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혈기왕성한 청춘은 축복이라지만 가진 것 없어 비참한 시절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형구(하정우)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 살아가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현해탄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삶을 떠도는 청춘이다. <보트>는 머무를 곳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청춘의 방황하는 감수성을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버무리며 희망을 역설한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쓸쓸한 뒤안길로 내모는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고 이내 비극으로 내던지는 느와르필름이다.
보트 위에서 나른하게 망중한의 낮잠을 자는 형구는 매번 현해탄을 건너 자신의 은인이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보경 아저씨(이대연)에게 다양한 물품과 김치를 배달한다. 그렇게 매번 보물처럼 김치를 전달하던 형구는 바다에서 묘연한 기습을 당해 김치를 망가뜨리고 중간에서 형구와 보경 아저씨를 중계하던 토오루로 인해 자신이 옮기던 김치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형구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묘령의 여인 지수(차수연)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도주로 인해 형구와 토오루는 예상치 못한 기회이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구는 유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남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기억엔 의문이 섞여있다. 왜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향수라는 배반적 감정과 함께 뒤엉켜 나아간다. 자식을 버린 혈육에 대한 희미한 애증이 식물적인 삶 사이로 무심히 새어나간다. 반대로 토오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미혼모로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의 현실을 비관으로 덧칠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회한을 무표정에 감춘 채 뒤로 조소하며 살아간다. 상반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두 청년은 지수의 돌발적인 제안을 통해 연대를 이룬다.
<보트>는 엉뚱한 사건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밟아나가며 예측불가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다. 참신하고 신선한 발상이 때때로 돋보이며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유머도 제법 쏠쏠하다. 특히 하정우의 연기는 새삼 대단하다. 특유의 넉살과 야생적 기질의 혈기가 어우러진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보트>의 생동감을 발생시키는 원천과 같다. 또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눈에 띄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어울림도 나쁘지 않다. 두 배우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듯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하게 뒤엉키고 구르며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한 관계가 진심 어린 우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의 부조화를 극복할만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두 남자와 함께 부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수의 캐릭터는 때때로 감정 과잉의 상태를 자제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특별한 매력을 남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느와르적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영화적 과정은 때때로 배반적이다. <보트>는 일본청춘드라마의 골자에 장르적 유머와 구성을 결합시킨 형태의 영화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엇박자 상황의 유머로서 동력을 끌어올린다. 두 캐릭터의 연대는 중심맥락을 차지하며 인물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보트>는 사실 캐릭터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인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다만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된 듯한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종종 편애적이다. 동시에 느와르적인 결말은 영화가 지속시키던 정서와 무관하게 단독적인 느낌을 준다.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온도차가 발생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강한 허무를 인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청춘의 표류 가운데 허구적 희망을 감지했던 이라면 활기 가득한 무용담 너머로 내려앉은 절망적인 결말 앞에 당황할 가능성이 녹록하다. 물론 포스터나 전단지를 통해 해양액션영화 따위를 기대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상영관을 박차고 나갈 확률이 더 크겠지만.
원인불명의 괴질에 감염된 사람은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출혈을 일으키다 발작 끝에 심장이 멈춰 사망한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이 이 괴질로 초토화된다. 그 모든 것이 도쿄에서 시작된다. 일본 열도 전체가 정체불명의 괴질에 감염되어 국가 전복의 위기에 처한다. 문득 <일본침몰>이 기시감처럼 상기된다. 하지만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은 그보다 좀 더 스케일을 요구하는 영화다. 단순히 일본의 패망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멸망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황량한 도쿄의 풍광을 스크린에 노출하는 건 <블레임>의 욕망이 그 영화들 못지 않게 거창하다는 걸 증명하는 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최대한 비슷한 규모의 풍경을 선사하고자 틈틈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간격을 채우는 스토리텔링은 역부족 그 자체다. 디테일의 한계가 선명한 내러티브는 완벽한 결함이다. 거대한 세트의 물량공세를 통해 이미지를 확대시키지만 그 이미지를 연결하는 스토리는 심각하게 허황되기 짝이 없다. 이미지의 내부에 자리잡은 사연들이 실로 앙상하다. 욕망과 성취의 격차가 지나치게 아득하다.
끊임없이 죽음을 묘사하고 비장한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 감정에 경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막을 통해 질병의 확산을 설명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지만 어떤 비범함도 감지되지 않는다. 거창한 화면과 달리 전이되는 긴장감은 빈약하다. 재난영화의 테두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메디컬 드라마로 삐끗하더니 탐정물의 동선을 기웃거리고 호러적 연출에 추파를 던진 뒤 종래엔 멜로로 외도해버린다. 사족이 끊이지 않더니 옆길로 새어 나간 뒤 그 자리에 정착해버린다. 맥락 자체에 대한 구심이 없고, 연출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부재하며, 전체적인 형태를 조립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됐다. 몸집을 키우고 싶어할 뿐, 내실을 다스리지 못한다. 믿을 수 없게 멋대로 흐르는 전개 속에서 가능한 건 이 영화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무의미한 호기심뿐이다. 그마저도 자폭에 가까운 결말을 확인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싶어진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중의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아래,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스팽글(spangle) 도시가 펼쳐진다. <도쿄!>의 오프닝은 미쉘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까지, 됴쿄를 바라보는 세 이방인들의 시선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선을 집약한다. 반짝거리는 빌딩 숲 사이를 가득 메운 갖가지 소음들로 들어찬 도시의 풍경 속에 숨어들어간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형체. 발들일 틈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하게 텅 빈 풍경. 인공 도시 안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단상들이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가늠할 수 없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도쿄!>는 이처럼 뚜렷한 형체가 짐작되지 않는 거대한 실체를 구상한다.
포문을 여는 것은 미쉘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다. 히로코(후지다니 아야코)는 자신의 애인인 아키라(카세 료)와 도쿄로 상경해 친구의 거처인 작은 쪽방에서 머무른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묻는 어느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깊은 우울에 빠져들던 그녀는 어떤 변신을 맞이한다. 공산품처럼 비슷한 크기의 방이나 줄지어 선 자동차보다도 가치가 앙상하다고 느끼는 히로코의 변신은 물질가치의 경도 속에서 스스로 퇴락을 경험하는 현대 도시인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그 불행은 유령처럼 인식되는 자신의 가치를 사물에 빗대어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가볍진 않지만 묵직하지도 않다. 수긍할만한 의도는 존재하지만 큰 감흥을 부르기엔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사물과 공간에 감성을 부여하는 미쉘 공드리 특유의 미술적 감각만큼은 탁월하게 구현된다.
1999년 작, <폴라 X>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은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도쿄 도심의 하수구에서 출현하곤 하는 정체불명의 광인(드니 라방)은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라지곤 한다. 광인은 도쿄의 하수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그 밑바닥엔 대동아 전쟁 시대의 잔재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대일본의 기저에 잠재된 군국주의적 욕망을 도시의 상하구조로 형상화하여 고발하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상흔에서 비롯된 공포와도 연동된다. 정체불명의 광인이 벌이는 폭력적 행위가 부르는 도심의 혼란은 패전국의 역사를 물려받은 일본인의 심리적 반작용을 자극한다. 마치 광인의 재판장은 전범재판소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한다. 광인은 일종의 망령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혹은 짐처럼 짊어진 일본인의 이중적 심리가 유령 같은 형체로 도사린다. 드니 라방의 거칠고 사나운 연극적 연기는 이런 심리적 형상을 끌어내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노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결말부는 둔탁한 맥락을 지닌 이 작품의 모호한 가치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은 다음 상대를 겨누기까지 한다.-메르드의 다음 모험은 뉴욕에서!-
말미에 등장하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와 팬시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9년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적막한 삶을 담담하게 인식하는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마주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를 통해 변화를 겪게 된다. 소품과 같은 상징성과 은유적 태도가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하지만 <흔들리는 도쿄>는 간결하면서도 단출한 테마가 짧은 시간에 잘 숙성된 작품이다.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편집증적 삶에 어지럼증과 같은 흔들림이 찾아온다. 폐쇄적인 안정에 갇혀있던 히키코모리가 우연히 외부와 접촉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은 실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체된 삶에 흔들림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정돈된 삶이 일사불란해진다. 도시의 유령은 비로소 삶의 윤곽을 확보한다. 히키코모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진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에 접속한 봉준호 감독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능숙한 연출력으로 잘 포장된 작품이다.
연출자의 개성이 적극 반영된 개별적 결과물들은 형태적으로 불균질한 패키지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맥락은 도쿄라는 유령이다. <도쿄!>의 세 작품은 도쿄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해 도쿄라는 특수한 이미지를 완성하지만 그것은 도쿄의 실체가 아니다. 그 지점에서 <도쿄!>가 어느 정도 통찰력을 검증 받은 개인의 해석적 관점을 수집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만큼 그것은 보편적인 심리를 아우르는 대신 특별한 시야를 확보한다. 누군가가 문득 느꼈을, 혹은 느낄만한 도시의 단상이 심중하거나 재기 발랄하게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바탕으로 한 기획은 그 도시에 대한 어떤 관심을 볼모로 한다. 그런 점에서 과연 현재 서울이란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