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그의 눈 앞에 놓인 건 낯익은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그가 머물던 곳이 아니다. 게다가 몰골도 말이 아니다. 지난 밤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말이 아니다. 심지어 모두 다 있는 게 아니다.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한 친구와 연락이 닿는 것도 아니다. 행적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널브러진 그 방에서 난데없이 출몰한 어떤 동물의 출처도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기억이 사라진 지난 밤의 흔적은 끔찍한 숙취(hangover)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첫 번째 경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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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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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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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1983년작 하이틴 슬래셔 무비를 리메이크한 <여대생 기숙사>원작으로부터 틀거리를 빌려온 뒤 보다 현대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물의 관계를 변주함으로써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확실히 새겨 넣는다. 남자들을 끌어들여 기숙사 안에서 파티를 즐기는 여대생들은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길 정도로 개방적인 일상을 즐긴다. 그 가운데서도 ‘세타 파이‘라 불리는 비밀클럽의 멤버로서 우정과 결속을 다짐하며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회합을 거듭하는 6명의 여대생들은 어느 날,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지만 그 사소한 장난은 그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비극적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곧 새로운 현실적 불안으로 떠오른다. 누군가 그들이 지난 파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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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볼’을 영화화한다니! 뒷감당을 생각한다면 분명 용기가 가상한 기획이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이하, <드래곤볼>)은 원작 팬들의 심금을 울릴만한 배반의 향연으로 이뤄졌다. 원작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어떤 독자라면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손오공(저스틴 채트윈)의 모습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나의 드래곤볼은 이렇지 않아, 라며 스크린을 향해 ‘에네르기파’라도 쏘고 싶은 애증이 한데 모여 ‘원기옥’을 띄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어떤 면에서는 영리한 선택이다. ‘드래곤볼’의 본래 자태를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집념은 만화와 영화의 괴리감을 무시하는 무지로 판명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드래곤볼>은 코스프레 무비로 스스로를 몰락시키지 않겠다는 듯이 만화적 세계를 거침없이 허물어 나간다.

그러나 그 특수한 세계관을 변주한 자신감이 특별한 묘미로 연동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색한 일이다. ‘기’를 아느냐는 직설적 대사로서 그 세계관을 일축하려는 대사는 흡사 ‘도’를 아십니까, 류의 질문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무국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방대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할리우드식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적 철학으로 채색되고 있는 건 심히 유감이다. 내가 아는 ‘손오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의 손오공이, 그리고 그 세계가 본래의 형태를 훼손할만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까닭에서 <드래곤볼>은 유감스럽다. ‘드래곤볼’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야심 자체가 7성구를 모아 신룡을 소환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드래곤볼>을 보면 그렇다. 엔딩 크레딧 너머의 영상을 통해 발견되는 후속에 대한 암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착각의 늪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든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와 스미스의 수중 격투 장면을 통해 ‘드래곤볼’의 실사버전을 연상했던 지난 한 때의 기대감이 서러울 지경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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