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탄환의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찢이길 폭탄 위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라크 한복판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가운데서도 EOD(폭발물 전담 제거반)는 모든 생의 조건을 내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책이다. 정체가 불확실한 폭발물이 발견된 현장에서 그들은 생존에 대한 갈망마저도 잠시 내려놓듯 숨을 죽이고 눈 앞에 놓인 공포와 매일 같이 대면해야 한다. 긴박한 임무의 연속 안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되레 공포는 잦아드든 것 같지만 종종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터져나오는 실전 상황을 대면하다 보면 잠자듯 죽은 공포가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한지 오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최근 개봉된 <그린 존>의 핸드헬드가 현장감의 간접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쾌감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불안에서 야기되는 심리적 통증의 끊임없는 주입에 목적을 두고 있다.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클로버필드>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찾아 두서 없이 고개를 흔들어 대는 카메라는 끊임없이 불안한 심리를 수집해 낸다. 그 불안한 심리는 참혹한 현상의 목격을 대면할 것이라는 불안의 징후를 파편처럼 쏟아낸다. 폭발물을 처리하는 EOD대원들의 동선을 따라 좇는 그 영상을 끊임없이 목격해야 할 관객들은 그 영상을 통해 통증과도 같은 긴장을 대면해야 한다. 현장감의 재현은 (어쩔 수 없이) 체험적인 쾌감을 동반한다. <허트 로커>의 현장감 또한 그 쾌감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쾌감에서 거리를 둔, 끝없는 통증의 환기라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확보된다.
거친 질감의 입자가 떠도는 스크린의 핸드헬드 영상은 이라크 바그다드의 풍경을 흔들며 영화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며 잡담을 나누는 미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 매설된 폭발물을 해체하러 온 폭발물 전담 제거반이다. 이런 현장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농담을 나누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새어나온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도처에서 웅크리고 있다. 그 시야에 포착되는 모든 상들은 의심스런 징후로 포착된다. 긴장을 감춘 표정으로 농담을 나누지만 주변의 작은 움직임 앞에서도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역력한 긴장감이 새어 나온다. 예감은 현실이 된다. 비극에 대한 의심은 곧 목격으로 돌변한다. 터져나간 폭탄은 선혈이 가득한 주검을 남기고, 여유를 위장하던 대화는 절규로 변질된다. <허트 로커>는 바로 그 공포의 현장 한가운데 놓인 덕분에 자신이 유지할 수 있는 생의 너비를 확신하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거나 그 의식에 매몰된 인간들의 심리를 첨예하게 파고 든다.
‘포스트 9.11’ 시대를 맞이한 미국영화들은 그 날의 테러리즘으로부터 잉태된 공포의 성장과 전이를 끊임없이 주시해 왔다. 뉴욕에서 폭발한 테러리즘의 불씨는 전쟁으로 번져 나간 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의 도처에 살아남아 타오르고 있다. 이라크는 화약고 같은 땅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에게도 그곳은 위협이 매설된 공포의 지뢰밭이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를 점령했다 말하는 미 정부의 발표와 달리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에게 이라크는 주둔지라기 보단 감옥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당장 보고 있는 풍경이 생의 마지막 목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위협에 시달린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그 통증은 곧 잊을 수 없는 쾌감으로 변질된다. 마치 체내에 흡수된 뒤, 축적될 뿐 배출되지 않는 중독성 물질처럼 전장에서의 긴장감이 생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삶을 꿰찬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시무시한 불행이다. 영원히 그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속을 떠도는 유령의 삶으로서 개인은 철저히 속박된다.
공포는 마음으로 감지되는 통증이다. 뇌를 통한 사고적 판단 이전에 감각을 통해 전이되며 감각적으로 반응된다. 뇌의 판단이나 신경의 전달보다도 빠른 육체의 떨림과 경직으로 예감되는 긴장을 통해 본능적으로 환기된다. 지각과 사고로서 전달되는 전기 신호이기 이전에 자율신경의 반응이다. 전쟁은 공포다. 인간은 명분을 걸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그 현장에 놓인 인간은 끝없는 공포와 싸우며 생존에 대한 욕구를 되새김질한다. 실리나 정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결정하는 자와 전쟁을 수행하는 자 사이에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통증의 간극이 자리한다.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생의 시계는 움직임을 보류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노출된 이들은 서서히 잠식당하듯, 그 공포에 무뎌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 긴장의 역치 상태에 중독된다.
거대한 폭력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 개인의 모든 삶이 파괴되고 증발되며 남은 것은 결국 공포 속에서 거듭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과잉적 효과에 예속돼버린 어느 개인들의 삶이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상, 그 중독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렇게 개인들은 체제가 만들어낸 거대한 음모적 현실 안에서 자각조차 잊은 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허트 로커>는 여전히 달궈지고 있는 화약고와 같은 위태로운 현실을 겨냥하며 그 현실 위에서 파편 같은 긴장 속을 통증처럼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삶을 주시한다. 죽을 수 없지만 사는 것도 아닌, 살아있는 시체들의 땅 위에서 진짜 진실을 목격하기 위해 카메라는 쉼없이 흔들리고 달려 나간다.
정치나 경제가 희망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판타지를 찾는다. 그것이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외계어 같은 주문일지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잠시라도 외쳐보게 된다. 소녀 아이돌 그룹의 후크송이 유행하는 것도 그것이 지겹고 험난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좋은 발랄한 환청인 덕분이며 <아내의 유혹>과 같은 막장 드라마의 대단한 열풍도 매일같이 펼쳐지는 그 자극적인 작태의 반복이 현실을 잊게 만들 만큼 중독적인 까닭이다.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좀처럼 피하고 싶다. 안 그래도 힘들고 괴로운 세상에서 그런 이야길랑 명함도 내밀지 말라는 듯, 모든 문화적 현상들이 가볍고 헐거워진다. 잠깐 보고 말아도 될 정도로 쉽고 간편해야 한다. 인스턴트 식 컨텐츠의 범람은 참을 수 없는 현실의 무거움을 이겨내기 힘든 서민들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를 밀던 SK텔레콤은 ‘비비디 바비디 부’로 또 한번 자신의 CF송을 유행어로 등극시키는데 성공했다. 멜로디를 가미한 짧은 멘트는 가히 범국민적 주문이 되어 거대한 염원을 담은 원기옥처럼 둥둥 떠 태양을 가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에서 ‘비비디 바비디 부’따위는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망각과 환각의 세계로 떠나자는 듯 백치미적 행복을 설파하는 이 CF송이 먹히는 건 어쩌면 도저히 변모시킬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실에 대한 무기력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정치권의 패악과 서민들의 경제적 몰락,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 지독한 이념의 반목 가운데서 할 말을 잃고,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은 그냥 바보가 되는 게 편하다는 걸 잘 안다. 그냥 그렇게 웃지요. 스트레스로 가득한 현실의 양태 속에서 분노로 일관해봤자 사는 꼴이 영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남은 수순은 그냥 그 매트릭스 안에서 숙주가 되어 잠드는 것이 편하다 믿으며 그렇게 도태될 뿐이다.
정당한 보상을 바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대박을 꿈꾼다. 도저히 제 힘만으로 삶의 기반을 온전히 다져내기 힘든 극악의 경우에 누구나 기적을 바란다. ‘비비디 바비디 부’나 그에 앞서 ‘생각대로 하면 되고’를 따라 읊조리던 세태가 단지 그 어절이 좋아서 따위라고 착각할 일이 아니다. 위기를 느끼는 심리적 불안이 목까지 차 올랐으나 좀처럼 그것을 증발시킬 재간이 없어 스스로 무뎌지고 있는 중일 뿐이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게 만드는 사회가 얼마나 희망적인가, 를 되묻는다면 가히 절망적이지 않나.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을 창출하기가 이리도 열악한 사회라는 걸 직감하는 젊은 세대들의 불안과 좌절은 이미 우리 사회를 디스토피아로 규정할만한 징조나 다름없다. ‘비비디 바비디 부’따위에 길들여지는 건 그 CF송이 기발해서가 아니라 정말 생각대로 하면 되는 사회를 염원하다 못해 잠시나마 그런 척이라도 해보고 싶은 갈망이 만만치 않은 탓이 아닐까. ‘비비디 바비디 부’가 지겨운 건 그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 정체불명의 음절로 조합된 주문 따위로 위안받아야 하나. 분노에 지쳐서 이젠 행복마저 위장하며 살아야 하나. 좀 더 솔직하게 살고 싶다.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위장된 찰나의 환각이 아니라 진짜 행복의 나라로 가야 하지 않겠나.
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