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이미 영화화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 ‘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 ‘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가면을 뒤집어 쓰고 독자적으로 제작한 제복을 걸친 히어로들이 밤거리를 누빈다. 아노미 상태의 도시와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자발적 본분 아래 세상을 감시하고 범죄를 다스리고 종래엔 조직을 정비해 힘을 결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개인들의 이념과 성격 차이로 간격이 벌어지거나 충돌이 발생하던 중 정부의 코스튬 히어로 활동 금지를 담은 ‘킨(Keene)’ 법령이 제정되고 히어로들의 활동권은 영구히 박탈당한다. 그들은 더 이상 강대한 미국의 새로운 신화를 자처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선전도구이거나 이를 거부한 채 추방당하거나 쫓기는 불순한 음해세력에 불과하다. 가면을 벗은 은퇴한 히어로가 되거나 정책에 대항해 아나키스트처럼 살아간다. 체제적 감시와 음모, 그리고 대중적 멸시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영웅으로 살아가던 과거를 그리거나 멸시하며 살아간다.
잭 스나이더는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도사린 우중충한 음모론의 시대를 그린 <왓치맨>을 묵시록의 이미지로 승화시켰다.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히어로들의 번뇌와 고민이 강렬하게 투영된 원색의 사각 프레임을 음울하고도 우아한 그로테스크의 스타일리쉬로 변주한다. 거친 질감으로 구현된 원색 바탕의 이미지와 방대한 대사량과 내레이션의 여백까지 삽입된 직사각형 틀의 일정한 간격은 프레임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대체되고 온전히 구현된다. <왓치맨>은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선택했다. 원작을 미리 접한 이라면 마치 코믹스의 움직이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강한 원색 톤으로 이뤄진 원작의 날카로운 색감과 달리 영화는 회화적인 색감과 대비적인 음영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물론 세세한 구석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원작의 내러티브 가운데 일부는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제외됐다. 스토리텔링의 큰 줄기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선별된 삭제 범위는 현명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160여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은 원작의 너비가 그만큼 방대함을 상대적으로 입증한다.
<300>의 비쥬얼을 염두에 두는 관객이라면 <왓치맨>에서도 그 기대감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다. 물론 <왓치맨>과 <300>의 비주얼을 영화적 결과값으로 설명하는 건 원작의 차이를 간과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두 작품의 영화적 결과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이다. 잿빛 필터를 씌워놓은 듯 톤 다운된 채도에 극대화된 명암 속에서 혈기왕성한 전투씬 사이마다 고속촬영을 통해 우아한 움직임을 새겨 넣던 <300>은 분명 스타일리쉬의 한 정점을 찍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팽창된 근육질 사내들의 육체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300>의 직선적인 세계관과 달리 <왓치맨>은 다양한 캐릭터들간의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의 맥락들이 제각각 어지럽게 보존된 세계다. 정신분열적인 산만함이 난해함을 부르지만 심오한 상징과 은유의 체계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성이 각기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은 복근 하나로 팀워크를 과시하던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음영을 강조한 듯한 컬러는 도시의 비열한 정서를 이미지로 각인시키고 영화의 무게감을 한층 더한다. <300>과 마찬가지로 우아하면서도 과감하게 묘사되는 이미지즘의 향연은 <왓치맨>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배트맨과 유사한 슈트를 입고 비행선을 조종하는 나이트 아울(패트릭 윌슨)을 비롯해 신적인 능력을 지닌 푸른 사내 닥터 맨하튼(빌리 크루덥), 끊임없이 변하는 데칼코마니 형상의 복면을 음침하게 뒤집어쓴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날렵한 액션을 구사하는 여성 히어로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 뛰어난 지력과 속을 알 수 없는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불한당 마초 히어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까지, 제 각각의 캐릭터들은 모든 슈퍼 히어로의 판본을 되새김질하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한다. <왓치맨>은 그 다양한 캐릭터의 사연이 담긴 원작의 스토리를 간과하는 바없이 스크린에 전시하고 나열해나간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적 표본의 한 전형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왓치맨>은 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탁월하게 이양했다. 원작의 열렬한 팬이라면 분명 이 작품에 열광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유명한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 <왓치맨>은 덕분에 가면 너머의 캐릭터들의 익명성을 객석까지 공고히 다지는 인상이다. 그 이전에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이루는 캐스팅이 실로 성공적이다.
다만 그 흔한 히어로물들을 상기하고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왓치맨>은 지독하게 무겁고 엄숙한 장례미사나 다름없을 가능성이 크다. <왓치맨>은 광활하고 방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히어로 무비에 대한 관성적인 기대감을 품고 <왓치맨>을 본다면 자신의 기대와 무관한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원작에 숨어있는 시대적 메타포를 향유할 수 없는 관객에게 <왓치맨>은 그저 끔찍하게 긴 제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작품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자신의 의지에 걸맞은 성취를 이뤘다. <왓치맨>은 분명 난해하고 심오한 원작 그래픽 노블의 새로운 전시관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한다. 결말부의 미세한 변주 역시 영화적인 설정으로서 좋은 선택이었다 평할만하다. 영화적인 재해석을 포기했다기 보단 좀처럼 재해석이 불가능한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곁가지를 쳐내고 주요한 설정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시대적 기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디테일의 수선을 마쳤다.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을 선보이진 못했다 해도 원작의 명성을 공고히 다질만한 스크린작은 하나의 명예에 속한다. 원작의 팬이라면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또한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읽고 싶어질 관객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후자보단 전자의 쪽이 영화와 원작을 섭렵하는데 있어 좀 더 우월한 감상의 위치를 선점할 가능성이 생긴다. 원작보단 영화가 좀 더 친절한 편에 속하는 까닭이다.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자가 아니다. 신이라 불려도 될만한 닥터 맨하튼조차도 실험적 실수에서 비롯된 후천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기술과 자본의 힘을 빌린 메카닉으로 무장하거나 예기치 않게 돌연변이가 된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독한 신념을 품고 신체를 단련하거나 이상을 고취시키는 것뿐이다. 닥터 맨하튼을 제외한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련된 사람들일 뿐이다. 실제로 앨런 무어의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는 히어로 코믹스의 영향력에서 코스튬 히어로가 등장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왓치맨>은 단지 초인들의 활약과 특별한 고독을 묘사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를 은유하고 사회를 관찰하며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 특수한 가면과 의상으로 정체를 가린 히어로들은 제각각 모순된 사회를 바라보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주체가 된다. 결국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한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필요악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거대한 선을 구축하거나, 혹은 이에 동조하거나 그저 무기력해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고 선택한다. 그들의 코스튬은 비범한 특수성을 위시하는 이미지라기보단 내외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처참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결말부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구조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누가 왓치맨을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Watchman?)’라는 질문은 단순히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 갇힌 고민만은 아니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은 모든 작은 것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움직임을 끊임없이 주시하지 않을 때 세상은 때때로 위태로워진다. <왓치맨>은 그 심오한 질문을 내던지기 위한 새로운 그릇이다. 또한 <왓치맨>은 익숙한 대답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영웅을 악당으로 변모시키는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등장했던 그 시기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를 넘어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이 도래했다. 슈퍼 히어로 코믹스를 한 단계 진일보 시켰던 1980년대의 변혁을 상기시키듯 21세기 다크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영웅을 악당으로 변질시키는 건 단지 영화 속의 시대상에 불과한가? <다크 나이트>와 <왓치맨>을 보게 될 21세기 관객들은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세기의 그래픽 노블들은 왜 21세기의 스타일을 입고 다시 구현되는가. 가상의 세계를 수놓은 화려한 비주얼 너머로 도사린 의미심장한 물음엔 어쩌면 우리가 얻어야 할 어떤 조언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왓치맨>의 원작에서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모든 건 네 손에 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