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집권 당대의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구중궁궐 내의 정치적 모략의 중심으로 떠밀리며 엄격한 궁의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왕의 남자’의 일상은 코믹한 광경을 이끌어낸다. 이 아이러니한 유머가 칼을 품은 <광해>에서 자연스러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으로 잘 안착시킨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때때로 그 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순간도 존재하나 전반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흐름을 지녔으며 그 틈새를 메우는 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다. 1인 2역을 오가는 이병헌은 서까래처럼 영화의 지붕을 받치고, 류승룡은 주춧돌처럼 영화를 떠받든다. 김인권과 장광의 연기에는 마음이 간다. 교과서적인 웅변조차 절절하게 소화하는 <광해>는 ‘정치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이 하는 정치’가 18세기 조선이나 21세기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절실함임을 잘 알고 있다. 달다가 맵다가 끝내 콧날이 시큰해진다.
학문을 익혀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무예를 익혀도 나라를 훔칠 수 없는 신분. 인조반정의 피바람에 휘말려 역적으로 몰락한 자손으로서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지만 시대는 그를 무기력하게 억누른다. 학문도 무예도 남이(박해일)에게는 덧없는 미망과 같다. 그래도 하나뿐인 여동생 자인(문채원)을 아끼는 그에게 자신을 거두어준 은인의 아들인 서군(김무열)이 결혼을 허락해달라 간청한다. 그리고 여동생의 결혼과 함께 먼 길을 떠나려던 그에게 불길한 기운을 느낀다. 거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밀려든 청의 대군 앞에서 성문은 손쉽게 열리고, 평화롭던 마을이 삽시간에 비극의 불길로 타오른다.
시대적 배경은 병자호란, 공간적 배경은 만주, <최종병기 활>은 탈한반도 지형의 액션물이다. 나라로부터 버림 받은 역적의 아들이 청의 군사들에게 포로로 끌려갔으나 나라가 구해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여동생을 되찾기 위해서 압록강 국경을 건너 만주 벌판으로 나아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활을 들고 청나라 병사들과 맞선다. 스토리의 구조가 시공간의 묘와 맞아떨어진다. 국가라는 대의의 명예보다도 중요한 건 사적인 생사에 있다. 조선이라는 보수적 세계관 안에서 도드라지는 진보적 가치관이 개개인의 현실 안에서 설득력 있게 맞붙는다. 이야기적인 설정의 묘가 시공간의 성격과 맞아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비극에 함몰된 인물이 타국으로 끌려간 여동생을 찾고자 국경을 넘는 남이의 의지를 설득력 있는 서사로 자연스럽게 노출시켜 나가는 과정도 자연스럽다. 사실과 허구의 배합이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최종병기 활>은 어떠한 인물보다도 제목에서도 등장하는 활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다. 검과 창이 아닌, 활과 활의 대결을 그린다는 건 결국 서로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심리를 얼마나 긴박하게 묘사할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최종병기 활>은 그 거리감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인물과 인물 사이의 심리적 긴장감을 끊임없이 당기고 놓는다. 검과 창을 맞부딪히는 묵직한 백병전 대신 잠복과 엄폐를 통해 위치를 점하고 상대를 겨냥하는 남이의 게릴라전과 이를 뒤쫓는 청군의 추격전을 통해서 영화의 심박수를 조절해나간다.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당기는 인물 간의 간격이 팽팽한 서스펜스로 당겨진 뒤, 속도감 있는 추격전이 재빠르게 튕겨져 나간다. 활의 기동성을 통해서 형성되는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은 <최종병기 활>이 지닌 영화의 ‘최종병기’다.
무엇보다도 대립각을 펼치는 양쪽의 인물들이 선악의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고 저마다에게 적당한 명분을 쥐어주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특정 인물의 행위에 감정을 쏟아 넣기 보다는 중립적인 시각에서 캐릭터들의 행위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격전의 묘미가 보다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탁월한 호연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 배우들의 호연에 멍석을 깔아준 캐릭터 설계 또한 준수하다. 단단한 드라마를 활처럼 세운 뒤, 탄력 있는 연출력을 활시위처럼 매달고, 화살처럼 잘 깎인 캐릭터들을 얹혀서 튕겨 날리니 쾌감과 감동이 적중한다. 단단한 드라마, 팽팽한 연출력, 날렵한 배우들, <최종병기 활>은 당기고 놓는 법을 잘 아는 영화다. 큰 무리수 없이 흐르는 스토리를 줄기 삼아서 주렁주렁 열린 액션들이 즐기기 좋은, 이 정도면 확실한 웰메이드 대작이다.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연음으로 이어진 제목은 그 형태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초점이 나가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이고 꿈은 절망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꿈을 칼처럼 갈아 세상을 베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부터 베어나간다. 자신을 지키던, 혹은 자신이 지키려던 신념부터 파괴한다. 마치 서로 다른 땅을 딛고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길을 걷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상주의자들의 파국적 사연을 줄기로 드라마를 그려낸다.
박흥용 화백의 동명원작만화를 스크린에 옮겼지만 사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원작의 인물 관계를 활용하고 개연성의 모티브만 얻어냈을 뿐, 전체적으로 원작의 재현성과 거리가 먼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원작과 달리 이몽학(차승원)의 비중을 키우고 역할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몽학은 자신이 모시던 스승 정여립의 죽음 이후, 그가 이끌던 대동계의 수장으로 나선다. 본래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세워졌던 대동계는 정여립의 복수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반란군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몽학과 함께 정여립의 또 다른 한 팔이었던 맹인 황정학(황정민)은 이몽학의 뒤를 쫓고, 이몽학에게 아버지를 잃은 견자(백성현)는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쫓고, 이몽학과 연모를 나눈 기생 백지(한지혜)도 그 뒤를 따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연상시키는 건 이준익의 <왕의 남자>와 <황산벌>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멜로적 정서와 그 너머로 그려지는 파국적인 운명의 서사는 <왕의 남자>의 그것과 유사하며 무능력한 실권자들에 대한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요소는 <황산벌>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실 그 결합적 형태로부터 발생하는 리듬감이 좋은 건 아니다. 캐릭터들의 배합은 자처하고라도 두 정서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멀다. 코미디가 발생하더라도 그 형질이 달라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마치 하나로 위장된 두 개의 극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궁궐에 들어서면 <황산벌>과 같은 풍자적인 코미디가 백치스럽게 펼쳐지다가도 그 밖에서는 비장하게 미간을 찌푸리거나 장난스럽게 의표를 찌르는 선문답의 대사들이 비장하게 구사된다. 그리고 마치 이건 어떤 면에서는 의도된 연출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 시대의 발음이나 화법을 고수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는 현대의 표준어나 다름없다. 이건 마치 이준익이 이 영화가 뒤집어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이미지를 우롱하듯 현대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우스꽝스러운 궁궐의 관리들이나 한심한 왕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분위기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의미라기 보단 구도에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건 결국 이몽학이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은 이몽학과 연관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곧 이준익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이몽학이 놓여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올바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배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길을 택하는 인물의 삶이란 숭고하고 처연하다. 그건 선악의 논리 안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문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상이 신념의 차이로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으로 허망하게 다다른다. 구도는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묘사의 방식에서 중량감이 떨어진다. 서로 다른 신념을 품은 이들의 대립을 통해 비장감을 덧씌우고, 꿈의 유무를 대비시키며 성장을 그리지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드러내는 궁극적인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건 마치 고의적인 자기 파괴적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단지 그 결말부의 텅빈 궁궐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마치 제로섬 게임과 같은 결말부의 파국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추켜세우던 모든 요소들이 어떤 성과로 다다르거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꼴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허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모종의 고민을 품게 만든다.
맹인 검객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인상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황정민의 연기는 영화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이자 가장 좋은 안배감을 자랑하는 요소다. 이는 황정민의 퇴장 이후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는 듯한 영화의 분위기만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검객들이 등장하는 만큼 칼을 부딪히는 장면이 여럿 되고 종종 볼만하지만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완성도에 다다르는 성과에 닿진 못했다. 사극으로서의 풍경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사물과 환경을 포착하는 이미지는 유려하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보이지만 명확하지가 않다. 마치 뭉개지듯 받침이 누워버린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요소들이 뭉개지듯 초점이 흐려진다. 그건 마치 고의적으로 ‘초저믈 흐리는 영화처럼’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