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같은 대부호지만 고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쓴 가면 아래에서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는 브루스 웨인과 달리 토니 스타크는 과감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낸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나 <엑스맨>의 뮤턴트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할 이유도 없다. 그는 부유하며, 똑똑하고, 외향적이다. 타인의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무대 매너가 대단한 셀레브리티의 전형에 가깝다.
토니 스타크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대단한 사명감이 없다. 물론 <아이언맨>에게도 ‘능력’과 ‘책임’의 알고리즘은 작동된다. 그러나 그것이 올가미 같은 숙명이 아닌 삶의 유희를 이루는 기반처럼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발견된다. 토니 스타크는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선친의 말을 신봉하는 사내다. 그에게 힘이란 평화유지라는 혜택을 통해 얻어내는 유명세의 권위, 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이상을 구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체제나 다름없다. 히어로로서의 의무와 개인의 정체성 안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기존의 히어로물과 <아이언맨>시리즈를 구분하게 만드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이언맨2>는 이런 인물의 성격을더욱 적극적으로펼쳐 보인다. 자신이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에서 끝났던 전편의 서사를 이어받은 후속편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만한 아이언맨 슈트를 국가에 귀속시키라는 의회의 요구를 맞받아친다. 심지어 대중의 앞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어필한다.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통해 인기와 영합하는 셀레브리티 히어로는 분명 이례적인 것이었고, 여전히 이례적이다. 이를 통해 <아이언맨>은 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의 액션 이상으로 특별한 묘미를 장착시킨다.
성공한 히어로물, 더 넓게 말하자면 액션 블록버스터가 시리즈로 거듭나는 건 당연한 관례가 됐다.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흥행을 목표로 두고 그 이후의 계획을 설정해내는 근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제작 행태를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들은 어김없이 스케일의 확장이라는 엔터테인먼트의 양적 팽창울 통해 새로운 시리즈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아이언맨2> 역시 새로운 시리즈가 확장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예기치 않게 변경된 캐릭터를 논외로 둔다 해도) 새로운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너비를 넓히고 개연성을 확대시킨다.
중요한 건 시리즈를 거듭하는 어느 히어로 무비가 그러하듯이새로운 적의 등장과 함께 주연 캐릭터가 맞서야 할 필연적인 위기를 그린다. <아이언맨2>에서 아이언맨은 내외적인 위협에 당면한다. 러시아의 물리학자 아이반 반코(미키 루크)는 (아이언맨의 슈트에 활용되기도 하는) 원자로 기술의 도면을 스타크 기업에 강탈당했다는 한을 안고 쓸쓸히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위플래시’를 개발해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동시에 스타크 기업의 경쟁사 CEO인 저스틴 해머(샘 록웰)는 토니 스타크를 넘어서기 위해 그를 몰락시킬 궁리를 한다. 가장 큰 적은 토니 스타크의 몸에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중금속 팔라듐을 사용한다. 이는 몸에 치명적인 중독 현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토니 스타크는 슈트를 입을 때마다 죽음과 근접해간다.
새롭게 등장한 적과 사투를 벌이고, 이전에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핵장치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토니 스타크는 그럼에도안티히어로의 길을 걷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되지만 이는 히어로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가치관이나 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동되기 보단 말 그대로 고비로서 장착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아이언맨2>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장기적 계획을 위한 밑그림으로서 도구화되고 있다. <아이언맨>의 쿠키에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를 등장시키며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열전이나 다름없는 <어벤져스>에 대한 팁을 남겼던 사례는 <아이언맨2>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확장되고 적극적으로 그 계획을 홍보한다. 특히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의 등장은 그 캐릭터의 비중과 무관하게 시리즈의 밑바탕을 다지기 위한 포석으로서 보다 유용하다. 물론 <어벤져스>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이 없는 관객에게 이는 불필요한 사족이자 시리즈로서의 일관성을 해치는 요인처럼 읽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 <아이언맨2>는 단지 시리즈의 속편으로서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시작점에 가깝다.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야심을 벗어난 사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같은-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서사적 내밀함이 전작에 비해 조금 부실해졌음을 지적할만하다. 하지만 캐릭터의 종이 늘었음에도 저마다 적당한 쓸모를 자랑하며 액션은 보다 강화됐고, 볼거리는 충만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개성은 여전히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가 걸친 금속슈트의 약발은 유효하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배우가 교체된) 토니 스타크의 친구 제임스 로드 중령(돈 치들)은 아이언맨의 동료 워 머신으로 거듭나며 액션의 묘미를 두 배로 키운다. 다만 화려한 등장이 주는 기대감에 비해 졸속적으로 퇴장하는 듯한 미키 루크만큼은 다소 아쉽다.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
(연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근미래에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대체에너지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로 공급한다. 소량만으로도 고효율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자기장 물질 언옵타늄은 지구에서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덕분에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미해병대 출신이지만 다리가 마비되어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가 판도라 행성에 온 건 언옵타늄의 채굴과 관련해 과학자로서 핵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다.
그 과업이란 제이크 셜리의 일란성 쌍둥이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Na'vi)'족의 유전자에 결합해 만들었다는 ‘아바타’를 형과 유전자가 일치한 제이크 셜리에게 맡기는 것. 나비족의 주둔지에 매장된 막대한 언옵타늄을 채굴하려는 기업적 야심은 제이크 셜리에게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수술비를 보장하며 그를 판도라 행성으로 이끌고 그에게 아바타의 육체를 입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바타에 접속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이 빌린 새로운 육체가 두 발을 땅에 딛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판도라 행성의 밀림에서 거대한 현지야생동물의 습격을 받게 된 그는 일행으로부터 낙오돼 죽을 고비를 맞이하지만 나비족 여성 네이터리(조 샐다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생명의 나무’가 있는, 나비족의 본거지로 들어서게 된다.
친자연적인 노스탤지어 이미지
<아바타>는 분명 혁신적인 비주얼만으로도 그 가치에 대한 의심이 불필요한 영화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걸고 등장한 기존의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받아 왔던 것과 달리, <아바타>는 비로소 성과라는 단어를 동원해도 좋을만한 값어치를 드러낸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3D비주얼을 실험하며 답보와 약진의 데이터를 구축해온 로버트 저메키스와 달리 제임스 카메론은 장고의 시간을 인내하며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온전히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버릴 참이다. <아바타>가 새롭다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지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그 이미지의 형태를 지칭하는데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으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는 특별함은 그 외형적 디자인보다도 판도라의 대자연과 (유사인류 형태를 띤) 나비족의 내면적인 교감방식을 전시하는데서 비롯된다.
<아바타>는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판도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은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는 방대한 네트워크 망이자 형광색 혈액이 흐르는 혈관으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판도라 행성의 식물과 대지는 마치 센서를 장착한 터치스크린처럼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때마다 LED조명에 가까운 선명한 조도를 밝힌다. 개체들의 반응은 서로를 연결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정보망을 구성한다. 형광 색채감을 드러내는 판도라의 야경은 시각적으로 황홀한 결과물이지만 그 조직적 체계를 완성한 아이디어가 보다 놀라운 산물에 가깝다. <아바타>는 창조와 응용이라는 창작적 협주로서 거대한 세계관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전율을 이루는 영화적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나 다름없다.
현대적인 감각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판도라의 풍요로운 원시림 이미지는 주제의식을 단단하게 매만지는 수단으로서 효과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디지털 문명에서 비롯된 착상이 자연적 풍경과 접목됐을 때 발생하는 감상적 결과가 단순한 교훈적 주제를 순수의 경지로 이끌어낸다. 오만한 기계적 문명을 동원해 나비족의 자연을 파괴하고 유린하는 인류의 민폐는 판도라 행성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두드러진다. 동시에 3D비주얼을 위시하는 기능적 이미지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기술적 발전을 과시하는 이미지 기술을 진정한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서 영화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한 성과가 드러난다.
자연친화적 노스탤지어, <아바타>는 노골적인 주제의식을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순하고 명확하게 밀고나간다.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인류의 어리석은 욕망은 손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주거지를 무덤으로 만들어나간다. <아바타>에서 인류는 점차 푸른빛을 잃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외계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마저 파괴를 일삼는 비루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을 지적하는 주제의식을 지닌 영화들은 <아바타>이전에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 <아바타>가 상투적인 영화라고 확신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순하다’와 ‘엉성하다’의 의미는 명확히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라는 형태로서 이야기될 때 더욱 마땅한 평가가 가능해보인다.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아바타’ 세계관
<아바타>가 전시하는 판도라의 생태계는 사실상 지구의 생태계를 리모델링한 것에 가깝다. 그 이미지의 형태가 익숙한 것이라기 보단 그 이미지의 모티브가 명확히 읽힌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에 다다르진 않을만한 풍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판도라는 지구의 ‘아바타’ 같은 행성이다. 사실상 <아바타>의 세계관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토대로 구축된 ‘아바타’ 같은 세계관이며 이로서 <아바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거대한 우화로서 기능한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제이크 셜리는 곧 관객을 위한 ‘아바타’이며 <아바타>라는 영화 자체가 이 세계의 발전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아바타’와 같은 영화인 셈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모티브는 그 외형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자의식마저도 이 세계와 연동돼있다. 제국주의 근대사를 비롯해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수난의 기록이 역사로서 당당히 자리한 인류의 서사는 <아바타>를 이루는 가장 명확한 근간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인류의 폐해적 역사를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에 반영한 <아바타>는 폭력적인 인류의 욕망을 고발하는 이미지와 그 욕망의 자멸을 그리는 내러티브로서 강한 공분과 희열을 전달한다. 나비족의 본거지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들의 공세는 그 자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짓이겨버릴 것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이 붕괴되는 광경을 통해 관객은 인류가 저지른 침탈과 파괴의 역사를 환기시킬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의표를 찌른다. 후반부에 (아바타의 육체를 빌린) 제이크 셜리가 이끄는 나비족의 역공이 대단한 쾌감을 부르는 것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연동된 상승효과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동족들의 죽음에 대단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타>는 인류의 자멸을 통해 인류의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미지의 혁명이란 수사는 실상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아바타>가 영화의 미래라 불릴만한 근거도 이 지점에 있다.
<아바타>의 스크린은 단순히 기술적 진화를 전시하는 윈도우가 아니다. <아바타>에 동원된 기술적 진화는 영화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서 제 위치를 확고히 지킨다. 이는 3D비주얼이라는 기술적 대안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 안에서도 발전적인 답변이다. 단순히 전시적 효과로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3D비주얼은 분명 ‘영화적’이란 단어 안에서 충분한 가치를 설득한다. 물론 <아바타>는 단순히 체험적 행위만으로도 가치가 온당한 영화다. <아바타>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 대단한 수준의 체험이 숭고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현존하는 3D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장담해도 좋은 첫 번째 성과다. 제임스 카메론은 로버트 저메키스가 결코 헤어나지 못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모션 퍼포먼스 캡쳐’라는 새로운 촬영기술을 도입해 완성했다는 <아바타>의 디지털 캐릭터들은 낯선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상상력을 두른 채 실사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아바타>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동자에 감정을 구현했다. 실제 배우의 외모가 서린 동시에 나비족의 외형적 특성이 포장된 <아바타>의 디지털 외계인들은 선명한 눈동자의 자연스런 동공 수축과 근육 이완을 디테일하게 전시하며 이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그 디지털 캐릭터들의 눈망울은 <아바타>의 감정적 깊이를 드러내는 호수나 다름없다. 그 눈은 제임스 카메론을 테크놀로지의 장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방점인 동시에 <아바타>의 기술적 진보에 진심마저 담아낸 진화의 산물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화시키고자 ‘아바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이를 통해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타이타닉>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했던 제임스 카메론의 오만한 발언은 <아바타>를 거쳐 진정한 자신감으로 진화했다. <아바타>라는 결과물로서 자신의 왕좌를 증명해냈다. <아바타>는 분명 새로운 세기를 일군 영화적 유산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21세기 고전이 탄생했다.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벌써부터 로버트 저메키스의 한숨이 들린다. 저메키스가 오랫동안 약진과 답보 사이를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한 방으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참이다. 현격한 기술력의 진화가 대자본의 투자 가치마저 설득할 정도로 놀랍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라는 닳고 닳은 소재를 순수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건 아이디어의 힘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은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의 가상적 체험을 가능케한다. 접촉을 감지할 때마다 형광빛의 색채감과 LED에 가까운 조도를 밝히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테리어된 원시림의 풍요를 접목하며 환상적인 감상을 부른다. 기술적 진화가 완성한 이미지는 감성적 체온마저 전달한다. 그 모든 것이 3D라는 기술적 도구를 효과적인 표현 양식으로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찍어낼 수 있는 <2012>가 거대한 사치라면, <아바타>는 자본만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진짜 명품이다.
<아바타>의 블록버스터적인 스케일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3D관람을 권장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만큼 <아바타>를 통해 목격할 3D비주얼이 체험 이상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현존하는 3D영상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평해도 좋은 첫 번째 작품이다. 단순히 체험적 값어치만을 따진다 해도 기회비용을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또 한번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한다 해도 <아바타>는 그 발언마저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라 이해시킬만한 작품이다. <아바타>는 영화 역사상 새로운 세기를 일군 혁신적 유산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며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것이다.
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땅이 꺼진다. 화산이 폭발한다. 쓰나미가 밀려온다. 지구 전체가 요동을 친다. 사람이 발붙일 곳은 없다. <2012>는 해볼 만큼 해보다 못해 끝장을 보는 재앙 블록버스터다. 아마 지구에서 재앙이라고 할만한 이미지들은 죄다 나올 거다. 그것도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시원하고 화끈하게 파괴적 장관들을 그려낸다. 마치 큰 스크린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 훈수 두는 것마냥 그렇다. <2012>가 그려내는 무지막지한 이미지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볼거리다. 그럼에도 그것이 심심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2012>가 규모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상대적 초라함 덕분이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거대한 이미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교각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교각이 부실해 다음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다. 재앙의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생존적 리얼리티보다도 휴머니즘을 구현하겠다는 연기적 일념으로 충만하듯 인위적 상황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그 파괴적인 장관들은 볼거리 이상의 긴장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 뿐,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서스펜스에 대한 연출적 감각이 부재하다. 물론 인류의 멸망적 위기를 관람한다는 건 묘하게 침통한 감상을 부른다. 그건 <2012>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이미지의 우월함 덕분이다. 말 그대로 <2012>는 CG팀의 공헌도가 팔 할인 영화다. 딱히 롤랜드 에머리히를 칭찬할 구석은 많지 않다. 마치 부모 잘 만난 자식의 사치를 보는 것 같다. 돈 있는 할리우드나 되니까 이 정도로 무모한 짓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만큼 그 막대한 자본을 좀 더 현명한 곳에 쓸 수 없었을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딱히 2시간 40여분에 육박해야 할 만큼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스토리는 명백한 필름 낭비다. 다 떠나서 (어차피 볼 당신이)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는 건 진리다.
유년 시절 장난감 좀 가지고 놀아봤다는(?) 남자라면 ‘G. I.유격대’라는 타이틀의 액션 피규어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 아이. 조>)이라는 타이틀 너머에서 어떤 기시감을 발견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러니까 <지. 아이. 조>는 ‘G. I. 유격대’를 기억하는 어떤 한국 남자에게 그것이 ‘G. I. JOE’라는 미국산 본명이 존재했음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물론 ‘마징가Z’가 일본산이라는 진실을 접하고 수많은 아동들을 패닉으로 몰고 갔던 쌍팔년도의 추억에 비하면 이는 놀랍지도 않겠지만.
마블 코믹스에서 서사화된 <지. 아이. 조> 역시 어느 슈퍼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코믹스와 TV시리즈를 통해 큰 인지도를 형성한 작품이다. 하지만 액션 피규어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에 서사의 옷을 입히고 코믹스의 시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지. 아이. 조>는 기존의 코믹스 슈퍼히어로들과 출신 성분이 다른 작품이다. 액션 피규어로 구체화된 캐릭터들에게 세계관을 마련해주고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한다. 코스튬히어로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갖춰 입고 캐릭터의 개성을 대변하는 무기를 소지한 캐릭터들의 외형만으로도 캐릭터에 얽힌 사연이 만들어지고 화려한 액션 신이 예감된다. 마블코믹스가 ‘G. I. JOE’를 코믹스의 세계관에 전시한 것 역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킬 이야기의 잠재력에 주목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코믹스와 TV시리즈가 액션 피규어라는 뼈대에 서사의 살점을 바르는 작업이었다면 영화는 그 피부에 보다 화려한 의상을 착용시키는 과정과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 아이. 조>는 전시적 욕망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현란한 속도감과 거창한 스케일을 원투 펀치로 삼아 현란한 액션신의 공세를 퍼붓는 <지. 아이. 조>는 킬링타임의 목표를 적중하기 위한 이미지의 공세가 대단하다. 특히 단순 명확하게 선악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자리를 잡은 캐릭터들의 대립구도는 손쉽게 대결의 이미지를 선점함으로써 액션을 연출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된다. 캐릭터의 다양성을 통해 다채로운 액션 이미지를 전시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지. 아이. 조>의 기본적인 장점에 가깝다. 히어로 코믹스의 요소들을 죄다 차용한 듯한 <지. 아이. 조>는 액션 블록버스터가 전시할 수 있는 총아적 이미지를 선사한다.
문제는 스토리다. 전시적 욕심에 비해 저능한 스토리가 영화의 오락적 묘미를 감퇴시킨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거창한 액션 시퀀스를 지속적으로 떠내려 보내지만 맨틀 역할을 하는 스토리가 잦은 균열을 일으키는 덕에 전반적인 영화의 완성도도 진동하는 기분이다. 열악한 스토리가 이미지의 쾌감을 증발시킨다. 때때로 심각하게 유치해지는 이야기가 화려한 액션신마저 저급한 수준으로 몰락시킨다. 가장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말할 수 있는 파괴적인 파리 추격신은 비윤리적인 인상마저 남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괴적인 욕망으로 파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광경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미국의 불가피한 사명임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만에 가깝다. 저능한 수준의 스토리에 못지 않게, 악질적인 자만으로 완성된 이미지가 오락적 쾌감이라는 편견을 타고 스크린에 전시된다. 하지만 그 이미지조차도 딱히 발전적이지 않다. 이미 수많은 액션 블록버스터들이 만들어낸 지난 이미지들을 나태하게 나열할 뿐이다. 마치 두뇌 없는 액션 피규어들의 현란한 움직임을 무작위로 감상하는 느낌이다.
<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