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타려던 회사 직원들이 최(최민식)를 보더니 멈칫하고 돌아선다. 최는 막 책상을 비우고 회사를 떠나는 참이다. 처량한 실직자의 몰골로 돌아온 집에서도 그는 혼자인 기러기 아빠다. 최가 동생의 공장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티벳의 이주노동자 도르지의 유골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하게 된 건 그런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외로움조차 방치해버린 적막한 삶에 있어서 현실은 어떤 애착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그의 히말라야행은 일종의 현실도피에 가깝다. 다만 결코 한적한 휴양이 되지 못하리란 예감을 짊어지고 오르는 고행의 도피가 될 것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도입부를 비롯한 초반부 서울의 몇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분은 험준한 히말라야의 경관으로 채워지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하, <히말라야>)은 극영화적인 연출이라기 보단 다큐멘터리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고 이해될만한 작품이다. 고산지대의 희박한 공기가 감지되듯 무겁게 옮겨지는 최의 산행과 이를 무심히 비추는 카메라의 롱테이크는 인물보다도 인물이 한 점처럼 끼어든 장관의 풍경에 관심이 많다. 시간이 멈춘 듯 세월이 보존된 자연적 풍광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 바람뿐이다. 그 바람은 마치 인간의 업을 실어 나르듯 부단히 오가며 히말라야로 향하는 카트만두를 오르는 최에게 고행의 무게를 얹어놓듯 시종일관 거세다. 바람에 흔들리는 카메라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내 고산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의 모습을 지켜보는 광경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제적이다. 실제로 최민식은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촬영을 강행했다고 한다.
사실 <히말라야>에서 최민식의 모습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라기 보단 카메라 너머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최라는 이름도 사실상 최민식의 성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히말라야 고지대에 놓인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놓인 최민식은 마치 자연 가운데 놓인 인간의 한 점처럼 이질적이며 그만큼 그 환경에서 동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탈문명의 인간이 친자연적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깨달아가는 성찰이란 지극히 뻔한 것임에도 <히말라야>가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지극히 뻔할 수 없는 감정을 도모한다. 그건 <히말라야>가 연출된 양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과 다른 비연출적 양식의 자연스러움을 상당 부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영화인 까닭이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비전문연기자들의 모습은 자연주의적인 풍광을 전시하는 카메라와 함께 <히말라야>가 극영화라기보단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에 따르고 있다는 증명을 더한다. <히말라야>는 문명에서 탈출한 현대도시인의 황폐해진 정서가 자연주의적 풍경과 인간들 사이에서 평온한 치유를 얻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살핀다. 문명에서 달아나듯 히말라야로 온 최가 통과의례를 겪듯 고산병을 앓고 이내 도르지의 가족으로부터 병간호를 받은 뒤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어울린 채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그 자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게 만든다. 그 자연주의적 풍경을 목도할 도시의 누군가는 분명 그 광경에 매혹되거나 자신의 현실을 작게나마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결코 현실을 망각하거나 온전히 그로부터 탈피하기란 어렵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결과에 있다. 도르지의 유골을 은폐했던 최의 의도가 발각되는 순간, 최의 여정도 함께 끝이 난다. 선의에서 비롯된 의도라 해도 결과적으로 최가 얻은 성찰은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착취적 형태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결론의 형태까지도 평온을 유지하지만 <히말라야>는 모든 과정을 지나쳐 결말에 다다랐을 때 묵묵한 카메라의 시선이 시니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상 그 중립적인 카메라의 태도는 단지 자연을 비추기 위한 롱테이크의 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을 무감정의 시선으로 장악하고 있는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방문자는 은폐하다 이내 망각해버린 제 목적을 뒤늦게 이루고, 떠밀리듯 황급히 자르코트를 떠나간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역시나 비판적인 태도와 무관하다. 지친 듯 무기력한 모습의 최가 고산병으로 쓰러져 자르코트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는 스스로 걸어 내려가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방인으로서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제 세계로 나아간다. 최는 평온하고 자연주의적인 타인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대자연의 장관 앞에서 황폐해진 마음을 정화시킨 최는 다시 한번 도시에서 제가 얻을 억겁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희망이다. 제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서로 다른 것이 다시 제 모습에 걸맞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순리에 가까운 행위다. 그것이 무기력이든, 의지든, 산을 내려가 다시 살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을 결국 희망이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묵묵히 제 자리에 선 히말라야의 풍경에 황폐한 마음의 먼지가 걷힌다. <히말라야>는 현대인을 위한 치유의 풍경을 선사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온전히 부지하게 만든다.
이건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엄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들이 위풍당당하게 한국에 체류하는 티벳인을 폭행하는 장면이다.이들은 그와 함께 미국, 캐나다인 6명을 오성홍기를 앞세워 구타했다. 27일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대낮에, 우리는 단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깡패짓을 일삼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구타당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봐야했다.
개같은 짱개들, 이라고 분노를 피워올리기 전에 당신은 한가지 생각을 먼저 품어야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지는 도로변에는 8000여명의 경찰 특공대가 파견되어있었다. 그들은 '성화봉송을 저지하는 시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 성화봉송자 1인의 주변을 겹겹히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는 무리들을 응징하는 중국인들의 무법천지를 국가는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도 경찰은 투입됐다. 약 10여명의 경찰들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해전술에 맞서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열악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10여 명 남짓의 경찰과, 8000여명의 경찰특공대라는 어마어마한 부등호를 그리게 만든 동시간대의 다른 상황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의를 부른다.
중국의 성화봉송을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8천명의 경찰이 배치된 상황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반대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폭력의 공포를 온몸으로 대면했다. 국가가 보호한 건 국민이 아니라 성화였다. 공권력은 중국에서 벌어질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으되, 그 반대편에서 중국인들의 알력적 폭력에 마치 의도적인양 무관심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경제적인 관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화봉송을 위해 8000여명의 특수경찰을 투입한 건 중국과의 이해관계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완연한 의지에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아니다. 다만 경제적 관념을 떠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마땅할 국가적 존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실용주의가 누구를 위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유력하게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될 공권력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은 없단 말인가? 동시에 자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한 외국인의 무분별한 난동을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지 못하거나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난립하는 중국인들을 두 눈 멀겋게 뜨고 바라봐야했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을 표방하는 건 실권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에게 중요한 건 성화봉송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받고 살 권리가 있는 국민들은 시청 앞 대낮에서 벌어진 공포의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지독한 민족주의를 구호로서, 그리고 폭력적 행위로서 도출하는 중국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양식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건, 그것을 방관하는 대한민국 실권자들의 몰염치한 사대주의적 근성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더더욱 침통할 수 밖에 없다. 제 국민의 안위를 버리고 밖으로 나갈 이익에 눈먼 정부의 방침은 결국 집을 돌보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대한 불신감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믿고 있는 힘이라면 그만큼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