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걷는 남자>는 말 그대로 하늘을
걸었던 남자 펠리페 페팃에 관한 영화다. 그는 1974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즉 쌍둥이 빌딩이라 불리던 그 고층건물 두 동의 110층 옥상에 나란히 와이어를
매달아 그 위를 걸었다. 이는 2008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에서 영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영화를 나란히
감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맨 온 와이어>는 <하늘을 걷는 남자>가 얼마나 사실적인
근거를 바탕에 두고 영화화된 작품인가를 증명하는 기록적 그림자에 가깝다. 고로 두 작품을 교차해 볼 수 있다면
상당히 입체적인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맨 온 와이어>는 <하늘을 걷는 남자>가 그 대단한 경험을
기록한 사실에 기반한 영화라는 육체적 증거가 될 것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맨 온 와이어>가 기록하지 못한 감각을
객석에 전이시키는 영혼적 증거가 될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다른 것을 느낄 것이고 궁극적으론 깊고
너른 감흥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영화화 계획이 발표됐을 때, 3D 입체 영상의 장인인 로버트 저메키스가 이 영화에 혹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10층 높이의 빌딩 꼭대기에 설치한 와이어 위에 선 남자의 주변부를 채우는
뉴욕시의 풍경만큼이나 광대한 원근감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늘을 걷는 남자>는 단순히 3D 입체 영상을 위시한
볼거리에 국한된 영화가 아니다.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안전한 경계를 무마시켜 버리는
체험으로 수렴시키기 위한 마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이길 넘어 기록을 읽던 관객을
기록의 현장으로 세워버리고자 하는 체험으로서의 영화에 가깝다. 와이어에 선 필리페 페팃이 줄에 서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었던 그 심정에 포개질 순 없겠지만 그 줄에 선듯한 기분을 공유할 수 밖에 없는 광대한 숏 앞에서 경건한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각적 스릴을 넘어선 육감적인 떨림.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겪는가. 무엇을 체험하는가.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영화의 영혼을 느낀다.
<하늘을 걷는 남자>에선 그런 영혼이 느껴진다. 뉴욕에서 필리페 페팃의 곡예를 본 사람들이 느꼈을 기적적인 감동. 영혼을 지닌 영화는 그런
감동을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나는 남자>는 단순히 볼거리로서의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단순히 뉴욕 세계무역센터 꼭대기를 와이어로
건너는 남자의 이미지만으로 언급될 만한 작품도 아니다. 어떤 영화는 남다른 모험담을 묘사하며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를 논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모험 아래 놓인 모두를 모험하지 않는 인물로 규정하기도
한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결국 필리페 페팃의 도전기를
다루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가 본받을만한 어떤 경지처럼 떠받들지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행한 그 모험이 대다수의
사람에 게 어떤 감동과 흥분을 줬는지 표정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란 것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대해서 역설한다. 우린 대부분 영화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없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래서 우린 영화를 본다. 다행히도 영화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서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영화도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겐 저마다를 위한 영화가 필요할 뿐이다. 고로 영화는
존재한다. 고로 우린 영화를 본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의 존재를 되묻고, 되짚게 만드는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그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게 만든다는 것이기도 하다.
필리페 페팃은 자신의 행위가 쿠데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조력자가
되길 자처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기꺼이 그 흥분에 동참한다. 그 시대는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광기가 절정에서
내려오는 시대였고, 히피들의 전성기가 지났지만 반체제적인 자유와 평화의 여운이 마지막 그림자를 드리우던 시대였다.
어떤 의미로든 무언가 한 시대가 지나가는 징후가 나타나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끝에서
뉴욕 한복판에 110층 높이의 세계무역센터가 건설됐다. 하나도 아닌
둘 씩이나.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온 필리페 페팃에게 말한다. "다들 저 타워가 마음에 든대. 네가 저 타워에 숨을 불어넣었어." 나는 문득 김춘수의 시 <꽃>이 생각났다.
펠리페 페팃은 완공 직전의 세계무역센터에서 하늘을 걸었고, 이는 결국 이 빌딩을
물리적 랜드마크 이상의 영혼적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이 됐다. 그리고 다시 그 형체를 스크린에 소환할
수 있는 사연이 됐다. 지금은 사라진 그 두 빌딩이 나란히 선 풍경을 스크린에서 목도하는 건 결국 사라진
이름을 다시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결국 불리어지지 않더라고 이름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일 것이다.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마찬가지로 세계무역센터를 마주한 채 엔딩크레딧을 올리는 스필버그의
<뮌헨>과 유사한 여운이 남는 것도 그래서다. 영화를 통해 가능한 마법이란 이런 것이기도 하다. 사라진 시대의 공기 속에서 호흡하고 잊혀진
것을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는 소환술.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그럴 수 있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바로 그런 영화다. 하늘을 걷는 남자와 함께 그 시대를 걷고 호흡할 수 있는,
마술적 체험의 영화. 마음이 벅차 올랐다.
<검은 사제들>을 보고 나서 설레발을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지쟈스 크라이스트. 어쨌든 본격 설레발 시작.
<검은 사제들>은 전율이란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체험시킨다. 사실 한국에서 이렇게 우아하고 강렬한 게다가 한국적인 엑소시즘 영화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사제들>은 국내 장르물의 새로운 한 뼘을 정복한, 오롯이 홀로 선 수작이다. 무엇보다도 엑소시즘을 기반에 둔 오컬트 호러를 국내산 로컬 엑소시즘으로 건져낸 느낌인데 결과적으로 월척이다. 웹툰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장르적 느낌을 실사로서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 최후반부에 판을 살짝 키운다는 느낌은 있지만 딱히 거부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수입산 장르 코스프레물이 아니라 국내산 배양에 성공한 느낌.
무엇보다도 장르물에 성장드라마의 서브 플롯을 잘 녹였고, 캐릭터물로서도 상당한 매력이 있다. 전반적인 연출 리듬도 상당히 좋다. 특히 본격적인 엑소시즘 초반 신은 정말 매혹적이었달까. 빠르게 컷을 편집해 이어붙이면서도 슬로 템포로 카메라 앵글을 틀면서 줌인아웃을 거듭하는데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도 차분하고 세련된 리듬감으로 평온한 몰입감을 보장하는 느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신만 떼서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음. 각본과 연출이 모두 괜찮은 인상인데 이 모든 것이 장재현이라는 신예 감독의 물건이라니, 이게 온전히 그의 역량을 뿌리 삼아 나온 결과물이라면 정말 그 이후를 닥치고 기대하겠다.
캐릭터 연출과 연기가 상당히 좋다. <검은 사제들>을 집에 빗대면 김윤석은 기본적인 골조의 틀을 잡아주고 강동원은 그 구조 안에 탁월한 풍경을 마련해주는 인상. 그리고 영신 역의 박소담은 그 풍경 안에 자리한 강렬한 소품. 사실상 캐릭터의 세기만으로 배우의 역량이 과대평가될 수 있는 배역인데 그 한계를 뚫고 스크린에 이름 석자를 박는 느낌. 그야말로 발견. 단언컨대 그녀는 새로운 바람이 될 것이다.
이미 알았지만 <검은 사제들>을 보고 백퍼 확신. 강동원은 그냥 그 자체로 장르다. 비현실, 초현실, 초자연은 다 강동원이란 이름 석자 앞에서 긍휼해진다. 강동원이란 필터를 거치면 판타지가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걸러짐. 지쟈스 크라이스트 강동원느님. 앞으로 강동원의 모에가 되겠다.
도전자라기 보단 방랑자에 가깝다. 맞선다기 보단 궁금해서, 김지운은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정복자가 아니라 개척자로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그 여정을 즐긴다.
블랙코미디, 호러, 필름
누아르, 웨스턴, 싸이코 스릴러 등, 영화감독 김지운은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듯 매 작품마다 새로운 장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결국 어떤 장르에든 김지운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달콤한 인생>은 내면으로 침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외향적인 영화가 떠올라서<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호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시각적인 스펙터클은 좋았지만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밀도가 빽빽한<악마를 보았다>를 쥐어짜듯이 만들게 됐죠.그러고 나니 괴롭고 우울한
느낌이 강해져서B급 코드의 유머를 펼칠 수 있는<라스트 스탠드>까지 닿게 된 것 같습니다.항상 지금 내가 느끼는 모순이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거나 이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들이 다음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아요.”
김지운 감독은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5주년을 기념하는 <어린왕자> 가족무용극에서 구성대본과 영상연출을 담당했다. 영화감독이 무용극의 연출에 참여한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다만
그가 김지운 감독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계에서 이름 석자만으로 이목을
끌 수 있는 감독은 많지 않다. 김지운은 바로 그런 감독이다. 그런
그가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 대신 무대에서 펼쳐지는 무용극에 참여한다니 필연적으로 그 계기가 궁금했다. “2005년도에
안애순 예술감독의 무용극 <세븐 플러스 1: 복수는
가슴 아픈 것>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
에피소드의 대본을 썼고, 영화에서 사용하는 특수효과를 무대 위에 구현했죠. 그야말로 잠깐 도와드린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게 됐죠. 그러다
본격적인 연출 제안을 받게 돼서 전체 구성을 잡고 대본을 쓰게 됐는데 지난 2월쯤 올해 미국에서 진행하려
했던 작품의 스케줄이 꼬이면서 동시에 국내에서 100억대의 장편영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린왕자>
공연일자와 그 장편영화 크랭크인 날짜가 겹치면서 총연출은 포기하고 대본 구성과 영상 연출을 맡게 됐습니다.”
사실 김지운이 지금과 같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무대 덕분이다.
그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더 잘 알고자 드라마의 기본부터 다지고 싶어서’ 연극과에 들어갔다. 유년시절부터
워낙 영화를 좋아했던 그에게 연극은 영화로 닿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연극배우의 길로 나아간 친누나 덕분에
연극과 가까워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누나의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있었고
연극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당시엔 공연 자체보단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연극인들의 삶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그만큼 무대에 그렇게 무지한 편은 아니었단 말이죠.”
그렇다면 그에게 무대 연극이란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제한적인
공간에 수많은 시공을 담아내야 하면서도 어떤 것은 생략하고, 어떤 것은 함축하고, 어떤 건 일부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전체를 이미지로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무대 미학에 어렴풋이 열광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요. 본래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의 물질적인 보다 저런 제한적 환경을 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나가고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는 무대미학이 훨씬 예술에 가깝다고 느꼈던 적도 있고요.” 이런
그에게 무용극은 또 어떤 흥미로 다가왔을까? “연극을 통해 표현성의 발생과 기원을 찾게 됐는데 무용에선
몸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나 기원적인 몸짓, 제의적인 동작이 춤의 형태로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항상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써왔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극 대본을 쓰는 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업이었다. “원작을 다시 읽고 새롭게 느껴지거나
말을 건다고 느껴지는 부분 그리고 우리가 ‘어린왕자’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내게 작용하는 느낌을 따라 써내려 갔습니다.” 물론 만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영화 시나리오처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지, 시처럼
여백을 두고 써도 되는지, 헷갈렸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그냥 스스로 제한을 두지 말고 쓰는 대로 써보기로 했어요. 세부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면 역시 그대로 자유롭게 썼어요. 그런데
무용단원들이 워낙 자유분방한 구성에 단련된 덕분인지 일관성 없는 대본을 알아보기 쉽게 구성표도 만들고 장면 진행표도 만들어 오더군요. 마치 타짜들이 화투패 깔듯이.”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보일 시점을 통제한다. 하지만 무대는 온전히
관객에 의해서 시점이 선택된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그런 차이가 되레 같은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신기하게도 드넓은 황야를 배경으로 둔 와이드숏을 봐도 대형 화면 한쪽 구석의 작은 점 하나가
커다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결국 영화의 쇼트 안에서,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힘을 안배하느냐에
따라 같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다양한 쇼트와 시선으로 변증법적인 충돌과 관계로 신을, 시퀀스를 만들며 스토리와 감정을 정교하게 구축해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는 영화에서 보여진 다양한 조각의 쇼트들을 쭉 펼쳐놓고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며 스토리와 감정을 구축해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죠.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영화와 무대극 사이의 이질감을 좁혀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김지운 감독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가족무용극 <어린왕자>연출에 참여하는 동시에 오는 10월에 크랭크인에 들어갈 새로운 영화 <밀정>의 촬영을 앞두고 시간을 쪼개서 로케이션 헌팅이 한창이다. 일제
치하 독립군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상해 등지에서의 촬영도 예정돼 있다. 해외 영화사들로부터 작업 제안도
심심찮게 전달되고 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모은 SF 재패니메이션 <인랑>의 실사화도 그의 손에 달려있다. 그를 즐겁게 만들 물음표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A부터Z까지 딱 떨어지게 계획하며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생겨야 점점 명확해지는
편이에요.배우가
들어오고,의상이
들어오고,공간이
생기고,그런 과정을 통해 점점 이야기가 맞춰져요.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프로그래머인 동시에 게이머인 셈이죠.어떤 결과를 프로그래밍하지만
게이머로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주제로 굳어가는 과정을 즐깁니다.” 불확실한 여정 가운데
서있다는 것. 그것이 김지운을 나아가게 만든다.
직장을 옮겼다. 20대 직원이 많은 회사였다. 낯설었다. 한편으론 흥미로웠다. 하지만
확실한 각오는 필요했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배 나온 아저씨도 되지 말자는 것.
지금까지 9년 동안 기자라는 직업으로 밥벌이를 해왔다. 기자들은 타업종에 비해 이직률이 높은 직업이다. 한달 전에 이직한
지금의 회사는 네 번째 직장이다. 여전히 기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누군가는 나를 팀장이라고 부른다. 기존에 다녔던 회사와는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물론 회사마다 환경이
다르고 문화도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이런 회사는 처음이다. 사원 모두에게 동등한 존중심을 당부하는데
이를 테면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직원이 마주쳤을 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나누고 이름 끝에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길 권한다. 아무래도 굉장히 젊은 직원이 많아서인지 기존에 몸담았던 회사들과 정서적인 온도차가 존재한다. 회사 구성원의 과반수 이상이 20대다. 확실히 젊고 발랄하다. 20대 구성원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의 정서가
사무실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모바일 앱 기반의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제작하고 기획하는 회사인데,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스마트폰에 보다 친밀한 20대가 자연스럽게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틀어놓은 노동요를 듣게 된다. 대부분
아이돌 노래부터 힙합, EDM 등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이다. 주도하는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틀면 다들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분위기다. 사무실의 그 누구도 이런 분위기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딱히 거부감을 느낀 건 아니다. 단지 필연적으로 생소했을 뿐이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니까. 이전까지 근무했던 회사들의 사무실 분위기가 경직된 수준까진 아니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자유분방한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20대가 많아서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기보단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확연히 살아난다는 건 확실하다. 다만 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생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불편함보단 낯섦에 가까운.
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가 두드러지는 순간도 적지 않다. 한번은 회의
중에 “여자친구가 인기가 많아요”는 말을 들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여자친구 인기가 대체 누구에게 많다는 거죠?”라고 물었다. 다들 ‘까르르’ 웃었다. 정말, 까르르. 요즘 인기 몰이 중인 걸그룹 이름이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하하하. 학창시절에 젝키가 홍콩사람이냐고 물었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렇게 또 하루 멀어져 간다는 것이 명확히 느껴질 날이 적지 않다. 상대적으로
어린 20대 팀원들과 직장 동료들이 즐비한 사무실에선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 노땅 취급 받지 않으려면. 물론 내게 요즘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숙지할만한 열정은 식은지 오래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것 같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일이다.
최근 이직 후 처음으로 몇몇 직원들이 주최한 술자리에 초빙(?)됐다. 그 자리에서 10살 가까이 혹은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20대 직원 몇 사람과 차례로 대화를 나눴는데 그들은 내가 해왔던 일에 대한 궁금증을 묻기도 했고, 나에 대한 모종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들 중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른 나이에 무언가를 구상해서 사회로 진입한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내가 이루지
못한, 앞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무언가를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경험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인지라 그들에겐 나이와 비례하게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회사 동료에게 나는 팀장이라는 직책을 넘어서 어른이었다. 팀장이란 지위보단 나이가, 경험이 더 많은 형이자 선배였다. 그래서 ‘어떤 상사가 될 것인가’라는 고민보다도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다.
내가 회사에서 보낸 20대 시절이 있었듯이 지금의 회사엔 20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직원들이 있다. 그들을 대면할 때면 종종
‘나의 20대는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내가 결코 닮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몇몇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이들에게 어떤 30대일까? 어떤 선배일까?’ 그렇다. 누군가를
이끌고 동기부여를 줘야 하는 입장에 섰다는 건 당연하면서도 때론 당혹스러운 일이 된다. 누군가를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존중 받는 게 중요하다는 건 그 입장이 돼봐야 안다.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권위만 내세우면
되레 권위는 손쉽게 허물어진다. 그저 회식 1차 자리에서
당장 꺼져줬으면 하는 꼰대로 전락할 뿐이다. 지혜와 품위가 있는 어른으로서 튼튼한 권위를 건축해야 한다.
그 비결이 아이돌 이름을 외우는 것은 아닐 게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대화에,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섣불리 조언하고 충고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내게 조언을 구하고, 충고를 원할 때가 아니라면 말이다. 대화를
주도해야 하는 입장이라 착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이질감만큼이나 그들 또한 내게 이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동등한 호기심을 품기 마련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며칠 전에 가졌던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한 20대 직원은 내게 셔츠핏이 좋다며 칭찬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더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배 나온 아저씨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추가했다. ‘최선을
다해서 꼰대가 되지 말자’는 다짐 옆에.
(GRAZIA KOREA SEPTEMBER FIRST ISSUE 2015 'GRAZIA COLUMN')
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꼽히는 케이트 윈슬렛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진화를 거듭하는 배우다. 그녀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줄 작품을 찾고 있다.
“나는 열셋 혹은
열네 살 때부터 항상 실제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처럼 느꼈다.” 영국 출신으로 11세 무렵부터 연기를 배운 케이트 윈슬렛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그녀의
연기 데뷔는 13세가 된 1991년 영국의 TV시리즈물을 통해서 이뤄졌다. 스크린 데뷔작도 10대가 지나기 전인 17세에 찾아왔다.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가가 됐지만 한때 B급 장르물의 대가로서 악명이
자자했던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1994)이
바로 그것이었다. 끔찍한 실화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지만 광기적인 판타지로 채색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두 소녀의 기괴한 우정이 끝내 한 소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기까지의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친구의 엄마를 살해하는데 조력하는
폴린 역으로 등장하는 윈슬렛은 나이에 비해 조숙한 외모만큼이나 섬뜩한 연기력으로 눈길을 끌었고,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삼촌까지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확실히 타고난 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다.
윈슬렛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에서 연기한 마리안 대시우드 역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니까 10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케이트
윈슬렛은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근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윈슬렛에게 있어서
그건 이른 경험이라기 보단 시작에 가까웠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이후로 윈슬렛은 시대극의 경력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냈다. 19세기 영국에서 대담한 주제를 소설로 담아냈던 토마스 하디가 남긴 마지막 소설을
영화화한 <쥬드>는 종교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19세기 영국을 배경에 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다. 자신의
사촌을 사랑하게 된 여인 수를 연기한 윈슬렛은 애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시대적 한계를 절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가련하고도 강인한 표정을
완벽하게 체화해냈다. 한편 같은 해에 공개된 <햄릿>(1996)에서는 그 유명한 오필리어를 연기한다. 아버지를 잃고
미쳐버린 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필리어의 광기에 압도적인 페이소스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타이타닉>(1997)에서도 비극과 대면하는 여인의 세계관은 거듭 이어졌다. 필연적인
비극을 향해 항해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과 사랑을 선택하는 열정적인 여인 로즈를 연기했다. 윈슬렛은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으로서의 운명을 연기하는데 능했다. 혹은 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윈슬렛이 연기한 여성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적 편견이나 관습을 견뎌내야 하거나 평범한 삶에 깃든 내밀한
욕망을 향해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케이트 윈슬렛은 고요하면서도 강인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혁명
이후로 도래한 삼엄한 공포정치 속에서 금기시된 음란소설에 탐닉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여인 마들렌으로 분한 <퀼스>(2000)와 무료한 삶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불륜에 빠져드는 여성 사라를 연기한 <리틀 칠드런>(2006),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독일의 첩자로 내몰리게 된 여인 한나를 연기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그리고 안온하게 위장된 권태로운 삶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여인 에이프릴로 등장한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까지, 이 모든 작품에서 윈슬렛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 놓인 각기 다른 여인을 연기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존재 혹은 ‘나’라는 여성에 대한 자문을 거듭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혹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대적 금기의 담을 넘거나 위장된 삶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근작인 <레이버 데이>(2013)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공황장애로 인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며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에게 기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로 인해 기이한 방식으로 삶을 회복해 나간다.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에 묶여 깊게 침전해있던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라 그녀에게 현실적인 의지를 부여한다. 금새 꺼져버릴지라도 가장 밝게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타오르는 성냥과도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의 가련한 슬픔과 강인한 의지가 동시에 전해진다. 윈슬렛은
바로 그런 배우였다.
<어 리틀 카오스>(2015)를
통해 오랜만에 시대극으로 돌아온
그녀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 디자인을 맡기 위해 경쟁하는 정원사 사빈 역을 맡았다. “사빈느와 나 사이엔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큰 슬픔과 어려움을 여러 번 이겨냈고, 내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녀가 그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있어 존경심이 든다. 그녀는 슬픔을 질질
끌고 가지 않았으며, 세상이 그녀를 불쌍히 여길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매우 긍정적이고 흥이 많다. 시대극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많이 만날 순 없지.” 사빈은 윈슬렛이 연기했던 시대극 속의 여자들과는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한편 <타이타닉> 이후로
대작 출연을 고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상업영화 출연 경력이 드물었던 그녀는 최근 SF시리즈물인 <다이버전트>(2014)와 <인서전트>(2015)에 연이어 출연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녀 스스로 새로운 경력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작품 이후에 항상 얼마나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 내게 도전이 될 수 있는지, 영감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보다 내 직업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녀에게 상업적인 할리우드 대작이 도전이 되고, 영감을
줄만한 때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운이 좋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자극을 주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윈슬렛은
실패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경력을 좀처럼 쌓지 않았다. 이미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로 꼽히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도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그녀는 길을 찾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도전과 영감의 길 위에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이름으로.
셰익스피어 해석의 권위자로 꼽히는 감독
케네스 브래너는 언젠가부터 셰익스피어의 것이 아닌 세계를 탐하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를 등진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어깨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탐구한다는 말이다.
케네스 브래너가 마블 유니버스와 디즈니 왕국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셰익스피어적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토르: 천둥의
신>(2011)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거대한 규모 안에서 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다. 거창한 허구의
시나리오 한가운데 있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그는 <신데렐라>(2015)에 대해서도 명확한 관점을 고수했다. “처음 이 작업에 관여하게 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 뭔지 알 거다. 그건 그 길에서 벗어나는 거야’라고.” 공통분모는
단 하나였다. “이건 셰익스피어로부터 비롯됐다.”셰익스피어적인 관점 안에서 이는 모두 지극히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 출신 감독들과 달리 브래너는 처음부터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 초기부터 카메라 뒤에 서서 ‘액션!’과 ‘컷!’을 외쳤다. 물론
자신의 연출작에서 주연을 맡게 되는 경우엔 예외였지만. 그리고 그의 데뷔 연출작인 <헨리 5세>(1989)부터
그 예외적인 경력이었다. 휴전 중이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재개하며 프랑스에 상륙해 대승을 거둔 영국의
왕 헨리 5세에 관한 작품으로 대단히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일관된 작품이다. 동명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감독 경력에 발을 디딘 브래너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부문과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로 지명되며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차기작 <환생>(1991)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것도 그런 덕분이다.
<환생>은 40여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전생과 윤회에 관한 미스터리물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제에 따라 흑백과 컬러 영상으로 전환되는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알프레도 히치콕의 서스펜스 감각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브래너 역시 이런 영향력을 언급한 바 있다. “항상 히치콕을
사랑했고, <환생>의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다이얼 M을 돌려라>(1954)를
비롯해 <레베카>(1940), <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등 수많은 히치콕의
영화들을 다시 봤다.”그리고 당시 브래너의 부인이었던 엠마 톰슨과
함께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브래너에게 이 작품은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확고한 명성을 안겨준 건 결국 히치콕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일 수밖에 없었다.
<헛소동>(1993)은
케네스 브래너라는 감독에게 있어서 대표작으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브래너 자신과 엠마 톰슨은 물론 덴젤
워싱턴, 키아누 리브스, 케이트 베킨세일, 마이클 키튼 등 대중적으로 친숙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서도 가장 유쾌한 작품이라 알려진 것처럼 브래너의
<헛소동>은 연극적인 연출력이 두드러지는, 유쾌하고
낭만적인 기운이 충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덕분인지 브래너는 대작의 야심을 품게 됐는데 영국계 여류 작가인 메리 셸비의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했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으로 합세하며 큰 그림이 완성됐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지독하게 심각하고 무거운 작품이었다. 특유의 위트나 페이소스가 실종된 이 작품에 대해서 평단의 반응은 이례적으로 차가웠다. 하지만 진정한 야심작은 따로 있었다.
브래너가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 <햄릿>(1996)은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희곡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영화적인 원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무려 네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그런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주옥 같은 대사가 고스란히 영화에서 발음되고, 모든
장면들이 존재하는 <햄릿>의 실사판은 여전히 브래너의
것이 유일하다.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의
<햄릿>(1948) 역시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브래너의 <햄릿>은
셰익스피어만을 위한 제단이 아니라 브래너 자신을 세우는 새로운 무대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중세 덴마크를 배경에 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달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19세기 덴마크로 시대배경을
옮긴 브래너는 이를 통해 보다 현대적인 인상의 <햄릿>을
완성했다. 또한 대사와 인물에만 집중하는 연극적인 연출 대신 다양한 몽타주를 동원하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지극히 영화적인 <햄릿>을 완성해냈다. 또한 에너지가 넘치는 브래너 특유의 연기가 반영된 햄릿은 그 어느 햄릿보다도 재기발랄한 개성이 있다. 브래너에게 <햄릿>은
감독으로서 가장 절정의 경력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햄릿> 이후로
4년이 지나서야 발표한 <사랑의 고통이 사라지다>(2000)와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공개된 <당신 좋으실 대로>(2006)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영화화한 결과물이었지만 그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통해 새로운 영광을 얻진 못했다. ‘추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건 확실했다. 주드 로와 마이클
케인이 출연한 <추적>(2007)은 부조리극의
대가 해롤드 핀터의 각본을 브래너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그가 연극이라는 초심으로 되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인상을 준다. 그 이후로 그는 셰익스피어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것처럼 할리우드에서 최적화된 상업적 블록버스터를 연이어 연출했다. <토르: 천둥의 신>과
액션 스릴러물인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2014) 그리고 <신데렐라>까지, 그의 최근작들은 셰익스피어의 인장이 명확했던 브래너의
과거와 완벽하게 분리된 인상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을 매료시킨 셰익스피어처럼 또 다른 무언가에
매료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동화는 200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구전돼서 손쉽게 응용됐고, 많은 각색을 거쳐왔다. 보다 적극적인, 더욱 21세기적인
캐릭터로, 새로운 느낌의 신데렐라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셰익스피어에 주목하고 해체시킨 방식으로 슈퍼히어로와 고전동화의 세계관을 응시한다.
브래너의 연출 차기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는 그가 <토르>의 새로운 시리즈에 복귀를 희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 차기작이 셰익스피어라는 자장 안에서 맴도는
작품이 아닐 것이란 예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언젠가
그가 셰익스피어라는 중력으로 다시 발을 디딜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분명 셰익스피어를 넘어선 우주로 유영하고 있다.
그건 확실하다.
이준에게 있어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는
이제 철 지난 풍문 같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무용도 하고, 아이돌도
됐던 이준은 이제 연기만 한다. 드디어 배우가 됐다.
<밀회>를 낳은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의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는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을 위한 발견의 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준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절대권력을 주무르고, 집안에서도 왕처럼 군림하는 아버지
한정호의 슬하에서 희대의 반역을 선도하는 아들 한인상을 연기한 그는 ‘아이돌 출신 배우’에서 ‘배우’로, 자신의 수식어를 더욱 간결하게 매만지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사실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수식어는 낙인과 같다. 팬덤을 등에 업고 손쉽게 기회를 얻어냈다는 혐의와 연기력에
대한 의심이 뒤엉킨 편견이 형성된다. 결국 배우 스스로 가능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편견의 중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준은 <풍문으로 들었소>를 통해서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무중력 상태로 띄워 올렸다. 중력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졌다. 스스로에게조차 발견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처음엔
의아했다. 한인상은 순수하고, 모범적이면서도 억압된 캐릭터인데
나는 자유분방하고 ‘날티’가 나 보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서 나를 발전시켜보자고, 성공하면 나로선 굉장한
이익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다.” 그만큼 배우로서의 욕심도 자라났다. “항상 욕심은 많았지만 확실한
건 앞으로 <풍문>에서보단 더 잘하고 싶다. 다음 작품이 무엇이 될진 몰라도 최소한 퇴보하는 모습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욱 많이 경험하고, 더욱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이준은 오래 전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극영화과가
있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다. “연극영화과를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진학상담 선생님의 면박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당장 진학이 가능한 건 무용과 정도뿐이었다. 그래서 무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춤을 추면서 어울렸기 때문에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서울예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서울예고에 연극영화과는 없었다. 그래서
계속 무용을 했다. 그리고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로 진학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학교를 휴학했다. “갑자기 내가 뭐하고 있나 싶어졌다. 내가
원래 하나에 깊게 빠지는 편인데 무용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4년이 지났더라. 연기를 하고 싶었다는 게 그때 기억났다. 그래서 당장 휴학을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해가 안가는 짓이다(웃음). 담보 하나 없이 중단한 거니까.” 그렇게 이준은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고,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녔고, 낙방을 거듭했다. ‘체계적으로 연기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비를 만났고, 비와 함께 할리우드로 갔다. <닌자 어쌔신>에 출연했다. 할리우드에서 연기 데뷔작을 찍게 될 것이라곤 이준
스스로도 예감하지 못했다.
“급하게 과외를 받았다. 연기
선생님과 영어 선생님을 붙여서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내가 영어는 못했지만 발음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주입식 교육을 시키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웃음).” 쉽게
말하면 운이 좋았다. 하지만 이준이 6차에 걸친 오디션을
통과한 비결이 단순히 좋은 영어 발음일 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할리우드가 그렇게 만만한 곳일 리도
없다. <풍문>을 보다 입체적인 드라마로 만들어준
건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조연배우들이었다. 그들은 이준의 연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말 연기를 배우지 않은 애처럼 연기하는 구나. 그런데 그
안에 정말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게 네 장점일 거야.” 스스로
‘연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준에겐 기본적인 끼,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재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용할 때에도
무용엔 답이 없다고 느꼈다. 연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아직까지
연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연기를 잘한다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냥 관객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배우라고 할까?” 사실 이준은 일찌감치 연기를 공감대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지만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던 이준은 ‘따라하기’를 통해 자신만의 연기적 훈련을 매진했다. 대단한 건 아니다. 인터넷으로 대본을 찾아서 나름대로 실감나게 따라
읽는 것 그리고 배우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 “지금 기분이 괜찮은데 어떻게 기분 나쁘게 화를 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혼자서 막 화를 내기도 하고, 좀
이상하지만(웃음).” 뛰어난 기교를 익힐 수 있는 훈련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배우가 구사하는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공감대 정도는 일찍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준은 최소한 배우는 자세가 된 배우였다.
“작품을 끝내면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아쉬운 부분이 보다 오랫동안
남는다. 결국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사실 어렸을 땐 생각이 없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다시 단순해질 수 있을 것도 같다. 자동차에서도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하더라(웃음).” 해석하자면 배우로서
보다 욕심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그럴만하다. 사실 이준이
처음 배우로서 주목을 받은 건 영화 <배우는 배우다>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갑동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궤도를 찾았다. 그리고 <풍문>은 이준이라는 배우가 지닌 가능성의 뒷면을 드러낸
작품이다. 과장된 세기로 치장한 캐릭터가 아닌 일상적인 평범함도 어울리는 배우라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그건 그 누구도 아닌 이준이 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처럼 계산하지 않고,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계산하게 되면 피곤해질 거다. 사실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라서(웃음). 그리고 본래 나는 뭔가를 할 때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지금 당장 모든 에너지를 쏟는 편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품을 할 때도 매 신마다 가진 에너지를 다 투자한다. 그러려고 한다. 그래야만 뭔가를 해낸 거 같다.” 피해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피해가지 않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어쩌면 그렇게 에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른 길을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풍문> 현장에서
이준은 안판석 감독에게서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어서 그랬다기 보단 현장 분위기가 항상 긴장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긴장하지 않으면 연기도 이상해진다. 항상
정신 차리고 긴장의 끈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스스로 긴장을 요구하는 건 단순히 배우로서의 책임감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이 직업이 항상 잘될지 알 수 없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남의 탓을 하기보단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해야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거 같다. 어차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니까 그에
따른 책임도 내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걸 잘 아는 게 중요하다.” 아무튼 이준은 그렇게 배우로서 방금
막 첫 장을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타이밍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직하고 명확하게.
군대에선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회에선 내가 저항해도 피해볼 일이 없다. 그냥 싸우면 되는 거지. 하지만 군대에선 신체가 구속된 상태라 저항하면 힘들어진다.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기고만장하게 살았던 게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신념이란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키는 것’이란 좌우명이 생겼다. 비겁한 태도라고 자학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곳>이 독자를 쉽게 타오르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송곳>은 첫 웹툰이다.
장편 연재가 가능한 곳이 웹툰뿐이었다. 시사 잡지와도 논의했지만 시사잡지 독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독자와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혀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으니 웹툰이 나아 보였다. 특히 네이버엔 젊은 독자가 많고 유동 접속량이 월등하니까. 네이버보단 다음에 더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너무 어울리는 곳에 있어도 이상하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전작들은 개인적인 범주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덕분에 취재랄 게 거의 없었다. 가족 인터뷰 정도(웃음)? 6월 항쟁을 그린 <100℃>에는 인터뷰와 취재 과정이 필요했지만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았고.
세계관이 팽창된 만큼 전작에 준하는 밀도를 채우기 위해 캐릭터의 수가 많아야 했을 거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갈지도 모르겠다.
<슬램덩크>에선 경기에 출전하진 않아도 항상 등장하는 벤치 멤버가 있지 않나. <송곳>에도 집회활동마다 참여하는 조합원들이 있다. 그런데 <슬램덩크>보다 훨씬 많다(웃음). 그 사람들을 항상 그 모습대로 그려 넣어야 한다. 힘들다(웃음).
1부보다 2부 분량이 더 많고, 2부보다 3부 분량이 더 많다. 분량이 늘어나고 있는 건가?
조금씩 늘어났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늘어나면 괜찮은데 불안감 때문이라 조심해야지.
불안감?
전달이 제대로 안될 거 같다는 불안감. 노조활동이 익숙한 소재가 아니니까. 주요 사건만 보여주고 넘어가면 실제 과정이 간과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생겨서 점점 세세하게 표현하게 된다. 애초에 노동쟁의에 관한 학습 만화로 기획돼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그렇다.
소재도 익숙하지 않지만 주인공인 이수인도 얄짤 없는 캐릭터다(웃음).
그래서 두려웠다. 과연 이런 인간을 좋아할까(웃음)? 사실이수인을 움직이는 동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인데, 재미없잖아. 이런 사람(웃음). 그래서 극 초반에 과거사를 많이 삽입했다. 이수인을 통해 살아가면서 누구나 맞닥뜨릴 법한 상황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군대에 관한 사연이 대부분이지만 사회에서도 사소한 부정을 직면하는 상황은 있을 테니까. 그런 부정에 맞서지 못했다 해도 다들 울컥했던 순간은 있었을 거다. 그런 감정을 쥐게 되면 이수인을 따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이수인만큼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구고신이다.노동법 전문가로서 이수인의 옳은 믿음에 전략을 세워주는 사람이다.
사실 대부분은 그런 옳음을 지키기 위한 행동조차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전략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한다. 이수인도 행동을 옮겼기 때문에 자신이 서툴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노동 문제에 빠삭한 전문가를 그리려면 작가도 그만한 수준이 돼야 할 텐데, 쉽지 않을 거 같다.
기획 초기엔 구고신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어렵더라.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물을 그리는 건 어렵다. 내 생각에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나면 욕했을 거 같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스무 살의 나를 이해한다. 그러니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게다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을 그리는 건 더 힘들다. 그리고 사회 진보에 대한 열정이 이 인간을 수십 년간 지배한 것인지, 그 사람을 그런 단계까지 닿게 만든 경험이 무엇인지, 지적 자아로서 욕구나 종교적인 열망도 있었던 건지, 그런 걸 설득력 있게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게 내 안에 있다면 그걸 증폭시켜서 만들 수 있겠지만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나보다 똑똑한 인물이니까, 역시 어렵다.
구고신과 이수인은 무림고수와 제자 같기도 하다. <송곳>은 이수인의 성장 드라마일 수도 있겠다.
성장이라기보다 ‘망함’의 드라마(웃음)? 이수인은 계속 망하고 있다. 진급도 물 건너갔고, 회사에서 잘리기 직전이고(웃음).
망함의 판을 짜는 작가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다(웃음). 어쨌든 상당히 심각하고 무거운 소재임에도 캐릭터들은 역설적으로 밝게 묘사되는 것 같다.
실제 노조 관계자들은 밝다. 힘들기 때문에 평소에 재미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원래 남자끼리 모이면 서로 웃기려고 애쓰지 않나. 게다가 노조를 조직할 사람이 침울하면 아무도 안 따라온다. 청소부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침울해서야 되겠나.
<송곳>은 까르푸 해고자들의 투쟁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실화가 필요했던 이유는?
<송곳>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틀을 계속 찾았다. 그냥 사건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수많은 자문을 구해도 이런 사건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예상하기 힘들다. 그래서 실제 사건을 가져다가 외곽에 두르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 까르푸 사태였을까?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일단 사건이 천천히 진행돼야 했다. 노동법 얘기도, 노조 조직 과정도, 파업 이전까지 거쳐야 할 과정도 세세히 보여줘야 하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노조 생성 과정은 회사의 초강수로 사람들이 막 잘리면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노조에 가입하고, 당장 파업에 돌입하는 식이다. 폭발적인 과정 안에서 이야기하면 노동법에 명시된 절차가 망가지고, 이야기의 순서도 사라진다. 결국 회사가 노조를 깨기 위해 돈을 쏟아 부을 만큼 처음부터 너무 악랄하진 않아야 했다. 까르푸 사태가 그랬다.
윤리적으로 엄격한 편인가?
사소한 부정의에는 관대하다. 물론 작은 부정의이든, 큰 부정의이든, 심리적으로 동일한 지점에서 잉태된 부정의일 순 있다. 한 명을 해친 사람이 100명도 해칠 수 있고, 쓰레기를 쉽게 버리던 사람이 기업의 사장이 되면 공해물질을 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 사안의 무게가 같은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소한 부정의는 사회에 소속된 개개인의 선으로 통제할 수 있다. 결국 큰 부정의를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걸까?
노동 문제는 대개 큰 부정의이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최악이다. 노동유연화를 시키면 나라가 돈을 번다고 강변했다. 좋다. 그럼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비정규직이 돼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축적된 부를 보상해 줘야 하지 않겠나. 분배도 유연화시켜야 되는데 그런 고리는 싹 빼버린다. 누군가만 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가난한 누군가만 계속 노예처럼 부린다. 이건 우리가 부정한 정책에 동의한 결과다. 그걸 알아야 한다.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그림을 잘 그렸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대학에 들어갈 시점에 마침 만화과가 생겼고, 적성에 맞을 거 같아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는 동안 만화계가 완전히 침체됐다. 공모전에 두 번 당선됐고, 잡지에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군대에 다녀오니 만화 잡지가 사라졌더라. 연재할 수 있는 만화 잡지가 없고, 웹툰도 없었으니 구체적인 목표라는 게 생길 수 없었다. 그래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는데 한 일간지에서 토요만화 섹션이 마련됐고, 그떄 <습지생태보고서>를 연재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어영부영했다면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화계가 침체된 상황에서 입시만화를 가르치며 후배를 양성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깝깝했지. 쟤네들 다 뭐 먹고살까 싶고(웃음). 그래도 그때 게임업계가 호황이라 만화과가 다른 과에 비해 취업률이 낮진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여러 방식으로 재현하는 거라 잘 배워놓으면 어떻게든 먹고살았다(웃음).
본인도 먹고사는 고민이 있었을 텐데.
취직하려고도 했다. 몇몇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미팅까지 했는데 다들 묵묵부답이더라. 평범한 신입사원을 뽑으려는데 나름 업계에선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고, 수상 경력도 있는 사람이라 언제 튀어나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투쟁이나 저항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작가라는 인상인데, 이게 작가 입장에선 괜찮을까?
어차피 작가라면 무슨 이야기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웃음). 뭐든 잡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작가마다 잡는 게 다른 거지. 개인적으로 작가라면 자기 감정을 긁는 걸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 투쟁이라면 투쟁이고, 저항이라면 저항일 텐데, 최소한 자격이 없는 걸 말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에 애늙은이라고 불렸다던데 지금은 동년배 중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창작자니까 직장생활 하는 친구들보단 조금 순진하거나 혈기왕성할 수 있겠다.
어쨌든 부정의한 사회 덕분에 <송곳>도 나왔고, 당신도 먹고산다(웃음).
에이, 다른 환경이었다면 다른 밥줄을 찾았겠지(웃음). 더 재미있는 만화를 그렸겠지.
더 재미있는 만화란?
<심슨가족>은 자본가도 까고, 환경론자도 까고, 노조도 까고, 페미니스트도 깐다. 모든 걸 풍자한다. 모든 것을 같은 무게로 다루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노조를 풍자할 순 없다. 가뜩이나 왜곡된 인식이 많은 집단이고 여전히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그럴 순 없지. 이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 깝깝하지.
<송곳>이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나?
인간에겐 이런 권리가 당연한 것이고, 정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라면 최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할 문제라는 걸 깨닫길 바란다. 나름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으니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다만 이런 사안에 관심을 갖고 논의해서 정치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게끔 만들면 좋겠다..
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 시대다. 집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식사가 과연 즐거웠던가?
주말마다 강림하는 귀차니즘 속에서도 꼬박꼬박 허기는 찾아왔다. 배는
고프지만 밥을 하긴 귀찮았다. 밥을 차려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나도, 아내도. ‘귀찮으면
나가 죽어야지’라던 어머니의 명언이 떠올랐지만 나가 죽기도 귀찮았고 배는 고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배달의 민족 아이가. 그래서 한동안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아내는데 공력을 쏟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대략적인 리뷰를 살피고, 괜찮아 보이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았다. 하지만 짜장면이 물렸다. 결국 내 입에게 미안해서 외출을 했다.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동네엔
괜찮은 식당이 많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촌에 살면서도 배달 유전자가 충만한 민족성에 의지하며 주말
끼니를 연명했던 지난 날이 문득 서글퍼졌다.
배달의 민족이란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지만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선 조선시대부터 일찌감치 음식 배달 문화가 있었으니까. 18세기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의 <이재일기>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배달을 해주지 않는 가게도 걱정하지 마라.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으니까.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면 결제까지 손쉽게 되는 배달앱이 있으니까. 최근엔
전국 팔도 맛집의 음식을 당일 혹은 익일에 배달해주는 ‘미래식당’이란
사이트도 생겨났다. 목포의 민어회를 서울의 방안에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배송비는 고작 3천원 정도. 세상
좋아졌다. 전국의 음식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는 시대라니. 그러니까
내가 사는 그 집이 미식 문화의 미래라는 것이다. 항상 같은 식탁에 앉아서 다양한 식당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어딘가 허무하지 않은가.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도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 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식사라는 건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먹을 것인가?’라는 다채로운 물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이다.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기는
미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말하고, 듣고, 웃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식탁이 단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앉아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은 단지 음식값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관계를
소비하는 비용까지 포함된 내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과 함께 소비한 경험에 대한 지불이라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포털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보면 야근에 대한 괴로움과 야식에 대한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문화는 어쩌면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배달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배달의 민족으로선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문화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는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배달음식의 편의는 인정한다. 그리고 배달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건 식당을 찾아갈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미식을 즐길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배달의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정말 죄인 것 같다.
이준기는 항상 편견과 싸우는 배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싸우지 않았다. 맞서지 않았다. 그저 견뎌냈다. 단단하고 유연하게,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배우로 살아남았다.
촬영은 어땠나?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화보 촬영이었는데 여자 모델과 함께 찍어서 신선하기도
했고.
화보로 만날 기회가 드물다.
사실 작품으로 다가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패션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도 하고, 화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들다.
배우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팬들
취향에 맞추는 것도 있고. 그런데 요즘 주변에서 예능 출연을 권하는 사람이 워낙 많긴 하다. 연기만 보지 말고, 다른 재능도 좀 써먹어 보라고. 사실 나도 예능에 나가는 게 싫진 않지만 아직 그렇게 소모될 때가 아닌 거 같아서 고민이다. 하지만 확실히 작품 외적인 활동이 드물다 보니 일반적인 대중 시각에선 활동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한 배우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예능을
생각해 보는 것도 그래서고.
막상 나가면 잘할 거 같다.
너무 오버할까 봐(웃음). 익숙하지
않은 만큼 그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오버할 거 같다. 욕심도 부릴 거 같고. 어쨌든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는 거 않다. 유쾌할 걸 좋아하기도
하고.
TV는
자주 보나?
어지간한 프로그램은다 본다.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중들의 취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가늠하기 좋은 척도가 TV프로그램이라 생각해서 두루두루 본다.
시사프로그램도?
본다.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책임감 있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세하겠다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그런 흐름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공적인 녹을 먹고 사는 공인은 아니지만 공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공인 쯤은 되니 어떤 식으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선 그런 흐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걸러 들을 것도 자연스럽게 걸러
들을 수 있고. 최소한 뭔가를 들었을 때 ‘뭐라는 거지?’ 이러고 싶진 않다. 그런 정보들이 연기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최근 생일날에 팬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던데.
팬클럽 분들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들어서 작년부터 팬클럽 운영진에게 부탁해서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물질적인 선물을 받는 것보다도 팬들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니까 오히려 나를 채우는 기분이 든다. 이준기가 멋있단 이야기만큼이나 이준기 팬들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고.
그렇게 계속 자리를 지켜주는 팬들과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다.
한때 SNS
인사말에 적어놨던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배우’라는
문구는 자기 주문 같았다.
맞다. 나는 내가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기 최면을 거는 셈이지. 20대 때만 해도 한 작품이 터지면
그 작품의 영향력이 오래갔다. 그런데 요즘은 금방 사라진다. 유일하게
대중과 소통할 기회가 작품뿐이니까 최소한 1년에 한 작품은 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그래서 최소한 1년에 한 작품은 꼭 선보이려 한다.
실제로 <왕의
남자> 이후로 영화든 드라마든 1년에 한 작품씩 꼭
출연했다. 그런데 거의 한 편 이상을 안 하더라.
한 작품을 고르고 끝내기까지 소모되는 시간이 최소 반 년은 걸린다. 그러니 1년에 한 작품 이상 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를 연이어 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러기엔 작품을 선택하는데 고민하고 소요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
팬들 입장에선 좀 더 자주 보고 싶지 않을까.
어떤 배우들은 4~5년을 쉬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작품을 기다리면서. 나는 쉬지 않고 해마다 한
작품이라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시간에 쫓기듯 결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싶을 때 그 결과를 지켜보는 팬들도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히려 팬들은 조급해지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만화는 좋아하나?
예전엔 좋아했는데 30대 이후론 거의 못 봤다.
웹툰도 안 보나?
거의 안 봤다.
차기작으로 확정된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의 원작 웹툰은 봤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들어가 보는데 드라마 매니아들 사이에서 <밤을
걷는 선비>라는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될 거 같다면서 이미 화제였다. 그래서 그때 찾아봤다. 아마 작년 초였을 거다. 여러 모로 신선했다. 그래서 소속사에 한번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 다른 배우가 물망에 올랐다더라. 그런데 제작이 미뤄지더니
올해 초에 제작진과 접선할 기회가 생겨서 한번 밀어붙여보자 싶었다. <조선총잡이>에 이어서 연속으로 사극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소재가 신선하니까 기회가 오면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게다가 원래 관심이 있던 작품이니까.
원래 그렇게 적극적인 편인가?
아니다. 그래서 감독님도 많이 놀랐다고 하셨다. 첫 미팅 자리부터 감독님과 술을 3차까지 마실 정도였으니까(웃음). 원래 첫 미팅에선 서로 잴 때가 많다. 배우도, 감독님도.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일단 판타지라는 장르를 좋아한다. 내 생김새나 신체적인 능력, 연기적인 스타일도 판타지에서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밤을
걷는 선비>는 뱀파이어라는 역할을 해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선할 것 같았다.
원작을 봤으면 알겠지만 본인이 연기할 김성일이란
캐릭터와 외모부터 닮았다.
나도 ‘어? 나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배우가 원작의 캐릭터와 싱크로율을 맞추려고
하는데 이건 이미 그림부터 닮았으니까 끌리는 점도 있었다. 물론 요즘은 눈 찢어진 배우들이 많이 나왔지만(웃음), 20대 때만 해도 내가 독보적이었잖아.
데뷔 초부터 남다른 외모로 주목 받았다. 개성 있는 외모로 부각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극복해야 할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맞다. <왕의 남자>의
흥행 덕분에 스타로 발돋움했음에도 작품 제안을 많이 받았던 건 아니었다. 배우로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얼굴이 아니란 평이 많았다. 그래서 배우 생명이 짧아질 것이란 위기감을 느꼈다. 심지어 <왕의 남자> 이후에
했던 <플라이 대디>도 흥행에 실패했으니까. 스타라고 불렸지만 배우로서의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배우밖에 없었고,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체적
능력이나 감정 표현에 주목하도록 만들자고, 그러면 내 얼굴도 점점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내 연기를 봐주더라.
사실 ‘이준기가
연기를 잘한다’라는 칭찬에는 ‘생각보다’라는 전제가 붙는 경우가 많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연기적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그때도 역할을 잘 만난 덕분이란 말도 많았다. <일지매> 때도 생각보다 잘 하는데 ‘과연 계속 잘할 수 있을까?’라는 꼬리표가 많이 붙었다. 그래서 약간 오기가 생겼다.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이지. 다 불태워버리겠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기본적인 캐릭터
구축부터, 다양한 감정선을 보여주고, 대역 없이 해낼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액션을 소화하려 했다. 그래서 ‘고생미’ 넘치는 배우라는 소리도 들었고(웃음). 그러다 보니 신뢰가 생긴 거 같다.
끊임없이 선입견과 싸워온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성격도 안 좋을 거 같고(웃음).
한때는 안티팬도 적지 않았다.
‘이준기는 안될 거야. <왕의
남자>는 운이 좋았지.’ 처음엔 이런 시각이 대부분이라서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배우로서의 나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여기까지 온 것도 같다. 물론
처음엔 악플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도 계속 봤던 건 그걸 이겨내야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유 없이 저평가하는 건 넘기되 필요한 이야기는 수용하고자 했다. 지금도 찾아본다. 좋은 말만 보지 않는다. 냉정한 평가는 정확하게 수용하려 한다.
아무리 몸에 좋은 말이라도 쓴 말은 쓴
말이다. 자존감이 강한 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거기 휩쓸린다는 느낌이 들면 애초에 보지 않았을 거다. 그런
의견을 듣는데 익숙해지면서 단단해지고, 유연해진 거 같다. 배우는
어차피 작품으로서 대중들의 심판대 위에 서야 된다. 언제까지 배우로 살진 몰라도 배우로서 사는 이상
어떻게든 감수해야만 한다. 이왕이면 빨리 보고, 빨리 느끼고, 빨리 생각할수록 나에게도 유리하다는 걸 안다. ‘내가 잘했는데 쟤들은
왜 저래?’ 이러면 언젠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쉬울 거다. 요즘은
누가 내 기사보고 있으면 ‘댓글에서 뭐래? 혹시 욕은 없냐?’ 최소한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멘탈 수준은 됐다(웃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유연해지고, 능글능글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맷집이 좋아진 셈이다.
아마 드라마를 계속해서 그런 거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처음 드라마 시스템을 경험했을 땐 죽을 맛이었다. ‘이런 열악한 시스템에서
뭘 한다는 거지? 다음엔 절대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중독되더라. 매주마다 두 시간짜리 결과물을 만들고, 매주마다 시청자들의 평가를 듣게 된다. 처음엔 그것도 스트레스였는데
하다 보니까 그런 의견을 수용하는 능력도 생기고, 순발력도 늘고, 점점
드라마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고, 지치는데도
다시 드라마를 선택하고, 그렇게 점점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은 느낌? 간혹 팬들이 영화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도 드라마를 계속 하게 되는 건 그런
중독성 때문이다.
고생을 잘 견디고 즐기는 타입인가 보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어색하더라. 이런 사치스러운 현장이
있다니(웃음). 배우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주고, 고작 한두 신 찍고 쉬고. 물론 바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쨌든 24시간을 구르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더 지치더라. 지금은 치열하고 공격적인 스타일을 즐기게 된 거 같다.
배우가 되기 전에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부모님의 반대 속에서도 서울로 상경해서 숙식 제공하는 가게를 떠돌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던데.
주방 보조를 할 때도, 당구장 카운터를 볼 때도, 호프집 서빙을 하거나 주유소 알바를 할 때도, 그저 서울에 왔다는
게 너무 좋았다(웃음). 원래부터 낙천적이다. 당구다이를 닦다가 TV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곧 저기 나갈 텐데’란 생각하고. 오디션도 계속 떨어졌지만 오디션을 더 많이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의 근성들이 남아있는지 웬만한 피곤은 견딜 수 있다.
생활력 있다는 말을 좀 들었을 거 같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웃음). 하나
더 있다면 낙천적인 성향. 그래서 모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고3때. 조금 늦은 편이었지.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 좋아했지만 배우가 되고 싶단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햄릿>을
연극으로 봤다가 배우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배우가 되고 싶다기 보단 배우라는 직업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기가 차셨겠지. 난데없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나라도 말렸을 거다.
친구들이 다 ‘또라이’라고
했다. 네가 배우를 하면 나는 대통령한다고(웃음). 그것도 그럴 것이 그때만 해도 부산 사람이 서울에서 연예인이 된다는 건 와 닿는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사람이 하는 거니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춤과 노래를 좋아했으니 아이돌 가수를 꿈꿀
법도 했는데.
연예인이 되고 싶단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에서 연예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도 그냥 연기를 공부해보고 싶었던 거지, 영화배우가 돼서 스타가 될 거란 생각이 아니었다.
어쨌든 잘됐으니 다행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섬뜩하다(웃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후회가 없다는 말처럼, 그 시기가 내겐 그랬다. 사실 컴퓨터 공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재수를 해야 하니 고3이었던 그 해는 쉬어가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여유가 있을
때 도전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컴퓨터 공학과는 왜 가고 싶었을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끼고 살아서 관련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만약
컴퓨터 공학과에 못 가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으면 ‘용팔이’라도
할거라고 생각했다(웃음).
질문이 던져지면 폭포처럼 답변이 쏟아지는데
평소에 혼자 생각이 많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편이다. 그래서 생각이 막히고 답답해지면 지인을 불러서 술을
마신다. 개똥철학이라 해도 툭툭 털어내면서 생각을 정화시킨다. 혼자
머리 싸매고 있는 편이 못 된다. 그래서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는 게 복이라고 생각한다.
말 없이도 편한 친구가 점점 절실해지는
나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이런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상대를 술자리에서만 채울 순 없을 거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 결핍을 해소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진득하게 연애해보고 싶다. 이제 가볍게 만날 나이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연애도 많이 못해봤는데
벌써 서른넷이나 됐으니까(웃음).
연애도 때를 놓치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요새 좀 억울하다. 꼭
적어달라. 팬들도 좀 알아달라고(웃음).
<투윅스>에서 딸로 나왔던 아역배우 이채미로부터 받은 생일축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고 ‘역시 딸이 좋다’는 멘션을 남겼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의미심장하게 읽히더라.
요즘은 집을 보러 다닐 때도 결혼하면 여기서 살 수 있을지 생각한다. 옛날엔
내가 저기서 쉰다면, 저기서 혼자 커피를 마신다면, 오로지
나한테만 맞춰서 생각했는데 지금은 집을 보러 가면 거실에 내 아이가 뛰어 논다면, 애들이 이 방에서
잠을 잔다면, 아내가 여기서 같이 지낸다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바뀌나 보다.
팬들도 이제 그런 생각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체크해보니 반반이더라(웃음). 하지만
이제 거기 휩쓸릴 나이는 아닌 거 같다. 나도 내 사랑을 찾아야지. 당장은
아니라 해도 나도 내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혼자일 순 없으니까.
결혼을 통해 안정적으로 배우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배우라는 게 사실 비정규직이다. 사고 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도 어떤
일이 생겨서 갑자기 이 직업을 잃을 수 있고,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잊혀질 수 있다. 그러니 더욱 절박하게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리를
지켜야 나중에 가족이 생겼을 때 가족들도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원래 가정적인 사람이다. 떠돌아다니는 것보단 집안에서 생활하는
걸 좋아한다.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좋고. 팬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그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편애하진 못했을 거다. 나름대로 사람을 챙기는 편이라 팬들과도 돈독하게 지내는 거다. 가족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그만큼 결혼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느낄 거란 확신이 있다.
웨이보 팔로워 수가 1600만 명이라던데, 서울 인구보다 많다(웃음). 중국과 일본에 팬덤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그만큼 든든하다. 그만한 팬덤이 있는 배우가 된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상당하니까. 내가 잘해서 기회를 얻은 부분도 있겠지만 팬들 덕분에 얻는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벗어나서도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자. 그런데 정작 <밤을 걷는 선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못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