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제프 브리지스는 캐릭터를 갈아입으며 배우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분명 실력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인정 따위는 그저 그럴 수밖에.
저명한 비평가 폴린 카엘은 <위대한 레보스키>(1998)가 개봉할 당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를 이같이 논했다.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그에 앞서 1992년, 뉴욕 타임즈는 <어게인>의 리뷰에서 브리지스를 "그의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저평가된 훌륭한 배우”라고 평했다. 후에 브리지스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저평가됐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변화에 순응하는 것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하나같이 제프 브리지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목된 건 벌써 다섯 번째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데뷔작 <마지막 영화관>(1971)을 통해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브리지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대도적>(1974)으로 또 한 번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후로 <스타맨>(1984)과 <컨텐더>(2000)를 통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크레이지 하트>(2009)를 통해 수상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트로피를 움켜쥔 브리지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받은 이 상이훌륭한영화한편을다시주목받게만들수있다는점이다.”
1949년 12월 4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제프 브리지스는 태생부터 연기자의 운명이었다. 아버지 로이드 브리지스와 어머니 도로시 브리지스 모두 배우였다. 특히 TV를 통해 활발히 활동한 로이드는 CBS에서 <더 로이드 브리지스 쇼>라는 롤타이틀 앤솔로지 쇼를 진행할 만큼 유명한 인사였다. 브리지스는 10살이 되던 해, 역시나 배우로서 활동하는 자신의 형 보 브리지스와 함께 이 쇼에 출연했다. 사실 브리지스의 첫 번째 스크린에 데뷔한 것은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이뤄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출연한 <The Company She Keeps>(1951)에서 제인 그리어의 팔에 안긴 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자로서 진로는 내가 앙앙거리던 생후 6개월에 시작됐다. 그러니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지. 요컨대, 족벌주의의 산물이랄까.”
사실 브리지스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각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라스트아메리칸히어로>(1973)를 끝낸 후였을 거다.” 당시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의 촬영을 마친 브리지스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아이스맨 코메스>(1973)에 그를 캐스팅하기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리 마빈, 프레드릭 마치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거절했다. 그러자 2시간 후,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를 감독한 라몽 존슨이 찾아와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그러고도 배우인가? 진정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화계의 이런 거물들과 일할 기회를 차버릴 수 있지?” 결국 브리지스는 <아이스맨 코메스>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를 직업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는 브리지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작업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이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줄 만큼.”
사실 제프 브리지스는 배우보단 뮤지션을 꿈꿨다. “나는 스스로 배우로서 활동하길 진지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열 편의 영화를 해버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카데미에 두 번째 노미네이트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게 될 거야.’” 일찍이 <사랑의 행로>(1989)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던 브리지스는 <컨텐더>(2000)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킴 칸스와 함께 녹음한 쟈니 캐쉬의 명곡 ‘Ring of Fire’이 오프닝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것이다. 같은 해 제프 브리지스는 유명한 아티스트 마이클 맥도날드와 크리스 페노니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램프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앨범, <Be Here Soon>을 발매했다. “대단한 작곡가이자 내 오랜 친구인 존 굿윈이 써준 세 곡이 앨범이 수록됐다. 우린 함께 자랐지. 심지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내 백업 싱어였다고!”
<크레이지 하트>에서 퇴물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를 연기한 브리지스의 선택도 그의 음악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음악을 찾고자 했다.” 곧 브리지스는 대안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크레이지 하트>는 이미 30년 전부터 준비된 영화였다. <크레이지 하트>에서 음악을 담당한 티 본 버넷과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1980)에 출연할 당시, 함께 연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티 본을 소개시켜줬고,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 중 어디선가 티 본이 보였고, 그도 나에게 대본에 관해 물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생애를 다룬 <앙코르>(2005)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티 본은 <크레이지 하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브리지스는 티 본을 찾아가 물었다. “어때? 관심 있어?”티 본이 답했다. “그래, 만약 네가 하겠다면 나도 하지.” 티 본의 참여로 <크레이지 하트>는 비로소 심장을 얻었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티 본의 가세로 모든 것이 변했다.”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신경 쓴 건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배드의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제프 브리지스는 오랫동안 배우로서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셀레브리티로서 가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정직한 삶은 배우들의 방탕한 삶을 즐기는 대중에게 심심한 사안이었다. 덕분에 제프 브리지스는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각인될 수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너무 깊게 몰두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고수해왔고 큰 성공을 거뒀다.” 브리지스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통해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항상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것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브리지스가 애초 배우에 전념하지 못한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흥미에 흥미가 많았다. 음악과 미술, 그 외에도 내가 진짜 원하던 다른 것들까지.” <스타맨>에서 함께 출연한 카렌 앨렌의 제안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브리지스는 2003년 <Pictures: Photographs by Jeff Bridges>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다. 브리지스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그린 삽화와 낙서로 가득하다.
현재 브리지스는 존 웨인의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에 참여를 결정했고,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SF영화 <트론>(1982)의 리메이크에 참여한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덕분에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배우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상식 트로피를 얻는 것 역시 그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목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브리지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브리지스는 자신이 터득한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 부치지 말아라. 거창한 인생의 과제를 정하지도 마라.” 이보다 확실한 경험담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