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정극'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0.30 <파주> 안개처럼 피고 지는.
  2. 2009.04.25 <박쥐> 단평 7
  3. 2008.12.18 <쌍화점>치명적으로 긴 삼각관계 치정극

여기 이렇게 변한 지 오래 됐어. 들뜬 어조로 무례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을 뱉는 택시기사,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의 파주는 예전에 그녀가 자리하던 그곳이 아니다. 그건 그곳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멀리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욱하게 길을 메운 안개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에 내밀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연과 속내를 점치기 어려운 인물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이 예민하게 출렁인다.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서듯 서늘한 적막을 유지하다가도 날카롭게 찌르고 거칠게 흔드는 찰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리는 작품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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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단평

cinemania 2009. 4. 25. 12:49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 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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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비사와 연관된 이 모든 설정은 연상에 의거하되 직접적으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실재를 가리지 않되 허구로서의 자질을 설득하기 좋은 태도다. <바람의 화원>나 <미인도>가 그랬듯, <쌍화점>역시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유통되던 비사(秘史)를 허구적 양식에 입각해 가공한 뒤 스크린에 유통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비사만큼 흥미로운 소재도 없다. 가공도 자유롭고 관음적 욕망이 소비를 유발한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열어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다. 그 일기의 주인이 많은 관심을 유발할수록 구매욕은 상승하기 마련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수많은 비밀을 잉태했을 왕실의 비사는 이야깃거리로 적절하다. 치명적일수록 매력적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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