을 겪는다. <예스맨>은 로맨스를 통해 성장하는 어른을 통해 삶을 간략히 정리한다. '예스'나 '노'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깜빡이를 넣고 달려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끝없는 갈림길이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삶을 가늠할만한 가장 좋은 신호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 끝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면서도 나아가는 게 바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