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사전에 ‘예스(Yes)’란 없다. 오로지 ‘노(No)’만 존재할 뿐. 어떤 제안에도 거절이 뒤따른다. 심지어 물음이 끝나기 전부터 거절을 서두른다.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미덕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예스’의 삶이 찾아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남자는 어떤 일에도 무조건 예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서약한다. 그 뒤로 그 남자는 예스에 귀속된다. '노'밖에 모르던 그가 '예스'만을 말한다. <예스맨>의 삶이 시작된다.
은둔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칼(짐 캐리)의 행동엔 어떤 이유가 명시된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기방어적 성향은 이혼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처의 앞에서 달아나듯 사라지는 칼의 모습에서 모종의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칼은 자신에 대한 모든 관심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한다. 홀로 집구석에 쳐 박혀 매일같이 DVD나 보면서도 친구의 전화엔 항상 바쁜 척이다. 심지어 오랜 친구의 약혼식마저도 귀찮다. 소통에 실패한 지난 경험이 소통을 거부하게 만든다. 타인을 통해 얻은 상처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해졌다. 외로움에 무감각해졌다. 집에서 홀로 DVD를 보다 죽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친구들의 조롱을 악몽처럼 꾸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 처방은 간단하다. 자신의 믿음을 역전시킬만한 계기만 있으면 된다. 다만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노'에 대한 강박처럼 '예스'에 대한 강박도 비슷한 양상이다.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삶에 대한 미숙함이 칼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진짜 성장이 필요한 사람이다. 관심에서 달아나는 법이 아니라 관심을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른이다. 그런 그가 우연처럼 '예스'를 실천하다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난다. 삶이 변한다.
<예스맨>은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스스로 꽉 막힌 채 살아가게 된 한 남자가 어떻게 변했고, 무엇을 알게 됐는지에 관한 가벼운 드라마다.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사연이지만 주제는 흥미롭다. 삶을 부정의 모토로 끌고 가던 한 남자가 타의로 인한 긍정을 통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은 지극히 성찰적이고 시사적이다. 개인주의적인 경계를 중시하는 현대 도시 사회에서 <예스맨>은 정도차가 있을 뿐 보편적인 사연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비약적이지만 <예스맨>은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통해 적절한 타협점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어떤 가능성을 묘사하면서도 그 가능성의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소심한 듯 기괴한 짐 캐리의 연기도 설득력을 지닌다. 코미디의 기능성과 드라마의 진정성을 겸비하는 짐 캐리의 연기는 뻔한 듯 하지만 점점 자신만의 관록을 자랑한다. 종종 넘치려 하는 짐 캐리의 애드립을 적절하게 받아넘기는 주이 드샤넬의 리액션도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짐 캐리의 한국어 연기가 이색적이나 반가운 묘미를 팁처럼 부여한다.
삶은 '예스'와 '노'라는 양면적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선택으로 삶은 가늠할 수 없다. 예스와 노가 혼재된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칼이 예스를 선택하고 곤경에 빠졌다가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처럼 어떤 일방적인 선택이 우연한 행운을 가져다 줄 순 있겠지만 그 효력이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예스맨>은 수동적인 인간이 능동적인 삶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노’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황량하게 방치하거나, ‘예스’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전시하던 철없던 어른이 뒤늦게 자신의 삶을 어른답게 선택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이들도 성장하지만 어른들도 성장을 겪는다. <예스맨>은 로맨스를 통해 성장하는 어른을 통해 삶을 간략히 정리한다. '예스'나 '노'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깜빡이를 넣고 달려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끝없는 갈림길이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삶을 가늠할만한 가장 좋은 신호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 끝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면서도 나아가는 게 바로 삶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차를 몰고 가던 진(오다기리 죠)은 차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치려다 사람을 칠뻔한 상황에서 잠에서 깬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그 현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랍게도 현장엔 진짜 자신이 꿈 속에서 들이받은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의 용의자는 집에서 자고 있던 란(이나영)이다.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지만 차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무인 카메라에 찍힌 사진마저도 본인이 확실하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는 잠든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기이하게 뒤틀린다. 진과 란은 배타적인 성별의 육체로 구분된 자웅동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지만 진과 란은 그 속세의 진리로부터 타자화된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너무나도 생생한 진의 꿈은 란의 몽유적 현실로 도래한다. 진과 란이 나란히 잠들게 되면 진이 꿈을 꾸고 란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꿈과 현실은 각자에게 역설을 부여한다. 진은 자신의 꿈을 통해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박지아)을 찾아가지만 그때마다 란은 자신이 혐오하는 옛 연인(김태현)에게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는 잊지 못한 사람을 매번 꿈으로 찾아가지만 여자는 지우고 싶은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대면하고 돌아온다. 진의 가상적 행복은 란의 현실적 불행으로 중첩된다. 마치 이란성 쌍생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사(장미희)의 진단처럼 두 사람의 육체는 하나의 자아를 나눠 담은 일종의 경계와 같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白黑同色). 두 사람의 분리된 삶은 별개의 자아가 꿈꾸는 배반적 욕망이다. 진과 란은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배반적인 감정의 형태로 구현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사랑이란 감정의 양극단에서 진과 란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감싼다. 하나의 욕망이 두 개의 극단적 자아로 분리될 때 그 이룰 수 없는 감정은 두 개의 욕망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개의 자아는 서로를 배반하는 형태로 동떨어지려 하지만 결국 자석의 다른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운명으로 점철된다. 결국 진과 란은 동일한 감정이 형성시킨 극단의 양태로 물화되지만 비로소 하나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비몽>은 김기덕 감독의 자의식이 해부한 로맨스의 추상적 견해, 혹은 그로부터 건축된 로맨스의 피상적 추론이다.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미지는 때때로 그 안으로 매몰되듯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의지로 상징적 의도들을 일관된 양식으로 건축해나간다. 남자와 여자, 꿈과 현실, 그리움과 혐오, 재회와 이별, 삶과 죽음. <비몽>에서는 대립적인 형태로 구현된 심리적 잠재태들이 구체적인 양태로 나열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개로 양분된 육체적 자아로서 내면의 너비를 구체화한다. 하나의 감정을 완성하는 양면의 육체가 서로를 향할 때, 그 지난한 사랑도 완전해진다. 잠을 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듯, 꿈과 현실로 양분된 극단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킨 후에야 완벽하게 교감한다. <비몽>은 극단적인 수난을 통해 정신적인 변태를 거듭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양식적 지론이 부분적으로 날것처럼 복원된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적 피탈(避脫)의 경지를 꿈꾸는 열반의 지향점을 그린다. 상징적인 욕망들로부터 구현된 화법은 여전히 김기덕으로 수렴하는 <비몽>은 개인적인 의식에 충실한 만큼 사적인 사유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칭구도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상징성은 극단적인 구체화를 거쳐 우아한 시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궁극적으로 잿빛과 같이 출발되던 세계관은 고요하게 투명해진다. <비몽>은 흑백의 조화처럼 이상적인 공존을 꿈꾸고, 현실로 투영한다. 그 안에서, 얇은 삶 하이얀 죽음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총기난사사건 15주년 추도식을 예고하는 힐뷰고등학교 교정 앞에 선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인 블룸>은 15년 전 다이애나가 그 급박한 기로에 닿기까지의 이전에 해당하는 과거완료진행형의 대과거시제와 15년 후 그 상황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현재진행형의 현재시제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다이애나의 잃어버린 15년은 흔적이 없다. 그녀에겐 단지 15년 전과 15년 후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통해 삭막한 부동산 경제 법칙에 고립되고 잠식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적 갈망을 포착했던 바딤 페럴만 감독의 <인 블룸>은 또 다른 인간의 갈망을 그린다.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총격사건, 더 앞서서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이 떠오른다.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면 그라운드 제로 앞에 묵념하는 미국인들의 포스트 9.11 증후군의 잔상이 어린다. 하지만 <인 블룸>에서 그런 구체적인 현실적 예시문을 언급하는 건 그리 썩 좋은 일이 아니다. <인 블룸>은 현실을 명징한 영화적 소환이라기보단 어느 가상을 통해 고찰하는 현상적 신비다.
현재와 과거가 반복되는 영화적 서술형태는 단지 서사적인 거리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평행적인 서사는 실마리를 알 수 없는 15년 간격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기거나 서로 간에 꼬리를 물 듯 연계되는 속성을 지닌다. 마치 그건 어떤 염원에서 비롯된 염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 15년 전 그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TV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다이애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거나 혹은 현실의 타인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일련의 태도나 행위를 목격한다. 또한 현실의 다이애나가 겪는 착시와 환각은 묘하게 과거와 연동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씬도 긴밀하게 교차되곤 한다.
영화의 끝은 시작과 같다. 그 끝은 시작의 평온함과 달리 커다란 울림을 동반한다. 15년 전과 15년 후의 균형을 유지하던 그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때, 우아하면서도 지독하게 아련하여 서글픈 여운이 슬프고도 고요하게 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기에 심정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실감난다. 죽음 앞에 직면한 자의 삶의 요구가 간절하게 적시된다. 찰나가 영원으로 번져나가고 정체가 모호하던 현실의 환각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과거를 명확하게 비춘다. 일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그 일생의 끝은 너무도 길다. 삶은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지독하게 간절해진다. ‘만약’은 유령과도 같은 단어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추모한다. <인 블룸>은 그 유령 같은 시간을 처연한 신비에 담아 고찰한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에도 꽃은 피고 진다. 고요한 세상 안에서 삶과 죽음은 찰나를 오가며 교차된다. 삶은 죽음 앞에서 더욱 빨갛게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