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장의 편지에 전쟁이라는비극적인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참상 속에 내던져진 이유도 모른 채 총을 쥐고 상대를 겨누던 한 학도병이 남긴 편지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선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속에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생에 대한 갈망이 가늘지만 깊게 스며들어 있다. <포화속으로>는 그 편지 한 장으로부터 확장된 팩션 전쟁영화다. 어린 학도병이 겪었던 끔찍한 참상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포화속으로>가 재현하고자 하는 건 참상 그 자체다. 그건 결코 추억이라는 단어로서 허용될 만한 가치를 품은 것이라거나 어떤 장식적인 환경으로서 수단화될 수 없는 것이다. 71명의 학도병이 다수의 북한군에 맞서 남진을 지연시켰고 이것이 전쟁의 전세를 역전하는데 대단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포화속으로>라는 영화가 재현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이라면 <포화속으로>에서 가능한 연출은 그 사실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거나 혹은 인물이 바라보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충실한 감정적 이입이어야 한다.
긴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단적으로 말하자면 <포화속으로>는 온전히 전쟁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전쟁 화보영화다. 극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포화속으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본질보다 전장에 대한 연출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얼리티는 중요하다. 하지만 <포화속으로>에 담긴 전장의 풍경은 리얼리티라기 보단 과장과 포장에 불과하다. 색의 대비를 높이고, 현란한 핸드헬드를 동원한다 한들, 그 풍경에는 어떤 비장함이나 숭고함이 없다. 그저 군복을 챙겨 입은 배우들의 살아있는 화보집의 나열에 불과할 따름이다. 종종 들어서는 얄개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는 웃기지도 않다.
이건 성의 문제다. <포화속으로>는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를 스크린에 옮겨놓았을 때 어떤 수지타산이 가능할까를 계산한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비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비극을 재현한다면 최소한 그 비극의 본질을 관통해야 한다. <포화속으로>에는 전쟁 이미지가 있을 뿐, 전쟁이 없다. 영화는 끝까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피난민들을 위해 다리를 폭파시켜서는 안 된다고 절실히 주장하던 장교가 지휘관의 명령에 체념한 뒤 폭파되는 다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비장하게 걸어오는 풍경은 그 자체로 코미디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찍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주고 싶은 건 단지 시대가 하수상해서 그런 것일까.
6.25전쟁 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포항에서의 실제 전투를 극화한 <포화속으로>는 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 신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감 넘치는 전투신을 목격하기 보단 ‘전쟁 화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포화속으로>는 재현보다도 포장에 능한 작품이다. 물량공세를 퍼붓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긴박감이나 비장함을 발견할 수 없는 건 그 덕분이다. 캐릭터의 비장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하나 같이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포화속으로>는 전쟁의 껍데기를 두른 마초 화보 영화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만들 심산이었을까. 그렇다면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놓았다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연음으로 이어진 제목은 그 형태만으로도 의미심장하다. 초점이 나가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고통이고 꿈은 절망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꿈을 칼처럼 갈아 세상을 베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 꿈은 자신에게 닿아있는 것부터 베어나간다. 자신을 지키던, 혹은 자신이 지키려던 신념부터 파괴한다. 마치 서로 다른 땅을 딛고서도 같은 달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길을 걷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상주의자들의 파국적 사연을 줄기로 드라마를 그려낸다.
박흥용 화백의 동명원작만화를 스크린에 옮겼지만 사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원작의 인물 관계를 활용하고 개연성의 모티브만 얻어냈을 뿐, 전체적으로 원작의 재현성과 거리가 먼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원작과 달리 이몽학(차승원)의 비중을 키우고 역할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몽학은 자신이 모시던 스승 정여립의 죽음 이후, 그가 이끌던 대동계의 수장으로 나선다. 본래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세워졌던 대동계는 정여립의 복수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는 반란군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이몽학과 함께 정여립의 또 다른 한 팔이었던 맹인 황정학(황정민)은 이몽학의 뒤를 쫓고, 이몽학에게 아버지를 잃은 견자(백성현)는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쫓고, 이몽학과 연모를 나눈 기생 백지(한지혜)도 그 뒤를 따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연상시키는 건 이준익의 <왕의 남자>와 <황산벌>이다.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멜로적 정서와 그 너머로 그려지는 파국적인 운명의 서사는 <왕의 남자>의 그것과 유사하며 무능력한 실권자들에 대한 풍자가 담긴 코미디의 요소는 <황산벌>의 그것과 유사하다. 사실 그 결합적 형태로부터 발생하는 리듬감이 좋은 건 아니다. 캐릭터들의 배합은 자처하고라도 두 정서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멀다. 코미디가 발생하더라도 그 형질이 달라서 서로를 밀어내는 것만 같다. 마치 하나로 위장된 두 개의 극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궁궐에 들어서면 <황산벌>과 같은 풍자적인 코미디가 백치스럽게 펼쳐지다가도 그 밖에서는 비장하게 미간을 찌푸리거나 장난스럽게 의표를 찌르는 선문답의 대사들이 비장하게 구사된다. 그리고 마치 이건 어떤 면에서는 의도된 연출의 일환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 시대의 발음이나 화법을 고수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 속 캐릭터들의 대사는 현대의 표준어나 다름없다. 이건 마치 이준익이 이 영화가 뒤집어쓴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의 이미지를 우롱하듯 현대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우스꽝스러운 궁궐의 관리들이나 한심한 왕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분위기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의미라기 보단 구도에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는 건 결국 이몽학이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은 이몽학과 연관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는 곧 이준익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이몽학이 놓여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올바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배반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길을 택하는 인물의 삶이란 숭고하고 처연하다. 그건 선악의 논리 안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가치관의 문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상이 신념의 차이로 무너져 내려가는 광경으로 허망하게 다다른다. 구도는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묘사의 방식에서 중량감이 떨어진다. 서로 다른 신념을 품은 이들의 대립을 통해 비장감을 덧씌우고, 꿈의 유무를 대비시키며 성장을 그리지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드러내는 궁극적인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건 마치 고의적인 자기 파괴적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다. 단지 그 결말부의 텅빈 궁궐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마치 제로섬 게임과 같은 결말부의 파국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추켜세우던 모든 요소들이 어떤 성과로 다다르거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일거에 무너져 내리는 꼴을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허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모종의 고민을 품게 만든다.
맹인 검객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인상적인 리듬을 유지한다. 황정민의 연기는 영화에서 가장 좋은 볼거리이자 가장 좋은 안배감을 자랑하는 요소다. 이는 황정민의 퇴장 이후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는 듯한 영화의 분위기만으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검객들이 등장하는 만큼 칼을 부딪히는 장면이 여럿 되고 종종 볼만하지만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완성도에 다다르는 성과에 닿진 못했다. 사극으로서의 풍경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사물과 환경을 포착하는 이미지는 유려하다. 그만큼 많은 것들이 보이지만 명확하지가 않다. 마치 뭉개지듯 받침이 누워버린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요소들이 뭉개지듯 초점이 흐려진다. 그건 마치 고의적으로 ‘초저믈 흐리는 영화처럼’보인다.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일렬로 늘어선 폰(pawn)을 전진시킨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동선이 확보된다. 그 사이를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 룩(rook)이 파고들어 적진을 유린한다. 결정적인 순간, 순식간에 퀸(queen)이 적의 폐부로 돌진한다. 상대말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때론 자신의 말을 미끼로 던져 허를 찌른다. 멀리 선 킹(king)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동선을 조인다. 더 이상 오갈 때 없는 적진의 킹을 쓰러뜨리며 외친다. 체크메이트(checkmate).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이이>)는 일종의 체스판을 구상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말을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마련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전략적 동선을 그려 넣는다. 마지막 한 수에 다다르기까지의 밀고 나가는 전략은 그 와중에 발생하는 빈 공간의 변수까지도 철저하게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판을 읽는 지능적인 두뇌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전진시키는 두둑한 배짱이다. 지능적인 복마전을 팽팽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을 움직이는 이의 배짱도 두둑해야만 한다. 손실조차도 차익으로 역전시키는 탁월한 전술과 냉정한 판단력은 게임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름없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을 구사하는 유저의 능력이다.
카체이싱의 박진감과 스피디한 전개로 현금수송차량 탈취과정의 흥미를 돋우며 시작되는 <눈눈이이>는 시작부터 범인들의 몽타주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사건의 양 축이 되는 범인과 형사의 구도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그들의 대결양상을 한껏 살리겠다는 의도를 지닌다. 결국 그 구도는 과연 이 양상이 어떻게 끝맺음을 낼 것인가에 관심의 무게를 얻는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물음표가 하나 얹혀진다. 판을 구성하고 패를 돌리는 안현민(차승원)은 그 게임에 의도적으로 백반장(한석규)을 개입시키며 판을 키운다. <눈눈이이>는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을 다룬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두 캐릭터의 비중은 사실 한쪽으로 이미 치우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안현민의 의도는 <눈눈이이>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결국 두 캐릭터의 격돌양상이 캐릭터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세기와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애초에 캐릭터에게 주어진 능력치의 양상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설계한 안현민이 체크메이트를 외치고자 하는 대상은 그의 감춰진 사연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결국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구도는 <눈눈이이>의 맥거핀과 다름없다. 문제는 그것이 동등한 캐릭터의 대비를 갖추지 못한 탓에 맥거핀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굳이 동등해야 할 의무는 없다. 차라리 <눈눈이이>가 안현민을 위해 백반장을 소모시키는 영화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의도한 게임의 묘미는 캐릭터의 대비가 느슨해진 덕분에 긴장감을 서서히 상실한다. 이는 결국 영화가 의도한 목적성에 이도 저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활력적인 범죄스릴러의 구조를 지닌 전반부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느와르적 감수성을 머금으며 느릿느릿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형태의 변질과 함께 클라이막스도 손상된다.
애초에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립구도가 선악의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란 점은 <눈눈이이>의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지점이었다.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식과도 같은 구조관계에서 벗어나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의 우위에 서려는 사소한 욕망의 대결구도가 <눈눈이이>의 성패를 가늠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눈눈이이>는 스스로가 내세운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체크메이트를 위한 구색만을 차린다. 다만 외모만으로도 인상적인 두 캐릭터가 펼치는 신경전의 양상과 초반부 현금차량탈취씬을 비롯해 주요한 사건이 발생되는 굵직한 시퀀스의 연출력은 <눈눈이이>가 지닌 절반의 성취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위장된 게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흥미를 반감시킨다. 일방적인 게임은 아무래도 재미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게임조차도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의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그 말미에 다다라서야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가 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단 그것이 배신감의 형태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나마 영화가 마지막까지 일정한 동력을 발생시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두 배우의 힘있는 표정덕분이다.