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 없이 말했다. 언뜻 가볍게 들렸다. 하나 곱씹을수록 명확했다. 주지훈은 똑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종영된 미니시리즈 <밀회>는 <도쿄타워>를 원안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사실 2009년에 안판석 PD가 <도쿄타워> 원안으로 기획했던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던 것으로 안다.
잘 알겠지만 그때 내가 사고를 쳐서 다 무산됐다. 이제 당당해졌다는
건 아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숨겨서 뭐하겠나 싶은 거지. 법적으로
죗값을 치렀지만 여전히 책임감을 느낀다. 괜히 나 때문에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될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내 일을 하려고 한다.
연기로 용서를 빌겠다는 말인가?
배우가 하는 일이란 연기로서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다.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줄 수도 있고 때론 상처를 치유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내 연기가 그런 불편함조차 잊을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면 지난 과오도 조금이나마
희석될 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숨기려고 하기 보단 잘못을 인정하고 맞을 건 맞더라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긍정적이다.
죽을 순 없으니까, 계속 살아가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좋은 친구들>의 이도윤 감독님도 그러더라.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라고.” 내 잘못을 반석으로 삼아서 그 위에 쌓인 교훈들을 활용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친구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라고 들었다. 원망스럽진 않나?
사실 그 친구를 이제 더 이상 보진 않는다. 원망해서가 아니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 다만 다시 그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기분 나쁜 일이 될 수 있겠더라. 아무래도 그 일로 손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서로에게도 좋을 일은 아닐 거 같고.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진 않나?
원래부터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동네 술집이나
편의점 앞에서도 잘 앉아있는 편이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땐 살도 많이 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있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문 거 같다. 옷도
막 입고 다니니까. 실제로 보면 내가 너무 까맣다더라(웃음).
주당이라던데.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이다. 요즘은 운동 때문에 한 달 가까이 못 먹었는데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못할 거 같다. 그런데 조만간 개봉을 앞둔
<좋은 친구들> 제작보고회도 있고, 시사회도
있을 거라 뒤풀이가 좀 걱정이다. 다들 ‘네가 견딜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저주를 퍼붓는데, 절대 안 먹을 거다(웃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라도?
지금 준비하는 차기작 때문에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론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힘들다. 어릴 때 술만 먹지 말고 운동 좀 해놓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웃음).
개봉을 앞둔 영화 <좋은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남자영화’다. 이렇게 단순히
‘남자영화’라고 할만한 작품엔 처음 출연하는 거 같은데.
<좋은 친구들>은
내게 잘 맞는 옷이었다. 그만큼 진짜 내 모습을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친한 친구들하곤 서로에게 욕도 많이 한다. 낄낄거리면서 헛소리도
많이 하고. 원래 남자들이 좀 그런 거 있잖아. 서로 까면서
친해지는 거. 그리고 쉬는 동안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살도 많이 찌는 편이라서 실제로 한 10kg 정도 체중을 늘렸다. 일상적인 내 모습을 담고 싶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감독님과 말이 너무 잘 통해서 대부분의 신이 두 테이크 안에서 오케이 됐다. 그래서
우리끼리 너무 잘 맞아서 너무 잘 찍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최근에
ADR(후시 녹음)을 하면서 편집된 영상을 보면서 둘 다 대가리 박고 반성했다(웃음). ‘너무 우리끼리 으쌰으쌰 했나?’ 싶더라. 아까 말했듯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 달간 술을 안마셨는데
그날 딱 한번 마셨다.
뭐가 아쉬웠나.
화면으로 보니까 희한할 정도로 멀끔해 보이더라. 그게 좀 아쉬웠다. 물론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병신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웃음).
사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 너무 과묵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 얘긴 많이 듣는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이미지보다
더 차갑게 대한다. 처음 만났는데 말을 툭툭 던지거나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서로 그래도 상관없다면 페어 플레이니까 괜찮다. 하지만 내가 하면
괜찮은데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저 혼자 잘나면 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보통 초보 배우 시절엔 본인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까?
<마왕> 촬영
중에 어떤 신을 앞두고 많은 연습을 했다. 그래서 굉장히 자신 있었지.
그런데 상대 연기를 하는 선배님 앞에서 준비한 걸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리액션을
맞추다가 그대로 끝나버렸지.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까 내가 준비했던 것보다 그게 훨씬 좋아 보였다. 한 수 배웠지.
자신의 단점을 쉽게 인정하는 편인가?
스스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면 발전할 수 없다. 인정해야 고칠 수
있지. 그러니 남 탓하면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야 잘나오고,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잘 안 나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일단 나부터 잘하는 사람이 돼야지.
스스로에게 엄격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줘야 노력이란 걸 하게 된다고 믿는다. 아니면 나태해지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부럽다. 물론 그런 사람은
드물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대본만 열심히 보면서 농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준비하는 만큼 잘해내는
선배가 있고, 항상 술 먹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잘해내는 선배가 있다. 스타일이 다른 거지. 하지만 결국 정진하면 정점을 찍는 거다. 하지만 그 선배를 보고 현장에선 저렇게 다 놓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 선배는 이미 기본이 돼있으니까 그게 되는 거다. 무대에서 10년씩 해왔던 사람들이니까. 날 것이 좋다고 하는데 잘 알겠지만
함부로 날 거 먹으면 장염 걸린다(웃음).
선배들이 꼭 연기적인 교훈만 주는 존재는
아닐 거다.
옛날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자기한테 들어온 작품들만 고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나가는 좋은 배우들도 직접 작품을 찾아 다닌다는 얘길 듣고 멍해졌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내게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으니까. 요즘은 “이 작품 재미있는데 나 주면 안돼?” 이런 얘기 잘 한다. 예전엔 그런 부탁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 같아서 쉽게 못했는데 지금은 편해졌다.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넉살이 생겼다고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웃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르지.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늘어가고 그만큼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한번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자주 찾던 동네 술집으로 친해진 동료 배우를 불렀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한 아저씨가
오시더니 반갑다고 툭 치면서 ‘오, 누구 씨!’ 이러는 거다. 그런 상황을 목격하니까 이해가 되더라. 그 친구는 항상 룸이 있는 곳에서만 술을 마셨는데 내가 항상 그럴 필요 없다고 잔소리를 했거든. 나는 한번도 그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 나이 서른
셋이면 애도 아니고 그날 따라 기분이라도 안 좋아서 욱해버리면 술 기운에 싸움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다
안 좋은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고. 여배우들은 오죽할까 싶더라. 직접
겪어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특별히 친한 배우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류)덕환이, (김)재욱이 정도? 군대에서
만난 (이)준기도 친해졌다.
사람들이 되게 안 어울린다고 하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사실 스타일이 정반대라 서로 흉보면서
토할 때까지 술 마신다(웃음).
남들이 보면 싸우는 줄 알겠다.
사실 이번에 촬영하면서 (이)광수랑
친해졌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오해할 소지가 많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광수가 NG를 내면 내가 ‘역시 예능하는 새끼는
안돼’라고 놀린다. 그러면 광수가 욕으로 응수한다. 사실 광수는 예의 바른 동생이다. 그 정도로 우리가 친해졌다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우리 관계를 잘 알만큼 곁에 있는 건 아니니까 멀리서 볼 땐 주지훈이 이광수를 엄청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겠더라.
그런 걸로 기사라도 나면 피곤한 일이고
사실 기자들이 모르고 쓰는 거라면 괜찮다. 그런데 대부분 알면서 일부로
쓰는 거잖아. 사실 배우를 공인이라고 하는데 공인은 사전적인 의미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지닐 필요는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아니다. 배우의 사생활이 국민의 알 권리는 아니다. 공무원들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이니까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배우는 자기 능력으로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물론 배우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할 순 있다. 하지만
사사건건 기사화하면서 그걸 알 권리라고 포장하는 건 어이없지. 그런 의미에선 기자들이야말로 공인이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생각하면 굉장한 책임감을 느껴야지.
최근에 가인과의 연애도 폭로되듯이 밝혀졌는데.
특별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숨어 다니는 편도 아니고. 하지만 먼저 나서서 밝힐 이유도 없는 거지. 어쨌든 누군가 미행하듯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20대
후반과 30대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군대도 다녀왔고.
군대 다녀오니까 현장 인원의 절반 이상이 나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른다(웃음).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요즘은 20대 초반 같은 기분을 느낀다. 보통 스무살 중반 정도가 돼야 성인이라는 게 느껴지잖아. 아무래도 20대 초반엔 대부분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을 계속 만나고, 돈도
없으니까 하는 짓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기간이 필요한 거지.
입대 전에도 <돈주앙>이라는 뮤지컬로 공연한바 있는데 군대에서도 뮤지컬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특별히 뮤지컬에도 흥미가 있었던 건가?
단순히 소리 내서 발성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지겨웠다. 그때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는데 문득 뮤지컬 발성이 기교를 부리지 않고 깨끗한 발성을 해야 하는 거라 기본 발성과 동일하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원래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지겹지 않게 발성 연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뮤지컬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뮤지컬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밴드 활동도 하더라. 자작곡도 있던데.
흥얼흥얼하면서 녹음했다가 세션 멤버들한테 들려주면
그들이 악기로 연주해서 곡이 하나 나온다. 물론 어디 가서 음악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창피한 수준이지.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해선 안될 이유도 없다. 물론 이렇게 편하게
연기하는 건 안 된다. 연기는 내가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까.
영화에서 주로 면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등장하는데 생각보다 몸이 탄탄해 보이더군요. 사색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특별히 운동을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나름대로 꾸준한 자기관리를 하는 거 같습니다. 혹시 나중에 케이블에서 보실 기회가 있으면 <얼굴없는 미녀>다시 한번 보세요. 제 몸이 ‘괘안습니다’. (웃음) 기대하시는 분들은 별로 없겠지만 평상시에 유산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웃음) 오히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하면서 술 많이 먹고 그래서 좀 망가졌죠. 사실 <얼굴없는 미녀>때는 감독님께서 일부로 몸을 만들라고 주문도 하셨고, 그래서 그때는 정말 좋았었죠. 사실 지금 몸이 좋아 보인다는 것도 원체 저에게 기대를 안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몸 좋으신 분들이 들으면 웃기고 있네, 그럴 걸요. (웃음)
사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마치 배우들에게 기본적인 설정만 알려주고 알아서 풀어낸 상황을 그냥 카메라에 담아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배우들을 방목시켜놓고 그냥 카메라로 따라잡은 느낌이죠. 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치밀하게 영화를 찍는다고 하시더군요.
예. 절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처음엔 저도 원체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상황만 약간 주어지고 애드립의 느낌으로 연기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안 그랬어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다 찍으시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완벽하게 만드시는 분이시죠.
자신이 원하는 컷을 얻기 위해선 몇 번이고 집요하게 반복해서 테이크를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지독하신 분입니다. (웃음) 예를 들면 다른 영화 같은 경우 뒤에서 누가 쳐다봐서 거슬렸다 싶으면 바로 ‘커트’, 그런데 그냥 ‘오케이, 괜찮아, 여기서 잘라 쓰면 되니까’, 보통 이렇게 되는데 홍 감독님 영화에선 2분, 3분, 5분 롱테이크 가는 도중에 마지막이라도 누가 지나가면서 어색하게 쳐다 봤다, 그러면 ‘다시’. 용납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홍 감독님 영화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홍감독님 영화에 원체 원신 원컷이 많고 만약 영화에서 리얼리티가 느껴지지 않으면 영화를 보다가 빠져나올 수 밖에 없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굉장히 치열하고 꼼꼼한 방식을 고수하시기 때문에 현장에서 그렇게 독하게 하실 수 밖에 없는 거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님과 함께 한 세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방식에 익숙해졌겠지만 아무래도 처음엔 어느 정도 적응이라고 할만한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렇죠.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두렵기도 하죠. 배우가 아닌 누구라도 궁금할 수 있을 텐데, 그게 배우입장이라면 더욱이나 그렇겠죠. 근데 해보니까 괜찮더라고요, 그 방식이. (웃음)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받아본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당일 분량의 대본을 전달되는 감독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작품의 결과에 대한 잠재적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전부터 제가 워낙 홍상수 감독님 팬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런 확신이나 믿음은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사실 그런 방식에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 오히려 새로운 기대가 있었어요. 그 방식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냥 다른 것인 셈이죠. 다른 영화나 다른 감독님과의 방식과는 다른 거에요. 그렇다고 그게 꼭 옳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건 그냥 그 감독, 혹은 그 사람만이 지닌 성격인 거죠. 물론 그게 또 모든 방식에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건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전반적으로 크게 볼 땐 그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만 그 감독님의 믿음과 별개로 특별히 보자면 그건 그냥 그 감독님의 방식이었던 셈이고, 저는 그 사람하고 하기로 했으니 그 방식에 따라야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그 방식의 첫 번째 지지자는 배우가 되는 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그냥 출연하는 배우들만 봐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더군요. (웃음) 더욱 놀라운 건 그 모든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는 점이죠. 그럼에도 그런 보기 드문 상황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라서 자연스럽게 수긍되는 느낌도 있더군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정말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노 개런티라는 게 그만 이슈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홍상수 감독님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웃음)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이 매번 노 개런티로 배우들을 출연시킨 건 아니거든요. 일단 감독님께서 이번 제작 여건에 대한 상황을 얘기해 주셨고, 안 주는 게 아니고 못 줄 상황에 놓였다는 걸 충분히 이해했고요. 물론 그런 이해만으로 다 출연할 순 없는 거잖아요. 만약 모든 감독님께서 저한테 오셔서 좋은 작품이니까 이해해달라고 해도 다 이해할 순 없는 거잖아요. 저는 그 이전부터 홍 감독님을 존경하는 팬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홍 감독님과 두 번 작품을 하면서 얻어진 믿음이 플러스됐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겠죠.
단지 인정적인 문제에서 노 개런티를 선택했다기 보단 분명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가 배우에게 주는 어떤 보상이 있기 때문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겠죠.
어쨌든 전 그런 이해와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합쳐졌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제가 ‘넌 왜 그냥 하기로 했니’ 이렇게 물어보진 못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결정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말하지 않아도 대충 다 아시지 않을까. (웃음) 그냥 저랑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드는데 그건 제 예상이니까 제가 대신 답변할 순 없는 거고요. 다만 저는 이제 노 개런티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앞으론 노 개런티라고 해서 안 한다 그러면 그 감독님들은 ‘내 작품이 싫은가?’ 그럴 거 같아. (웃음) 그리고 어느 개인적인 작품을 한 배우가 아니라 어느 한 작품을 한 배우의 입장에서 노 개런티란 부분이 너무 이슈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아요. 어쨌든 좋은 사람들의 뜻이 맞아서 찍은 좋은 영화가 영화로서 이야기되는 게 아니라 그런 이슈를 통해서 이야기될 거 같아서요. 그걸 숨기려는 건 아니고 이젠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까요. 그냥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어요. 사실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물론 전체적으론 대단한 일이긴 하죠. 돈을 줘도 그 배우들이 이렇게 다 모일 수도 없잖아요, 사실.
구경남은 겉으로 봤을 땐 소심하고 마음이 약해 보이지만 때때로 다혈질이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곤 한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혼자 꿍꿍이 짓 다하고, 일 있다 그래 놓고 방에 가서 퍼 자고. (웃음)
사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배경 안에 놓여있다 보니 캐릭터 자체가 마치 배우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혹시 연기하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자신 스스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라고 느껴본 적은 없습니까?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출연작에서 제가 연기하는 모습 속에 제 안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렇다곤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사실 홍 감독님의 영화에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굉장히 리얼하게 연기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겠죠. 물론 배우들의 힘도 있겠지만 감독님께서 그렇게 잘 만들어내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감히 더 나아가보자면 홍 감독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그래, 그래, 하고 끄덕일 수 있을만한 공감대를 끌어내시는 것이기도 하겠죠. 저는 항상 주어지는 대로 하는 것뿐인데 그게 유독 홍 감독님 영화에서 많이 보이고, 저뿐만 아닌 다른 배우들도 그렇잖아요. 그건 홍 감독님에게 김상경이면 김상경, 김태우면 김태우, 그들 안에 있는 걸 끌어내는 힘이 있으심과 동시에 그걸 배우의 이미지와 잘 조화시켜서 마치 그 사람이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공형진 씨는 원래 코믹한 연기를 잘 하는데 이번에 보면 다르잖아요. 영화 속 캐릭터를 보고 ‘저게 진짜 공형진 아니야?’. ‘저게 진짜 정유미 아니야?’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사실 감독님의 힘이 큰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더 많이 죽여서 연기한 거에요. 저는 원래 구경남보다 더 찌질해요. (웃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의 구경남은 마치 빨랫줄과 같은 인물입니다. 나머지 인물이 빨래처럼 걸렸다 걷혀도 구경남은 항상 거기 있으니까요. 전체적인 맥락을 관통하는 인물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장악하는 캐릭터는 아닌 셈이죠. 사실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배제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감정의 중심을 장악하는 캐릭터가 아니란 점에서 마치 영화의 배경과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볼 때 구경남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건 나중에 고순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뿐이에요. 그 외에는 정말 말 그대로 구경하는 남자에요. 구경남이란 이름 자체가 개인 욕망인 셈이죠. 물론 어쩌면 다른 배우가 구경남을 연기했다면 빨랫줄 같지만 부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더 잘 했을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저는 그럴 능력이 안 됐던 것 같고요.
어떤 인물의 감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식어로서의 연기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기보다도 상대의 감정을 중시하는 인물로 등장했던 것 같거든요. 배려가 많거나 소심한 느낌이죠. 심지어 <키친>이나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는 아내의 불륜에 충격을 먹으면서도 쉽게 화내지 못하는 캐릭터이기도 하죠. 곧잘 사과를 하기도 하고요. 이번 작품에서도 혼자 속으론 별 생각을 다하면서 쉽게 번번히 사과하잖아요. (웃음)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제가 감정을 드러내기 보단 받는 스타일의 배우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 그건 작품에 따라서 틀린 거죠. 예를 들면 <해변의 여인>같은 경우는 괴상한 짓을 하는 작은 역할이었고 오히려 거기서 도와주는 것처럼 연기했는데 운이 좋아서 영평상 남우조연상까지 받았죠. 물론 어떤 상을 받았느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 안에서 자기역할을 충실한 배우가 좋은 배우가 아닐까 싶어요. 역할의 위치나 비중에 대한 욕심이나 부담은 없어요. 아무래도 조화를 중시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작품에 녹아 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해요. 다만 다음에 다른 캐릭터를 할 기회가 되면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야겠죠.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마치 저 인물이 홍상수 감독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은연 중에 자의식을 때때로 속물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곤 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그렇게 읽혀도 좋을 만큼 절묘한 대사들이 많았어요. 특히 제주도에서 학생의 질의에 대한 답변하는 구경남은 마치 홍상수 감독님의 대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죠. 아까 말했던 2백만도 진짜 홍상수 감독님 속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이 홍상수 감독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얻는 착각일 지도 모르겠죠. (웃음)
이번에 인터뷰할 때 그런 질문들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에요.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은 거에요. 일단 구경남이 예술영화감독이고, 질문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은 거죠.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를 찍는 동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 찍고 나서 하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고 나니,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죠. 하지만 지금 돌아가서 다시 찍는다 해도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 같아요. 역할을 하면서 ‘이건 홍상수 감독님하고 다르나? 이건 맞지 않나?’ 이런 건 제 입장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니까요. 실제로 전혀 의식도 못했고요.
홍상수 감독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작업을 했던 배우로서 이런 생각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감독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아는 홍 감독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2백만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웃음) 다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해보자면 홍상수 감독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다들 감독님 머리에서 나온 캐릭터잖아요. 저 뿐만 아니라 공형진 씨 역할이나, 유준상 씨 역할 안에도 감독님이 녹아있을 수 있겠죠.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캐릭터에 녹아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홍 감독님은 구경남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구경남은 감독님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죠. 감독님을 닮았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지금 제가 돌이켜 생각해본 답이에요. 어쩌면 그 전부터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모두 그랬던 거 같아요. 감독님의 모습에서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거 같기도 하고.
KBS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배우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준 건 영화 쪽이었죠. 필모그래피만 보자면 마치 방송 매체보단 영화를 선호하는 배우라는 인식을 줄 정도로 꾸준히 영화로 활동해왔습니다.
저는 원래 연극과 출신이에요. 사실 제 얼굴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다는 건 생각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어요. (웃음) 일단 배우로서 솔직히 영화가 매력 있긴 하죠. 다만 편견은 없어요. 의도해서 그런 건 전혀 아니고요. 그냥 공교롭게도 영화 쪽에 좋은 작품이 들어오다 보니까 최근 9년 정도 계속 맞물려서 영화만 찍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뿐이죠. 기회가 되면 드라마뿐만 아니라 연극도 다시 하고 싶고요. 작년엔 SBS에서 했던 4부작 드라마 <도쿄, 여우비>에도 출연했고, 졸업하고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하기도 했잖아요. 물론 이런 건 있을 수 있어요. 영화와 드라마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될 때 영화 쪽으로 약간 기울 순 있겠죠. 왜냐면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영화는 배우로서 준비할 시간도 많고 환경적으로 유리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렇게 구분 지어서 생각했던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사실 드라마보다 영화나 연극이 좀 더 배우에겐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 안배된다는 점에서 말이죠. 모든 배우가 사실 좀 그렇지 않을까요. 기자님이 기사를 쓰셔도 시간이 있고 정보를 알고 쓰는 게 아무래도 편한 것처럼요. 물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본적으로 해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말씀하신 것처럼 작년 말에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했습니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였는데 긴장되진 않던가요?
무대에 너무 오랜만에 서서 약간 긴장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런 건 없더라고요.
졸업 이후로 첫 연극이었는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나름대로 오랜만에 귀향한 기분도 들지 않았을까 싶고요.
좋았어요.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기엔 프로로서 보여준 게 없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처음 했다고 봐도 되겠죠. 물론 학교 때 쉬지 않고 연극을 했지만 그건 학교 때 했던 거니까 프로로서 처음 했다고 볼 수 있는 거에요.
러시아 출신 연출가인 ‘유리 부투소프’의 작품이었고 ‘트레플레프’를 연기했던 것으로 아는데 원래 희곡의 형태에서 변주를 가미한 파격적인 공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3막에서 원작과 달리 ‘트레플레프’의 내면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삽입됐다고도 하더군요. 오랜만에 선 무대에서 어떤 에너지를 얻진 않았을지 궁금하군요.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어요. 일단 배우로서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주변의 많은 분들이 무대를 해야 배우로서 재충전할 수 있게 되고 재충전을 떠나서 많은 걸 정비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런 말씀들이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욱이나 ‘유리 부투소프’라는 좋은 연출가를 만나서 너무 많은 걸 배웠어요. 제가 원래 사실주의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원래 형태를 완전히 태워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형식이 놀라웠죠. 예를 들면 우리가 국한해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작품이나 인물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형태로 보여주는 거에요. 이렇게 연극이란 매체를 통해서 배운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얻은 것도 많고 오랜만에 그런 훈련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도 있었고, 내가 너무 게을렀던 건 아니었는지 생각도 하게 됐고요. 여러 방면에서 좋은 기회였죠.
홍상수 감독님이 아침마다 당일 촬영분량의 대본을 집필하는 건 자신의 갱신된 생각을 최종적으로 갈무리하는 하나의 의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형태적으론 마치 드라마 쪽대본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가 밀려가고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버겁게 마감되는 경우에서 드라마 쪽대본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요. 드라마 쪽대본과 홍상수 감독님의 대본은 형태가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죠. 그만큼 배우에게 전해지는 안정감이나 신선함도 다를 것 같고요.
전혀 다르죠. 드라마에서 쪽대본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전해지거든요.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3일 뒤 방송이 나가야 되는 상황을 전제로 완성되는 거죠. 일단 지금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거나 토론할 시간도 없이 그저 대본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서 얘기하고 넘기고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쪽대본이 나오는 거에요. 내가 지금 너무 과장되고 격하게 얘기했나요? (웃음) 쉬운 얘기로 드라마 작가는 인물의 다음 스토리를 전하는 거지만 홍 감독님의 대본은 계속 쌓여가는 인물의 상태를 통해 관찰된 결과를 가져가셨다가 되돌려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에 대한 토론을 충분히 하고 내가 불편한 점을 얘기하면 그걸 반영해서 짧든 길든 리허설도 충분히 하고 상황이 완성됐을 때 촬영에 들어가죠. 만약 그게 오늘 완성될 수 없다면 내일 다시 찍어도 되는 거고요.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웃음)
구경남이 양치질을 할 때 ‘이번에는 꼭 2백만이 볼 영화를 만들고 말 거다’라는 독백이 내레이션 됩니다. 구경남의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기도 하죠. 사실 김태우 씨는 상업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활동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흥행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배우처럼 인식되는 느낌도 있고요. 그런데 혹시 구경남처럼 ‘이번엔 2백만이 볼 영화에 출연하고 말 거다’라는 생각이 들 때는 없었나요? (웃음)
저는요,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런 영화에 출연을 해왔어요. 지금 말씀하신 흥행영화라는 건 장르영화에 해당될 텐데, <키친>도 그렇고, <기담>도 그렇고, <리턴>도 그렇고, 심지어 <얼굴 없는 미녀>도 그렇고, 다 흥행성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다만 그런 영화들이 이제 흥행되지 않다 보니까 자꾸 홍 감독님 영화나, <사과>라던지, <내 청춘에게 고함>이나, <버스 정류장>같은 영화가 부각되고 저는 약간 예술적인, 마치 영화제 가는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됐지만 저는 지금까지 계속 흥행할만한 장르영화를 쭉 골라오면서 하고 있거든요. 물론 제가 출연한 전체적인 작품 가운데 후자 쪽의 편수가 좀 많이 눈에 띄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꼭 의도적인 행보는 아니었거든요.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관객이 덜 들다 보니까 그런 이미지로 보이는 것 같아요.
몇 년 사이에 출연했던 <기담>이나 <리턴>과 같은 영화는 확실히 흥행이 요구되는 영화였던 거 같습니다. 어떤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흥행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고요. 그럴 땐 흥행 자체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작가주의 영화나 예술 영화도 관객이 많이 든다면 좋겠지만 어쨌든 그런 영화 같은 경우엔 제가 관객이 들 거다라고 생각해서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번엔 장르영화니까 좀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관객이 드는 게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기도 하죠. 다만 그걸 기준으로 고르는 건 아니에요. 제 기준으론 좋은 시나리오라서 택한 거니까요. 질문하신 대로 그런 욕망이 있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전 그렇게 해왔지만 그게 잘 안된 거에요. 말 그대로 그런 욕망은 있고요. 다만 그건 욕망으로 되는 부분이 아니니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2백만이 넘겠죠. (웃음)
간지러운 표현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해맑게 웃는 편입니다.
영혼이 맑아서. (웃음)
영화에서도 그렇게 웃다가 돌연 정색하는 표정이 재미있더군요. 마치 인물의 양면성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랄까요.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데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안팎의 온도차가 다르다고 할까요. 그래서 때때로 소심하거나 나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욕망을 숨기기 좋은 표정을 대변한 적도 있었죠. <얼굴없는 미녀>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안으로 숨긴 채 은밀하게 진전시키려는 인물이었고, 사실 유일하게 악역이라 할만한 <리턴>에서도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으니까요. 어쩌면 감독들이 김태우라는 배우에게 있어서 끌어내고자 하는 모습이 종종 그런 이중성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음, 글쎄요. 제가 그런 것 까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가 있는 거 같아요. 결국 이미지가 배우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금처럼 포괄적으로 그 배우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감독님들이 캐스팅을 결정할 순 있겠죠. 다른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반대로 제 부족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걸 좀 다른 시각이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란 사람의 어떤 한계 때문에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이 안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그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지만 일관적인 이미지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약간 자신의 속내를 좀처럼 내밀지 못하는 소심한 이미지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마치 그게 김태우 씨의 성격과 연관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저는 매번 다른 역할, 다른 배역, 다른 나이, 다른 직업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건데, 그게 또 제 안에서 나오니까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성격이 꼭 <버스, 정류장>이나 <사과>에서 나오는 인물 같진 않거든요. 구경남도 그렇고. 사실 저한테는 아까 말씀 드린 그런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없거든요. 좀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제 반대적인 부분인 거죠. 제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좋지만 매번 비슷비슷하다는 건 반대로 제게 뭔가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사실 캐릭터가 항상 동일해 보이는 건 아니에요. 파격적인 변화를 연기하는 배우도 있지만 디테일한 차이를 통해 꾸준한 성격을 드러내는 배우의 연기가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죠. 그리고 그게 캐릭터와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제 생각엔 영화마다 그 캐릭터처럼 보이는지가 중요하니까요. ‘왜 구경남을 저렇게 연기하지’라고 하시면 정확히 문제가 되고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만 그 인물로 느낀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겠죠. 다만 ‘구경남이 김태우랑 좀 비슷하지 않아?’ 이러는 건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로 다음에 깡패를 한번 연기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만약 다음에 코미디를 몇 편하면 예전엔 먹물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코믹하고 가벼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그게 누군가를 의식해서 코미디를 한 건 아닐 거란 말이에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악역을 한다 해도 그걸 잘 해내는 게 중요한 거지, 어떤 이미지를 의식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캐릭터에 충실한 게 장기적인 면에서 중요한 거죠. 평생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당장 조급할 이유도 없고요. 이 작품에서 이 인물이 되는 게 저한테 중요할 뿐이지, 어떤 이미지에 국한된다거나 변화가 없다라는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만약 저에게 변화를 기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일부로 피하는 게 아니니까 다음에 기회가 왔을 때 잘 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싶고, 제 나름대로는 항상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 많이 곱씹으며 후회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쉽게 털어내는 편인가요?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이긴 해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배역에서 빨리 빠져 나오는 것도 배우로서 굉장히 큰 덕목중의 하나이고 장점이다 그러더라고요. 저는 촬영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첫 촬영 들어가기 전에 고민을 좀 하느라 그 전까지 너무 힘들어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촬영하면서부터는 편해지고 촬영 끝나면 굉장히 빨리 잊는 편이죠. 대체적으로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건 사실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죠. 빨리 잊어야지 한다고 빨리 잊는 건 아니거든요.
“정말 몰라서 들어가고 그게 발견이어야 합니다.” 이런 구경남의 대사처럼 이번 영화는 배우에겐 몰라서 들어가는 과정이었고 그게 발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오히려 생소한 발견을 주는 경우도 많죠. 그 발견은 일차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몫이자 관객의 몫이 됩니다. 배우에게도 어떤 발견의 몫이 있을까요?
역시나 다른 배우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없어요. 만약 시나리오가 있는 작품을 했다면 지금 같은 질문에서 답변할 수 있는 말이 많았을 거에요. 제가 이런 캐릭터를 했지만 막상 찍으면서 이런 발견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번엔 더욱이나 트리트먼트도 없던 작품이라 오늘 찍을 내용도 모르고 하면서 한편의 영화를 쌓은 셈이거든요. 그래서 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저는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돌아본 적도 없고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할까요?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희가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옆자릴 가리키면서) 어쩌면 이렇게 앉아있었을지, (빨대를 잡으면서) 제가 콜라를 이렇게 마실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는 행동을 따라 하면서) 지금 기자님이 이렇게 하실지, 순간순간 모르면서 쌓여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어쨌든 한 시간 정도 인터뷰가 지나서 그걸 영화처럼 보면 저희가 어떤 인물이 돼있는 거 아닐까요. 저한테 기자님이 어떤 인물이 되고, 결국 지금 상황은 영화가 돼있는 거죠. 이번엔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지금처럼 하는 건데 그게 두 시간 전에 알게 됐던 거죠. 그걸 통해서 연기하고, 그게 하루씩 쌓여서 영화가 되고. 그게 두려울 거 같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게 그렇잖아요. (사진 기자를 가리키면서) 지금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 이런 상황들은 그냥 날것으로 오는 것처럼, 이렇게 만나고 쌓여서 어떤 인물이 저한테 그 인물로 구축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루마다 주어진 상태에서 그날의 구경남을 쌓고 그 다음날엔 그 전날에 쌓였던 구경남과 합쳐져서 또 하루가 연장되고, 그런 식으로 구축된 인물이었거든요. 결국 발견이라는 건 우리가 어떤 인물을 지난 다음에 오는 건데 이번엔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감독님 안에서는 어떤 인물이 그런 식으로 발견돼서 새롭게 쌓아주실 수 있는 거고, 관객은 그 새롭게 쌓여가는 형태를 쭉 볼 수 있지만 막상 그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상황에만 충실하게 되거든요. 내 스스로에게 쌓이는 발견의 개념이 아닌 거죠.
어떤 전체적인 캐릭터를 예상하고 들어간 뒤의 변수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에서 매번 존재하고 빠져 나오는 일회적 작업의 연속이었기 때문일까요?
지금 저와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을 쌓고 계시는 거겠죠. 그런데 사실 항상 생각하는 대로 뭔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누군가와 싸울 수도 있고, 어떤 분과 웃으면서 술을 마실 수도 있고, 그렇게 그냥 살면서 쌓이는 거잖아요. 인생에 있어서 발견이란 건 어느 일정한 시간을 돌았을 때 본인에게 구축된 것을 알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번에 구경남은 그런 식의 접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하루하루마다 구경남으로 쌓여가는 것에 불과했죠. 그래서 제가 지금 돌아봤을 때 구경남이 어떤 인물인 거 같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게 저한테 중요한 의미가 아닌 거에요. 관객들은 구경남을 보면서 어떤 걸 생각하고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겠지만 저는 그냥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걸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으니까요.
어떤 전체를 염두에 두거나 그 이후를 생각하기 보단 그 현재에 집중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과정을 연기한 본인에겐 그 서사가 어떤 발견으로 점증되는 과정이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러니까 ‘구경남은 어떤 인물이지?’라고 돌아본다거나,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구경남은 저런 인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저에겐 별로 의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제가 어떤 시나리오를 받고 싸웠으면 나중에 혼자 이번엔 이런 걸 표현하려고 했지만 하다 보니까 이런 새로운 게 나왔고, 이런 건 좀 덜어야 했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가 모르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캐릭터나 영화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캐릭터를 돌아본다거나 어떤 인물인지 신경 쓰는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트리트먼트도 없었고, 이야기의 결말도 어찌될지 모른다면 일단 궁금증은 상당했겠습니다. 오늘 찍을 내용도 전혀 몰랐고, 결말은 커녕 과정도 몰랐으니까요. (웃음) 이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면서’였어요. (웃음) 그래서 너무 궁금했고 대본을 받으면 기쁘더라고요. 덕분에 매일 아침 대본을 받았을 때 연재소설 보는 것처럼 낄낄대고 그랬죠. 사실 감독님만 다 알고 가는 이야기니까요. 다만 구체적인 상황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알고 캐스팅을 미리 하셨겠어요.
줄기는 이미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운데 디테일한 가지와 잎을 붙여나가는 셈이군요.
예. 제가 볼 땐 이미 당신의 머릿속엔 다 있는 거죠. 대충 어떻게 만나고, 어떤 일이긴 한데 그에 대한 정확한 대사와 관계를 그 날 아침의 느낌으로 정하시는 거죠.
홍상수 감독과 함께 하는 세 번째 영화였는데 지난 두 번째와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없었습니까?
가장 큰 건 같은 감독님의 영화지만 내용도 모르고 했다는 게 틀린 점이죠. 아무래도 기존에 했던 영화들 가운데 <생활의 발견>정도가 두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정도의 제한된 인물과 제한된 장소의 기본 구조와 달리 이번엔 다른 부분이 많죠. 장소도 와일드하게 펼쳐져 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른 내용들이 많잖아요. 영화제 쪽 내용이나 후배들 내용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양상도 다르고. 그런 이유로 굉장히 많은 배우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도 지금까지와 많이 다른 점이었죠. 예전에도 보통 스태프가 많지 않았지만 총 12명의 스태프와 함께 하기도 했고요. 고사 때는 배우 매니저가 스태프보다도 한 3배는 많았던 거 같아요. 스태프라고 해 봤자 감독님 포함 13명이었으니까. (웃음)
제천과 제주도에서 촬영이 이뤄졌으니 마치 단란하게 MT가는 기분이었겠습니다. (웃음)
매 저녁마다 너무 이상한 거에요. 밥을 먹는데 (둘러보면서) “우리 팀 이게 다네?” 이러고. (웃음) 게다가 배우들이 내려오면 손님 접대하듯이 인사하고, 자기 분량 다 찍고 가기 전에 수고했다고 쫑파티하고, 다음 팀 오면 또 그렇게 하고, 그것도 사실 즐겁고 재미있었죠.
마치 안주인 노릇을 한 셈이네요. (웃음)
예. (웃음) 완전히 안주인처럼 ‘오셨어요, 가세요, 수고했어요, 아, 또 오셨어요’. (웃음) 예를 들면 (엄)지원이 같은 경우는 순서대로 찍다보니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곤 했거든요. 그러면, ‘또 왔니, 한번 더 해보자’ 이렇게. (웃음)
예전에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칸 영화제에 가신 적이 있죠. 이번에도 칸 영화제에 가실 예정이고요.
지난 번엔 경쟁작으로 갔지만, 이번엔 감독주간으로 간다는 점이 조금 다르긴 하죠.
마치 구경남처럼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녀와도 좋겠습니다.
구경남처럼 그러면 삶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렇게 좀 스펙터클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심심해. (웃음) 가면 뭐 뻔하죠. 스크리닝하고, 기자시사하고, 감독님이랑 같이 술 마시다 이제 돌아가야 되겠다, 그렇게 돌아오겠죠.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통해 감독 역할만 두 번 했습니다. 한번은 감독 친구였고요. 혹시 감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은 없나요?
에이, 한마디로만 대답드릴께요. 감독 아무나 하나요. (웃음)
집안 가득 햇살이 가득 찼다. 보기만 해도 따스한 광경이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빛이 들어서있다. 그 광경만으로 반 허공에 뜨는 기분이다. 예쁘게 내려앉은 빛이 곱고 화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채광 좋은 집엔 젊은 부부가 산다. 자상한 상인(김태우)과 천진난만한 모래(신민아)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둘만의 공간이다. <키친>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사연이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때로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 어떤 이들의 마음을 비추려 한다.
제목처럼 <키친>은 공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장된 명도로 내리쬐는 그 구석구석엔 인물간의 감정이 먼지처럼 켜켜이 내려앉아있다. 상인과 모래는 서로를 신뢰하며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도발할만한 사건이 생긴다. 약 기운에 취하듯 어느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외딴 남자의 스킨십에 몸을 맡겨버린 모래는 난생 처음 이상한 맛(?)을 느낀다. 따스한 햇볕에 기분이 나른해지듯 그 남자와의 망중한 같은 시간이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난다. 우연히도 한집에서 살게 된다.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그 남자 두레(주지훈)는 한식당을 차리려는 남편이 믿는 사부라 한다. 기이한 삼각관계에 놓인 세 사람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한 집을 공유하는 관계로 거듭난다.
우연과 필연의 접합으로 이뤄진 삼각관계는 그 투명한 명도만큼이나 인공적이나 설득력을 지닌다. 보다 중요한 건 우연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연의 본심이다. 순수한 캐릭터로 위장에 성공하고 있으나 관계를 흔들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내재돼 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라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좋아진 모래의 마음을 마냥 두근거리듯 바라볼 순 없다. 궁극적으로 마냥 순수한 경험담으로 보존될 수 없는 것이다. 갈등을 느끼는 주체는 모래가 아니라 두 남자다. 비밀의 유효기간이 파기되는 순간 화기애애하던 두 남자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웃음을 공유하던 공간은 침묵과 호통으로 채워진다. 애초에 소유하던 쪽과 새롭게 공유한 쪽의 감정이 점차 치열하게 맞부딪힌다. 결국 상황을 무마시키는 건 여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듭나는 쪽은 여자다. 두 남자는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소유하고 있다고,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로부터 공유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남자들은 허탈하게 주저앉는다.
<키친>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도발적 물음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맺음과 끊음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뒤늦게 이해해버린 여자는 결국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다. 그렇다고 그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은 선택의 역량에 달렸다. 결혼과 이혼을 시작과 끝의 대립적 성향으로 인식하는 풍토 안에서 <키친>은 나름 진보적인 영화다. 그 변화를 결정짓는 주체도 여자다. 소유하기 원했던 남자들은 그저 선택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사가 되지도 않는 양산가게를 경영하며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듯 살아가던 모래는 그 특별한 경험을 거쳐 홀로서기를 꿈꾸고 시도한다. 남녀의 관계보다도 그 여자의 변화가 눈에 띈다. 항상 남자의 요리를 먹던 여자가 스스로 요리를 시도하고 남자들에게 요리를 떠먹여준다.
이야기 흐름은 명료하고 딱히 막히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상황에 내재된 감정보다도 그 감정을 품은 그릇에 눈이 간다. 깔끔하고 정갈한 미장센은 안으로 삭힌 감정을 숨기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값비싼 그릇처럼 보인다. 보일 듯 말 듯 얕고 천천히 흐르는 감정선 사이로 시각적 묘미가 더욱 흥미롭게 파고 든다. 세심한 조리사의 손놀림 끝에 차려지는 빛깔 좋은 음식들의 향연은 트렌디한 재미를 더하고, 밝고 화사하면서도 뚜렷한 색감의 영상은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인물들의 감정변화가 확인되고 갈등의 양상이 감지되나 정작 그 감정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한 만화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적인 상을 통해 풍겨져 나오는 감정의 내음 역시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가 가나 마음으로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그 주변부의 다양한 정보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깊은 맛보단 인공적인 자극을 제공하는데 익숙하다. 고운 빛깔로 치장해 눈요기에 좋지만 정작 손이 가지 않는 음식과 같다. 착향료나 감미료처럼 인공적인 색과 맛이 인지된다. 너무 예뻐서 되려 맛보기 불편하다.
<키친>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영화다. 투명하고 또렷한 색감처럼 인물들도 또렷하고 투명하다. 도발적인 사연을 품고 있지만 착하기만 한 인물들은 그 사연마저 순수하게 표백시킨다. 그 덕분에 <키친>은 극히 특별한 사연으로 속박된다.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려 하지만 그 특수한 실례가 답변의 영향력도 제한한다. 너무도 투명하여 이 세상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햇살만큼이나 세 사람이 이루는 사연도 반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다. <키친>은 편향적인 답변으로 이뤄진 앙케이트다. 보편적인 수치를 얻고자 했던 물음의 가능성이 국한된다. 물론 그게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정의가 없듯 어떤 로맨스도 가능성을 의심받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의 차이다. 도발적인 질문이 품은 답안지의 가능성에 비해 편향적인 답변을 수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