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픽사 애니메이션은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이 꼬마 전구에 불이 켜지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한 공주 메리다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자 마녀의 주술을 빌린다. 그 주술은 단순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대신 어머니를 곰으로 만든다. 메리다는 사람들 몰래 곰으로 변한 어머니와 성을 빠져 나와 주술을 풀 방법을 찾아나간다. 픽사의 1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클리셰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비트는 대신 그 고유의 감동을 과녁처럼 걸어놓고 일일이 적중시킨다. 지극히 순진해서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몇몇 대목도 존재하지만 결국 마음을 울린다. 디즈니의 순수한 세계관과 픽사의 정교한 작법이 어울리며 디즈니 고유의 전통적인 감성을 새로운 기술로 계승한다. 픽사의 최고 브레인 존 래세터(John Lasseter)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꿨고, 한때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그가 지휘하는 픽사가 그린 그림이 디즈니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거액으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이 놀라운 소식은 1991년, 픽사의 장편 CG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에 대한 디즈니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당시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CG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허풍이었지만 픽사의 창립자 에드 캣멀(Ed Catmull)은 오래 전부터 그 날을 준비해왔다. 이미 단편 CG 애니메이션 <틴 토이>(1988)가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고, 디즈니의 <인어공주>(1989)나 <라이온 킹>(1994)의 부분 CG작업에 참여하며 투자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토이 스토리>(1995)로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인 2005년을 앞둔 2004년 초, 픽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토이 스토리> 이후로 <벅스 라이프>(1998), <토이 스토리 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로 승승장구했던 픽사였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이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가량을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CG 애니메이션의 반향에 밀려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마저 선언한 상태였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스티브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해고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픽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수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복원한 <공주와 개구리>(2009)와 <라이온 킹>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 전 세계 5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2010)을 기획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일명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리고 당시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 재직 당시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에드 캣멀을 찾았었다. 에드 캣멀은 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흥미를 지닌 애니메이터란 점에 주목했고 디즈니에서 해고당한 그를 픽사로 끌어들였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존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에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였지만 그는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결성된 팀은 <스타워즈>를 연출한 감독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로 편입됐다. 그곳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갔다. 그들은 회사 입장에선 낭비라 이해될 그 작업을 지속하고자 회사의 눈을 가리기 위한 기능적인 업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 제작 따위의 일 말이다. 그 당시 이는 결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에드 캣멀은 쓸모 없게 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표했던 조지 루카스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수시로 막아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플에서 퇴출당했던 스티븐 잡스에게 인수된 그들은 비로소 ‘픽사(PIXAR)’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화를 찍다’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픽서(Pixer)’를 변형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픽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10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으니 관대해질 수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가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 친구, 멘토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엔딩 크레딧에서 떠오르는 이 문구는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자”고 곧잘 말했던, 픽사의 오늘에 기여한 마지막 조력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는 이런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작품을 제작하는 어느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Andrew Stanton), 브래드 버드(Brad Bird) 등 픽사의 브레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토론한다.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예술은 팀 스포츠다”라는 픽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은 창조적인 놀이에 창조적인 놀이터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마음껏 열어둔다. 우리가 사랑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던 픽사의 오늘을 안도하게 만든다.
<라따뚜이>(2007)에서 봤던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 <월-E>(2008)의 황홀한 우주, <업>(2009)의 놀라운 비행, 그리고 <토이 스토리 3>(2010)의 심금을 울린 안녕까지,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 아래 만났던 그 사랑스러운 찰나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실로 다행이기 때문이다. 그건 예언자도 몽상가도 아닌,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밀고 나간 현실주의자들의 꿈을 통해서 완성된 현실이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에드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커팅 라인을 따라서 뜯고, 접고, 붙이면 어느 새 납작한 박스 안에 누워있던 컬러풀한 종이들이 개성 있는 페이퍼 토이로 일어선다. 얼굴도 네모, 몸도 네모, 팔다리도 네모, 이른바 ‘네모네모로보트’ 그래서 ‘모모트’. 단순한 종이 접기가 아니다. 최근 직접 사무실을 방문한 디즈니 아시아 지역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마블 시리즈 페이퍼 토이가 온전히 모모트만의 것이라 극찬했다. 호서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출신 동문 5명을 중심으로 구성된 모모트는 영업 담당을 자처하는 박희열로부터 시작됐다. 대학교 4학년 시절 페이퍼 토이에 관한 사업구상을 한 그는 그래픽 디자인 실력이 뛰어난 이준강과 이흔태를 설득했고, 같은 해 말 즈음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천진난만한 패기를 쥐고 시작된 ‘맨땅에 헤딩’은 그들을 갖은 시행착오와 맞닥뜨렸다. 함께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공정 과정을 직접 자문해준 학과 교수님 같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종이 쪼가리 따위로 무슨 돈을 벌겠냐’며 조소를 보였다.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지만 시행착오는 만만치 않았다. 투자 사기를 당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실패의 여정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모습에서 좌절 같은 단어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돈독해지고 자신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들은 결국 몇몇 브랜드를 직접 찾아가 계약을 맺었고, 꿈에 그리던 나이키와의 컬래버레이션마저 성사됐다. 우연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나이키의 제품들을 페이퍼 토이 형식으로 개발해왔고,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페이퍼 토이로 만든 나이키 신발을 전달했다. 마블 캐릭터의 국내 판권 계약도 그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제작할 수 있는 페이퍼 토이의 가짓수가 무궁무진해졌다는 점에서 실로 고무적이다. 모모트는 이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할 캐릭터를 부화시킬 예정이다. 최근 새롭게 영입한 홍인기와 손경식은 모모트만의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을 영상과 사진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꿈꾸는 건 모모트의 페이퍼 토이가 레고와 같은 전세계적인 문화적 아이콘이 되는 것. “전세계로 모모트를 유통시킬 거에요. 돈도 벌겠지만 많이 알리고 싶어요.”(박희열) 허황된 소리가 아니다. 조만간 디즈니와의 인터내셔널 판권 계약이 성사될지도 모른다. ‘어려울 때 등돌리지 않았던 사람들’만 남은 지금, 주먹구구식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왔던 3년을 지나왔다. “이젠 진짜 시작이에요. 지금부터 제대로 해야죠.”(박희열) 이렇게 터무니 없을 만큼 유쾌한 자신감이라니, 응원할 수 밖에.
솔직히 말해서 <라이온 킹>은 오늘날의 정교한 애니메이션의 기획력과 완성도에 비교하자면 떨어지는 물건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의식한 효과와 예상 범위 안에서 머무르는 기승전결, 지나치게 단순해서 부조리한 은유적 세계관, 이는 결국 픽사와 드림웍스가 주도하기 전까지 애니메이션 왕국을 자처했던 디즈니 월드가 시대적 한계에 봉착하기 전까지의 영광과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지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라이온 킹 3D>에서 눈여겨볼만한 건 고전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컨버팅 3D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됐을 때,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그 입체적인 공간감으로 구현되는 이미지의 목격이다. 3D 입체감과 탁월하게 결부되는 CG 애니메이션의 구현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때로 그 레이어의 층위가 때때로 다른 차원의 입체감을 준다는 건 흥미롭다. 하지만 역시 세월무상이랄까. 때때로 호기심은 추억을 죽인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픽사는 수많은 실패를 견뎌내고 얻어낸 이름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최고, 그 이상이 됐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금액을 들여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관계는 1991년에 시작됐다. 디즈니가 픽사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자금을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였다. 당시 CG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도박처럼 보였다. 하지만 픽사의 CEO인 에드 캣멀과 멤버들은 오래 전부터 그 날만을 고대해오며 모든 채비를 마련해갔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투자사인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즈니의 권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토이 스토리>(1995)와 함께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꿈의 왕국이라 불리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처럼 박스오피스에서 사라지는 사이, 픽사의 작품들은 꾸준히 자리를 지켜나갔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정도를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해내는 상태까지 몰렸다.
2004년 초,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픽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은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리며 신호를 보냈다. 사실 디즈니 내부에서는 픽사가 자신들의 인지도를 넘어섰다는 징후를 곳곳에서 목격하며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영접이었다. 픽사의 창작적 중추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최고창작책임자로 임명됐다. 래세터가 기획한 <라푼젤>(2010)은 <알라딘>(1992)과 <라이온 킹>(1994)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됐다.
래세터는 원래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어려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그는 디즈니가 운영하는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당시는 디즈니의 마법이 급속하게 힘을 잃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과거 래세터는 구상하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캣멀을 찾았다. 캣멀은 래세터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관심이 많은 애니메이터란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 캣멀은 그를 불러들였다. 캣멀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픽사의 전신은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던 하드웨어 그래픽 부서였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CG애니메이션 제작을 목표로 그곳에 은둔해 있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자신과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규합된 팀은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가 됐고, 애플에서 퇴출당한 잡스가 이를 인수하며 픽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픽사의 탄생에 투자했던 잡스 역시도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다만 끝내 그들의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가 있었을 뿐이다.
후에 픽사라고 불릴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그 전신이 되는 회사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가며 자신들의 투자자나 인수자들이 원했던 일들을 수행해나가야 했다. 이를 테면, CG 구현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던지,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을 제작한다던지,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을 통해서 점차 살아있는 것들을 그려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수익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은 분명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을 당시, 루카스는 쓸모 없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이견을 표했고, 캣멀을 비롯한 멤버들은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후에 이들을 500만 달러에 인수한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열 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으며 때때로 조바심을 드러냈다. 다행인 것은 그가 재능을 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로 이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 애니메이션들은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맞붙어 이룰 수 있는 최상품들을 대중 앞에 선보이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이는 성공적인 과정의 마련을 통해서 이뤄졌다. ‘브레인트러스트’는 픽사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진행 중인 어느 작품의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창작적인 난관에 빠졌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 브래드 버드 등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결국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
예술은 팀 스포츠다.” 픽사의 캐치프레이즈는 그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확실한 정의다. 각자의 재능을 더해서 최상의 완성도를 선사하는 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에 가깝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시킨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는 시스템, 이는 픽사가 직책과 직위의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한계 대신 상대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경의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최고의 결과로 나아가는 방향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감탄한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방식 안에서 탄생했다.
픽사는 그 이름을 지닐 수 있을 때까지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심지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룹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생경한 것이다. 그저 공통된 꿈을 갈망한 이들이 모여 이룬 그 창작의 연대를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살아남아 이룬 결과에 가깝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었으며 한때 몽상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결국 성공보다도 중요한 건 실현에 대한 의지였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항상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사회지도층 공주로 태어났지만 마법의 금발을 타고난 덕분에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한 소녀 라푼젤, 그녀는 자신을 유괴한 탐욕스런 여인 고델을 어머니로 알고 그녀의 반협박적인 모성애 연기에 속아 높은 탑 속에서 갇히듯 자라났다. 덕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긴 금발만큼 자라난 라푼젤의 성에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도적 플린이 침입하고 우연히 그를 붙잡게 된 라푼젤은 그가 지닌 보물을 숨긴 뒤, 자신의 소원과 맞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그림형제의 고전동화 <라푼젤>을 각색한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묵은 영광 속에서 고성처럼 낡아가던 ‘디즈니 캐슬’의 새로운 리노베이션을 선언하는 작품과 같다. 지난 2009년,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각색한 <공주와 개구리>로 셀애니메이션 명가의 저력을 21세기에 증명한 바 있는 디즈니는 <라푼젤>을 통해서 CG애니메이션에서도 디즈니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라푼젤>은 디즈니가 처음으로 시도한 CG애니메이션이 아니며 <볼트>를 통해 이미 자신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라푼젤>은 고전동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스토리 양식을 새로운 애니메이션의 기법 안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양식에 새로운 감각을 수혈해내며 디즈니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냈다.
고전동화의 텍스트를 밑그림 삼아 다채로운 캐릭터를 세워 넣고, 위트 있는 활기로 덧칠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활기는 <라푼젤>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러브스토리와 권선징악이라는 두 개의 요소는 여전하되, 새롭게 각색된 고전동화의 현대적인 운용이 돋보인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마련은 아기자기한 위트와 어드벤처로서의 활기를 더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열쇠임을 생각한다면 <라푼젤>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성과를 증명하는 단서나 다름없다.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라푼젤> 역시 다양한 노래와 춤으로 극적인 감정들을 고조시키며 흥겨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라푼젤>은 분명 디즈니라는 타이틀 안에서 빤히 읽혀지는 것들을 품은, 전형적인 디즈니 클리셰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상투성과 전형성 안에서 줄타기를 한다. <라푼젤>은 후자에 가깝다.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라는 이해를 넘어서는 건 누구나 알지만 바라고픈 이야기라는 감동이다. <라푼젤>은 픽사와 드림웍스의 시대에서도 빤하다 못해 낡아 버린 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치가 여전히 지속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식시키는 답변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디즈니의 인장이 뚜렷한 <라푼젤>은 바로 그 이름에 걸린 기대에 어울리는, 최상품의 감동으로 채워진 디즈니의 새로운 고전이다. 누구나 바라는 그 감동, 그것이 바로 디즈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가치이며 <라푼젤>에 바로 그것이 있다.
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킹>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향수 그 자체일 것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에 쌓인 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닦아낸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지닌 <공주와 개구리>는 사실상 ‘신데렐라’스토리를 끌어들이며 동화를 변용한다. 동시에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우고 1920년대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삼아 보다 현대적인 형식의 동화로서 이야기를 착안하는데 주력했다.
<공주와 개구리>는 딱히 새롭다 말할만한 여지가 없는, 디즈니의 지난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궤도 위에 탑승한 작품이다. 선악의 대비는 뚜렷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들의 역경과 모험은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조건들은 그 동안 디즈니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동원됐다. 진정성과 상투성이라는 백지장 차이는 동일한 요소들을 표현하는 방식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지녔거나 참신한 기법이나 창의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의 장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선과 악, 노래와 춤, 꿈과 희망, 역경과 모험, 단순하지만 특별한 동화의 세계로부터 구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퍼레이드와 같이 진전된다. 마법과 모험의 세계관과 춤과 노래의 향연이 볼거리를 이루지만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로맨틱한 무드다. 어드벤처와 뮤지컬은 러브스토리를 이루기 위한 소스가 된다.
1920년대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흑인공주를 그리고 있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차별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건 마치 오바마 시대를 기념하는 팬서비스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인물들은 그런 현실적 편견이나 불합리와 무관하게 동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역할로서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유아적인 낙관이라기 보단 동화적 순수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다. 디즈니의 새로운 2D 애니메이션은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아날로그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대변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는 법이다. 능수능란한 픽션의 파도 속에서도 순수한 동화적 감동은 떠내려갈 수 없다. 기술은 변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공주와 개구리>는 망각했던 동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장인과의 반가운 재회나 다름없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