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렇게 변한 지 오래 됐어.”들뜬 어조로 무례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을 뱉는 택시기사,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의 파주는 예전에 그녀가 자리하던 그곳이 아니다. 그건 그곳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멀리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욱하게 길을 메운 안개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에 내밀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연과 속내를 점치기 어려운 인물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이 예민하게 출렁인다.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서듯 서늘한 적막을 유지하다가도 날카롭게 찌르고 거칠게 흔드는 찰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리는 작품이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플래쉬백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사를 진전시키는 <파주>에서 김중식(이선균)이 보는 TV화면에 비춰진 ‘범민족대회 연대사태’광경을 제외하면 시대적 연원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부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명확한 연도에 대한 표기나 언급이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서사적 진행과정을 예감할 수 있는 건 과거를 지칭하는 몇 번의 서술적 자막과 대사뿐이다. <파주>는 실제적 서사의 현실적 배경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연출자의 본 의도를 떠나서) 그 형태는 마치 <파주>가 어떤 시공간에 놓여있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방치해버리는 것마냥 보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둔 <파주>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영화다. 심지어 서브 플롯에 가까운 철거 신은 근래 재개발 철거 문제로 참상을 빚은 용산의 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파주>가 낙후된 지방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성으로 감지되는 풍경의 특성이란 게 도시에 비해 낙후된 발전적 척도로 가늠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그만큼 영화의 외부에 놓인 세상의 변화가 부조리한 탓이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적극 활용되는 <파주>는 플롯의 서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적 난이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지 서사의 배열과 플롯의 접목을 차례대로 밟아가는 행위 자체가 불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흐름이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단 되레 내밀하게 감정을 감춰둔 채 그 외면적 상황만으로 관객의 판단과 추리를 도모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까닭이다. 실질적인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크린으로 묘사되는 상황과 그 이미지와 서사적 추이를 통해 제시되는 근거만으로 조합되고 추리되는 예감과 의심은 결과적으로 <파주>가 뒤늦게 드러내고 공개하는 사연 속에서 오해와 착오로 전복된다. 오해와 착오는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에게 쌍방간의 영향력을 미치는 <파주>의 특성적 기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속내를 감춘 채 홀로 감정을 삭히다 소통의 불가해가 발생시킨 오해와 착오 속에서 사건을 엉뚱한 구석으로 밀어붙이다 과오적 찰나로 상대마저 밀어내곤 한다. 동시에 서사적 미궁을 만들어 관객의 오해를 유도하고 이를 묵살할만한 근거지를 뒤늦게 밝힘으로써 인물의 밀폐된 심리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서사적 짜임새를 절묘하게 다지며 극적 흥미를 유도한다.
<파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멜로적 복선을 밑바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적 기질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해내는, 멜로로서 현격한 가치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내밀한 인물의 심리가 과거로부터 전진해 나가다 또 다른 회상으로의 이탈을 반복하곤 하는 서사적 플롯이 서서히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와 함께 첨예하게 발전해나가는 남녀의 관계는 기민한 오해와 착각을 건너 안도와 불안의 감정에 두 발을 각각 디디고 선 채 파국의 심상을 농밀하게 축적해 나간다. 지속적인 불길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외부적 지표들의 환기를 통해 인물의 서사적 전후를 끊임없이 구성해나가고 이를 통해 정보적 차단과 접근을 조율해 진실과 진심의 격차를 벌리다 이내 좁혀버린다. 단순히 은모(서우)와 김중식의 치정으로 위장됐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뼈대이기도 하지만,) <파주>는 단순히 파격적인 멜로라 불릴만한 소재의 단순한 외벽에 단단한 서브플롯의 내면을 켜켜이 쌓아 넣으며 거대한 심상을 구축해 냈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도피 중이던 김중식을 중심에 두고 연이어지는 비극적 연애담을 통해 불길한 뉘앙스를 뻗어나가던 영화는 끝내 파국적 형태를 그려나가되 결코 비관적 선언으로서 사연을 매듭짓지 않고 진전적 여운을 남겨 둔다. 끝내 불길한 기대심리를 미세하게 벌려둔 채 시선을 거둔다. 사랑의 파괴적 본능을 대변하듯 낙관적일 수 없는 멜로적 파국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던 영화는 그럼에도 그것이 끝끝내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속박임을 증명하듯 위태로운 관계를 생의 억겁처럼 끈질기게 이어내려 한다. 은밀한 응시와 묘연한 관찰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금기를 맴도는 감정적 욕망은 세상의 살풍경 속에서 연약하게 움츠리면서도 덧없이 자라난다. 금기와 욕망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갈등과 불안에 휩싸이던 은모가 중식의 확신적 태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되레 그것을 밀어내는 광경은 그 상황 이전에 영화에서 제시된 사회적 단면들을 거듭 경험한 은모가 그 테두리에 대한 불안감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란 방어적 본능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주>는 단순히 감정을 교류하는 쌍방간의 감정적 진폭을 벗어나 사회적 알고리즘 안에서 개개인이 발생시키는 감정적 진동이 초래할 암묵적 파장을 면밀하게 살피고 이를 통해 사연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간다.
재개발 철거를 앞두고 이에 저항하는 철대위 주민과 이를 진압하는 용역깡패의 대립 과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과감한 철거 몽타주를 동원하며 감상을 거칠게 압도하고 흔들어대기도 하는 영화는 때때로 서사의 일부를 직설적인 묘사 대신 간접적인 대사나 상황의 연결만으로 짐작하게 만드는 모호한 국면으로서 강렬한 잠상(潛像)을 심어두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파주>의 주요한 언어는 표정이자, 눈빛이고, 인물 그 자체다. 그만큼 배우들의 호연은 <파주>에서 주요한 장치이자 필수적인 여건으로 기능한다. 칼날을 잡은 것마냥 위태롭지만 그만큼 강인한 심리를 표출하는 은모 역의 서우는 인물의 중의적 표정과 눈빛을 무기로 내밀한 심리를 탁월하게 객석에 전달해낸다. 서우가 연기하는 은모가 쭈뼛하게 선 <파주>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칼 끝이라면 반대로 이선균의 김중식은 단단한 반석이다. 담담한 표정만으로 안정적인 감정으로 속내를 위장한 김중식을 대변하는 이선균은 일관된 표정과 목소리 톤으로 철저히 위장된 삶을 밀어나가다 잠재된 감정을 일거에 방출시키며 강렬한 진동을 발생시킨다. 그 밖에도 극적 감정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최은수 역의 심이영은 헌신과 열연을 통해 영화에 일조하며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조연들이 저마다 적절하게 제 역할로 영화의 토대를 이룬다.
아득하게 잠재된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천천히 극적 열기를 높여 감정을 데우던 영화는 그 끝에서 감정의 끓어오름을 묘사하기 보단 결코 끓어오를 수 없게 차디찬 현실과 직면한 감정적 갈등의 진화를 포착한다. 안개가 자욱한 길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던 인물이 일순간 안개가 걷힌 길 위에서 목도한 선명한 풍경에 되레 압도당하듯 미궁과도 같은 감정적 혼란 속에서 짐짓 안도하던 은모는 중식의 고백과 함께 명료해진 감정적 정리 앞에 되레 돌아선다. 파주로 돌아온 은모는 결국 파주에서 등을 돌린 채 다시 길을 나서지만 은모가 발을 딛는 곳은 더 이상 안개가 사라진 또 다른 파주일 것이다. 안개와 같이 불안정한 감정에 미혹되던 소녀는 무례하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자라난 뒤, 선명해진 감정적 확신을 되레 뿌리치고 달아난다. 연민적 이타와 결핍적 이기로 맞붙어 자란 사랑은 결국 금기를 넘어서지 못한 채 유배되고 한편으로 보존된다. 결국 안개처럼 희뿌옇게 감정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던 남녀는 비로소 마주선 뒤에야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내달린다. ‘해서는 안 될 말’과 ‘할 수 없는 말’사이에서 방황하는 남녀에게 <파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광야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속박으로 농익어 서로를 당긴다. 뜨겁게 끓어오르기 보단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적 여운이 인상적인 <파주>는 그래서 그만큼 더욱 애절하고 절실한 감정을 무겁게 침전시키는 고밀도 멜로다. 마치 안개처럼 피고 지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공민왕의 비사와 연관된 이 모든 설정은 연상에 의거하되 직접적으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실재를 가리지 않되 허구로서의 자질을 설득하기 좋은 태도다. <바람의 화원>나 <미인도>가 그랬듯, <쌍화점>역시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유통되던 비사(秘史)를 허구적 양식에 입각해 가공한 뒤 스크린에 유통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비사만큼 흥미로운 소재도 없다. 가공도 자유롭고 관음적 욕망이 소비를 유발한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열어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다. 그 일기의 주인이 많은 관심을 유발할수록 구매욕은 상승하기 마련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수많은 비밀을 잉태했을 왕실의 비사는 이야깃거리로 적절하다. 치명적일수록 매력적이다.
고려 말, 왕의 호위무사 ‘건룡위’가 있었다. <쌍화점>은 그 집단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한다.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고려의 왕실의 정통성에 관여할 정도로 극심했다. 고려왕은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원나라공주를 왕후로 맞아야 했다. 게다가 고려의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원나라에 기대는 외척세력이 많았고 그만큼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왕은 자신을 보위할 건룡위를 조직한다. 건룡위는 왕의 취향을 반영한 어린 미소년들로 이뤄져 집단적으로 육성된다. 건룡위의 수장 홍림(조인성)과 왕(주진모)은 단순한 신하와 군주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호위무사로서 왕의 보위를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라 10년 넘게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반려자에 가깝다. 어려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왕후(송지효)는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는 외부인처럼 껄끄럽다. 그 삼각관계는 실상 고려에 알력을 행세하는 원나라의 외세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시대적 정치와 개인적 욕망이 얽혀 이뤄진 삼각관계는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를 퍼즐처럼 엮으며 복잡한 함수관계로 뻗어나간다. 구도로만 이해하자면 홍림과 왕의 관계는 애정의 합의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권위에 의한 일방적 소유에 가깝다. 홍림은 유년시절부터 스스로를 왕의 남자로 인식하고 왕을 위한 헌신적 충정이 모든 행위의 기반이라 믿는다. 오해가 형성되는 건 이 지점이다. 홍림의 본심은 공적인 업무를 거듭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은 홍림에게 사적인 진심,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연모한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업무에 대한 오해가 형성된다. 홍림이 연모의 대상에 눈뜨게 되는 계기는 감정의 변화도, 변절도 아니다. 자신에게 본래 주어진 수컷의 기질에 눈뜨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사료만 먹던 개가 고기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비단 홍림의 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고려로 건너와 왕후가 됐건만 왕은 왕후를 여성으로 품은 적이 없다. 생식적인 강압에 의한 홍림과 왕후의 동침이 궁극적으로 에로스의 양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설득력은 그로부터 발생한다. 사랑을 얻지 못한 자들이 미숙한 방식으로 사랑을 도모한다. 그 사이에서 권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소유하던 왕은 고립된다. 홍림과 왕후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갈등을 빚는다. 삼각관계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삼각관계를 조절하는 권한은 왕에게 있었고 홍림과 왕후는 그 권한을 충분히 인지한 채 명령에 따른다. 이는 일종의 게임과 같다. 왕의 조종에 따라 홍림과 왕후는 캐릭터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게임 도중에 캐릭터는 자각한다. 스테이지를 구성하던 왕의 권한이 무시되기 시작한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본성을 자각한 인물의 심리가 흔들리다 못해 거침없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반목은 은밀하면서도 섬세하게 이뤄지다 점차 적극적인 행위로 진전된다. 관계의 변화를 짐작한 인물들은 의도와 다른 말을 주고 받으며 오해의 골을 깊게 파내려 간다. 끝내 갈등이 형성되다 애정은 증오로 발전되고 파국이 형성된다. 결국 자신의 본심을 가리지 못한 인물들의 욕망이 거친 구조의 위기 상황을 점진적으로 이루고 부순다. 파격적이라 할만한 정사씬들도 인물의 감정적 파고를 설득력 있게 전시한다. 연기적 테크닉이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도 홍림의 캐릭터는 유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한 조인성의 표정에 어울린다. 특히 섬세한 듯 히스테릭한 왕의 이중적인 심리를 연기하는 주진모는 적절한 위엄을 드러내고 송지효 역시 육체적 발로에 의해 서서히 변모하는 왕후의 심리적 추이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다. 배우들의 연기도, 캐릭터도 적절하다.
정치적 파국으로 빚어진 인물관계의 변화 속에서 사유화된 갈등 양상이 도출된다. 그 지점에서 이야기의 너비가 축소된다. 왕의 권한 아래 안정적으로 결착된 삼각 관계가 흔들리는 건 고려왕실의 후사문제를 빌미로 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대한 위기 때문이다. 퍼즐구조로 뒤엉키는 인물 간의 심리 변화는 결국 그 정치적 발화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알력이 개개인의 심리전 양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배경이 됐던 정치적 위기는 쉽게 무마된다. 실상 시대상과 맞물려 공민왕을 연상시키는 왕의 정치 노선에 얽힌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될 것까진 없지만 시대적 배경을 통한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이 인물 관계의 갈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규모가 협소해지는 양상이다. 극 전체를 주무르던 거대한 정치적 야심이 증발한 가운데 치정극이 거칠게 거듭 반복된다. 사연의 너비가 좁아진 것에 비해 재생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형태가 다를 뿐 비슷한 양상의 갈등이 자가분열하듯 절정에 이르지 못하는 위기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인물의 갈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나아가기 보단 제자리를 도는 양상이다. 정해진 결말에 할애되는 러닝타임이 길다. 구조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가 결말을 거듭 반복하는 인상이다. 2시간 20여분을 넘기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이야기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형태만 변화된 인물간의 갈등 구조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거듭되는 까닭이다. 위기와 절정이 수 차례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한 감상이 권태를 유발한다. 모든 과정엔 명백한 사연이 있으나 지나치게 연속적이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임에도 결말을 망설이는 이야기는 끝내 허무한 마침표를 피로하게 남기고 사라진다. 천산대렵도에 대한 사족마저도 그저 허무를 더할 따름이다. 초반의 공격적 기세가 긴 러닝타임 속에서 오버페이스처럼 무너지는 형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