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다섯 군대 전투>를 축약하자면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통해 한차례 증명된 바 있지만 피터 잭슨이 물리력을 총동원해서 전투신을 뽑아냈을 때의 스펙터클은 볼거리 중의 볼거리다. 아이맥스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여러 종족이 엮어서 발생하는 공명심과 이기심의 복마전과 물리력의 차이를 바탕에 둔 전투적 정황의 다양성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입체적인 감상 구조를 제공하고, 켜켜이 틈이 없는 감상적 지층을 만들어내는 덕분에 딱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롤러코스터. 어떤 식으로든 아이맥스에서 보시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피터 잭슨이 다시 중간계로 끌려 들어가 <호빗> 트릴로지, 심지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을 확장해 가며 3부작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살짝 혀를 차는 입장이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으로 다시 한번 갈무리된 트릴로지를 봤을 땐 대사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스타워즈>의 살짝 민망한 3부작 프리퀄과 대조적으로 언급될 만한 프리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올 겨울에 이만한 볼거리는 없다. 무조건 극장에서, 이왕이면 아이맥스다.
올해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작품마다 명암이 엇갈렸다. 보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넘쳤다.
사실 생중계를 보진 못했다. 그저 결과만 실시간으로 체크했을 뿐이다. 그래서 U2의 라이브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웠다. 게다가 사회를 맡은 엘렌 드제너러스가 꽤 진행을 잘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TV쇼 프로그램인 <엘렌 쇼>의 진행자답게 유연한 진행 실력을 뽐내면서도 시상식의 품위에 어울리는 유머를 구사한다.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으로 피자를 배달시켜서 브래드 피트가 손수 서빙을 하게 만든 건 정말 훗날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거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대단한 배우들과 찍은 셀카가 트위터상에서 무한하게 리트윗되는 과정은 오스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권위보다도 대단히 소소한 동료애를 목격한다는 건 할리우드가 지닌 저력을 체감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를 통해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오랜 할리우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86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상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그래비티>를 위한 무대였던 것 같다.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각효과 부문을 비롯해서 촬영, 음향효과 등 기술 부문을 거의 독식한 건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해에 발표된 영화 중 <그래비티>만한 기술적인 성취도를 보여준 영화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에서 <그래비티>가 호명될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편집상과 감독상 부분 수상은 할리우드가 보기 드물게 SF영화를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래비티>가 구현해낸 영상 기술이 특정한 장르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영화적 감동을 전달하는데 혁혁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임을 아카데미 위원회 역시 인정한 것이 아닐까. 사실 <아메리칸 허슬>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편집상을 <그래비티>가 차지한 것도 기술적인 효과를 넘어서 영화라는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 어땠을까? 반대로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작품상 대신 감독상을 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제86회 아카데미는 역사상 꼽힐만한 오스카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기술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의미는 더해지고 흑인 감독의 능력을 인정한 오스카로 기억됐을 테니까. 어쨌든 스티브 맥퀸은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남게 됐다. 덕분에 브래드 피트 또한 피자를 서빙했던 특별한 경험을 넘어서 배우로서 오른 적 없었던 아카데미의 단상을 제작자로서 오르게 됐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을 받을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흑인 감독이 이토록 중립적인 시각과 건조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그 시대성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었다. 걸작의 면모가 충분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한편으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되레 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성의 비극을 생생하고도 건조하게 전달하는,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시대적 목격이 될만한 영화다. 작품상 수상은 이 영화에게 어울리는 대우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줄곧 증명해왔던 스티브 맥퀸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난 거장의 면모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영할만한 결과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매튜 맥커너히와자레드 레토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확하게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출연한 이후부터 배우 경력의 전후를 나눠버리 듯 눈부신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완벽하게 메소드 배우로 진화해 버린다. 에이즈에 걸린 텍사스의 마초 역을 맡은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금지된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들여오고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며 불합리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는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속에 갇혀 살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을 온 몸으로 연기한다. 단순히 체중을 얼마를 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이 영화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장담하건대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후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어떤 배우도 이만한 연기를 보여줬던 적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영화엔 자레드 레토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인지도가 낮은 배우이지만 <레퀴엠>과 같은 작품에서 혹은 지난해에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 배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보다 확실하게자신의존재감을 발산한다. 매튜 맥커너히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란 영화를 가득 채우는 면과 같다면,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의 결을 만드는 선과 같다. 일찍이 <영 빅토리아>와 같은 실화 바탕의 영화를 연출한바 있는 장 마크 발레를 통해서 재현되는 시대적 풍경 또한 인상적이며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를 위해 마련된 완벽한 무대 노릇을 한다.
한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수상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모순된 일상을 전전하는 신경질적인 여인을 연기하며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다 결말부에 다다라 놀랍도록 처연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영화 자체의 감정적인온도를 바꿔버린 그녀의 표정은 애초에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결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편으론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겐 조금 아쉬운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지난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래비티>는 그녀에게 대단히 특별한 작품이었을 거다. 한편으론 이번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으로 꼽힐만한 루피타 니옹고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지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의 모니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놀라운 결과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니지만 미친 듯한 연기력을 선보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나 탁월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이례적인 선택으로 회자될 것만 같다.
<슈퍼배드 2>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겨울왕국>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역시 익히 예상한 바이지만 픽사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최초란 점에서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2002년에 처음 신설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주제가의 명가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상 수상은 2000년 제72회 오스카에서 <타잔>으로 수상한 필 콜린스 이후로 무려 14년만이기도 하다. 한편 <겨울왕국> 상영 전에 짧게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스터 허블롯>이란 작품에게 밀린 건 꽤나 놀라웠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변천사를 디즈니의 전통적인 흑백 캐릭터들을 통해서 유머러스한 연출과 테크니컬한 구현에 성공한 수작을 밀어낸 작품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한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가 지닌 야심에 비해서 아쉬웠던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씁쓸한 결과처럼 보인다. 올해만큼은 내심 오스카 트로피를 노렸을지도 모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또 다른 주연작이었다는 사실에선묘한 연민이 드는 것도 같다. SNS상에서 떠도는 레오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관한 '짤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수상 실패가 인류 대화합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같다. 게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매튜 맥커너히가 그와 함께 잠시 호흡을 맞춘신을 복기한다면동정심이 더해지는 효과가 유발되는것 같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그래비티>와 함께 10개 부문 후보로 오른 <아메리칸 허슬>이었다. 이 작품이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건 역시 이례적이다. 사실 <아메리칸 허슬>은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보이는 반면 결과적으로 정서적인 울림이 얕은 작품처럼 느껴지긴 했다. 마치 캐릭터들의 전장처럼 보일 정도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지는이 영화는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와 능수능란한 연출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코미디물이지만 그 실화의 재현이 끝내특별한 감흥까지 가 닿는다는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 뛰어난 범작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것이 아마도 골든글로브에 비해서 영화적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어쨌든 축제는 끝났고, <아메리칸 허슬>은 놀랍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겨졌다.
한편 각본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가 궁금하다. 해외 평에 따르면 <허>에서 호아퀸 피닉스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이 범상치 않는 작품들을 연출해온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전작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바 있었던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 역시 눈길을 끈다. 참고로 <그레이트 뷰티>는 6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아직 <허>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인상인데 아카데미의 힘을 빌어서 개봉에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수상엔 실패했지만 스타 캐스팅 하나 없는 흑백 영화로서 주요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네브라스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디센던트>와 <사이드웨이>, <어바웃 슈미트>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아니할 수가. 이미 해외에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 특수를 마저 누릴 순 없을까. 우리가 아카데미를 주목하는 것도 그곳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니까.
아이가 태어났다. 축복을 공유해야 할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통하다. 산모가 죽었다. 그 때문인가. 다들 아이를 경계한다. 아이의 얼굴을 본 아버지의 얼굴은 경악을 품더니 그 아이를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버려진다. 팔순 노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얼굴과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노쇠한 육체는 막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요양원에서 거두어진 아이는 운명처럼 노인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알려진 스콧 F.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모티브의 뼈대로 삼아 풍만한 살을 붙여나간다. 제목은 영화를 탁월하게 함축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특별한 일대기를 회상과 재현의 방식으로 전진시키는 160분의 서사는 저 제목으로 완전히 압축된다. 서사적인 흐름에 역류하는 인물의 성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주변에 선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는 원작과 궤가 다르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설정이 원작으로부터 이탈된다. 인물을 둘러싼 변화를 덩어리진 서사의 경계적 진행에 담아 묘사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사실적인 연대를 서사로 삼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배경을 사건에 결부시켜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연관시켜 작동한다. 1860년대에 시작되는 원작과 달리 <벤자민>이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에 시작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맥락도 마련됐다. 어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특별한 사연을 가공해 삽입한다. <벤자민>은 기이한 생을 짊어지고 가는 남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저 노인에서 유아로 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삶을 다룬 원작과 달리 <벤자민>은 그 기이한 삶 속에서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는 로맨스의 추억을 드리운다. <벤자민>은 실로 미스터리 하나 로맨틱한 영화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로맨스는 은밀하게, 때론 강렬하게 지속된다. 이는 평생의 러브스토리이자 운명적인 로맨스다. 물론 긴 러브스토리는 많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인생이 이 러브스토리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매우 절실한 감성을 보완한다. 특별한 소재와 서사의 뼈대가 온전한 원작을 통해 수려한 모티브를 발생시켰다. 각색을 맡은 에릭 로스는 흥미로운 사건을 위대한 러브스토리로 펼쳐냈다.
현실적인 연대는 <벤자민>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벤자민>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특히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진 유화 같은 색감을 지닌 <벤자민>의 풍경은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에 걸맞은 삽화로서 기능한다. 마치 실재 같지만 환상이며, 거짓 같지만 진실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씩씩하고, 그 운명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아련하되 투명한 여운으로 지속된다.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듬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고 진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디악>을 통해 중후한 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데이빗 핀쳐는 <벤자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생이 끝나도 그 생이 남긴 사연은 회자되기 마련이다. <벤자민>은 특이한 삶보다도 특별한 감동이 서려있어 아름다운 수작이다. 160여분의 대장정 끝에 얻어진 감정은 실로 투명하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도 마지막까지 사랑은 흐른다.
지난 2005년, 영국BBC방송은 ‘세상을 바꾼 대중문화’란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통기타 선율을 밑그림으로 삼아 나지막하게 흐르는 밥 딜런의 포크송은 겉으로 소박했지만 듣는 이를 안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의 광기가 도사리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서 밥 딜런의 노래는 대중의 처참한 분노를 대변했고 그들의 삶에 일말의 위안을 안겨줬다. 물론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극 초반, 스크린에 나열되는 문구-Inspired by the music & many lives of Bob Dylan-와 같이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음악과 많은 삶으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쥬드(케이트 블란챗)를 비추는 카메라 너머로 들려오는 나레이션은 그의 영혼이 안식을 얻었음을 선포하며 게걸스러운 대중이 그의 유물을 공유할 것이라 말한다. 그 이미지는 각각 시인(poet), 예언가(prophet), 무법자(outlaw), 가짜(fake), 인기스타(star of electricity)의 얼굴로 나열된다. 이는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육체를 재연하는 전형적인 전기영화가 아님을 표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임 낫 데어>에서 등장하는 연령과 생김새가 각각 다른 6인의 이미지는 7가지 삶으로 호명된다. 그들은 각각 밥 딜런이 아니지만 그를 연상시키는 단면으로써 밥 딜런을 이룬다. 그들은 밥 딜런이면서도 밥 딜런이 아니다. 동시에 그 개별적 이미지들은 밥 딜런의 것이 아닌 ‘(게걸스러운) 대중’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이미지를 생성한 건 타인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인지된 밥 딜런의 초상들이다. <아임 낫 데어>는 타자화된 밥 딜런을 콜라주 하듯 배열하며 스크린에 수집한다. 그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던 정의로운 포크 싱어였지만 일렉기타를 든 포크의 변절자였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적 은둔자이며, 세상의 규격에 맞추길 거부하는 무례한 저항가였다. 그는 무력한 급진주의자였으며, 강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영화는 이처럼 밥 딜런을 규정하던 다양한 세계적 시선 속에서 무심코 존재하던 밥 딜런의 조각들을 거칠게 조립한다.
물론 밥 딜런을 연상시킬 만큼 그와 근접한 이미지의 쥬드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그의 삶 일부를 채취해내듯 낯설거나 그가 남긴 궤적을 통해 얻어지는 영감의 흔적처럼 막연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밥 딜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거나 그를 만들어낸 근본이라 추측되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인물들은 밥 딜런을 향하고 있는 동시에 밥 딜런을 갈망하게 만든다. 예리한 추상과 철저한 해석으로부터 완성된 인물들은 밥 딜런과 현격하게 동떨어진 모습으로써 그를 완벽하게 배려한다. 심지어 밥 딜런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쥬드가 여배우인 케이트 블란챗의 육체로 이뤄졌다는 점은 <아임 낫 데어>가 철저하게 인물들과 밥 딜런 사이에 괴리감을 형성시킴으로써 인물에 대한 주관적 시선들을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려 했음을 드러내는 징표와 같다.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밥 딜런을 연상시킨다는 점은 이 영화가 진정 밥 딜런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드넓은 단상들을 하나로 융합하지 않고 스펙트럼 그 자체로 펼쳐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가장 규정하기 힘든 전기적 영화이자 밥 딜런이라는 불가해한 이미지에 가장 탁월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모든 규정을 거부한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을 탁월하게 연상시킨다. 스크린에는 밥 딜런을 제외한 밥 딜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으며, 그를 통해 관객은 밥 딜런이 존재하지 않는 밥 딜런의 영화를 통해 밥 딜런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이해’란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 결국 <아임 낫 데어>는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한 인간을 완벽하게 재생한다. 그것은 너비가 불분명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된 탐구라 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의 캐스팅 경위도, 뛰어난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의 OST 역시도, 하나같이 그 경의를 위한 것이라 말하기에 손색없이 훌륭하다.
90년대도 아닌 1989년이다. 전작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의 개봉연도가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하, <해골의 왕국>)은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이 모자란, 무려 19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다. 이는 분명 어떤 이들에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함께 한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를 21세기에 스크린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못했던 올드팬들에게 <해골의 왕국>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더라, 는 말처럼 진위만 분명하면 이유 따위야 알 바 아니란 듯이 들뜨게 되는 일이다.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가죽 중절모와 무엇이든 낚아채고 때론 밧줄처럼 활용되는 채찍은 20여 년이 지나도 쓸모가 대단하다. 물론 흰머리가 무성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이하 ‘인디’)는 분명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실감하게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지적이면서도 화끈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롱 섞인 위트를 날릴 줄 알며 코 앞까지 닥친 위기 앞에서 순발력 있게 기지를 발휘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 쉬지만 여전히 그는 쉼 없이 달리고 주먹을 날리며 악에 대항한다.
물론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워진 <인디아나 존스>는 흡사 어드벤처 영화의 유물이라 할만한 것이다. 특히나 디지털 방식이 대세인 21세기에서 그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쉰내 난다고 소박맞을 물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으로 돌아온 존 맥클레인이 ‘죽지 않아’를 증명했듯 인디아나 존스 역시 21세기에서 현저하게 불필요한 노동으로 분류된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해골의 왕국>은 철저하게 <인디아나 존스>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유물에 얽힌 전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유치하고 조악해 보이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낭만.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던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를 증명하듯 전작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던 나치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메운 건 공산진영의 소련군이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두르던 전작들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건 비단 영화 밖만이 아니다. ‘Better dead than red(빨갱이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해골의 왕국>은 미소진영의 대립이 한창이던 1950년대 냉전시대의 미국에 서있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서막인 <레이더스> 말미에 등장했던 네바다 군사기지 51구역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덕분에 <레이더스>에서 인디가 찾아냈던 성궤도 잠시 형체를 드러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인디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라 종용한다.
<인디아나 존스>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당신이라면 이 시리즈가 지닌 이야기 맥락이 예상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둬라.- 숨겨진 보물과 이를 악용하려는 무리들의 음모에 맞서 인디는 한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이를 소유하려는 악은 소멸하고 인디는 살아서 제집으로 돌아온다. <레이더스>에 등장했던 메리언(카렌 알렌)이 재등장하고,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자 인디와도 깊은 관계임이 밝혀지는 머트(샤이아 라보프)가 동행하는 모험은 원전에 충실한 반가운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신선한 감각이 수혈된 것이다. 다만 인디의 아버지 헨리(숀 코네리)는 죽어서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숀 코네리가 나이 관계상 출연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동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인디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1950년대가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이 된 건 인디의 나이를 고려한 것이자 모험의 실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 인디의 나이를 고려할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전작 시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거니와, 성스런 유물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해야만 모험은 이뤄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소련은 나치만큼이나 유효한 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이념대립이 구시대의 산물이 된 요즈음에 소련이 전작의 나치들마냥 악의 무리처럼 활용된 것이 불편한 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작들이 그러했듯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악은 그저 모험을 성립시키는 구실로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필요하게 감정을 유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우크라이나 억양의 이리나 스팔코 역으로 케이트 블란쳇이란 매력적인 배우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소모적인 악역들과 <해골의 왕국>에서의 그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골의 왕국>은 올디스(oldies)한 시리즈의 감성을 현대에서도 구디스(goodies)하게 살렸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단지 인디아나 존스의 채찍질이, 그리고 그의 치킨 레이스가, 그리고 세월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푸념마저도, 돌아온 풍운아 존 맥클레인의 아날로그 액션에 비견할 만큼 환호와 열광을 점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땀내나는 인디의 액션은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시킬 정도로 숭고한 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두른 동세대 영웅들의 초현실적 몸놀림으로 즐비한 블록버스터의 현세태에서 아크로바틱 액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해골의 왕국>은 구시대적 유물의 현대적 희소성을 환기시킨다.
물론 <해골의 왕국>은 모험 그 자체로 이뤄졌다. 오랜 팬에게는 실로 반가운 귀환이자 <인디아나 존스>가 낯선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만끽할만한 체험이 될만한 것이다. 물론 의외성은 존재한다. 마치 멀더와 스컬리가 제기했을 만한 <엑스파일>스러운 결말은 무시무시한 스케일이 가공할만하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빵상 아줌마를 대면했을 때나 느낄만한 생소하고도 난감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어드벤처 감수성은 <해골의 왕국>의 말미에 이르러 SF적 경이로움으로 치환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디는 ‘그들도 고고학자였다’며 감탄사를 날리지만 그것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지지한 범우주적 프로젝트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킬만한 위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이건 호불호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험의 종착역은 지금까지 <인디아나 존스>에서 봐왔던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것이며 경이롭고도 경악적인 것이다.-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알고 봤다 해도 결국은 당했다고 말할만한 것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핵폭발 씬만큼이나.
중요한 건 <해골의 왕국>이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년시절에나 꿈꿀만한 유치하고 조악한 상상을 영화적 모험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당시 관객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는 것. 그건 그 단순하고 유치한 꿈이 매번 낭만과 위트를 지닌 정의로운 인간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관객의 취향이 과거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감수성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그리고 <해골의 왕국>은 취향을 뛰어넘을만한 보편적 기질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고고학 노동자, 인디아나 존스가 주목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핵 떨어져도 죽지 않는 진정한 ‘다이하드’ 노장 인디아나 존스는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다만 사라질 뿐. 물론 이전과 다르게 인디아나 존스 가족의 재구성이란 점에서 이번 시리즈는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