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루 앞둔 신부가 예기치 않은 죽음에 터진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예비신부 히로코(우에노 주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한다. 히로코는 평생 꼴찌로 살아왔다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이상형과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시체를 트렁크에 담아 집을 나선 히로코는 그 와중에 길에서 빠친코 전단지를 돌리던 코미네(코이데 케이스케)의 차를 탈취해 산에 오르지만 자살을 희망하는 여자 고바야시(키무라 요시노)의 엉뚱한 동행을 받아들인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시종일관 엉뚱한 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틀어댄다. 뮤지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도입부 시퀀스를 비롯해 때때로 스릴러나 호러적인 연출이 가미되는 등 다양한 장르적 형태가 순열적으로 전시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목적으로 둔 산만한 소동극이다. 새로운 삶을 꿈꾸던 여자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비로소 성장을 맞이한다는 성장담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두 여자의 버디무비이자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진전되는 산만한 전개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캐릭터들은 고의적으로 의도된 코미디의 양식에 가깝다.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상황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품었다는 사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방편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백치미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에노 주리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영화적 과장마저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해시키는 윤활유에 가깝다. 사실상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우에노 주리의 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낙관에 대한 강박이 지나친 영화다. 소재적으로 <달콤, 살벌한 여인>을, 캐릭터적으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앞선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사연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형식적 열거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감정의 밀도를 채우는데 실패한 영화처럼 보인다. 감정이 탈색된 백치미적 사연의 끝에 자리한 성찰적 태도마저도 또 하나의 형식적 나열처럼 보일 뿐, 그에 앞서 전개된 사연의 총합이 이루는 결과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매 시퀀스마다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지만 저마다 파편화된 형태로 굴러가는 시퀀스들은 결과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곧장 휘발되듯 소모된다. 결국 여정의 나열 끝에 걸리는 캐릭터의 성찰은 딱히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할 뿐이다. 좀처럼 와 닿지 못하는 낙관의 비현실성이 마음에 걸린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해 과장된 상황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그 과장된 상황의 연속적 나열이 부여하는 소동극이 나름의 재미를 부여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농익어야 할 성찰은 헐겁다. 백치미적인 웃음을 나열하는 것도 좋지만 낙관적 성찰마저 백치미적이라 너무 가볍다.
언제나 그렇듯, 다소 황당하지만 귀여운 그녀와 덜 떨어진 듯 순수한 그가 만나 에피소드는 이뤄진다. <엽기적인 그녀>이후로 곽재용 감독의 머릿속엔 그저 대조적인 성향의 여자와 남자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것 같다. <싸이보그 그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싸이보그 그녀(아야세 하루카)는 먼 미래에서 지로(코이데 케이스케)에게 날아와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남녀의 동거가, 엄밀히 말하면 싸이보그와 주인의 합숙이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 게 좋다. 그걸 안다고 해 봤자 모르는 것만큼이나 속 터지는 일이 될 테니까. <싸이보그 그녀>는 두서 없는 영화다. 인과관계에 대한 납득은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저 시트콤 같은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서사엔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기적인 배려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아도취되는 영화의 감정선 따위에 몰입할 가능성은 반 푼어치도 발생할 리 없다. 거대한 지진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머리에 다다르면 이 영화의 태생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일본 개봉판을 재편집했다는데 전자도 딱히 궁금하진 않다. 영화의 말미에 묘사되는 지진만큼이나 100분의 러닝타임이 끔찍하게 막장이라 원래 형태를 되새김질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아야세 하루카의 미소가 작은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