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를 보고 난 사람들은 마치 우주에 다녀온 것 같았다. 우주를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그래비티> 같은 우주 영화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다녀온 그 우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7일 <그래비티>가 개봉된 이후로 지금까지 세상은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혹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으로.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입체적인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돌비 아트모스(Dolby Atmos)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관람하길 적극 추천한 덕분에 서울에 단 두 개밖에 없다는, 돌비 아트모스 시스템이 완비된 상영관의 예매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보다 나은 영사 방식이나 사운드 시스템을 찾아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비티>의 경우엔 그와 유사하나 다른 욕망이 읽힌다. <그래비티>를 정의할 때 한결 같이 동원하는 단어는 ‘체험’이다. 그러니까 아이맥스 상영관이나 돌비 아트모스 상영관이 <그래비티>를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아니라 <그래비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방법, 즉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인정한다는 것. 사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체험의 산물이다. 여기서 체험은 두 종류로 나뉜다. 현실에서 결코 할 수 없는 비현실에 대한 체험과 현실에서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현실적인 행위나 감정에 관한 체험. 그렇다면 우리는 <그래비티>를 통해서 무엇을 체험했을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비티>를 대단히 사실적인 영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그래비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화를 추구했다는 것. <그래비티>는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100% 프리비즈(Pre-visualization)’을 거쳤다. 프리비즈란 전반적인 영화의 비주얼을 계획하고 그 실현 방법을 디테일하게 구성하는 방식인데 비주얼 전반의 연출 계획을 세세하게 설계하는 사전 작업에 가깝다. 일종의 도면 작업인 셈. 하지만 ‘당장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원했던 알폰소 쿠아론의 요구에 의해서 <그래비티>의 프리비즈는 집을 짓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프리비즈 단계에서 100%에 가까운 CG 작업으로 완벽한 비주얼을 구축한 것. 그리고 배우들은 집에 들어가듯, 완벽하게 구축된 이미지 안에서 철저하게 동선이 통제된 채 연기했다. 그렇게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를 화룡점정처럼 찍어 넣는 방식으로서 <그래비티>는 완성됐다.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우주라고 일컫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구상에서 <그래비티>의 우주는 관객들에게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듯 멀게 느껴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놓여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어야 했다. 실제로 산드라 블록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매일 같이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수많은 LED 패널로 둘러싸인 ‘라이트 박스(Light Box)’라는 특수한 세트에서 갇히듯 연기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제작진은 라이트 박스가 마치 산드라 블록의 새장 같다며 ‘샌디의 새장(Sandi’s cag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주에서 고립된, 그리고 끝내 홀로 남겨진 스톤 박사의 외로움은 실제 배우의 감정이 이입된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라이트 박스 안에서 세트의 벽에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ISS) 등 배우가 바라보는 시야에 해당되는 우주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서 배우에게 우주라는 공간성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배우의 시점을 관객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는 곧 배우들의 시점을 관객의 시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나 다름없다. <그래비티>는 이런 인물이 바라보는 시점을 대변하는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객석의 중력을 무력화시킨다.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영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시와 착각을 부추긴다. 게다가 진동과 저주파음 그리고 기습적인 묵음 효과를 교차시킨 사운드 전략을 통해서 공기가 없어서 음파의 전달이 불가능한 우주에서의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공감각적인 체험은 <그래비티>를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몇 가지 사실을 왜곡시킨 영화다. 일단 영화 속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코왈스키는 우주에서 우주배낭 추진체(MMU)를 타고 자유 자재로 유영한다. 그는 그 추진체를 타고 우주미아가 될뻔한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를 구출하며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그녀를 끌고 간다. 이는 모두 허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의 김해동 박사에 따르면, 나사(NASA)의 우주인들이 착용하는 우주복엔 모두 추진장치가 달려있다. 다만 잠깐 동안의 이동이 가능한 소량의 연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만한 장거리 유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다. 물론 코왈스키가 타고 다니는 배낭식 추진장치가 영화를 위한 설정이었다면 이야긴 달라진다. 하지만 허블망원경 주변부에서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그리고 중국 우주정거장 텐궁까지 다다르는 여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추진장치나 소유즈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엔 세 지점의 자전 궤도가 지나치게 멀고 궤도의 접점에서 마주칠 확률도 희박하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중요한 설정들이 모두 허구인 것이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영화적 오류들에 대한 예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비티>는 나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영화다. 실제로 촬영 현장엔 나사와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있었고, 산드라 블록은 촬영 중 의문이 생기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우주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우주 영화가 사실(fact)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그 비사실적인 결과물이 고의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래비티>의 거짓말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reality)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영화의 사실성에 대한 전제 조건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비티>라는 영화적 체험이 위대한 건 이 영화가 주는 체험적인 쾌감이 숭고한 감동으로의 착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놀로지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우선시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이 영화가 하고 있다고 본다.”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진화한 테크놀로지의 과시도 중요하지만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어떤 영화적인 감동을 더해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비티>는 ‘놀라운 거짓말’로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전한다. 무중력의 우주를 체험하게 만들지만 결국 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의지를 고취시킨다. 용기를 준다. 결국 <그래비티>가 증명하는 건 기술의 진보가 영화의 발전을 촉매할 순 있지만 영화의 발전의 절대적 조건일 수 없다는 교훈이다. 한편 미국의 라이브쇼 <SNL>에서 <그래비티>의 오류 하나를 지적했는데 내용인즉슨, 조지 클루니가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동년배의 여성과 대화를 나눌 리 없다는 것. 이야말로 정말 날카로운 지적 아닌가?
지구의 구체 일부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 아이맥스 스크린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과 반비례하듯 청각적 자극을 완벽하게 말소시키는 적막함으로부터 <그래비티>는 시작된다. 우주로부터 날아온 시점숏을 통한 시각적 체험과 함께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다는 청각적 체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우주를 보고 있다’가 아니라 스크린 속의 ‘우주에 포함돼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우주의 풍광 속에 잠재된 공포가 그 신비를 목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직구처럼 달려드는 순간부터 <그래비티>가 그리는 진짜 우주를 목격할 수 있다. 무중력, 무산소, 무기압이라는 ‘무’의 바다에 빠진 한 점 같은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무기력이라는 단어의 공포가 생생하게 환기된다. 우주 그 자체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래비티>는 몇 가지 전복적인 흥미를 던진다. 일단 탈출이라는 단어의 방향성을 뒤튼다. <그래비티>는 지구로부터 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지구를 향한 탈출극처럼 보인다. 그 결말부에서 <쇼생크 탈출>의 엔딩컷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으론 우주의 경이적인 이미지보다도 사운드 전략이 <그래비티>에서 우주를 체험시키는 방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산소와 무기압은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완벽한 묵음 상태를 통해서 무음 상태의 우주를 재현하는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채우는 우주의 풍경과 맞물려 진짜 우주에 떠있다는 공감각적인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중력 안에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과 생물처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숏 또한 <그래비티>의 우주를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우주라는 공간성의 신비를 벗기고 공포라는 감각을 주입하는 것 역시 뼈가 시리도록 신선하다.
열연을 펼치는 산드라 블록도 대단하지만 이 숨막히는 우주적 재난에서 산소 같은 위트를 공급하고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선사해내는 조지 클루니의 존재감도 형형하다.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는 이토록 거대하고 적막한 재난이 생명과 인생이라는 두 개의 ‘생’을 구원하는 우주적인 감동으로 나아간다는 데에서 보다 훌륭한 가치를 품고 있다. 다시 그 생을 목격하고 싶다.
1. 왕십리 아이맥스 3D로 <그래비티>를 봤다. 우주에 다녀온 기분. 우주 혹은 무중력 그 자체가 이길 수 없는 괴물 같다.
2.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광활한 시점숏과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경이로운 무중력 세계의 신비를 순식간에 공포로 둔갑시켜버리는데 정말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분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 우주에 함께 떠 있는 듯한 기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대단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부여하는데 이리와, 이런 건 처음이지, 라고 손짓하는 느낌이랄까.
3. <더 문>이 잠깐씩 생각나긴 했다. 모노드라마에 가까운, 광활한 우주에서의 고립감. 하지만 <그래비티>는 우주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이입시킨다. 덕분에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4. <피라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 싶겠지만 보면 안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온갖 것들을 해체하는데 딱 그런 공포심이 느껴진다.
5. 이만큼이나 광활한 시점숏은 본적이 없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배우들의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배우들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마저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극히 '생물 같은' 시점숏이 활용된다. 실제로 가끔씩 배우들이 카메라를 고의적으로 의식하는 인상을 주는 컷도 등장한다. 어쨌든 덕분에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대한 우주를 표류한다는 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것인데 지금까지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그 어떤 공포스러움보다도 공포스러운 기분을 체험한 기분.
6.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들은 때가 되면 더러 등장하는데 그 발전을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승화시키는 영화들은 아주 가끔 등장한다. <그래비티>가 그런 영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래비티>의 전후로 나뉠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훗날 <그래비티>를 연상시킨다라고 할만한 영화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아이맥스 상영 방식이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도 이런 관점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한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래비티>를 통해서 경이로운 기술적 체험을 우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지극히 영화적이라 더욱 놀라운 작품. 우주라는 거대한 괴물로부터의 탈출극이 장르적인 카타르시스를 책임지는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휴머니즘과 멜로적인 감수성의 결정을 선사하며 영화적인 중력을 선사한다. 기술적 체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진보를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끌어올린다.
8. 사운드 전략이 대단하다. 도입부에서 설명하듯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는 우주의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적막함과 웅장함의 극단적인 음의 이동과 전개가 서스펜스를 촉진시키고 극대화시킨다.
9. <프로포즈>(2009)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 해에 <블라인드 사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을 때, 정말 산드라 블록이 좋아졌는데 <그래비티>를 보면서 아, 정말 좋은 배우로 자리잡았구나 생각했다. <그래비티>의 조지 클루니를 보면서 <밀양>의 송강호가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을 지지하는 조연이자 영화적 장치로서의 임무에 완벽하게 복무한다. 실제 등장 배우가 온전히 둘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는 생각보다 일찍 퇴장함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복선을 세우고, 광활한 우주를 메울만한 감정선의 스케일을 넓히고, 방점까지 찍어낸다. 정말 훌륭한 배우다. 멋있다.
10.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3번 정도는 더 보고 싶다. 아니, 목격하고 싶은 것일지도. 지금이어야만 가능한 일은 해도 해도 아깝지 않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일단 액션 걸로 시작했지만 점차 로맨틱 코미디 걸이 됐다”는 산드라 블록의 말은 그녀의 변화를 온전히 대변한다. <스피드>(1994)의 터프한 액션 헤로인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어낸 산드라 블록은 이듬해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로 로맨스의 중심에 섰다. 연이은 성공으로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성공적인 두 편 이후로 그녀는 평범한 멜로나 스릴러에 갇혀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를 구한 건 슬랩스틱이었다. 제작자로서도 이름을 올린 <미스 에이전트>(2001)에서 철저히 망가진 그녀의 결심은 결국 보상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를 구한 건 코미디였다. 오래된 유행가사처럼 잊혀져가던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2009)로 다시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올 어바웃 스티브>(2009)는 “나는 항상 대담했다”라는 산드라 블록의 자신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최근 <블라인드 사이드>(2009)로 인상적이란 평가를 얻고 있는 산드라 블록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이 아닐까. 언니가 돌아왔다.
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