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임파서블>을 발표한 것이 1996년의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하, <미션 임파서블 4>)은 15년 만에 발표된 네 번째 속편이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는 분명 이단 헌트의, 좀 더 정확하게 이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존재감으로 굴러가는 영화다. 다만 이번 속편에서는 지난 세편의 전작들과 다른 조짐이 발견된다. 전과 달리 전편과의 서사적 연결성이 뚜렷하게 발견되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눈에 띄는 건 이단 헌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상을 전시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단 헌트를 위시한 IMF 팀원들의 조직력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를 비롯해서 프라하와 뭄바이 등 세계 각지의 풍경을 미장센으로 삼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서사 구조는 간결하다. 인류의 멸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재 과학자가 핵전쟁을 조장하려 하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단 헌트는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선악이라는 양진영으로 대립하며 뚜렷한 자기 역할을 얻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미션을 수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안에서 각자 자기 진영의 역할을 코스프레한 배우들이 대단한 물량공세를 등에 업고 스턴트 액션을 전시해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네 번째 속편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위력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 초반부, 크렘린궁 폭파신으로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은 부르즈 칼리파 스턴트신과 이를 잇는 모래폭풍 추격신,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격투신까지, 위력적인 볼거리들을 우월하게 디자인해낸다.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창의력으로 설계된 몇몇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르즈 칼리파 등반 스턴트신의 반중력적인 액션과 거대한 모래폭풍이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적을 추격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뒤엉켜 구르며 펼치는 격투신은 단지 그 위력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인크레더블’한 인상이다. 이런 이미지의 설계는 ‘픽사’ 출신의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중전화의 변신 광경을 비롯한 몇몇 소품에서 발견되는 위트는 전적으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바로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팀원들은 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조직원들의 탄탄하고 유기적인 팀워크를 통해서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양상은 시리즈의 쇄신을 예감하게 만들 만큼 신선한 변화에 가깝다. 덕분에 개개인의 조직원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발생시키는 영향력 또한 증가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차별적인 감정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시종일관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되던 전작들과 달리 극 중에서 심심찮게 유머가 발생한다는 것. 이는 사이몬 페그 덕분인데, 긴박한 순간에도 정색하듯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 안에서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벤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단 헌트 못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는 브란트(제레미 레네)와 함께 새로운 팀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제인(폴라 패튼)은 시리즈의 차기작을 예고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시리즈의 새로운 전환점에 가깝다. 이단 헌트의 원맨쇼 대신 팀워크가 강조된 이번 시리즈는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밑천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체력적 안배가 이 시리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한계도 여전하다. 그만큼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이 시리즈의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드 팔마의 냉소적인 첫 작품을 그리워하는 팬덤 앞에서 이번 작품은 여러 모로 이질적인 결과처럼 인식될 수 있겠지만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다이나믹한 디테일이 공존하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획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원숭이가 지배하는 세계에 불시착한 사람들. 그 세계에서의 탈출을 고대하며 행동에 옮기던 그들은 자신이 발 디딘 땅의 정체를 알아버린 뒤, 자신의 안식을 위해줄 영토가 없음을 절실하게 체감한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블의 원작을 영화화한 <혹성탈출>의 충격적인 결말은 인간사와 지구사를 동일시해온 인류에게 있어서 경종을 울릴만한 사건이었다. 1968년, <혹성탈출>이 첫 작품의 상영 이후로 여섯 편에 달하는 시리즈로 진전된 것도 그런 반향이 만들어낸 추진력 덕분이었다. 물론 이 시리즈가 시초가 된 첫 작품 이후로 팀 버튼의 리메이크작을 포함한 어떤 것도 그 이상의 흥미를 자아낸 것은 아니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에 대한 흥미와 의심의 눈길이 모이는 것도 그런 전례에서 기인한다.
<진화의 시작>과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 지닌 공통점은 두 작품이 과거의 오리지널보다도 진화된 영상 기술을 담보로 보다 세련된 이미지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진화의 시작>은 수작업으로 완성된 침팬지의 탈을 쓰고 연기하던 과거의 시리즈물에 비해서 모션 캡처 퍼포먼스를 활용한 디지털 캐릭터로 보다 사실적인 묘사력을 얻어냈다. <진화의 시작>에서 사실적인 묘사란 영화를 위한 수식어가 아니라 필수적 요소처럼 보인다. 팀 버튼의 그것을 포함해서 과거의 시리즈가 가상적인 메타포의 세계관처럼 보이는 탓에 퇴보적인 VFX의 요소가 되레 그 가상성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진화의 시작>은 영화 밖의 현실을 영화로부터 환기시켜야 될 만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미지가 요구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의 시작>은 오늘날의 진화한 디지털 비주얼을 통해 현실화된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스타워즈>의 프리퀄 3부작이나 J.J. 에이브람스의 <스타 트렉>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리지널 프랜차이즈보다도 앞선 근본을 그린 프리퀄 무비가 그 기원보다도 나은 영상 기술로 구현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진화의 시작>도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새로운 예감을 품게 만든다. <진화의 시작>은 1968년의 그것을 이루는 세계관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되짚는, 보다 정확하게는 그 기원의 역사를 뒤늦게 기획해낸 <혹성탈출>의 프리퀄이다. 하지만 <진화의 시작>과 <혹성탈출>은 분리된 세계관처럼 보인다. 이 작품을 단순히 프리퀄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 있다. 시리즈의 원류가 된 <혹성탈출>을 통해서 설명하자면 <진화의 시작>은 우리가 목격한 그 디스토피아의 원류를 그리는 프리퀄이다. 동시에 <진화의 시작>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도 상관없는 시리즈의 리부트라 논해도 좋을 작품이다.
현시대의 풍경으로부터 멀리 나아간 과거의 시리즈와 달리 <진화의 시작>이 작금의 풍경을 그릇 삼아 영화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는 이 작품 이후에 이어질 (가능성이 충만해진) 새로운 시리즈의 이미지가 보다 현실적인 환경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낸 셈이다. <진화의 시작>은 화석 같던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동시에 그 모든 이미지들을 새롭게 단장해낸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건 결국 <진화의 시작>이 그럴 만한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시작>은 과거의 시리즈에 대한 경험 유무와 관계 없이 저마다의 흥미를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끝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진화의 시작>이 단순히 자신이 봤던 그 작품의 원점을 살필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 <혹성탈출> 속에서 그려지는 인류의 처참한 상황은 <진화의 시작> 속의 침팬지가 처한 상황과 일 대 일로 조응한다. <진화의 시작>은 <혹성탈출>의 메타포가 된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는 동시에 그 메타포를 영화적 모티프처럼 응용해낸다. <혹성탈출>이 인간과 유인원들의 역전된 관계를 그리며 오늘날의 인류가 유인원(, 그리고 여타의 동물들)에게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에서 메타포를 얻은 우화임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프리퀄의 서사를 통해서 그 세계관이 우화의 수준을 넘어서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안착시킨다.
(<혹성탈출>을 아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진화의 시작>은 유인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인간의 몰락이 어디서 시작됐는가에 관한 영화다.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인해 우연 같은 필연으로 지능을 얻게 된 침팬지가 인류를 제압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인간에 의해서 의학적 실험 대상으로 유린 당하는 침팬지들이 인간의 손에 의해 개발된 의학적 산물로 인해서 진화적인 사고를 얻게 되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과정을 논리적인 인과로서 설득해낸다. 동시에 진화한 유인원들이 인류의 주도권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해내는 과정이 생략된 덕분에 현실의 메타포로 머무르던 <혹성탈출>의 세계관에 완전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진화의 시작>은 단순히 침팬지들의 진화로 인한 세계의 전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능으로 인해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인류의 과정을 그린다. 단순히 시리즈의 서사적 빈칸을 메우는 수준을 넘어서 그 논리적인 공백을 메워버리는, 그야말로 완벽한 프리퀄인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들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 시저는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눈동자를 통해서 어느 인간보다도 진실된 감정을 전달해낸다. 탄탄한 서사가 <진화의 시작>을 이루는 육체라면, 앤디 서키스가 연기하는 디지털 캐릭터 침팬지 시저를 비롯한 유인원 캐릭터들은 영화를 밀고 나가는 심장이다. 노예 해방 운동에 가까운 계급적인 투쟁처럼 발전해나가는 침팬지들의 반인류적인 활약은 그것을 지켜보는 인간 관객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큼 뜨거운 감정을 전하는 동시에 흥분할만한 긴장감을 전한다. 민첩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지닌 침팬지들이 주변의 환경을 이용해서 인간의 공격에 맞서고 되레 역습을 가하는 이미지는 탁월한 묘사력 자체만으로도 역설적인 경고인 셈이다. 특히 클라이맥스라 할만한 금문교 전투 신은 실로 압권이다. 카리스마가 대단한 리더로 진화한 시저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유인원들의 활약은 심장의 박동처럼 경쾌하고, 그 사이에서 희생을 결심하고 서로를 고무시키는 그들의 소통 방식은 그 자체로 마음을 달군다. 특히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객석마저 장악하는 시저의 포효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명장면이다.
<진화의 시작>은 유명 시리즈의 프리퀄 수준을 넘어서 동물적인 감각과 이성적인 사고를 배합해낸 진화적인 블록버스터다. 이미 그 이후를 알고 있음에도 흥미를 사로잡는 시작은 소름 돋는 전율로 다다라 끝을 맺는다. 무엇보다도 발달된 CG기술의 남용을 전시하는 할리우드발 블록버스터 광풍 속에서도 <진화의 시작>과 같은 작품은 그 기술적인 가치의 활용성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그리고 <진화의 시작>을 통해서 <혹성탈출>은 다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진화란 이런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자, 다시 한번 거대로봇들이 지구를,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지구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간이 왔다. <트랜스포머 3>는 지구를 링으로 삼아 벌이는 살아있는 로봇들의 불꽃 튀는 전투 영화다.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그 대형 변신 완구 로봇들이 펼치는 치열한 몸싸움에 있다. CG기술의 진화를 통해서 완구 로봇에 숨을 불어넣고 LA도심 한복판에서 벌이는 육탄전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적 롤러코스터 장난감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할리우드발 롤러코스터는 또 한번 살아 움직이는 로봇의 위용을 앞세워 전세계 관객을 현혹시킬 채비를 하고 있다.
짚고 넘어가자.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언 갑옷을 피부로 입고 있는 거대 변신 로봇들이 격돌하는 스펙터클한 액션을 볼 수 있다는 것. 사실 시리즈의 시작점이 된 <트랜스포머>가 공개될 당시에는 매끈한 스포츠카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광경만으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변신 로봇이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소재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센세이션한 이벤트였다. 이 보기 드문 볼거리를 두르고 있는 서사의 병풍 따위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CG의 발전으로 개척된 이 신세계적인 볼거리는 서사의 수준 따위를 깡그리 무시하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또 한번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정복해내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이 세 번째 속편의 맥락은 지난 전편들과 딱히 다를 게 없으며 새로울 리 없다. 중요한 건 무엇을 또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관객들의 기대감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3편에 다다르기까지 이 시리즈에서 극명하게 업그레이드된 건 변신 로봇들의 가짓수를 늘려 새로운 볼거리의 너비를 넓히고 그 로봇들의 기능과 성능을 충분히 전시하며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는 것보다도, 지구 방위대로 전락한 외계 로봇들의 지구 수호에 관한 서사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작업이었다. 2시간이 넘는 첫 작품 이후로 두 편의 속편이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거대한 러닝타임을 얻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로봇들이 평화주의자와 호전주의자로 갈려 지구를 걸고 결투를 벌인다, 는 1편의 서사는 점차 친지구인 로봇 오토봇과 반지구인 로봇 디셉티콘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는 2편으로 나아갔고, 3편에 다다라 달의 표면과 지구인 숙주론까지 닿는 외계 음모론의 수준으로 확장된다.
팔릴만한 볼거리의 생명 연장을 위해 서사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기획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고민의 몰두가 시리즈의 연속적인 기획 위에서 필요 이상으로 판을 벌리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특히 <트랜스포머 3>가 이런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제공하는 정보량은 과부하 수준에 가깝다. 음모론에 얹힌 서사의 설정은 흥미롭다. 인류의 달 진출이 비확인물체의 달 불시착을 확인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며 그것이 외계 로봇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노라는 서사의 착안은 이 세 번째 시리즈의 필요성을 어필할만한 흥미로운 떡밥이다. 문제는 이 시리즈가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장점 대신 불필요한 설명과 설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단적으로 말해서,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에서 인간들의 위치란 로봇들의 한판 승부를 위한 작은 조연들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들, 더 정확하게 지목하자면 샘 윗윅키(샤이아 라보프)의 활약상이 로봇들의 활약에 비해 보다 도드라지는 이번 시리즈의 서사 안배는 달의 뒤편에 대한 의문보다도 미스터리하다.
무엇보다도 같은 것을 거듭해서 재확인하고 있다는 시각적 피로감 역시 <트랜스포머>라는 시리즈가 지닌 오락적 흥미의 한계를 확신하게 만든다.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로봇들의 스펙터클의 첫 번째 목격 이후로 두 편의 시리즈를 통해 얻어낸 건 보다 거대한 파괴적 행위로 나아가는 로봇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딱히 로봇들의 육박전 시퀀스의 물리적 너비가 늘어나지 않은 가운데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러닝타임이 확대된 이번 작품에서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 특별한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인내력이 보다 요구된다. 심지어 <트랜스포머 3>는 본격 로봇 영화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헷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디셉티콘의 모선들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고, <트랜스포머 3>의 끝에 가 닿는 감상은 <인디펜던스 데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육중한 로봇들이 화끈하게 뒤엉켜 구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재미는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동어반복적이라 식상해진 감이 없지 않으며 그 결정적인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시간이 길다. 낭비적으로 확장된 서사 속에서 시간 죽이기가 이처럼 어렵다는 것을 거듭 체감하게 된다.
3D비주얼은 어쩌면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어려워진 이 시리즈의 유용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때때로 이는 효과적이다. 커다란 아이맥스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입체적인 비주얼로 구현되는 로봇들의 위용은 분명 이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볼거리다. 하지만 역시나 로봇이 빈 자리에서는 3D도 무용지물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는 <트랜스포머>라는 이름 아래 사족과 같다. 그러니까 샘 윗윅키의 삼각 관계나 디셉티콘에 맞서서 비범하게 활약하는 인간들의 무용담 따위보다는 로봇의 변신 시퀀스 하나라도 더 보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소총부대와 토마호크 미사일을 동원해서 로봇을 사냥하는 감동적인 인간 승리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지 않나. 오른팔을 내주고도 지는 법이 없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간지나는 결투 장면을 보기까지 너무도 오랜 인내력을 요구한다니, 심지어 그것은 전편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펼치는 3:1 결투 장면보다도 짧고 밋밋하다. 그러니 보는 입장에서 지치고 피로해질 수 밖에.
물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배의 선단에 서서 유유히 뭍으로 착륙하는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인상적인 등장은 새로운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을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이하, <낯선 조류>)는 이 프랜차이즈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이자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를 이끌었던 고어 버빈스키 대신 새로운 시리즈의 키를 잡은 선장으로 탑승한 롭 마샬과 지난 세 편의 헤로인이었던 키이라 나이틀리 대신 새롭게 이 시리즈에 올라선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런 야심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엔진이나 다름없는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며 그의 숙명적인 라이벌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역시 시리즈를 밀고 나가는 돛과 같다.
팀 파워스의 판타지 소설 <낯선 조류 On Stranger Tides>가 원작이라 알려져 있지만 영화 <낯선 조류>는 소설을 모티프 삼아 제작된 <캐리비안의 해적>의 속편일 뿐이다. 물론 소설이 영화를 위한 껍데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해적의 등장을 통해 작품의 항로를 이어나가던 시리즈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낯선 조류> 역시 검은 수염(이안 맥쉐인)의 등장을 통해서 새로운 물길을 연다. 실존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해적 검은 수염의 등장과 스페인 모험가 폰세 데 레온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젊음의 샘’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소설로부터 이양해온 영화는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을 얻어낸 셈이다. 그리고 이 밑그림은 시리즈의 아이콘 잭 스패로우와 연관된 에피소드로 발전됐으며 전편과의 맥락을 잇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교체 그리고 시리즈의 얼굴을 이루던 중심 캐릭터들의 유입은 <낯선 조류>가 시리즈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선전과 같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이 시리즈의 아이콘인 잭 스패로우에게 놓여있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줄기처럼 자라난 윌(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로맨스로 인해 잭 스패로우의 무용담은 점차 서사를 장식하는 주변부의 소품처럼 위치를 점해나갔다. 시리즈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레 시리즈의 중심에서 밀려나가는 현상은 분명 기이하다고 할만한 것이었으나 이런 요소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다 흥미롭게 치장하는 측면이기도 했다. 잭 스패로우는 두 남녀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이 시리즈의 볼거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포석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중심 이동은 시리즈의 변화를 대변하는 주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장단이 있다.
시리즈의 팬을 자처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잭 스패로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시리즈의 변화는 반가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주변부에 놓인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잭 스패로우에게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이외의 캐릭터들이 주목 받을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새롭게 보강된 캐릭터, 특히 엘리자베스를 대신하는 헤로인 안젤리카(페넬로페 크루즈)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지만 정작 그녀는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와의 로맨스를 위해 고안된 장식품 이상의 기능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라이벌 바르보사의 존재감이 극을 견인하고 일회적인 캐릭터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검은 수염의 포지셔닝도 적절하나 윌과 엘리자베스, 잭 스패로우의 삼각관계로부터 빚어지던 감정적인 입체감에 비하면 <낯선 조류>가 품은 캐릭터의 너비는 상대적으로 협소해 보인다. 또한 지난 서사와 새로운 서사의 맥락을 이어나가기 위해 동원되는 설명이 긴 탓에 초중반부까지 스토리 진행이 더딘 인상도 들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속도감이 붙어나간다.
고어 버빈스키 특유의 기괴한 감각으로 치장된 지난 해적선들에 비해서 롭 마샬의 해적선은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낯선 조류>는 상대적으로 지난 시리즈에 비해서 해양에서 펼쳐지는 사연의 비중도 적다. 캐릭터의 변화와 함께 이런 전반적인 변화들로 인해 <낯선 조류>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프랜차이즈의 특성이 희석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조류>는 지난 시리즈가 지닌 강점들이 보다 약해진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낯선 조류>는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잭 스패로우로 인해 가능성을 품은 시리즈의 전환점이다. 캐릭터의 강화,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로서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시리즈의 항해는 보다 멀리 나아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는 시리즈의 방향키를 새롭게 제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추친력이 대단한 시작은 아니지만 거듭되는 시리즈 안에서 가속력을 발생시킬 동력은 충분하며 무궁무진한 항로의 개척도 기대된다는 점에서 <낯선 조류>는 분명 여전히 외면할 수 없는 볼거리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대단한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시리즈를 순항시키는 아이콘의 힘을 증명한다.
신의 세계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최고신 오딘(안소니 홉킨스)은 군대를 이끌고 난폭한 거인족의 수장 라우페이가 이끄는 ‘요툰하임’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오딘의 통치 아래 오랜 평화를 맞이한 신계는 오딘의 첫째 왕자 토르(크리스 헴스워드)에게 절대무적의 병기 ‘뮬니르’를 하사하는 왕위계승식이 있던 날, 갑작스러운 요툰하임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다. 왕위 계승식을 방해 받게 된 토르는 불 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딘의 명령과 주변의 만류를 어긴 채, 동생 로키(톰 히들스톤)와 동료 전사들을 규합해서 요툰하임을 공격한다. 결국 이에 격분한 오딘은 토르로부터 뮬니르와 힘을 빼앗은 뒤, ‘미스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한다.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인간과 닮은 호전적인 신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기초한 슈퍼히어로물 <토르>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그리고 (차후에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의 영화로 공개될) <캡틴 아메리카> 등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꼽히는 작품이다. 번개를 다스리는 북유럽 신화의 수장 토르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자면 제우스 격에 가까운 최고신이다. 동시에 마블코믹스의 라이벌격인 DC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 중,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에 대적할 수 있는 마블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사실 코믹스물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본래 호전적인 신화의 양태와 달리 기독교적인 희생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영화 역시 이런 측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토르는 이국의 오랜 신화의 외형을 빌려서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한 사생아 같은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화와 원작을 떠나서 <토르> 자체에 집중해 보자면, 이 영화는 토르라는 캐릭터가 겪는 질풍노도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벤저스>의 전초전 성격에 가까운) <토르>는 토르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선보이기 전에 캐릭터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일종의 캐릭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마블 슈퍼히어로 올림픽이라 해도 좋을 <어벤저스>로 가는 수순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토르> 역시 이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치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벤저스>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매니아들과 캐릭터의 기원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객들 사이에서 감상의 편차가 발견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다. 신계와 인간계, 즉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카메라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계의 풍경과 북유럽 신화를 고스란히 차용한 특별한 아이템들을 전시하며 자신만의 볼거리를 과시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만남, 초자연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대비적 특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토르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인연을 통해 멜로적인 드라마를 구축하고 이런 감정선을 토대로 성장드라마의 노선을 밟아나간다. 또한 전시 수준에 가까운 선악의 극명한 대비도 오락적 취향의 갈등을 삽입한 의도로 보이며 이 역시도 깊은 수준의 감정을 잉태할만한 자질은 엿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 즉 거대한 계획을 염두에 둔 소품적인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얄팍함이 용인되지 못할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CG로 완성한 가상적인 이미지의 전시력에 비해서 액션 시퀀스의 파괴력이 미흡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수준을 유지해낸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해내는 감독으로 꼽히는 케네스 브레너의 재능이 보다 탁월하게 반영될만한 슈퍼히어로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슈퍼히어로 올스타전이라 불려도 좋을 <어벤져스>의 영화화를 계획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초전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무비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는 시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이하, <토르>)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통합전을 위한 또 한번의 전초전이다. <어벤저스>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이 작품이 토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섭섭하다면 2년여 간의 유예 기간을 기다릴 것. <어벤저스>의 문을 여는 캐릭터가 토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활약상을 볼 기회는 여전히 유효하다. <토르>는 진정한 토르를 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무지개 다리, 즉 아스가르드의 ‘비프로스트’라는 말이다. (그래도 스크린에서 구출해오고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1942년 LA에서 벌어졌던 UFO대공습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는 <월드 인베이젼>은 보다 현대적이고 사실적인 <인디펜던스 데이>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사실적인 시가전 장면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쓸만한 수준을 자랑하는데 멀게는 <블랙 호크 다운>의 발전적 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조악한 캠버전 영상의 숏을 통해 현장감을 증폭시킨 <클로버필드>나 <디스트릭트 9>의 수법도 영리하게 동원됐다. 컷의 전환을 빠르게 가져가며 긴장감을 배속시키고 외계인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LA시가지의 재난 광경은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이루면서도 그 영토에 속한 이들의 공포를 영리하게 포착하며 스릴러적인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딥 임팩트>도 아니고, 인류멸망의 이야기를 예상할 리 없는 관객들의 예감처럼 <월드 인베이젼>은 외계인의 대공세 속에서 무력화되다시피 하던 인류의 대반격을 그리는 SF전쟁영화다. 이렇게 빤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영화가 식상하지 않은 건 그 안에 놓인 캐릭터들의 드라마가 설득력 있는 감정을 자아내는 덕분이다. 구시대적인 ‘팍스 아메리카나’ 영웅주의의 잔상이 보인다고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겠으나 딱히 정색할 필요는 없겠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재난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 세계인을 표방할 필요도 없지 않나. 외계문명의 디자인은 마치 진화된 기계문명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때때로 초토화된 시가지의 모습은 <터미네이터>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 복수 버전 같기도 하고, 보다 상업적으로 다듬어진 <우주전쟁>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볼만하다는 말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감상을 부른다. 1980년대 동명의 드라마시리즈를 스크린에 옮긴 <A-특공대>는 분명 인기TV시리즈의 네임밸류에 편승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하지만 <A-특공대>는 단순히 그 이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작이 지니고 있었던 장점을 명확히 계승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두서없이 나열되는 서사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서사에서 중심이 되는 캐릭터의 등장과 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 자체로서 기능한다.
저마다 유니크한 능력을 자랑하는 멤버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만큼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위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며 단단한 팀웍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액션신이 끊임없이 자극의 세기를 밀고 올라가는 동안 곳곳에 매복된 것처럼 순발력 있게 튕겨져 나오는 역설적인 위트가 적절한 높이를 조절하듯 역치를 이룬다. 강렬한 리듬감의 자극이 적절한 강약과 안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A-특공대>는 캐릭터를 통해 서사의 구조를 마련하고 감상의 방점을 찍는 오락영화다. 마치 첩보와 전쟁을 병풍으로 삼아 케이퍼 무비의 활력과 쾌감을 전시하는 듯한 <A-특공대>는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의 설계에 있어서 베테랑급의 수준을 자랑한다.
고난이도의 특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A-특공대(The A-Team)'는 본명을 쓰지 않고 작전명으로 소통하는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이뤄진 스페셜리스트 팀이다. 현명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한니발(리암 니슨)을 중심으로 대단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멋쟁이(브래들리 쿠퍼), 과격하면서도 순진한 B.A(퀸튼 ’램페이지‘ 잭슨), 그리고 똑똑하지만 괴짜에 가까운 머독(샬토 코플리), 이렇게 총 4명의 소수정예로 이뤄진 ’A-특공대‘의 캐릭터 각자의 개성은 <A-특공대>의 매력을 구동시키는 밑천 그 자체다.
4인의 주연 캐릭터들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A-특공대>는 단순 명확하게 캐릭터를 전시해내는 도입부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해 개개인의 개성을 조합하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여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입체적인 관계의 너비를 확보해낸다. <A-특공대>는 내러티브가 단단한 작품은 아니며 때때로 묘사의 수위가 현실성의 한계를 무시하듯 과한 감이 없지 않은 작품이지만 확실한 한 방을 통해 끊임없이 쾌감과 활기를 제공하고 축적하는 오락적 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단단한 조직력으로 감상을 지배하기 보다는 개인의 전투력을 응집해서 감상 자체를 궤멸시키는 작품이랄까.
과거의 TV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A-특공대>는 좋은 선물이 되겠지만 원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이 작품은 유효할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르시즘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듯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대단한 자신감을 표하는 <A-특공대>는 극단은 어떤 방식으로도 통할 수 있음을 대변하는 듯한 작품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건 쾌감 그 자체다. 호쾌한 액션과 유쾌한 캐릭터, 그것만으로 자아내는 오락적 자질이 확실한 만족감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