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일단 앞서 설명한 서사의 줄기를 읽은 당신이라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예고편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거듭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써커 펀치>에서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소녀 베이비돌의 상상 속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혹은 망상이다. 소녀가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중계하던 영화는 어떠한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느 한 찰나에 급작스러운 시공간의 점프컷을 이행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녀는 퇴폐적인 물랑루즈의 쇼걸로 전락한다. 공간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를 액션 시퀀스로 연동시키는데 주력하는 반면, 그 캐릭터들이 속한 체제의 현실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사실 이는 연출자 개인의 야심이 강력하게 피력된 일종의 수단에 가깝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를 완전한 자기 취향의 전시적 행위 혹은 전리품으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장단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스팀펑크적 모티프를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전투 시퀀스, 거대한 사무라이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식 무협, 미래적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눈에 띄는 SF액션, 거대한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써커 펀치>는 재패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망라한 만화적 취향이 총동원된 액션물이다. 또한 바디수트와 가터벨트, 망사팬츠, 세일러복까지, 일본 망가의 미소녀 캐릭터가 연상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테이지 형식으로 진전되는 단계적인 액션 시퀀스와 함께 완전한 버추얼 게임의 속성을 띠기 시작한다.
단계적인 게임 스테이지의 속성을 띤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의 구조적 비교가 가능하며 야심 또한 유사한 영화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면을 재료로 다양한 액션 시퀀스 연출이 가능한 신을 마련하기 위해 구조적인 합의를 구축해나간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는 현실과 무의식 속의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퀀스로 세워나간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에 비해 이성적인 구조로 설정의 무리수를 설득해내는 영화가 아니다. <써커 펀치>는 무의식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확장되는 파편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무리수를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영화다. 이는 대단한 야심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연출 방식은 의도 자체로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가 완벽한 설득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써커 펀치>는 잭 스나이더라는 어느 개인의 취향이 총아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취향이, 오락적인 자극의 역치를 이루는 액션 시퀀스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고립시킨다. CG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여러 모로 눈여겨볼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가짓수만큼이나 흥미도 확대될만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버추얼 액션 시퀀스가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반면 상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현실은 급속도로 흥미를 반감시키고, 동시에 반복되는 액션 시퀀스의 자극의 역치 또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품은 의도나 태도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작품 자체가 존중 받을 길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적 형태로 완성된 영화가 완벽한 자신만의 이상향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도 석연찮은 덕분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잭 스나이더에게 <써커 펀치>는 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소품에 가깝다.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여전사의 면모를 지닌 걸캐릭터들, 그리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의 화력과 톤다운된 화면의 질감, 비트가 강한 일렉트로니카와 락넘버들, 이 자극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써커 펀치>는 그 대단한 화력을 무기로 삼아 감상을 초토화시킨다. 여기서 감상의 초토화란 영화에 장악 당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자극이 영화적 몰입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보다는 후자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야심과 취향이 매력적인 유혹을 일으키지만, 오르가슴을 공유하지 못하고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섹스뿐인 상대와의 관계는 불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스케이트를 타거나 죽거나’라는 제목 그대로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스케이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 드는 두 소년의 도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줄거리는 간단명료하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두 소년이 스케이트 보드에 의지한 채 자신들을 추격하는 범인들로부터 달아나고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들을 쫓는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상대가 경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
음모론의 플롯을 아우른 범죄영화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장르물이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특이점은 서사가 아닌 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스케이트 오어 다이>가 실제로 스케이트 보드를 잘 다루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사실적인 스턴트 액션을 연출해낸다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추격과 도주의 도구가 되는 스케이트 보드는 단순히 이 영화의 소재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킥 플립과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스케이트 보딩을 본다는 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나 다름없다. 스케이트 보드를 이용한 스피디한 추격전과 지형을 이용한 스케이트 보드 액션은 볼거리로서 유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또 다른 특이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 파리라는 사실이다. <택시> <스틸> <13구역> 등 파리를 배경으로 둔, 파리에서 제작된 스피디한 액션 영화들의 새로운 계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프랑스 상업영화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소재로 둔 스턴트 액션에서 꾸준히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파리라는 고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는 스피디한 추격전은 동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유사한 소재를 활용한 동류의 장르물 가운데 신선하다고 평할 만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장점과 단점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둔 익스트림 스포츠 킬링타임 무비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활극적인 재미의 자극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서사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음모론을 축으로 둔 범죄영화로서의 내러티브가 탄탄하거나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흠이다. 결국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성패는 영화 속에서 질주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달아나거나 멈춰서 구경하거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빠른 속도감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이쑤시개 꼬나 물고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쌍권총 손에 들고 폭풍 킬샷 날리던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홍콩 느와르의 전설이다. 하얀 비둘기 날리며 홍콩 느와르의 간지를 창출해낸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를 특유의 장르적 분위기로 승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작품이었다기 보단 그 시대적 공기와 함께 호흡함으로써 얻어진 훈장과 같은 장르나 다름없다.
1986년작인 <영웅본색>은 오늘에 이르러 분명 낡은 추억과 같은 유물이나 그것이 자신의 시대 안에서 이룬 성취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매력임에 틀림없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한 송해성의 <무적자> 속에 담긴 <영웅본색>의 흔적이란 그래서 조금 낯설다. <영웅본색>의 캐릭터 구도를 이어받은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유사 이미지의 액션은 <영웅본색>에 빚진 것임에도 그 뉘앙스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들처럼 보인다.
<영웅본색>이 그러했듯이 <무적자> 또한 범죄 조직의 비정함에 맞서는 수컷들의 의리를 앞세워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액션 느와르를 표방한 작품이다. 팽배한 물질주의와 대륙으로의 반환을 앞둔 공황적 심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홍콩의 입지를 사내들의 느와르적 정서로 연동한 <영웅본색>은 시대에 깃든 아이러니한 정서를 낭만적인 기운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멋을 입힌다. <무적자>는 탈북자라는 신분과 부산이라는 지정학을 통해 <영웅본색>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보기 좋은 젊은 배우들의 캐스팅을 통해 혈기를 보충한다.
<무적자>는 스토리텔링의 흐름 안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결점이 발견되는 영화가 아니다. 인과관계는 적절하며 관계 설정의 변주와 갈등의 양상에서도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산을 근거지로 연출한 느와르적 풍광도 근사하다. 다만 그 내러티브의 흐름을 흔드는 울림이 약하다. 강한 의리와 애틋한 형제애로 묶인 원작의 인물들이 펼쳐내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무적자>의 인물들은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내기 보단 그 감정적 상태를 거듭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것만 같다. 다단한 플롯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선을 구축했으나 감정의 진전이 더디고 끝에 다다라 닿는 폭발력이 약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기능적으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말 그대로 기능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할까. 젊은 배우들의 갈등과 이해로 도모되는 <무적자>의 감정선은 강렬한 혈기가 존재하나 이를 녹록하게 묵혀줄 관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표독스러운 눈빛과 멋스러운 자태가 공존하지만 그것들을 진짜로 승화시킬 내공이 부재한다. 나름대로 대단한 물량공세를 자랑하는 피날레의 액션신은 나름의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 상황 위를 날고 뛰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객석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정서적 연대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할까. 이미 낡은 것이 된 원작의 영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적자>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다. 원작의 본색은 물론 자신의 본색조차 얻어내지 못한 범작에 불과하다. 존경심을 표하기 이전에 자립심부터 챙기고 볼일이랄까.
전직 형사였던 강태식(설경구)은 좋은 말로 하자면 ‘범죄연구소’, 속된 말로 하자면 ‘흥신소’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명 해결사다. 모텔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대가를 얻는 그의 일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이려던 어느 날, 그는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청난 덫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연루된 일임을, 동시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런 덫을 풀어놓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음모의 핵심을 찾아 나선다.
일단 류승완이 기획하고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해결사>는 분명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대감을 품은 어떤 이가 있다면 그 방향을, 혹은 그 기대감의 정도를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만큼이나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그린 <해결사>는 시종일관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해결사>는 단순히 그 활약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최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지 않는 영화다.
개인에게 얽힌 음모의 실체가 실상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와 폐악의 범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 얻게 될 충격은 곧 관객에게 전이돼야 할 문제의식으로 발전될만한 것이다. 실제로 <해결사>는 현실정치를 직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클라이맥스로 점철될 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풍자의 의미를 더할 때, 쾌감은 분명 배가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결사>는 풍자라는 작품의 의미적 성취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완결성 안에서도 분명한 파급력을 얻어낼 수 있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사>라는 결과물 안에서 딱히 이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되레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되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사>에서 가장 기대하고자 한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은 지나치게 의미에 매달린 영화의 야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며 궁극적으로 그 야심 또한 그 의미에 근접해내기 보단 극의 흐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 낭비적인 욕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결사>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부재한다. 음모를 뒤집어 쓴 인물이 끝내 이루는 건 단순한 폭력적 응징에 불과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설경구라는 주연 배우 탓일지 몰라도) <공공의 적>을 연상시키는 엔딩이기도 한데 두 영화의 결말이 클라이맥스라는 용어 안에서 대조군을 이루는 건 말 그대로 중심인물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공공의 적>이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활약을 거칠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반면 <해결사>에서 강태식의 활약이란 고작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룰렛 안에서 돌고 돌다가 운 좋게 타인의 도움에 구제받는 식이다. 음모에 빠진 인물의 감정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할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부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방점을 고민하지 못한 채 어떤 이야기적 구성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주연배우들이 주도하는 액션신은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가 느껴질 뿐, 탁월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는 사실 <해결사>에서 가장 아쉬운 측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액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해결사>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다. 최근 <아저씨>와 같이 특별한 성과라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액션신을 연출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해결사>의 액션은 어떤 스타일도 어필하지 못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체이싱은 대단히 공허하다. 몇몇 조연배우들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이는 영화의 공백을 메울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체 <해결사>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에서 해결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랄까.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을 예상했다면 일단 기대치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일단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보다는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을 추구한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담아낸 <해결사>는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을 풀어내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을 기대해야 할 영화다. 문제는 추구하는 바에 비해 결과물이 조금 지지부진한 느낌이랄까.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인상을 남기며 산만한 감상을 이끈다. 이를 치장하는 액션신조차도 육체적 노고 이상의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몇몇 조연배우들의 대사나 행위가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아바타-아앙의 전설 Avatar: The Last Airbender>를 영화화한 <라스트 에어벤더>는 물, 불, 흙, 공기로 세상이 이뤄졌다는 플라톤의 4원소설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관은 사실 현대 문명에 대한 우화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자행되는 자연의 파괴,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복적인 역사관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물의 왕국, 불의 제국, 흙의 부족, 공기의 유목민으로 이뤄진 <라스트 에어벤더>의 세계는 제국주의적인 야심으로 가득한 불의 제국과 대항하는 타부족인들의 저항을 그리는 영화다. 균형을 이루던 4개의 세계는 100년 전, 막강한 힘을 발판으로 전쟁을 일으킨 불의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고 억압에 억눌린 타부족인들은 물, 불, 흙, 공기를 모두 다스릴 수 있다는 에어벤더, 즉 아바타(Avatar)의 재림을 꿈꾼다. 그리고 어느 날, 남극의 빙하에서 한 소년이 발견된다. 아앙(노아 링어)이란 이름을 지닌 이 소년은 스스로가 아바타임을 밝히고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불의 제국 왕자 주코(데브 파텔)로부터 달아나며 모든 요소를 다루기 위한 수련에 매진한다.
M. 나이트 샤말란은 일찍이 초자연적인 신비에 대한 취향을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 왔다. 그가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것도 그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관적으로 미스터리 장르에 가까운 필모그래피를 축적하던 샤말란이 <라스트 에어벤더>에 흥미를 느낀 건 아무래도 장르적 도전에 의미를 두고 있다기 보단 자연적인 요소를 기초로 둔 초자연적인 판타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라스트 에어벤더>는 샤말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례적인 동시에 이질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라스트 에어벤더>에서 두드러지는 건 단연 볼거리일 것이다. 물과 불, 흙, 공기를 이용한, 즉 ‘벤딩 액션’이라고 부르는 <라스트 에어벤더>의 액션신은 CG를 이용해서 완성한 비주얼을 통해 시각적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라스트 에어벤더>는 지나치게 안이한 스토리텔링을 방관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캐릭터의 등장부터 캐릭터간의 관계를 이루는 과정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서사가 온전히 쉽고 편하게 진전된다. 간단한 설명만으로 진전되는 모든 인과관계의 흐름에는 정서적인 동의를 얻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결여됐다. 이는 곧 감상자로 하여금 영화에 감정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조차 없도록 완벽하게 영화로부터 괴리시켜 버리는 과오나 다름없다.
물론 국내 개봉 전에 이미 북미에서 <라스트 에어벤더>에 대한 기록적인 혹평이 쏟아진 것에 비하면 이 영화의 만듦새는 꽤나 양호한 편으로 분류할만하다. 이는 샤말란이라는 작가적 감독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힌다. 그의 필모그래피의 흐름과 함께 하락했던 평가의 관성들이 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일종의 묘한 경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만큼 샤말란이 여전히 주목 받고 있는 감독이란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외부적 분위기와 무관하게 <라스트 에어벤더>는 완전한 범작 혹은 그 이하다. 3부작을 완성하겠다는 샤말란의 야심 또한 백일몽에 불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딱히 인상적인 성과도, 샤말란의 아이덴티티라는 인장도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주의적인 면에서도, 상업주의적인 면에서도, 온전한 실패다.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어두운 전당포에 박힌 채 사는 탓에 ‘전당포 귀신’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그 사내는 말수도, 표정도 없다. 좀처럼 과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전당포 주인 사내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일면식 없는 남자에게 붙이기 쉬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접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호칭의 거리감을 쉽게 무시하는 유일한 상대가 있다. 술집에서 댄서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소미(김새론)는 네일 아티스트로 일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갖고 살아가는 씩씩한 소녀다. 소미만이 아저씨라 불리는 그 사내, 태식(원빈)의 전당포로 들어설 수 있다. 매일 같이 전당포를 찾아오는 소미는 태식의 말벗이 되고 자신의 외로움도 달랜다.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녀와 유일하게 소녀의 아지트가 되어 주는 정체불명의 사내. 소녀와 사내의 관계는 서로에게 정서적 공백을 채워주는 유일한 위안이나 다름없다. 무신경한 태도로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아무렇지 않게 태식의 전당포로 들어서는 소미와 무덤덤하게 문을 열어주는 태식은 서로 알게 모르게 모종의 단단한 정서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극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태식의 과거는 소미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매만지고,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폭력을 거듭 목격하고 자란 소미에게 태식의 존재는 일종의 대리적인 안위를 부여한다. 그런 어느 날, 두 사람의 현실을 위협하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위기에 놓인 소미를 구하기 위한 태식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 남자 거침없다.
고독한 킬러와 어린 소녀의 우연한 관계를 담아낸 <레옹>의 내러티브에 과격하면서도 저돌적인 <테이큰>의 아버지를 사내로 치환해 격투신을 연출하고 홍콩느와르적인 스타일을 덧씌우면 <아저씨>가 된다, 는 말은 조금 비약적이지만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은 분명 <아저씨>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가족애를 느와르적인 비정성의 기폭제로 장치한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주목받을만한 필모그래피다. 이정범은 <아저씨>를 통해 정서적 이해를 넘어 보다 직접적으로 느와르적인 비주얼 감각을 마음껏 뽐낸다. 비정성의 선을 넘는 동시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악랄한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적인 비극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색에 가까운 심성을 지닌 주연 캐릭터의 비장한 감성을 적극적으로 설득시킨다.
불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덕분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연 캐릭터 태식의 가려진 단면들은 <아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느와르적인 관성을 보다 매끈하게 기름칠하는 자질로서 유용하다. <열혈남아>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린 채 재문(설경구)을 보좌하던 치국(조한선)이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 폭발적인 정서적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이 <아저씨>가 태식의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은 서사적인 흥미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는 캐릭터적 호기심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보다 손쉽게 밀고 나가며 주입시키는 방편이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저씨>는 <열혈남아>에 비해 보다 높은 체온을 지닌 작품이다. 피비린내가 밑바닥에서 진동하는 잔혹한 느와르적 세계관의 끝에 휴머니즘의 위안을 품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에서<본>시리즈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정교하게 디자인된 액션신의 묘미는 발견에 가깝다. 협소한 공간에서 분각을 다투듯 스피디하게 팔과 다리를 뻗고 비트는 인물들의 효율적인 동작 속에서 발생하는 묵직한 타격감을 놓치지 않는 중반부의 액션신은 인상적이다. 특히 화려한 동작 대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실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인물의 동작을 통해 보다 강렬한 긴장감을 제공하는 후반부의 일대 다수 격투신은 단연 백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사가 결정되는 찰나의 긴박감을 냉정하게 포착하며 감각적인 소비재가 아닌 생동감 있는 진짜 폭력을 포착해낸다. 종종 그 핏빛 시퀀스의 잔혹함이 대단한 수위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과하다기 보단 확신이 대단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판단할만한 완성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성취에 가깝다고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비장한 대사를 던지는 탓에 감정적으로 넘치는 몇몇의 찰나를 제외하면 원빈은 <아저씨>의 비현실성을 완벽하게 영화적 리얼리티로 승화시키는 이미지로서 완전하다. 지독하게 암담한 악의로 무장된 ‘비정성시’의 뒷골목에서 선의를 향해 비장하게 분투하는 이상적인 ‘그림’ 그 자체다. 그 그림에 휴머니즘적인 감정적 동의를 부추기는 김새론의 연기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꽤나 영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김희원의 악랄한 연기는 <아저씨>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지는 미장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선악의 경계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훌륭한 기자재나 다름없다.
‘데이-X’는 고도로 훈련된 러시아 스파이들이 위장된 신분으로 미국 본토에 잠입해서 살아가다 일거에 미국 핵심부 공격을 개시한다는 냉전시절의 가설이다. 이 가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간 <솔트>는 이 가설을 뼈대로 삼아 허구의 살점을 붙여나간 첩보 액션물이다.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면 21세기에 냉전이라니,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한 물 간 유물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파이물에서 냉전시절이 언급된다는 것이 어리석은 전략은 아니다. 궁극적인 본체가 아닌 캐릭터의 서사적 배경으로서 여전히 활용가치는 다분하다. 다만 그것이 미끼가 아닌 바늘이라면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솔트>에서 냉전은 단순히 캐릭터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적 정보가 아니라 캐릭터가 대면하고 극복해야 할 현재의 미션이 된다. 마치 낡은 가설의 발굴이라도 해내려는 듯 자못 진지한 태도가 되레 그 모든 기반에 소금을 뿌리듯 초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불분명한 가설의 신빙성 따위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만 대체 이 낡은 가설, 그리고 지난 시대를 장악했던 묵은 유물적 이념이 현재에서도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첩보 액션물의 아류작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솔트>의 야심은 그저 안젤리나 졸리의 터프한 스턴트 액션을 치장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장식의 마련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냉전시대의 낡은 가설이 21세기에 부활시킨다는 전략이라니, 일부로 속아주기 어려운 거짓말처럼 몰입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무색한 법이랄까.
진부한 음모의 미로를 구태의연하게 밀어 넣는 <솔트>를 구원하는 건 안젤리나 졸리다. <솔트>는 머리보다 발을 쓰는데 능한 스파이 ‘액션’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노고가 느껴지는 안젤리나 졸리의 스턴트 액션은 분명 볼만한 거리로서 적절한 기능을 다한다. 하지만 그 눈요기조차도 딱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스턴트 액션의 연속에 불과하다. 흥미를 유발하기 어려운 첩보적 소재를 눈가림하듯 액션 자체로서 승부수를 띄우지만 그 역시도 애매하다. 이 정도의 액션은 흔해 빠진, 낭비적인 기시감의 복기에 불과하다. 낡은 수싸움과 빤한 몸싸움으로 이뤄진 흔한 액션물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