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46세,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죽음이 남긴 안타까움은 좀처럼 지워질 것 같지 않다.
그야말로 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설 연휴가 끝난 2월 3일 오전에 믿을 수 없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사망했다는 것. 자택인 뉴욕 웨스트 빌리지의 아파트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동료 시나리오 작가가 발견했지만 그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팔엔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고 했다. 현존하는 대배우를 쓰러트린 건 약물 중독이었다. 집안에선 다량의 헤로인이 발견됐다. 침통한 일이다. 단지 그가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여전히 적지 않다. 하지만 연기력만으로 작품 자체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끌어올리는 배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침통하고, 또 침통하다. 게다가 향년 46세라니,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1991년 TV시리즈로 연기를 시작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자신이 출연한 작품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유의 비만한 체구와 가쁜 호흡소리, 곧잘 홍조를 띠는 얼굴을 지닌 호프만이 전세계가 인정하는 배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그가 진짜 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출연작에서 결코 단순한 캐릭터의 탈을 쓰고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대신 비중과 무관한 중량감을 선사하곤 했다. 둥글둥글한 외모와 달리 날카로운 서스펜스로 허를 찌르거나 깊은 페이소스로 심금을 울리는데 능했다. 대단히 복잡다단한 캐릭터의 광활한 심리를 드러내는데 능한 배우였다.
그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카포티>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진가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살인범을 인터뷰하다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소설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줄 살인범의 사형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심리가 예민하게 새어나온다. 특히 최근작인 <마스터>에선 특유의 메소드 연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심리학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신격화시키는 남자 랭케스터의 외면으로 드러나는 자신감과 내면적인 불안을 한 몸에 담아 점차 폭포처럼 쏟아내듯 연기해내는 <마스터>의 와이드 스크린이란 흡사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란 배우의 경지를 전시하는 평원과도 같았다. 잔잔한 수면 위의 파문이 퍼져나가듯 세심한 심리적 진동을 보여주는 <다우트>와 욕망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다가 비극적인 파국을 목도하게 되는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와 같은 작품에서의 연기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체로 욕망과 불안이 뒤엉킨 인간의 내면을 폭풍처럼 쏟아내는 연기를 선보이곤 했다.
현재로서 우리가 목격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마지막 영화는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통해서 그의 마지막 흔적을 되새겨야 한다는 건 한편으로 대단히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 전형적인 상업영화에서도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보존해낸다. 다소 과장되고 기괴한 세계관을 그린 이 작품에서 상대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복장으로 등장하는 그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가린 인물로 등장하는데 대단히 평면적으로 느껴질만한 캐릭터를 특유의 연기력으로 비범하게 해석하며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포석으로서 자리했다. 일찍이 <미션 임파서블 3>에서도 극에 긴장감의 불을 붙이는 심지이자 뇌관처럼 자리했던 그였다. 배우의 역량이 영화의 완성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이만큼 적절한 예시도 없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유작은 <헝거게임>의 마지막 속편이 될 것 같다. 그는 세 번째 속편의 촬영을 마쳤고,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 네 번째 속편에서 7분 가량의 출연 분량을 남겨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지난해에 선댄스에 출품한 두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헝거게임>의 마지막 작품에 7일 가량의 촬영 분량을 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스파이물의 거장 존 르 카레의 원작을 안톤 코르빈이 영화화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비롯한 두 작품이 그의 숨결을 보존하고 있다. 아마도 이 남은 작품들을 목도할 때마다 필경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란 배우의 빈 자리를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쓸쓸하다. 혹자는 그가 약물 중독에 의존한 배우가 아니었냐고 비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한 죽음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음에 직면한다지만 그렇게 합리화하기엔 우린 너무나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잃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그가 남긴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 이 허망함을 당분간 달랠 길이 없을 것 같다.
삶과 죽음은 어쩌면 평행선에 놓여 있다.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죽음 또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단지 해가 뜨고지는 것처럼 명확하게 그 시작과 끝이 존재할 뿐이다. 불과 27세의 나이에 척추암 판정을 받고 생사의 확률이 50%라는 진단을 얻은 아담(조셉 고든 래빗)의 삶 역시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조깅을 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그가 자신의 등이 기다란 암세포로 잠식당하리란 예감이 가당한가. 하지만 아담은 암 진단을 받으며 생사 확률 50% 선고를 받는다. <50/50>은 갑작스럽게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아담이 겪게 되는 암투병기 혹은 암 선고 이후의 일상을 돌보는 이야기다.
<50/50>은 시나리오 작가 윌 라이저가 세스 로건의 권유로 자전적인 암투병 경험을 모티프로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시작된 영화다. 영화 속 사연과 그의 실제적인 경험이 얼마나 매치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화에 부여된 특이성을 비추어 판단했을 때, 그 개인적인 경험의 특수성이 이 영화의 근간이 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50/50>은 암투병 중인 주인공을 다룬 영화이지만 신파의 가능성이 농후한 소재에 매몰되는 대신, 인물의 일상을 유쾌하고 산뜻하게 길어 올리는 드라마로 완성됐다. 암투병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한 남자가 암투병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일상의 가치관에 관한 영화라는 것.
죽을 가능성이 5할이면 곧 살 가능성도 5할이다. 그리고 그 반타작의 가능성 위에서 생사를 예감해야 하는 남자를 비추는 이 영화는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배제한 채 그 일상의 변화를 탐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삶의 변화를 맞이하거나 모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친구의 만류에도 교제를 계속해온 애인과의 관계를 신랄하게 판단하게 되고, 가족과의 애정을 다시 확인하기도 하며, 평소 행하지 않던 일탈에 과감히 빠져들거나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발견이다. 죽음의 암시가 삶을 유지하는 수많은 규칙과 습관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는 삶이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여정임을 명쾌하게 일깨운다. 죽음은 때로 보다 선명하게 생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암투병이라는,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는 과정은 그 자체로 통증일 수 있으나 <50/50>은 이러한 과정조차 연속적인 삶의 진행 속에서 맞닥뜨리는 하나의 여정처럼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빤한 교훈을 설파하는 대신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 결국 어떤 삶의 결과를 이루는 총아의 조각임을 되짚게 만든다. 쿨하다기 보단 따뜻하고, 냉정하다기 보단 애정 어린 시선에 가깝다. 이 시선 속에 놓인 인물들, 즉 배우들의 존재감도 탁월하다. 조셉 고든 레빗과 세스 로건이 만들어내는 화학 작용은 <50/50>의 유쾌함과 진솔함을 불어넣는 동력과 같다. 평면적인 안정감을 선사하는 안나 케드릭의 미소와 수직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히스테리는 영화의 감정적인 변화를 직감케 하는 좌표축과 같다. 그리고 <50/50>은 선택과 만족의 상관관계 안에서 직선의 상승 그래프를 예감해도 좋을, 유의미한 일상의 발견이다.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는 가난한 가장이다. 그는 마약 거래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삶을 꾸려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삶은 그렇게 흘러 넘어왔다. 그에게는 남다른 능력도 하나 있다. 죽은 자를 보는 것, 그리고 말을 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본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서서히 직감한다. 선명하지 않은 삶의 흐름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것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죽은 자를 본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의 죽음은 목격이 가능해도 대화가 불가능함을 안다. 아니, 더 이상의 대화가 필요 없음을 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우티풀 Biutiful>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궁금할 것이다.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맞다. 바로 그 단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Beautiful’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에 뿌리를 둔 어느 언어인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Biutiful은 Beautiful을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쓴 언어다. 이는 고의가 아니다. 그저 어느 한 남자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이 행위에는 숨겨진 의도가 없다. 그저 그 남자, <비우티풀>의 욱스발이 인식한 단어의 외형이 그러했을 뿐이다. <비우티풀>은 그런 영화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마치 자신의 꿈을 해몽하듯 이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여정 안에서 점차 어떠한 의도가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흐릿해진다.
알 수 없는 두 시퀀스의 연결을 통해서 시작되는 <비우티풀>은 그 불투명한 원점의 의미를 선명하게 밝히며 눈을 감듯 끝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의 불안이 영화 곳곳을 채운 몽타주들을 수집하다 이내 인물의 감정으로 파고들 때, 영화에 잠재된 수많은 비극이 제 머리를 들고 제 몸을 드러내듯 구체화되고 명확해질 때, 관객 대부분은 영화와 함께 시름하면서도 그 세계 자체를 둘러싼 기이한 현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냐리투는 <비우티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통해서 영화적 해석에 개입하고자 했는데, 그의 변에 따르면 <비우티풀>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된 영화였으며 어느 공간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었다. <비우티풀>은 온전히 이냐리투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인 셈인데, 이 영화는 그만큼 비선형적인 구조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생을 통해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대해서 고찰하고 사유한다. 이 영화는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 세계에 자리한 어느 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편적인 삶 속에 자리한 어떤 하나의 생에 관한 이야기다. 규정된 언어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듯 규정에서 벗어난 언어가 때로는 더욱 분명한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마치 규정되지 않은 언어처럼 쓰여졌다. 어느 한 남자의 삶으로부터 뻗어나간 영화는 결국 이 세계를 채운 어느 특별한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의 너비, 즉 죽음이라는 비극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삶의 보편적 숙명의 너비가 저마다의 생으로 채워지고 모여서 이 세계의 형상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인과의 변형적 제시를 통해서 흥미를 돋우는 화술과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의 부조화가 이루는 특정한 리듬감, 이냐리투 특유의 화법과 묘사로 채워진 이 영화의 인장을 더욱 근사하고 명확하게 새겨 넣는 건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비우티풀>은 이냐리투의 영화이며 바르뎀은 그 세계를 완성하는 핵심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아버지로서의 고뇌와, 죽음을 앞둔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통해서 생존을 체득한 이가 체감하는 불행, 바르뎀은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통해서 그 모든 생의 스펙트럼을 일거에 점령하듯 영화 속에서 걸어나간다.
<비우티풀>은 그 남루한 삶에서 벗어나는 방식, 즉 죽음을 목격하는 방법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에 신비로운 사유를 더한다.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대구는 마치 생과 사의 경계처럼 잉태되고 종말된다. 그 끝에서 의미는 선명해진다. 삶을 정지시키듯 죽음이 찾아올 때, 그 정지된 삶이 새로운 세상에서 보존될 수 있다면 과연 이 세계에서의 삶은 무엇으로 남겨지는가. 그 끝에 다다라야만 알 수 있는 물음. 하지만 당신의 삶은 어느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가치로 누군가에게 전승될 것이다. 삶을 이루는 건 ‘삶’이란 단어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바로 그것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규정할 수 없는 삶을 각자의 언어로 읽어나가듯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라진다.
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경험의 진위와 무관하게,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 초현실적 영역에 환상을 뒤집어씌운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히어애프터> 역시 사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이 취하던 관습을 크게 뒤집지 못한다. 빛으로 가득 채워진 무의 영역처럼 보이는, <히어애프터>의 사후 이미지는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설정된 결과물이라지만 결국 이 불분명한 사후의 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히어애프터>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담보로 영화를 신비로 치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후라는 초현실적 영역을 실존적 경험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에 관한 드라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각각 먼 곳에 떨어진 세 인물은 죽음에 속박된 삶을 살아간다. 무시무시한 쓰나미 이미지로 극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블록버스터의 재난 스펙터클 유희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쓰나미 시퀀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는 건 극심한 통증이다. 압도적인 죽음의 물결은 빠르고 신속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삶을 집어삼킨다. 이는 <히어애프터>가 주목하는 죽음이 단지 생 이후의 단계로서의 영역 찾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상실이 야기시키는 현실적 통증을 진단하기 위한 것임을 웅변하는 첫머리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상투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이유가 분명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매개로 한 이 개별적인 사연들이 옴니버스적인 스토리 안에 상주하고 점차 그 흐름 속에서 맞물려나갈 때, 인위적인 의도의 위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감지된다. 세 개의 줄기를 엮어 넣은 <히어애프터>의 옴니버스적 스토리에 종속되며 이런 인물들의 사연은 죽음이라는 경험의 단면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가깝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해봤거나,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타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내재된 죽음을 끊임없이 감지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 죽음에 대한 경험의 너비를 확장해내기 위한 요소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른 말판과 같다면, 그 주제를 품은 이야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들은 일종의 말인 셈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요소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인위적인 양상이 발견되며 그로 인해 내러티브는 종종 불가피하게 산만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애프터>는 분명 특별한 덕목을 지닌 영화다. 죽은 자와 접속하는 영매의 삶을 사는 조지의 능력은 타인에게 재능이라 여겨지지만 스스로에겐 둘도 없는 저주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는 이중적인 심리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 산 자에게 남겨진 망자의 기억을 목격하고, 망자의 전언을 전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진력이 난 조지는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마리는 삶의 기반을 상실하면서도 자신이 목격한 것들 것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린 쌍둥이 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마커스 역시 그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주변에서 살아 숨쉬던 이들에게 남기는 영향력의 너비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죽음은 곁에 있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거나 멈춰 서게 하거나 뽑아내 뒤흔든다.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순간은 마리가 겪는 쓰나미의 스펙터클을 한 차례 경험한 뒤에 등장하는 조지의 심령술 신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끝내 치유시킨다. <히어애프터>는 그 경직된 형식과 무관하게 보는 이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명료한 찰나들이 곳곳에 자리한 영화다. 이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단순히 이미지의 연출을 뛰어넘어 어떤 정서와 조응해낸 덕분일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강직한 보수주의자의 현명한 죽음을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마련했다.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갈망하는 산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히어애프터>는 결국 사자들을 위한 송가가 아니라, 그 망자들의 곁에 머물던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가깝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되레 이를 뛰어넘는 인정의 방식으로서 그 이전의 실제적인 삶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거대한 재난이든, 사소한 죽음이든, 생사는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죽음은 결국 삶 이후의 영역이다.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위로하며 제 생을 구원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일으키는 법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엄숙하지만 온화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땅에서 삽시간에 휩쓸려 나간 수많은 생들에게 깊은 애도를. 그 곁에서 숨쉬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이 거대한 참사 앞에 상처 입은 세계의 영혼에 치유를.
<싸인>의 결말은 마치 <이끼>의 이장이 던지는 협박 같은 물음에 대한 숭고한 답변과 같다.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오만하지만 실로 살 떨릴 만한 물음 앞에 맞서고자 하는 어느 개인은 그 거대한 장벽 뒤에 가려진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 장벽을 깨부수고자 스스로의 생까지 내던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이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이끌어낼 만한, 숭고한 돌팔매질의 전례가 될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같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층이 얼기설기 얽힌 이 추악한 사태의 진면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대담하고 거대한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거대한 부조리를 조금씩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세상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인>을 남기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애니(크리스티나 리치)와 폴(저스틴 롱)은 서로를 향한 애정에 균열을 느끼는 권태기 커플이다. 특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듯 매사에 무기력을 느끼는 애니는 그 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런 가운데 타지로 발령을 받은 폴은 저녁식사 자리를 주선한 뒤, 애니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며 서로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보려 한다. 그러나 폴의 말을 자르고 성급히 모든 상황을 단정지은 애니는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죽은 나사로의 부활을 빗대어 명명된 ‘나자루스 신드롬’, 즉 사망선고가 내려진 환자가 소생하는 현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애프터 라이프>는 생과 사의 경계를 조명하는 미스터리다. <애프터 라이프>가 인간의 죽음을 다룬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차별화를 주장한다면 그 근거는 생사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를 그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사망이 선고된 애니가 장의사 엘리엇(리암 니슨)과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생을 주장하지만 엘리엇은 끊임없이 그녀의 죽음을 각인시키며 그녀를 설득시켜 나가고, 애니의 죽음과 엘리엇의 정체를의심하는 폴은 그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애프터 라이프>는 의심을 자아내는 인물의 행위와 확신이 부족한 상황을 거듭 나열함으로써 미스터리를 강화시키고 서스펜스를 구축해 나가려 한다. 모호한 생과 사의 경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토대로 이야기의 불완전성을 설득해내려 한다. 하지만 <애프터 라이프>는 그 불확실성과 불완전성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애니와 그녀의 죽음을 설득하는 엘리엇의 관계 사이에는 특별한 긴장감이 없다. 단지 어떤 의문이나 의심이 개입될 뿐이다. 이는 곧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딱히 인상적인 수준의 흥미를 보장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배우들은 제각각 나름의 역할을 해내지만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을 결코 구제해내지 못한다.
동시에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소재를 품은 이 영화의 불확실성은 이야기의 불완전성을 설득해내지 못한다. <애프터 라이프>는 이야기의 불충분한 완결성을 소재의 불확실함으로 핑계를 삼으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의심의 단서를 곳곳에 흩뿌려놓고 그 어떤 의문 하나 해소하지 못한다. 마치 자신이 설계한 미로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서 스스로 그 구조의 대단함을 설명하는 꼴이랄까. 시종일관 거듭되는 의문스런 상황의 전시가 두 인물의 지루한 대화 속에서 고단하게 지속될 때, 감상은 덧없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그것처럼 길을 잃은 채 공허해진다. 제로섬 게임처럼 얻을 것이 없는 결말은 안이하고 어리석은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가를 드러내는 예시에 가깝다. 마치 심장이 정지한 이의 심장박동 그래프처럼 기승전결에는 어떠한 클라이맥스도 없다. 마치 맥박이 뛰지 않는 이야기 같다고 할까.
지난 수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아침까지, 그러니까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전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사실 날을 새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다 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친구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깊게 눌린 슬픔이 읽혔다. 난 좀처럼 말을 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도착한 동창이나 선후배와 종종 화기애애하게 떠들곤 했지만 쉽게 침묵했다.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떠안고 있는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지켜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고, 전날 외고 마감 때문에 몇 시간 잠들지 못한 나는 새벽 즈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움을 느끼다 잠깐 눈을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지하철 속에서 꾸벅꾸벅 졸다 겨우내 집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진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1시간 정도 눈이라도 붙이자는 마음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이물감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집에 와서야 나를 비트는 취기를 느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야 취기를 직감할 때가 많다. 어쨌든 양치질을 하고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듯 쓰러졌다. 눈을 떴다. 벨소리가 들렸다. 금요일마다 원고를 넘겨주는 선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 젠장, 출근시간이 1시간 정도 넘었다는 걸 알게 됐다. 편집장님께 전화를 드리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한 뒤 강남역에 있는 사무실로 날아갔다. 추석 전날이라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인데 지각을 했다. 머쓱했다. 편집장님의 아량으로 별 탈은 없었다.
오후까지 볼 일을 보다 버스에 짐처럼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에 당장이라도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랬다. 하지만 정작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네. 선약이 갑자기 깨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명절 전날이라 다들 분주했다. 아니면 그만큼 내 인간관계가 얄팍하나 보지. 그냥 그 거리에서 사라지듯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뒤늦게 발인에 참가한 친구들과 안부를 나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었던 그 자리의 기억이 선연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었던 기억도 선명했다. 누군가가 죽음 앞에 슬픔을 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탄생 앞에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겠지.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실상 죽은 자의 슬픔이란 산 자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건 산 자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죽음 너머로 살아있는 자들은 연민을 공유하며 서로를 치유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무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남긴 슬픔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지탱한다. 죽음이 각별한 건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삶에 대한 각성을 일깨우는 까닭이다. 그 죽음이 남기는 건 허무가 아닌 사유다. 우린 그 사유 안에서 생을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얻은 건 산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죽은 자를 위한 자리에서 산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되새긴다. 기묘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삶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친구도 살 것이다. 나도 살 것이고, 모두 다 살아갈 것이다. 사라진 사람이 남긴 기억을 흘려 보내며 산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공유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산 자들의 눈물 위로 떠내려가는 망자로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야겠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련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일깨움을 얻었다. 역설적이다. 산다는 게 참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검은 정장을 내걸었다. 내일 입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면 좋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의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 잠이 드신 채로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다. 정확한 사인은 모르지만 지병이 없으셨다니 급사하신 셈이다. 다른 친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먹먹함이 전해졌다.
언젠가 검은 색 정장은 한 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식이야 발가벗고 가지만 않는다면 상관없겠지만 장례식은 좀처럼 그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축하하는 자리에선 엄격한 격식을 버려도 된다지만 위로하는 자리에선 적절한 격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을 깨닫는다는 건 어느 새 내가 그걸 알아야 할 나이가 됐음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죽음을 위로해야 할 나이가 됐다. 작년엔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객사했다. 죽음은 멀지 않다. 아니, 어쩌면 언제나 멀지 않았을 거다. 다만 그것이 예감할 수 없는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밀기 때문에 순간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위로하거나 위로 받을 나이가 된 것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예견할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이 아닐까. 그만큼 그 상실을 위로하는 예의를 갖춰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다. 복장이 프리한 직업을 선택한 덕분에 일 년에 몇 번 입을 일도 없는 검은 정장이 필요하다 느낀 것도 그런 의무감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건 진심이다. 하지만 때때론 그 진심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 진심의 무게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내일은 친구를 위로하기 위한 예의가 필요한 날이다. 마음을 단단하게 여미고 한 움큼 쥔 위로를 전하고 와야겠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