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46,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죽음이 남긴 안타까움은 좀처럼 지워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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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어쩌면 평행선에 놓여 있다.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죽음 또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단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명확하게 그 시작과 끝이 존재할 뿐이다. 불과 27세의 나이에 척추암 판정을 받고 생사의 확률이 50%라는 진단을 얻은 아담(조셉 고든 래빗)의 삶 역시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조깅을 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그가 자신의 등이 기다란 암세포로 잠식당하리란 예감이 가당한가. 하지만 아담은 암 진단을 받으며 생사 확률 50% 선고를 받는다. <50/50>은 갑작스럽게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아담이 겪게 되는 암투병기 혹은 암 선고 이후의 일상을 돌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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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는 마약 거래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삶을 꾸려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은 그렇게 흘러 넘어왔다.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도 하나 있다. 죽은 자를 보는 것, 그리고 말을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서서히 직감한다. 선명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것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자를 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목격이 가능해도 대화가 불가능함을 안다. 아니,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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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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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의 결말은 마치 <이끼>의 이장이 던지는 협박 같은 물음에 대한 숭고한 답변과 같다.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오만하지만 실로 살 떨릴 만한 물음 앞에 맞서고자 하는 어느 개인은 그 거대한 장벽 뒤에 가려진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 장벽을 깨부수고자 스스로의 생까지 내던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이끌어낼 만한, 숭고한 돌팔매질의 전례가 될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같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층이 얼기설기 얽힌 이 추악한 사태의 진면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대담하고 거대한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거대한 부조리를 조금씩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세상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인>을 남기길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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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크리스티나 리치)와 폴(저스틴 롱)은 서로를 향한 애정에 균열을 느끼는 권태기 커플이다. 특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듯 매사에 무기력을 느끼는 애니는 그 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런 가운데 타지로 발령을 받은 폴은 저녁식사 자리를 주선한 뒤, 애니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며 서로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보려 한다. 그러나 폴의 말을 자르고 성급히 모든 상황을 단정지은 애니는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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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역설

도화지 2009. 10. 3. 23:28

지난 수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아침까지, 그러니까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전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사실 날을 새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다 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친구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깊게 눌린 슬픔이 읽혔다. 난 좀처럼 말을 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도착한 동창이나 선후배와 종종 화기애애하게 떠들곤 했지만 쉽게 침묵했다.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떠안고 있는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지켜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고, 전날 외고 마감 때문에 몇 시간 잠들지 못한 나는 새벽 즈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움을 느끼다 잠깐 눈을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지하철 속에서 꾸벅꾸벅 졸다 겨우내 집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진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1시간 정도 눈이라도 붙이자는 마음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이물감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집에 와서야 나를 비트는 취기를 느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야 취기를 직감할 때가 많다. 어쨌든 양치질을 하고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듯 쓰러졌다. 눈을 떴다. 벨소리가 들렸다. 금요일마다 원고를 넘겨주는 선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 젠장, 출근시간이 1시간 정도 넘었다는 걸 알게 됐다. 편집장님께 전화를 드리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한 뒤 강남역에 있는 사무실로 날아갔다. 추석 전날이라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인데 지각을 했다. 머쓱했다. 편집장님의 아량으로 별 탈은 없었다.

 

오후까지 볼 일을 보다 버스에 짐처럼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에 당장이라도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랬다. 하지만 정작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네. 선약이 갑자기 깨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명절 전날이라 다들 분주했다. 아니면 그만큼 내 인간관계가 얄팍하나 보지. 그냥 그 거리에서 사라지듯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뒤늦게 발인에 참가한 친구들과 안부를 나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었던 그 자리의 기억이 선연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었던 기억도 선명했다. 누군가가 죽음 앞에 슬픔을 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탄생 앞에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겠지.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실상 죽은 자의 슬픔이란 산 자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건 산 자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죽음 너머로 살아있는 자들은 연민을 공유하며 서로를 치유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무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남긴 슬픔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지탱한다. 죽음이 각별한 건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삶에 대한 각성을 일깨우는 까닭이다. 그 죽음이 남기는 건 허무가 아닌 사유다. 우린 그 사유 안에서 생을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얻은 건 산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죽은 자를 위한 자리에서 산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되새긴다. 기묘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삶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친구도 살 것이다. 나도 살 것이고, 모두 다 살아갈 것이다. 사라진 사람이 남긴 기억을 흘려 보내며 산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공유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산 자들의 눈물 위로 떠내려가는 망자로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야겠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련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일깨움을 얻었다. 역설적이다. 산다는 게 참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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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정장

도화지 2009. 9. 30. 00:16

검은 정장을 내걸었다. 내일 입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면 좋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의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 잠이 드신 채로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다. 정확한 사인은 모르지만 지병이 없으셨다니 급사하신 셈이다. 다른 친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먹먹함이 전해졌다.

 

언젠가 검은 색 정장은 한 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식이야 발가벗고 가지만 않는다면 상관없겠지만 장례식은 좀처럼 그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축하하는 자리에선 엄격한 격식을 버려도 된다지만 위로하는 자리에선 적절한 격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을 깨닫는다는 건 어느 새 내가 그걸 알아야 할 나이가 됐음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죽음을 위로해야 할 나이가 됐다. 작년엔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객사했다. 죽음은 멀지 않다. 아니, 어쩌면 언제나 멀지 않았을 거다. 다만 그것이 예감할 수 없는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밀기 때문에 순간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위로하거나 위로 받을 나이가 된 것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예견할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이 아닐까. 그만큼 그 상실을 위로하는 예의를 갖춰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복장이 프리한 직업을 선택한 덕분에 일 년에 몇 번 입을 일도 없는 검은 정장이 필요하다 느낀 것도 그런 의무감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건 진심이다. 하지만 때때론 그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 진심의 무게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내일은 친구를 위로하기 위한 예의가 필요한 날이다. 마음을 단단하게 여미고 한 움큼 쥔 위로를 전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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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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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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