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
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인 ‘팔레비 샤’왕가가 서독을 방문한다. 베를린에서 그들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발생하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반정부적 조직 ‘독일적군파(RAF: Red Army Faction)’가 창설된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리입트로이)와 그의 연인 구드룬 엔슬렉(요한나 보칼렉)을 주축으로 한 이 청년단체는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폭탄테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직의 방향성을 알린 뒤 시민들의 지지마저 얻는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지만 이듬해에 가석방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진보적 언론인 울리히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는 독일적군파를 행위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 헤롤드(브루노 간츠)는 이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그들의 심리를 추적한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이 증명하는 건 폭력의 전진이다. 이란의 전제군주를 맞이하는 서독 정부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정부에 반발한 시민의 일부는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자행한다. 대립의 형태로 맞선 신념의 구도는 점차 극단적 행위의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는 독일적군파는 점차 그 행위적 명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극단적 행위를 통해 신념을 관철하려는 바더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며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방식의 설득을 중시하는 마인호프는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며 바더와 대립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올가미에 걸려 검거되거나 이에 맞선 총격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단원이 늘어가고 조직은 점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과 테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역사의 몸통 위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자리한 독일적군파에 대한 가치평가를 걷어내고 건조하고 묵묵한 다큐적 질감의 영상을 가미하며 의문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 물론 <바더 마인호프>를 온전한 리얼리즘 필름의 시선으로 주장될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저서 ‘신화의 시간(국내 출판명, 원제 ‘The Baader Meinhof Complex’)’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기 보단 그 주변부에서 제기된 하나의 가설적 형태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을 때 보다 정당해진다. 동시에 <바더 마인호프>가 역사적 증언을 목표로 둔 영화라기 보단 그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서 논의의 진전을 꾀함으로써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작품이라 정의할 때 이런 배후에 대한 설득력이 보다 힘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자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외부자가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록에 근거를 둔 형태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건 그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증인들을 양산해낸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장을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한다는 것이 <바더 마인호프>의 궁극적인 가치다. 혁명과 테러를 오가는 역사적 정의 가운데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현상의 근본을 탐구하게 만든다. 특히 <바더 마인호프>가 그리는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이 단지 그들에게 국한된 역사적 장면이라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더욱 중요하다. 혁명이냐, 테러냐,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쉽게 논하기 어려운 건 그 시대가 머금은 광기가 선의를 악의로 잠식하고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진전시키는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이 폭력의 또 다른 주체가 되길 결심하고 죽음과 파괴를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 커다란 대의의 전진이 아닌 세계의 또 다른 몰락이 목격된다. 양극단으로 몰린 세계의 두 축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순간 또 한번 세상은 어지럽게 들뜬다.
시민들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자행하는 반국가적 테러를 묘사하는 영화적 시선엔 당위를 따져 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관객들은 혁명의 기운에 도취되다가도 테러의 현장 가운데서 깨어나야 한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물음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만 영화는 그저 혼란의 도가니로 관객을 끌어들이고 방치한 채 무심하게 서사를 전진시킬 뿐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 역사의 가치를 설득하거나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자란 괴물의 형태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인간들의 대립은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 대상의 파괴로 변질되어 나간다. 본질은 훼손된 채 극악하게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만약 <바더 마인호프>의 곳곳에서 기시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건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가치관의 명분과 동떨어지게 발생하곤 하는 극단적 성질의 폭력은 좌우의 개념으로 편을 가른 이념의 극단적 대치 상황이 예감되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쉽게 연결될만한 풍경이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권한이다. 무엇이 괴물을 잉태했나. <바더 마인호프>가 발생시킬 궁극적 가치는 그 물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독일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하게도 그 현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미 우리 주변에 잉태되고 자라나기 시작한 괴물의 흔적들을 인지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오후 1시 23분에 뉴욕 펠햄 역에서 출발해서 ‘펠햄123(one-two-three)’이라 불리는 지하철이 갑자기 구간 가운데서 정차하더니 차체마저 분리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하철 배차원 가버(덴젤 워싱턴)는 접속을 시도해보지만 좀처럼 응답이 없다가 곧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원미상의 목소리는 지하철 납치를 알리며 인질과 거액의 교환을 요구한다. 협상이 시작된다. <서브웨이 하이재킹: 펠햄 123>(이하, <펠햄123>)은 이와 같이 지하철 납치를 소재로 한 범죄극이다. 하지만 하이재킹 액션물의 이미지를 기대한다면 배반감을 느낄 가능성이 농후하다. <펠햄123>은 뉴욕에서 벌어지는 납치범죄극이며 이는 명백하게 ‘9.11’을 연상시킨다. 사실 문제의 그날 이후 할리우드의 멘탈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포스트 9.11’ 작품들은 벌써부터 낡았다고 인식될 만큼 지겹게 회자되고, 해석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펠햄123>의 포스트 9.11 탑승을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테러에 대한 공적 공포보다도 테러리즘을 대처하는 뉴욕 시민들의 심리적 이해와 행정적 대응의 현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을 납치한 라이더(존 트라볼타)는 국가를 상대로 테러의 대가를 요구하면서도 민간인을 협상의 중계자로 지정한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단지 공적인 정치로 해결되기 전에 개인의 공포를 거쳐 환기된다는 직설적인 심리가 더욱 적나라하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협상과 연동되는 위기이기 전에 인간적 생존과 직결되는 개인과 개인의 알레고리 안에 놓여있음에 접근한다. 거대한 재난을 공유했던 뉴요커, 더 넓게는 미국인들이 관계를 인식하는 심리적 변화를 예상케 한다. 개인의 희생과 양심적 고백을 요구하는 범인의 태도에 몸소 응답함으로써 무차별적인 희생을 방지하려는 시민의 태도를 묘사한다는 점이나 뉴욕 시민의 안위를 정치적 훼손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반응하는 공적 대응도 흥미롭다. 동시에 <펠햄 123>은 캐릭터의 심리적 대립구도를 통해 밀고 나가는 스토리의 결과가 궁금해지는 영화다. 토니 스콧의 오랜 동반자인 덴젤 워싱턴은 언제나 그렇듯 빼어난 연기를 보이고 존 트라볼타 역시 매력적인 악당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선사한다. 특유의 핸드헬드와 컷 편집을 동원하는 토니 스콧의 현란한 이미지는 <펠햄123>에서도 눈길을 끄는데 유효하지만 때때로 스타일리쉬의 강박을 인식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과정에서 증폭되는 흥미에 비해 허탈함이 선명한 결말은 분명 가장 큰 아쉬움이라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