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그의 눈 앞에 놓인 건 낯익은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그가 머물던 곳이 아니다. 게다가 몰골도 말이 아니다. 지난 밤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말이 아니다. 심지어 모두 다 있는 게 아니다.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한 친구와 연락이 닿는 것도 아니다. 행적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널브러진 그 방에서 난데없이 출몰한 어떤 동물의 출처도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기억이 사라진 지난 밤의 흔적은 끔찍한 숙취(hangover)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첫 번째 경험이 아니다.
<행오버 2>라니, 어떤 이에게는 이 낯선 제목의 영화가 심지어 속편이란 것까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알만한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영화가 이 땅에서 미개봉작이 돼버린 전편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불시착하듯 개봉한 것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숙취’라는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결혼식을 앞둔 친구와 총각파티를 벌이겠다며 라스베가스에서 질펀하게 먹고, 마시고, 맛보고, 즐기던 네 남자가 필름이 끊어진 사이에 벌어진 친구의 실종을 수습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난장판의 코미디다. <행오버>가 여타의 코미디물들과 차별화된 건 절제하지 않는 표현력의 막강한 수위 덕분이다. 예측불가능한 내러티브 위에서 나열되는 파편적인 시퀀스는 역시나 측정 불가능한 수위의 파괴력을 지닌 코미디의 엔진을 달고, 거침없이 달려나간다.
<행오버>와 <행오버 2>는 온전히 닮은 꼴 영화다. 라스베가스에서 방콕으로 장소만 변했을 뿐, 모든 제반 상황은 전작의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유사하다. 심지어 영화 속 캐릭터들조차도 또 한번의 반복이라는 상황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대사로 이를 내뱉는다. 그러니까 이는 분명 의도적이다. 또 한번 필름이 끊긴 그 상황은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민폐의 포텐셜을 지니고 있는 한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역시나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그들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동물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역시나 전작에서 등장했던 요주의의 인물이 그들의 여정에 끼어들고, 그들이 더듬어나간 잃어버린 기억 안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잠재돼 있다.
그러니까 만취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이 마치 토사물을 치우듯, 지난 밤에 벌여놓은 난장을 청산하는 과정이 바로 <행오버>와 <행오버 2>의 요지다. 사실 이건 똥이다. 변기 뚜껑 아래에 놓인, 똥이다. 그냥 물을 내려도 되겠지만, 꼭 누군가는 그 뚜껑을 들어서 내용물을 확인하고야 마는, 그것이다. <행오버 2>는 <행오버>와 마찬가지로 술 취한 얼간이들이 벌인 지난 날의 막장 놀음을 뒤쫓는, 좋은 구경거리다. 전작만큼이나 위력이 대단한 화장실 코미디가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된 <행오버 2>는 위력적인 면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나온 속편이라는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한다.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복마전을 전전하는 전편의 재미는 속편에서 다소 증발된 면이 있다.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인위적인 강박이 느껴지고, 캐릭터의 등장도 부자연스럽다. 특히나 하던 이야기를 대충 수습하는 듯한 결말의 방식은 어리둥절한 수준에 가깝다. 업데이트가 부진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행오버 2>는 역시 <행오버>의 속편답다. 무시할 수 없는 코미디의 위력,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존재가치를 스스로 선언한다. 스토리는 그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그 만취의 난동 속에서 만들어진 토사물 같은 상황들을 시한폭탄 같은 웃음의 잠재력으로 강력하게 이어나간다는 것이 바로 <행오버>를 포함한 <행오버 2>의 본체다. 그러니 더도 말고, 그저 취향이 맞으면 고, 아니면 스톱인 것. 다만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숙취처럼 감상의 호불호도 결국 본인의 몫인 것.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일단 앞서 설명한 서사의 줄기를 읽은 당신이라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예고편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거듭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써커 펀치>에서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소녀 베이비돌의 상상 속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혹은 망상이다. 소녀가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중계하던 영화는 어떠한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느 한 찰나에 급작스러운 시공간의 점프컷을 이행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녀는 퇴폐적인 물랑루즈의 쇼걸로 전락한다. 공간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를 액션 시퀀스로 연동시키는데 주력하는 반면, 그 캐릭터들이 속한 체제의 현실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사실 이는 연출자 개인의 야심이 강력하게 피력된 일종의 수단에 가깝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를 완전한 자기 취향의 전시적 행위 혹은 전리품으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장단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스팀펑크적 모티프를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전투 시퀀스, 거대한 사무라이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식 무협, 미래적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눈에 띄는 SF액션, 거대한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써커 펀치>는 재패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망라한 만화적 취향이 총동원된 액션물이다. 또한 바디수트와 가터벨트, 망사팬츠, 세일러복까지, 일본 망가의 미소녀 캐릭터가 연상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테이지 형식으로 진전되는 단계적인 액션 시퀀스와 함께 완전한 버추얼 게임의 속성을 띠기 시작한다.
단계적인 게임 스테이지의 속성을 띤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의 구조적 비교가 가능하며 야심 또한 유사한 영화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면을 재료로 다양한 액션 시퀀스 연출이 가능한 신을 마련하기 위해 구조적인 합의를 구축해나간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는 현실과 무의식 속의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퀀스로 세워나간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에 비해 이성적인 구조로 설정의 무리수를 설득해내는 영화가 아니다. <써커 펀치>는 무의식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확장되는 파편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무리수를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영화다. 이는 대단한 야심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연출 방식은 의도 자체로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가 완벽한 설득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써커 펀치>는 잭 스나이더라는 어느 개인의 취향이 총아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취향이, 오락적인 자극의 역치를 이루는 액션 시퀀스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고립시킨다. CG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여러 모로 눈여겨볼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가짓수만큼이나 흥미도 확대될만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버추얼 액션 시퀀스가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반면 상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현실은 급속도로 흥미를 반감시키고, 동시에 반복되는 액션 시퀀스의 자극의 역치 또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품은 의도나 태도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작품 자체가 존중 받을 길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적 형태로 완성된 영화가 완벽한 자신만의 이상향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도 석연찮은 덕분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잭 스나이더에게 <써커 펀치>는 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소품에 가깝다.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여전사의 면모를 지닌 걸캐릭터들, 그리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의 화력과 톤다운된 화면의 질감, 비트가 강한 일렉트로니카와 락넘버들, 이 자극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써커 펀치>는 그 대단한 화력을 무기로 삼아 감상을 초토화시킨다. 여기서 감상의 초토화란 영화에 장악 당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자극이 영화적 몰입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보다는 후자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야심과 취향이 매력적인 유혹을 일으키지만, 오르가슴을 공유하지 못하고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섹스뿐인 상대와의 관계는 불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동명의 1983년작 하이틴 슬래셔 무비를 리메이크한 <여대생 기숙사>는 원작으로부터 틀거리를 빌려온 뒤 보다 현대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물의 관계를 변주함으로써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확실히 새겨 넣는다. 남자들을 끌어들여 기숙사 안에서 파티를 즐기는 여대생들은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길 정도로 개방적인 일상을 즐긴다. 그 가운데서도 ‘세타 파이‘라 불리는 비밀클럽의 멤버로서 우정과 결속을 다짐하며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회합을 거듭하는 6명의 여대생들은 어느 날,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지만 그 사소한 장난은 그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비극적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곧 새로운 현실적 불안으로 떠오른다. 누군가 그들이 지난 파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살인은 서스펜스를 낳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수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하이틴 슬래셔 무비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여대생 기숙사>는 전형적인 하이틴 슬래셔 무비다. 끔찍한 기억을 공유한 여대생들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기억을 봉인하지만 종종 발견되는 기시감과 어떤 징후들을 통해 심리적 불안을 느낀다. 그런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강력한 페로몬을 발산하며 섹슈얼리티를 어필하는 영화는 긴장과 이완을 통해 기본적인 서스펜스의 자질을 구축해 나가면서도 그 수위를 조절해 나간다.
<여대생 기숙사>는 어떤 과감한 시도나 참신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는,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이틴 슬래셔 무비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대부분의 영화들이 앞서 이뤄낸 성과들을 고스란히 차용한 작품에 불과하다 말한다 해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대생 기숙사>는 적어도 최소한 장르가 지향하는 목적만큼은 달성했다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때때로 지나치게 수위 조절에 강박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은 들지만 지나친 노출을 삼가면서도 기습적으로 연출되는 살인신은 적절한 긴장의 몰입을 도모한다.
물론 <여대생 기숙사>는 결말에 다다라 다소 무색한 반전으로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서사적인 완결성 안에서 빈약한 약점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또한 노출과 살인의 연출에 있어서 보다 과감한 이미지나 분위기를 기대했을 ‘선수’들의 기대 심리를 충족시킬 만큼 장르적으로 독자적인 성과를 이룬 작품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여대생 기숙사>는 장르가 표방하는 기본적인 구색을 잘 끼워맞추고 연출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장르적 소모품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이다. 하나의 전형으로 기억될만한 성과적 모델은 아니라 해도 쓸모 있는 기성품 정도로서의 품질은 갖춘 하이틴 슬래셔 무비다.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볼’을 영화화한다니! 뒷감당을 생각한다면 분명 용기가 가상한 기획이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이하, <드래곤볼>)은 원작 팬들의 심금을 울릴만한 배반의 향연으로 이뤄졌다. 원작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어떤 독자라면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손오공(저스틴 채트윈)의 모습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나의 드래곤볼은 이렇지 않아, 라며 스크린을 향해 ‘에네르기파’라도 쏘고 싶은 애증이 한데 모여 ‘원기옥’을 띄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어떤 면에서는 영리한 선택이다. ‘드래곤볼’의 본래 자태를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집념은 만화와 영화의 괴리감을 무시하는 무지로 판명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드래곤볼>은 코스프레 무비로 스스로를 몰락시키지 않겠다는 듯이 만화적 세계를 거침없이 허물어 나간다.
그러나 그 특수한 세계관을 변주한 자신감이 특별한 묘미로 연동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색한 일이다. ‘기’를 아느냐는 직설적 대사로서 그 세계관을 일축하려는 대사는 흡사 ‘도’를 아십니까, 류의 질문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무국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방대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할리우드식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적 철학으로 채색되고 있는 건 심히 유감이다. 내가 아는 ‘손오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의 손오공이, 그리고 그 세계가 본래의 형태를 훼손할만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까닭에서 <드래곤볼>은 유감스럽다. ‘드래곤볼’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야심 자체가 7성구를 모아 신룡을 소환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드래곤볼>을 보면 그렇다. 엔딩 크레딧 너머의 영상을 통해 발견되는 후속에 대한 암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착각의 늪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든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와 스미스의 수중 격투 장면을 통해 ‘드래곤볼’의 실사버전을 연상했던 지난 한 때의 기대감이 서러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