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다.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시골로 전향된 김순경(엄태웅)을 비롯해 교수 임용을 위해 멧돼지에 관한 거창한 논문을 기획하는 변수련(정유미), 손녀의 복수를 위해 식인멧돼지 사냥에 나서는 천일만(장항선), 최고의 포수로 가오가 대단한 백만배(윤제문),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신형사(박혁권)까지, <차우>는 각자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다섯 인물을 통해 서사의 밑그림을 그린다. 한강괴물을 연상시키기 좋은 거대식인멧돼지와 함께 그 뒤를 쫓는 캐릭터 머릿수까지 <괴물>의 가족과 엇비슷하게 이뤄진 <차우>는 분명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중력에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괴수영화로서 <괴물>과 비교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환경을 무대로 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활용에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킬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는 유사한 소재와 환경적 구조를 선점한 두 작품의 후발주자로서 비교 대상의 운명에 놓였을 뿐, 봉준호의 두 작품이 <차우>를 포괄하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기시감이 명백할 따름이다.
소박한 표정 너머로 흉악한 인상이 감지되는 시골성의 전복적 기운과 거대 괴물의 출몰과 함께 그려지는 아수라장의 이미지까지, 한국의 토착성을 부조리하게 수식하는 사건들이 열악한 지방성의 감춰진 욕망과 함께 뒤엉켜 구른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소굴이자 기형적인 욕망으로 비뚤어진 인간들의 늪처럼 쇠락한 도시인이 모여들고 상승의 욕구로 팽배한 지방인들이 자리한 삼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의 풍자를 위해 가공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포악한 기질을 응축한 다큐적 질감의 오프닝 시퀀스는 <차우>가 본질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적 목적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노골적으로 증명한다. <차우>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낳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되레 그 괴물을 포획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안티-휴머니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예측불허의 슬랩스틱부터 엉뚱한 경로에서 끼어드는 캐릭터들의 난동극까지, B급 취향에 근접한 마이너 코드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의 기대감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다. 순수제작비 60억 대의 메이저 상업영화로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유머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는 <차우>를 불순하게 수식하는 동시에 특수하게 치장하는 배반적 장기로서 활용된다. 종종 위태로운 이음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플롯의 공백과 무뚝뚝하고 성긴 액션신의 연출이 매끄럽지 못한 장르적 자질을 인식하게 만들고, 연출력의 공백을 감지하게 만들지만 예측불허의 지점에서 난입하듯 발생하는 유머가 상황을 불식시킨다. 엉뚱하지만 때때로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괴수영화로서 영화적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차우>는 분명 배반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멧돼지와의 추격신과 액션신이 후반부에 집중된 건 CG예산과 관련된 집중력 문제에 있겠지만 ‘리얼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의 기대감을 양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분명 불만을 얻을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차우>는 쏠쏠한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괴수물로서의 위용과 B급 유희가 맞물리는 조합은 컬트적인 호응에 다다를만한 근사값을 이룬다. 대자본을 활용한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코드의 결과물은 무모함과 과감함의 너비를 확보한다.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전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 논란 따위를 접어두고라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드>는 현재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부여하는 묘미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는 작품이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집단 학살신은 심심하지 않은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액션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때때로 게임 동영상을 삽입한 것마냥 조악하기 짝이 없는 CG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비전문액션배우의 지친 몸놀림을 커버하기 위해 시종일관 흔들어대는 카메라 워크도 무색하기 짝이 없다. 결론은 <블러드>가 딱히 미덕을 설명하기 어려운 오락영화란 말이다. 혹시나 만약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원작 스크린판이란 문구 따위로 그 이상의 기대감을 충만한 관객이 있다면 모든 기대감을 접는 게 낫다. <블러드>는 전공투 시절의 역사적 의식을 투영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소설도, 그 이후로 뱀파이어 팬픽 수준의 양질을 유지하며 분화해나간 ‘블러드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과 코믹스와도 다른 작품이다. 특히나 증축된 서사는 <블러드>를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흔드는 과욕 같다.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 할만한 전지현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뿐, 안타깝지만 액션을 구사하기엔 지치는 몸놀림을 선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부작을 생각한다지만 이미 시리즈로서의 가능성은 끝난 느낌이다.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구사되지 않는, 타격감이 없는 성룡영화라니 생소하다. 액션 장면은 있다. 하지만 그 액션 장면에서 성룡은 우리가 아는 성룡이 아니다. 그냥 마구 휘두르고 얻어 맞기도 한다. 액션 활극이 아닌 사실적인 느와르 안에서 성룡의 위트는 전혀 구사되지 않는다. 그 진지함만큼이나 진중함도 대단하다. <신주쿠 사건>은 살벌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도쿄의 비정한 정서를 온전히 체감하는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도쿄 생존기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한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넘치던 90년대 도쿄 신주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희망과 절망을 가로지르는 불법이민자들의 저항과 애환을 핏빛으로 투영한다. 성룡과 판빙빙을 비롯한 중화권 배우들과 타케나카 나오토를 비롯한 일어권 배우들은 제 역량을 다함과 동시에 그 조화가 자연스럽다. 사실적인 신체훼손 장면이 연출되는 등 폭력의 수위가 높지만 그 무거운 정서가 캐릭터의 공포와 분노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무엇보다도 활극적 액션을 연출하지 않고 온전히 표정만으로 승부하는 성룡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륜과 관록이 넘치는 성룡의 표정은 비정한 느와르의 내면을 탁월하게 대변하는 창이나 다름없다.
국내에서 방영됐던 TV시리즈 <스타트렉: 더 넥스트 제네레이션>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스타트렉>의 네임밸류는 분명 국내에서 ‘듣보잡’에 가깝다. 특히 <스타트렉>이 전세계적으로 ‘트레키(Trekkies)’라는 광신적인 팬덤까지 형성하며 성대한 지지를 얻은 시리즈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리즈가 국내에서 얻은 대우는 가히 ‘안습’에 가깝다. 하지만 1966년에 제작된 진 로든베리의 오리지널 시리즈로부터 5번에 걸쳐 진전된 TV시리즈와 10편의 극장판까지 업데이트 된 <스타트렉>의 발자취는 국내 사정과 무관하게 무궁무진 그 자체다. J.J.에이브람스가 이 시리즈의 프리퀄(prequel)이라 소개된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하, <더 비기닝>)을 축조하기까지의 과정도 분명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스타트렉>은 분명 전설이다.
<더 비기닝>은 전설을 위해 마련한 또 다른 초석이다. 시작을 의미하는 부제처럼 시리즈의 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린 것 같지만 실상 그 야심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더 비기닝>은 단순한 프리퀄이 아니다. 그저 앞선 시리즈가 묘사하지 못한 옛날 이야기 따위를 삽입하거나 발전된 그래픽기술을 통해 과거에 불가능했던 비주얼을 전시하는 부록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더 비기닝(The beginning)’이라는 부제는 그 위치를 알리는 지표가 아니라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되는 ‘리셋(reset)’도 아니고 지금까지 진행되던 모든 사연을 뒤엎고 새롭게 건축하는 ‘리부트(reboot)’도 아니다. 말 그래도 또 다른 시작에 가깝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원점을 그려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서사의 영역을 단선적 배치로부터 탈피시킨 상대성 원리다. 공간에 구멍이 뚫리고 그 공백을 통해 차원의 장벽이 무너질 때 시간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개념은 순간이동과 상대성 원리의 기초적 결합이며 이는 <더 비기닝>이란 프로젝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자 규칙이 된다. 또한 <스타트렉>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이미 기본적인 물리적 원리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원리를 응용하는데도 무리가 없다. <스타트렉>은 영화 밖 현실에서 가설의 형태로 존재하는 물리적 법칙들이 이미 현실화된 하이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다. 그만큼 영화 밖 현실과 영화 안 현실의 괴리는 미래의 기술적 진보라는 테마 자체만으로 극복이 가능하다. 미래라는 서사적 허구는 현실적인 불확실성을 원리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판타지의 현실적 그릇으로 확보된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시대적 성취로 인정되는 다양한 가능성이 새로운 이야기의 동력원으로 확보된다.
<더 비기닝>은 이런 가능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서사의 형태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가공하거나 새롭게 포장만 바꾼 것이 아닌, 과거와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대체 현실(alternative reality)’을 창조해낸다. 마치 어떤 표면을 흐르는 카메라가 궁극적으로 우주선의 몸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더 비기닝>은 어떤 일부분의 노출을 통해 흥미를 자극하면서 거대한 결과물을 통해 탄성을 내지르게 만든다.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시작은 이야기의 파편과 같다. 그 파편의 흔적을 추적하고 새로운 파편을 수집하며 이야기의 동선을 가늠할만한 단서가 되는 거대한 원리가 등장하는 중반부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다. 캐릭터의 탄생 시점을 비틀고 이를 통해 운명을 보존하되 새로운 필연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캐릭터의 성향이 변화하고 새로운 변주가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스타트렉>시리즈의 전통적인 트레키나 새로운 트레키의 양자가 될 후보군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이다.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와 스팍(잭커리 퀸토)을 비롯해 우후라(조이 살디나)와 술루(존 조), 맥코이(칼 어번), 스콧(사이먼 페그)과 같이 새로운 얼굴로 대체된 전통적 캐릭터들은 오래된 추억과 교감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한 양자로서의 표정을 드러낸다. 또한 체코프(안톤 옐친)와 같은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이 시리즈가 과거와 다른 방향의 탐사를 펼칠 것임을 예고하기도 한다.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미래를 담보로 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다소 낙관적인 <스타트렉>시리즈의 감수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음과 동시에 과거보다 진보된 영상 기술을 통해 과감한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쾌감을 장착한다.
이는 프리퀄도 아니고, 속편도 아니다. 시리즈의 0번째 위치를 선점한 동시에 11번째 자리마저 점유한다. 시리즈의 중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출발점에 섰다. 서사에 합류하기 보단 서사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탈출해버렸다. 확실한 건 이 시리즈가 매력적인 탐사를 시작할 것이란 기대감이다. <더 비기닝>은 새로운 탐사에 앞서서 새로운 세대의 트레키를 끌어당길 거대한 떡밥 그 자체나 다름없다. <더 비기닝>은 이로서 추억을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이 펼쳐질 광활한 우주적 가능성을 품었다. 이는 새로운 대탐사 시대를 예언하는 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제임스 커크의 질문에 관객은 답해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바꾸는 거, 반칙이죠?”올드 트레키들은 “장수와 번영을! (Live long and prosper!)”그리고 새로운 트레키들은 ‘행운을! (Good luck!)’. 어떤 쪽이라도 황홀할 것이다.
<몬스터 vs 에이리언>(이하, <몬스터>)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캐릭터가 아니라 스토리를 보고 영화를 선택했다. 스토리가 마음에 들면 캐릭터는 자신의 방향에 맞게 만들어가면 된다. 특히 <몬스터>같은 경우 젊은이들에게 남과 다르다는 건 나쁜 점이 아니라 오히려 큰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면 ‘거대렐라’는 굉장히 크다는 게 콤플렉스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친구들도 구하고, 지구도 구한다. 목소리 연기는 캐릭터를 내 몸에서 벗어나 목소리만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24>를 찍던 중에 <몬스터>를 했기 때문에 주중에 14시간은 잭 바우어를 연기하고, 주말 5시간은 워 딜러를 연기했기 때문에 균형이 잘 맞았다. <몬스터>는 5살로 돌아가는 것처럼 재미있는 기분을 느꼈다.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캐릭터를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창조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게 애니메이션의 좋은 점이기도 하다. 내가 예전에 봤던 <벅스 바니>만화 캐릭터의 목소리가 워 딜러 장군과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얻었다. 그걸 기반으로 좀 더 발전시켜서 워 딜러 장군에 맞는 목소리를 만들었다.
<몬스터> 이전에도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친 적이 있다. 그 밖에도 게임이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맡았던 적이 있다. <24>를 비롯해 그 동안 액션 연기를 많이 했다. 그런 당신에게 목소리 연기가 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이지만 <몬스터>를 비롯한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캐릭터에 맞게 창조를 하는 작업이다. 낮과 밤, 아니면 오렌지와 사과처럼 목소리 연기와 몸으로 하는 연기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일단 애니메이션은 내 몸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이나 목소리만으로 연기를 한다는 면에 있어서 훨씬 자유롭다.
3D영상기술은 차세대 영상매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 안에선 가상의 3D인물이 진짜 배우처럼 연기한다. 배우로서 이를 지켜보는 느낌이 어떤가?
3D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유망한 기술이며 당연히 장차 차세대 매체로 활용될 거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 같은 유명한 감독들도 이에 동의하는 것으로 안다. 이는 관객들을 영화자체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내가 봤던 50년대, 60년대 3D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물론 기술 자체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기술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담회에서 한예슬 씨와 친근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녀의 첫인상이 어땠나?
일단 목소리 톤이 리즈 위더스푼과 굉장히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드림웍스의 CEO인 제프리 카젠버그는 47개의 언어로 출시되는 <몬스터>가 제각각의 버전에서 제대로 표현되는지 관심이 많고 그만큼 목소리에 민감했다. 그런데 한예슬 씨 목소리를 듣더니 굉장히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나도 오늘 아침에 처음 봤는데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게 웃더라.
<24> 시즌7이 조만간 한국에서 공개된다. 시즌7에서 주목할만한 점이 있나?
메시지는 관객들이 픽업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부분을 봐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다. 다만 시즌7에서는 잭 바우어가 지난 삶에 대해서 많은 성찰을 한다. 한국에서도 공개된다니 기대가 된다.
오랫동안 잭바우어를 연기하고 있는데 그런 캐릭터와 함께 늙어간다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잭 바우어는 계속 진행되는 캐릭터다. 시즌1에 나오는 잭 바우어와 시즌7에 나오는 잭 바우어는 완전히 다르다. 잭 바우어는 굉장히 큰 대가를 치르면서 많은 일을 해나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변화하는 것처럼 캐릭터도 함께 보완되는 것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잭 바우어를 연기하는 동안 배운 바가 많다. 지금도 굉장히 즐기면서 하고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잭 바우어의 이미지를 나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24>가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자신의 작품이 여러 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24>는 아시아권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인기가 많다. <24>가 국경과 언어와 문화의 경계성을 초월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고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해서 그만큼 동감하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자랑스럽다.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결혼식 날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서 선배(?) 몬스터들과 함께 ‘거대렐라’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채 격리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로부터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전군이 동원됐지만 거대로봇에게 맞서긴 역부족이다. 결국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거대렐라’가 된 수잔과 함께 미씽 링크와 닥터 로치, 밥은 작전에 성공하면 자유로운 신분을 주겠다는 워 딜러 장군(키퍼 서덜랜드)의 약속과 함께 거대로봇을 제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유머로 발생시키는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깝다. 특히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의인화된 몬스터 캐릭터들이 해학적인 위트를 구사한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결과적으로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식상한 스토리는 어떤 면에 있어서 <몬스터>의 야심에 어울리는 배경이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몬스터>의 야심은 심오한 스토리텔링과 어울릴만한 것이 아니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영상이미지다.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기술을 통해 구현된 입체적 영상이 <몬스터>의 야심 그 자체다. 시각적 기술의 진일보를 통해 새로운 차세대 엔터테인먼트의 자극을 체험하고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이미지는 단명해진다. 거대로봇과 맞서는 몬스터들의 에피소드는 거대한 사물의 등장을 통해 스케일을 넓히고 스펙터클을 확장하려는 기술적 성취의 전시적 욕망의 부산물에 가깝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일단 흥미롭다. 이미 역치의 수준이 실무율의 단계에 들어선 영상의 오락적 기능성을 대체할 입체영상의 현대적 지표가 어느 수준에 다다랐는가를 증명하는 기술적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몬스터>는 되레 자신의 야심과 다른 지점의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담보로 한 혁신적인 이미지를 장착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떤 수준 이상의 이야기와 함께 맞물리지 못한다면 영화적 만족도를 주지 못한다는 것. 뛰어난 효과는 뛰어난 영상의 기반이 되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창작적인 스토리를 기반으로 삼지 못한 이미지는 결국 영화로서의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인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그것 또한 <몬스터>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기도 쉽지 않다. <몬스터>는 창작과 기술의 조합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공무원 지상주의가 대한민국 20대를 고시라는 무덤에 매장해버린 세태 속에서 <7급 공무원>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한 예감을 부른다. 하지만 예감은 예감일 뿐, 오해하지 말자. 코미디, 그것이 진리다. 첨단 기기를 이용한 첩보행위 도중에도, 지상과 수상을 넘나드는 추격전 도중에도, 긴박한 육박전이 동원되는 액션 도중에도, 어김없이 다리에 힘 풀릴만한 엇박자가 연출된다. 진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해프닝을 일삼는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엔 안중 없는 대사의 합은 매번 웃음을 안겨주고야 만다.
안수아(김하늘)는 국가 비밀정보요원이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선 안 되는 처지인 덕분에 스스로를 여행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무(?)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으로 애인인 이재준(강지환)의 오해를 사고 결국 이별 통보까지 받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여전히 공무를 수행 중이던 안수아는 이재준과 재회하고 구타로 회포를 푼다. <7급 공무원>은 액션물이나 형사물, 심지어 첩보물의 외피를 한쪽씩 걸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로맨틱코미디다. 그리고 그 로맨틱코미디 안에서도 로맨틱보단 코미디에 강세를 두고 있다. <7급 공무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코미디를 위해 모든 요소를 복무시키는 영화다.
전체적인 맥락만 놓고 보자면 <7급 공무원>은 조악한 영화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충분히 설득할만한 내러티브는 종종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시퀀스 전체를 관통할만한 유기적인 맥락은 애초에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그릇을 시야에서 가려버릴 정도로 뻔뻔하게 눈에 띄는 장기가 그 안에 담겨있다. 개성이 충만한 캐릭터들은 <7급 공무원>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일급요원들이다. 새침하듯 억척스런 안수아와 소심하듯 열정적인 이재준을 연기하는 김하늘과 강지환은 나름대로 그 캐릭터에 충실한 연기를 펼친다. 또한 두 주연이 이루는 합의 빈틈을 메우거나 역할의 반사적 기능에 충실한 덕에 효과를 증폭시키는 조연들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류승룡이 연기하는 재준의 상관 원석은 웃음의 자율신경이라 명명해도 좋을만큼 중요한 배후 인물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비밀요원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국내에 잠입한 국제적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한다. 그들은 고성능 장비를 소지하거나 첨단 추적 기기를 통한 지원을 얻는다. 사실 영화 속 ‘7급 공무원’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과학수사대와 경찰특공대라는 절대명사까지 동원한다 해도 영화 속에서 ‘첩보’란 단어를 묘사하는 이미지 자체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의 범주를 통해 예상되는 스케일과 괴리감을 부른다. 드레스를 입은 채 수상제트스키를 타고 범인들을 쫓는 안수지의 추격전에서 시작되는 <7급 공무원>은 작게는 고화질 위장캠을 비롯한 첨단 첩보 장비로 무장한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외형부터, 크게는 스파이물이라는 소재 자체의 성격까지, 모든 것들이 한국적이라고 부르기엔 괴리감을 형성할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 괴리감은 <7급 공무원>의 선택적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지향점이 그 영화적 현실을 관객에게 온전히 설득시킬 요량과 무관함을 입증하고 있다고 보는 쪽이 옳다. 만약 일련의 이미지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그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첩보물 형태의 오락영화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은 분명 할리우드 오락영화에 대한 동경심이 읽히는 영화다. 반대로 그 동경심 자체를 역공으로 착취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스케일을 흉내 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묘사한 사례들을 대한민국에 적용시킨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7급 공무원>의 핵심은 시트콤에 가까운 에피소드를 순발력 있게 이어가며 강세를 유지하는 코미디다. 공격할만한 허점이 많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 있는 공격력을 갖추고 있다. 철저하게 조직된 진영이라기 보단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지뢰밭처럼 예측할 수 없는 웃음들이 순간을 지배한다. 물론 객석에서 일어서게 될 즈음엔 영화의 첫 장면이 가물가물함을 느낄지 모른다. 어떤 관객은 뒤늦게 이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론을 두더라도 2시간 정도는 분명 낄낄거리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7급 공무원>은 욕설과 구타라는 가학적 폭력을 코미디라고 착각하는 어떤 코미디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유연한 캐릭터와 합이 적절한 대사를 통해 웃음을 전달하는 건전한 오락영화란 점에서 장르적 성취를 인정할만하다. 어쩌면 코미디라는 기능성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7급 공무원>을 선택할 관객에게 이런 긴 설명은 무의미한 일이 될지 모른다. 대사로 치자면, ‘장난 한번 치니까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랄까.
<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敵)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賊)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야연><집결호>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 펑 샤오강 감독의 2004년도 작품인 <천하무적>은 사실 기교적으로 뛰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소매치기 씬이나 소매치기들 간의 결투 장면은 지나친 눈속임으로 일관하다 못해 때때로 한심할 정도다. 잔상이 심한 슬로모션을 통해 동작을 파악하기 힘든 영상으로 무마하는 소매치기 장면에서 디테일한 손놀림 따위를 기대했을 관객의 심리를 뻔뻔하게 반감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소재를 활용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부터 어떤 기대를 지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좋다.
다만 일면 타당한 구석도 있다. 사건의 전개보다는 개과천선을 바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가 그렇다. 사건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의문을 야기시키는 그 변화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배려라는 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그 변화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시점부터 영화의 감정은 어느 정도 허무맹랑한 구석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성찰을 높이 평가할만한 자신은 없다. 변화의 양상이 타당할 뿐, 그것이 깊은 감동을 부를만한 수준은 아닌 덕분이다.
동시에 소매치기라는 소재를 통해 발생하는 기교적 기대감은 철저하게 망연자실해진다. 내용물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그릇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천하무적>의 문제는 그 어느 쪽도 확실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점이겠지만. 때때로 허세로 가득 찬 화면과 음악을 접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고의적으로 웃음을 야기시키는 의도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실소를 부르는 풍경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유덕화조차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동정을 부르는 느낌이다. ‘천하무의(意)’와 ‘천하무실(實)’의 연속이다. 의미도, 실속도, <천하무적>에선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