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사전에 ‘예스(Yes)’란 없다. 오로지 ‘노(No)’만 존재할 뿐. 어떤 제안에도 거절이 뒤따른다. 심지어 물음이 끝나기 전부터 거절을 서두른다.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미덕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예스’의 삶이 찾아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남자는 어떤 일에도 무조건 예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서약한다. 그 뒤로 그 남자는 예스에 귀속된다. '노'밖에 모르던 그가 '예스'만을 말한다. <예스맨>의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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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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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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