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 대전환점을 얻게 된 의료 과학 분야로 인해 인간의 불치병 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1967, 인간의 평균 수명은 백 살을 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란 희생을 담보로 한 혁신이었다.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 급속도로 발전된 장기 이식술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타인의 갱생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야 했다. 1978년 헤일샴의 기숙사에서 성장했던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류 가필드), 루스(키이라 나이틀리)도 그런 부류의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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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사회의 계급은 사회지도층을 일컫는 알파와 늑대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오메가로 구분된다. 케이트는 알파고, 험프리는 오메가다. 험프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케이트와 달리 험프리 눈에는 케이트가 김태희고 전도연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험프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건 단지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으로 끝나야 할, 오래된 늑대 사회의 계급적 운명론이다. 어쨌든 <알파 앤 오메가>는 늑대 종족을 구분하는 두 계급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케이트와 험프리의 모험과 로맨스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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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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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 이후로 살림에 어려움을 느끼던 연주(김혜수)는 자신의 2층집에 세입자를 구하지만 좀처럼 방을 구하는 이가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딸 성아(지우)는 엄마에게 성형수술을 해달라며 조르기만 하니 엄마 속은 더욱 타 들어가고 매일 같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다. 어느 날, 방을 보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연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당장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 창인(한석규)에게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고, 그는 줄곧 연주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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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뉴 문>에 이은 속편이라니, 적어도 두 편의 전작 가운데 하나라도 관람한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미 알아차렸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즐길만한 것인지, 혹은 견딜 수 없는 고문인지. <이클립스>는 사실 더 이상 할 말이 필요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선 두 편의 작품, 특히 전작인 <뉴 문>은 이 시리즈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가이드나 다름없는 작품이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틴에이저 할리퀸 로맨스라는 것. 평범한 소녀를 둘러싼 훈남들의 삼각구도 경쟁 구도라니, 이를 지켜보는 여인들의 마음에 지펴질 훈훈한 로망과 남정네들의 오그라든 손가락 위로 내뿜어질 냉담한 한기의 대립 구도가 되레 볼만한 구경거리가 될만한 것일지도 모를 이 시리즈의 관람 포인트란 다시 말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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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한 경찰이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스티브 러셀(짐 캐리)은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결심한다.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그 원하는 삶이란 그의 진짜 정체성, 즉 동성애자로서의 삶이다.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가장으로서의 위장된 삶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누리던 러셀은 게이로서의 삶이 대단한 수입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되고 그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위해 갖가지 사기를 구상하고 실행하며 성공한다. 하지만 결국 러셀은 사기 행각이 드러나 감옥으로 향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그 감옥에서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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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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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성장이 신체적인 발육과 성징을 통해 이뤄지는 선천적 변이라면 성숙이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한 교육과 학습으로서 완성되는 후천적 변화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한다. 성장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성장 너머로 자신의 꿈이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간을 뒤돌아본다. 때때로 아이였던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는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유년 시절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일이다. 성장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되레 그 성장과 함께 그 꿈들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며 현실을 합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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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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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문> 단평

cinemania 2009. 12. 1. 14:36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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