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풀 작가의 <26년>은 사연이 많은 소재를 장르적인 그릇에 담아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호흡은 짧게 가져가야 하니 각색은 불가피하고, 실사화라는 표현적인 제한도 존재한다. 특별한 재해석 능력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원작의 의미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본전 찾기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26년>은 그런 제약들을 뛰어넘은 영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압축된 초반 서사는 성기고, 변주된 일부 캐릭터는 비효율적인 경우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감정이 차고 넘친다. 어떤 식으로든 1980년 5월 18일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자유롭기 힘든 탓이다.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보기 힘들다. 보는 내내 울화가 치민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진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 놈의 현실이 문제다. 영화 하나가 짊어진 사연이 뭐 이리 무겁고 언제까지 애달파야 하냔 말이냐.
살인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지방 형사들의 몽타주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극 초반부터 정체가 개방된 범인의 당돌한 심리와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 구도가 <추격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아버지는 직업윤리에 반하면서까지 제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이입한 <세븐 데이즈>. 그리고 그 끝에선 <올드보이>를 본뜬 듯한 죄와 벌에 대한 패러독스가 걸려든다. <용서는 없다>는 마치 지금까지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적절한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의 레퍼런스를 섞어 넣고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 같은 형태를 띤 영화다.
금강 하구둑에서 토막 난 시체가 하나 발견된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는 결정적 단서를 잡아내고 손쉽게 용의자 이성호(류승범)를 검거한다. 경찰의 심문 중, 범행을 부인하던 이성호는 신참 여형사 민서영(한혜진)의 추궁에 손쉽게 자백을 한다. 하지만 이성호의 계략에 의해 강민호가 불가피하게 사건에 개입하고 대학 시절 은사로서 강민호를 존경하던 민서영은 그의 심상찮은 태도를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용서는 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심리다. 이성호는 <용서는 없다>의 논리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조종자다. 강민호는 이성호의 계략대로 놀아나는 말이며, 민서영을 비롯해 강민호의 주변인물은 강민호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긴장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조율하는 이의 절대적 역량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시할 것인가가 <용서는 없다>의 키인 셈. 단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없다>는 그 역할의 어필에 실패한 영화다.
<용서는 없다>의 이성호는 자신의 명확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강민호를 움직이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오랜 목적을 완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지만 사실상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에서 그 변수란 본래 그 게임의 설계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가 그려나가는 서사의 논리는 지나치게 우연을 간과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나쁘다. 덕분에 결말부에서 주어져야 할 충격이 얕다. 사실상 <용서는 없다>는 결말을 위해 모든 과정이 할애되는 영화다. 그 모든 지난한 여정이란 결말부의 정점에 서기 위한 오르막길인 셈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빈틈이 많은 과정은 동력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며 결말의 정점 역시 높이가 모자라다. 논리적 동원이 빈약해지는 가운데 감정적 이입만 과도해진다.
마치 <올드보이>의 그것과 비슷한 파국을 그리는 <용서는 없다>는 단적으로 자해를 무릅쓴 어느 남자의 복수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 복수의 정당함이란 굳이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어느 개인의 복수란 그 행위의 윤리적 정당함을 따져 물을 수 없게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인정될만한 사안이다. 다만 그것이 공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로서 대중에게 언급될 때는 사안이 다르다. 누군가의 개인적 범위의 사연을 소비하기 위해선 충분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얹어야 한다. <용서는 없다>는 사연의 틈새를 메우지 못하고 자꾸 옆길을 뚫어가려는 작품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형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범인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허세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배우의 연기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제 기능성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시에 뻣뻣한 대사에 갇힌 이성호를 연기하는 류승범은 <용서는 없다>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다.
4대강 개발이라는 현안을 차용한 건 맥거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해도 눈가림의 구실은 한다. 동시에 부검 과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시체의 형태를 디테일하게 살린 더미는 눈길을 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현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말에 다다르면 그 세심한 부검과정의 묘사가, 체모마저 디테일한 더미의 전시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라는 해답이 제시된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딱히 비범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화자가 끝까지 비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지겨운 일이다. <용서는 없다>가 그런 꼴이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사연은 갈피를 잃고 이성마저 잃은 뒤, 이야기를 갈무리할 타이밍마저 제대로 잡지 못하다 결국 허세로 자폭한다. 정말이지 용서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