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대전환점을 얻게 된 의료 과학 분야로 인해 인간의 불치병 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1967년, 인간의 평균 수명은 백 살을 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란 희생을 담보로 한 혁신이었다.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 급속도로 발전된 장기 이식술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타인의 갱생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야 했다. 1978년 헤일샴의 기숙사에서 성장했던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류 가필드), 루스(키이라 나이틀리)도 그런 부류의 삶을 살아야 했다.
2005년,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집필한 SF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를 원제 그대로 영화화한 <네버 렛미고>는 누군가의 삶을 대체하기 위해서 부품처럼 길러진 어떤 이들의 삶을 비춘 SF픽션이다. 미래적인 소재를 지난 20세기의 풍경에 대입한, 이 시대착오적인 소설은 비사실적인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아 되레 현실적인 감정을 이식하고 진지한 감정선을 주입한다. 섬세한 문체로 사건의 흐름과 인물들의 심리를 회상하는 이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서정적인 정서를 두른 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극적인 예감을 담담하고 쓸쓸하게 진술해낸다.
<네버 렛미고>는 이런 소설의 자질에 밑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는 원작에 종속된 영화의 한계라기 보단 원작이 지닌 가장 탁월한 장점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의 필연적 선택에 가깝다. 도입부부터 이야기에 잠재된 비극적 예감을 보다 직설적인 구술로서 명확하게 야기시키는 동시에 희미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의 결말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서사의 전략적 변주를 제외하면 소설과 원작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서사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역시 원작과 마찬가지로 캐시의 담담한 1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수채화처럼 맑고 안온한 풍경을 입은 섬세한 분위기 속에서 서정적인 흐름을 유지한 채 서서히 흘러나간다.
다만 서사적인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적 긴장과 심리적 상응이 예민하게 발견되는 원작에 비해서 인물의 심리적 이해와 시선의 깊이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얕은 편이다. 덕분에 영화의 안온한 인상이 심심하고 밋밋하다는 인상으로 감지되기도 하지만 이는 큰 단점이라 지적될만한 사항은 아니다. 지난 과거를 회고하는 캐시의 나직한 독백은 낭만적인 추억에 가깝게 묘사되는 과거의 이미지 속에서 더욱 쓸쓸하게 비극적인 예감을 유지하며 결말에 다다라 간절함이 깃든 인물의 처연한 감정을 수려한 여운의 그림자로 드리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또한 성장드라마로서의 흥미와 로맨스물로서의 긴장을 보다 도드라지는 형태로 발전시킴으로써 감정적인 온도차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긴 호흡을 지닌 소설을 축약된 이미지와 대사로 전달하는 이 영화는 변주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에 아기자기한 해석을 가미하며 영화만의 의미를 간직해낸다.
자신들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채 아스러져 가는 젊은 청춘의 삶. 비사실적인 현실을 그린 이 영화가 되레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젊은 배우들의 잠재력 덕분일 것이다. 캐리 멀리건, 키이라 나이틀리, 앤드류 가필드는 <네버 렛미고>에서 성장드라마와 로맨스물의 결을 이루는 좋은 원목과 같다. 특히 1인칭 독백으로 서사를 열고 닫는, 떨림이 깃든 담담한 어조로 감정의 수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고, 정서적 가지에 가녀린 떨림을 만드는 캐리 멀리건의 연기는 그녀가 지닌 너른 가능성을 짐작하게 할만한 대목이다.
늑대 사회의 계급은 사회지도층을 일컫는 ‘알파’와 늑대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오메가’로 구분된다. 케이트는 알파고, 험프리는 오메가다. 험프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케이트와 달리 험프리 눈에는 케이트가 김태희고 전도연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험프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건 단지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으로 끝나야 할, 오래된 늑대 사회의 계급적 운명론이다. 어쨌든 <알파 앤 오메가>는 늑대 종족을 구분하는 두 계급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케이트와 험프리의 모험과 로맨스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생소한 개념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내세우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늑대 사회의 계급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늑대 사회는 세 계급으로 자신들의 우열을 구분하는데 그 순열에 따르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뉜다. <알파 앤 오메가>는 계급의 양 극단을 지칭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계급적 배타성을 통해 늑대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즉 늑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설정이 그러할 뿐, 이 애니메이션이 셰익스피어의 그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처럼 절절한 로맨스의 비극 따위를 연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골자는 간단하다. 계급적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쌍의 늑대가 있고, 그들 중 낮은 계급에 속하는 수컷이 암컷을 짝사랑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윤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암컷은 수컷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이웃 늑대 부족의 사회지도층 수컷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지는 법, 갑작스런 인재에 휘말려 험프리와 케이트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먼 곳으로 떠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늑대 사회로 위장한, 계급적 신분차를 뛰어넘는 남녀의 로맨스물이다. 중간중간 골자로 코믹한 설정들이 끼어드는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애니메이션이 그 빤한 설정들을 불식시킬 만큼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나 탁월한 발상의 전환을 지니고 있느냐는 물음에 답변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알파 앤 오메가>는 이에 충실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한 작품이다. 픽사와 드림웍스가 매년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은 몇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다크호스처럼 떠오르기도 하는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링에 등장한 라이온스 게이츠의 <알파 앤 오메가>는 어떤 특이성이나 기발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소위 요즘 날고 긴다는 애니메이션 작품 가운데 가장 몸값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 흉내 내는 늑대들과 몇몇 동물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드림웍스 캐릭터들의 실패적인 아류처럼 보이고, 그들이 구사하는 유머란 다소 지나친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서 웃어야 할지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 역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낭비적이며 전반적인 스토리텔링 역시 불필요한 사연을 늘려나간다는 인상을 넘을 만한 감상을 얻기 어렵다. 어드벤처로서 추천할만한 시퀀스를 찾는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물론 3D의 입체감을 활용하겠다는 야심만으로 그득해 보이는 몇몇 시퀀스는 입체안경의 쓸모를 재확인시켜주겠지만 그게 최선은 아니다. 한 가지 의미를 짚어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이온스 게이츠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서의 쓴 유산이 될 것이라는 조언 정도가, 그게 최선의 칭찬이 될 것 같다. 물론 <알파 앤 오메가>를 (사실상 이 리뷰 따위가 필요 없는) 순수한 아동들을 위한, 동화적인 교육용 애니메이션 정도로 여긴다면 앞선 박한 언어들 따위는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필름 원본이 유실됐다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는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이 되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빨갛게 물들이며 강렬하게 마지막 삶을 치장하는 단풍과 같은 멜로다. <만추>는 살인죄로 체포돼 수감된 여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7년 만에 3일 동안의 외출을 얻게 되고, 그 짧은 외출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 순간 강렬한 열애에 빠져든다는 로맨스물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의 반복을 거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동명의 로맨스물로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 묵은 감정의 허물을 벗기듯 오랜 신파의 유효기간을 다시 한번 연장한다.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만희와 김수용의 <만추>가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 형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 시애틀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리모델링된 김태용의 동명 리메이크물은 그 상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차별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애틀의 풍경 속에 놓인 동양의 남녀는 자신들이 밟고 선 그 이국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대비되며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잉태하지 않았던 이국의 풍광 속에 머무는 두 남녀의 몽타주는 그 단적인 풍경만으로도 두 사람의 외로움을 한껏 드러낸다. 복역 중인 수감자 신분으로서 3일만의 외출을 허락 받은 여자와 자신의 육체를 이국에서의 새로운 생을 위한 밑천으로 삼은 남자의 만남은 그리하여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을 증발시켜버리듯 적막한 감상 속으로 관객의 시선을 묵묵하게 걷게 만든다. 대사 하나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만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 오프닝부터 모든 서사의 뒤에 홀로 남겨진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는 탕웨이의 설렘을 여운처럼 남긴 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엔딩까지, <만추>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에서 염원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으며 관객을 점차 갈망하게 만든다. 뿌연 안개가 걷히듯 러닝타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기승전결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는 감정적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며 훈(현빈)과 애나(탕웨이)의 개인적 서사를 유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돼 나가는지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강물처럼 서서히 극을 떠내려 보낸다.
범상치 않은 전력을 지닌 두 남녀가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나 단 3일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서로에게 진한 감정을 물들이는 두 남녀의 거짓말 같은 러브스토리가 담긴 <만추>는 두 인물의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온도차로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멜로물의 특성에 발을 들이기 보단, 되레 감정을 증발시키고 저온으로 숙성된 감정을 결말에 다다라 여운으로 휘발시킨다. 고즈넉한 가을로 접어든 시애틀은 적막하고도 고요하며 그 속에서 방랑하다 조우하듯 마주친 두 동양 남녀의 사연은 저마다 처연한 짐작을 부르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숙연하게 무르익는다. 김태용의 <만추>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적 진전이 동시간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경험적 교감으로서 설득해낸다. 외로운 두 인물의 감정이 자연히 공감대를 이루고, 이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점차 감정적인 깊이를 형성하게 된다.
백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넣기 좋은 표정을 지닌 탕웨이는 <만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될만한 자원이다. 그녀는 현빈의 들뜬 연기를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극적인 흐름 안에서 분위기의 편차가 큰 <만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 같이 자리한다. 현빈 역시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캐릭터와의 궁합도 적절하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드는 인상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생의 끝을 예감하듯 빨갛게 제 몸을 태운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 나뒹굴기 직전의,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멜로다.
남편의 죽음 이후로 살림에 어려움을 느끼던 연주(김혜수)는 자신의 2층집에 세입자를 구하지만 좀처럼 방을 구하는 이가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딸 성아(지우)는 엄마에게 성형수술을 해달라며 조르기만 하니 엄마 속은 더욱 타 들어가고 매일 같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다. 어느 날, 방을 보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연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당장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 창인(한석규)에게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고, 그는 줄곧 연주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층의 악당>은 ‘적과의 동침’이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전하다 결국 ‘가족의 탄생’으로 종착하는 기이한 로맨스 코미디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 눈길을 끌지만 그에 앞서서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재기발랄한 범죄 로맨스를 연출한 바 있는 손재곤 감독의 4년 만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선명한 물음표를 쥐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층’이라는 구조와 ‘악당’이라는 캐릭터가 부각된 제목처럼 <이층의 악당>은 공간의 활용범위가 탁월하고 캐릭터를 매만지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치 캐릭터를 방아쇠로 당겨 스토리의 곳곳에 매복시킨 뇌관을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1층과 2층을 경계로 한 지붕 아래서 거주하게 된 창인과 연주의 관계는 그 자체로부터 새어 나오는 긴장감은 서서히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고, 관계의 전환을 통해 흥미를 지속시키며 그 관계를 통해 불거지는 갈등이나 예기치 못한 감정의 발화를 통해 폭발적인 유머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층의 악당>은 창인과 연주의 심리적 거리가 서로 공유하게 되는 동선의 확대와 함께 점차 묘한 심리적 연대로 변모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감정적 설득력을 통해 감상을 지배해나간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채 연주에게 접근해 나가던 창인이 연주와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은 비슷한 부류의 로맨스물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성이기는 하나 <이층의 악당>은 그런 관계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묘사할 뿐, 화학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야기 안에 구겨 넣지 않는다.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냉정하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인물과 다소 백치미스러운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그의 목적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인물 간의 줄다리기는 효과적인 유머의 기반으로서 손색이 없다.
정말 웃긴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지하실 시퀀스’와 같이 <이층의 악당>은 두 인물 사이에 놓인 비밀과 접근성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 밖의 상황들을 연출해냄으로써 폭발력 있는 서스펜스와 유머를 찰나에 묶어둔 채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재미를 끊임없이 개발해 나간다. 시종일관 편차 없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스토리텔링은 시작과 끝이 깔끔하며 의뭉스럽게 시선을 잡아 끄는 캐릭터들은 예측 불허의 긴장과 유머를 들이밀지만 저마다 쓰임새가 적절하다. 물론 소모적인 캐릭터가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층의 악당>은 전반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올해의 물건이라 장담할만한 코미디의 발견이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앙상블도 흥미롭지만 그에 앞서서 <이층의 악당>은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견한 손재곤 감독의 검증을 이룬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확실한 의미를 짚게 만든다.
<트와일라잇>과 <뉴 문>에 이은 속편이라니, 적어도 두 편의 전작 가운데 하나라도 관람한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즐길만한 것인지, 혹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인지. <이클립스>는 사실 더 이상 할 말이 필요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선 두 편의 작품, 특히 전작인 <뉴 문>은 이 시리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가이드나 다름없는 작품이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틴에이저 할리퀸 로맨스라는 것. 평범한 소녀를 둘러싼 훈남들의 삼각구도 경쟁 구도라니, 이를 지켜보는 여인들의 마음에 지펴질 훈훈한 로망과 남정네들의 오그라든 손가락 위로 내뿜어질 냉담한 한기의 대립 구도가 되레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만한 것일지도 모를 이 시리즈의 관람 포인트란 다시 말해 이렇다.
<이클립스>가 전편과 마찬가지로 북미 오프닝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경신해버렸다는 사실은 이 시리즈를 지지하는 만만찮은 팬덤의 실체를 가늠하게 만든다. 대단한 인기를 누린 원작팬들을 고스란히 상영관으로 끌어들인 이 시리즈의 저력이란 원작의 텍스트가 노골적으로 서술해내던 할리퀸 로맨스가 영상으로서 스크린에 투영된다는 점 정도랄까.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시리즈가 누리는 대단한 인기의 저력 그 자체나 다름없다. 원작소설의 팬덤이 영화화된 작품으로 이어져 오는 과정은 단순히 계승이 아닌 폭발로서 위력을 더했다. 말 그대로 이건 현상이다. 작품의 기본적인 완성도를 놓고 <이클립스>가 어떤 작품인가를 설명한다는 건 꽤나 무력한 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경쟁 구도는 보다 심화되고, 이와 함께 특별한 혈통을 지닌 두 훈남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제이콥(테일러 로트너) 사이에 놓인 소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어장관리 능력은 보다 강화된다. 마치 햄릿만큼이나 심각하게 ‘뱀파이어냐, 늑대인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고민을 오가는 벨라를 사이에 두고 전전긍긍하면서도 자신의 경쟁자를 향해 양 눈 가득 힘 준 두 청년의 러브스토리란 누군가가 보기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인 동시에 낭만적인 것이 될 게다. 그리고 아주 간혹, 그리고 극의 말미를 잠시 지배하는 액션신은 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액션 따위는 필요 없어.
정리하자면 이렇다. 두 손을 모아 <이클립스>가 개봉되기만을 학수고대한 당신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에 상영관을 찾았다면 그 죽일 놈의 호기심을 판돈처럼 건 자신의 이성을 탓하시라. 게다가 이 시리즈는 여기서 끝이 아니며 그것도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작의 최종편인 <브레이킹 던>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제작된다 하니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기괴할, 하지만 폭발적일 이 현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유효할 것이다. 마치 제 몸을 갈라도 되레 두 개의 생명으로 분화되는 플라나리아를 보는 것마냥 끈질기게 등장할 이 시리즈에 발을 들일 것이라면 일찌감치 자신의 취향을 잘 판단하거나 혹은 시험에 들기 전에 각오라도 하시던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조언은 선택은 자유지만 책임도 자신의 몫이라는 것. 악마적인 매력에 헤어나지 못하던가, 악마의 유혹에 2시간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느끼던가, 빠져들거나 혹은 오그라들거나, 판단도 감당도 셀프다.
성실한 경찰이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스티브 러셀(짐 캐리)은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결심한다.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그 원하는 삶이란 그의 진짜 정체성, 즉 동성애자로서의 삶이다.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가장으로서의 위장된 삶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누리던 러셀은 게이로서의 삶이 대단한 수입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되고 그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위해 갖가지 사기를 구상하고 실행하며 성공한다. 하지만 결국 러셀은 사기 행각이 드러나 감옥으로 향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그 감옥에서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
너무나도 유명한 고유명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이지만 <필립 모리스>는 그 익숙한 고유명사와 무관한 또 다른 고유명사로서의 의미를 품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임을 거듭 강조하는 <필립 모리스>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이자 탈옥수였던 러셀의 활약상(?)을 다룬 러브스토리(!)다. 여기서 필립 모리스는 바로 그 러셀이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 말 그대로 필립 모리스(이완 맥그리거)인 것. <필립 모리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기꾼이자 탈옥수인 러셀의 실화적 삶을 다룬 극영화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필립 모리스> 역시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진짜 사연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다양한 사기와 탈옥 전력을 지닌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흥미 본위의 이야기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필립 모리스>는 케이퍼 무비와 같은 활기로 사건을 전진시키고 축적된 서사의 정보를 밑천으로 그 결말에 다다라 숙성된 성장드라마와 깊은 로맨스의 정서를 끌어내는 작품이다.
물론 <필립 모리스>가 실제 인물의 행위를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연출적 과장 혹은 비약이 가미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짐 캐리 특유의 연기적 특성은 실제 인물의 행위 자체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캐릭터를 극적인 방식으로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필립 모리스>의 분위기나 뉘앙스를 지배하는 절대적 특성으로 발전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게이 로맨스물로서 두 커플을 묘사하는 방식 혹은 배우들의 연기방식은 동성애자에 대한 특정한 편견이 고스란히 활용됨으로서 대상을 희화화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도 일부나마 자유롭지 않다.
이는 <필립 모리스>가 인물보다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 전기적 재현 영화라는 증거에 가깝다. 그만큼 영화가 앞세운 실제 인물의 행적은 서사적으로 사실적이되 행위적으로는 과장돼 있으나 왜곡되지 않았다. 또한 <필립 모리스>는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것은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분위기 덕분이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스크린에 옮겨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겠지만 인물의 범죄행각이 그 시대에서 발견되는 틈새를 파고든 영악한 결과인 덕분이란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인물의 현재가 그들의 어떤 과거적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결말부에 다다라 일순간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기는 클라이막스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필립 모리스>는 분명 유쾌하고 활달한 영화다. 어떤 동정심조차도 거부하려는 것처럼 이 영화는 비극적이라 말할 수도 있는 그 결말 너머에서도 유쾌한 감정을 잃지 않는다. 이는 역시 짐 캐리라는 배우로부터 생산된 기질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나 다름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무후무한 사기탈옥극이자 퀴어 로맨스물인 <필립 모리스>는 소재 자체의 가능성이 배우의 특성에 필터처럼 걸러져서 완성된 작품인 셈이다. 물론 <필립 모리스>의 백미는 영화가 끝난 뒤 몇 줄의 자막이 전해주는 진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성장이 신체적인 발육과 성징을 통해 이뤄지는 선천적 변이라면 성숙이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한 교육과 학습으로서 완성되는 후천적 변화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한다. 성장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성장 너머로 자신의 꿈이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간을 뒤돌아본다. 때때로 아이였던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는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유년 시절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일이다. 성장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되레 그 성장과 함께 그 꿈들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며 현실을 합리화시킨다.
성장이 개인적 영역에서의 완성이라면 성숙은 그 개인과 연관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완성에 가깝다. 개개인의 성숙은 사회를, 그리고 세계를 성숙시킨다. 성숙은 개인의 자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주변의 도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관계적 변화다. 성장이 성숙을 동반할 때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한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은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성숙한 교육이 이뤄진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유산처럼 물려주는 어른들의 아집이나 자신이 타협한 현실을 당연한 것이라 충고하는 어른들의 편견은 때로 교육적이란 말로 남용된다. 성숙한 교육은 성숙한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이룬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명민하다. 아버지로부터 ‘옥스포드’ 진학을 강요당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학교에서도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만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하지만 제니는 우등생이기 이전에 호기심 많은 소녀다. 옥스포드 진학의 유일한 걸림돌인 라틴어 공부보다도 첼로 연주와 샹송에 관심이 많으며 후에 프랑스 파리에 꼭 가보리라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시시하다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을 흔드는 계기가 생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 첼로를 든 채 비를 맞고 서 있던 제니에게 낯선 중년 남자가 호의를 베푼다. 데이빗(피터 사스가드)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온 제니는 그에게 미묘한 호감을 느끼고 그와 재회한 뒤, 자신이 꿈꿔왔던 혹은 예감하지 못했던 짜릿한 경험을 거듭해 나간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삶 가운데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을 만끽하고, 점차 지난 일상들이 시시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가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썼다는 12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을 각색한 닉 혼비의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언 애듀케이션>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언 애듀케이션>은 17세 소녀가 우연히 찾아온 중년 남자와의 로맨스를 거치며 보다 성숙해지는 성장담을 그린다. 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소녀는 우연히 찾아온 인연을 통해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낭만과 자유의 일탈을 겪어 나가고 그 특별한 경험과 짜릿한 감정에 도취되어 그것이 자신의 이상이라 믿게 된다. 하지만 뒤늦게 그것이 가혹한 착각이자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소녀는이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졌던 기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가능성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라는 본질을 관통하면서도 전형적인 교육관에서 벗어난 영화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성찰을 중시하면서도 본질적인 교육적 제도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설득한다. 일탈은 소녀에게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생채기를 안겨주지만 이는 보다 단단하게 아물어 소녀의 성장을 수식하고 성숙으로 인도한다.
그 성장담은 <언 애듀케이션 An Education>이라는 제목이 직시하는 것처럼, ‘교육’이라는 명제에 대한 철학을 이끌어내는 은유적 구실을 하고 있다. 제니에게 주변인의 기대가 짐이 되는 건 옥스포드 진학의 가치를 설득해줘야 할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탓이다. 기대는 버겁고 강요는 거세다. 제니에게 옥스포드 진학이란 드넓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현실로부터 달아날 기회를 마련해주는 기회일 뿐이다. 제니에게 얹혀진 어른들의 기대감은 제니가 품은 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부모의 기대도, 선생님의 충고도, 그녀의 기대할만한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제대로 설득시켜 줄 어른의 충고가 부재하다는 것. 그 역할을 대신하는 건 경험이다. 경험은 좋은 교훈이 된다. 제니는 자신에게 찾아온 달콤한 경험을 만끽하고 안주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손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면의 진실을 마주한 뒤, 자신의 선택이 이룬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제니에게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건 교육이다. 학교를 떠나 옥스포드에 진학하지 않고도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제니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미성숙한 제자의 얕은 확신을 걱정하던 스승은 제자의 절망을 책망하지 않으며 그 경험이 남긴 교훈을 쓰다듬는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란 제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의 시행착오마저 돌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는 걸 알았다”는 제니는 자신이 멸시하던 스승에게 뒤늦게 도움을 청하고, 스승은 “그 말을 기다렸다”며 제자를 맞이한다. 달콤했던 일탈의 경험은 끝내 절망적인 파국으로 갈무리되지만 어린 소녀의 인생은 파국으로 멈추지 않는다. 제니의 말처럼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 막다른 길도 없다. 다만 자신의 인생이 지름길을 내달리고 있다고, 혹은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필요한 건 설득의 힘이다. 성공을 위해 매달려야 할 가치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인생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시행착오마저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교육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킹>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향수 그 자체일 것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에 쌓인 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닦아낸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지닌 <공주와 개구리>는 사실상 ‘신데렐라’스토리를 끌어들이며 동화를 변용한다. 동시에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우고 1920년대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삼아 보다 현대적인 형식의 동화로서 이야기를 착안하는데 주력했다.
<공주와 개구리>는 딱히 새롭다 말할만한 여지가 없는, 디즈니의 지난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궤도 위에 탑승한 작품이다. 선악의 대비는 뚜렷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들의 역경과 모험은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조건들은 그 동안 디즈니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동원됐다. 진정성과 상투성이라는 백지장 차이는 동일한 요소들을 표현하는 방식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지녔거나 참신한 기법이나 창의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의 장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선과 악, 노래와 춤, 꿈과 희망, 역경과 모험, 단순하지만 특별한 동화의 세계로부터 구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퍼레이드와 같이 진전된다. 마법과 모험의 세계관과 춤과 노래의 향연이 볼거리를 이루지만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로맨틱한 무드다. 어드벤처와 뮤지컬은 러브스토리를 이루기 위한 소스가 된다.
1920년대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흑인공주를 그리고 있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차별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건 마치 오바마 시대를 기념하는 팬서비스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인물들은 그런 현실적 편견이나 불합리와 무관하게 동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역할로서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유아적인 낙관이라기 보단 동화적 순수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다. 디즈니의 새로운 2D 애니메이션은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아날로그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대변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는 법이다. 능수능란한 픽션의 파도 속에서도 순수한 동화적 감동은 떠내려갈 수 없다. 기술은 변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공주와 개구리>는 망각했던 동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장인과의 반가운 재회나 다름없다.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은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